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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로부터 100년 뒤의 조선인 희생자 추도 식전

도쿄도와 국가가 결탁해 조선인 학살은 없었던 듯한 인상 조작
 
김종익 | 2023-11-10 11:49:1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학살로부터 100년 뒤의 조선인 희생자 추도 식전

가무라 유스케 木村友祐
소설가. 『괭이갈매기의 Treehouse』『어린이의 聖戰』 등의 작품이 있다.


■ 공원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진재 발생, 그리고 그 직후부터 시작된 조선인 학살로부터, 올해로 꼭 백 년을 맞이했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 요코아미쵸橫網町공원에서 개최된 「간토 대진재 백주년 조선인 희생자 추도 식전」에 나도 올해 처음으로 참석했다.

접수처에서 받은 안내문에 따르면, 이 추도 식전은, 한국․북한과의 우호 운동에 전념하는 ‘일조日朝협회’ 등의 유지에 따라, 요코아미쵸공원 안에 ‘간토 대진재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건립된 1973년부터 매년 9월 1일 개최되어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놀랍게도 50년이나 계속되고 있다. 식전에 대해서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좀처럼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은, 반드시 참가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날은 이제까지 추도비에 인접한 한쪽 구석에서 추도 식전의 방해 집회를 열어온 단체 ‘일본 여성회 산들바람’이, 추도비 바로 앞에서 집회를 연다고 들었다. 조선인 학살 희생자를 추도하는 비 앞에서, 비문에 있는 희생자 수 “6천여 명”에는 근거가 없다고 하며 비의 철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집회를 연다.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은, 도쿄도 공원녹지부는 ‘산들바람’에게 추도비 앞 공간 점용 허가를 해준 모양이다. 2020년에 도쿄도 인권부는, ‘산들바람’의 집회에서 “불령 재일 조선인들에게 가족이 살해되고, 집이 불타고, 재물을 빼앗기고, 여자아이를 강간당한 많은 일본인” 따위의 언동이 “일본 열도 밖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에 해당한다고 조례에 근거해 인정했는데 말이다. 모순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일까.

또한, 2017년부터 식전에 추도문을 보내지 않는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의 자세에 호응하는 듯한, 정부의 마쓰노 히로카즈松野博一 관방 장관이 8월 30일의 기자회견에서, 조선인 학살에 관한 기록을 정부 내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한 답변도 큰 문제가 되었다.

조선인 학살로부터 백 년이라는 시점에, 희생자에게 추도의 마음을 보내고, 반성의 마음을 새롭게 하기는커녕, 도쿄도와 국가가 결탁해 조선인 학살은 없었던 듯한 인상 조작을 한다. 올해 추도 식전은 그런 불온한 흐름 속에서 개최되었다.

■ 오전

9월이라고는 해도, 아직 한여름 그 자체. 활짝 갠 하늘에서 강렬한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가운데, 추도비 앞에 도착하자, 핵심인 추도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미 일반 참가자와 언론 관계자가 빙 둘러 울타리를 만들고 있었다. 추도비를 마주하고 오른쪽 인의 장막 뒤에 섰다. 옆에는 올려다 볼 정도로 큰 석비(나가타 히데지로永田秀次郞 시비詩碑)가 있고, 그 부근에는 나무 그늘이 져 있었다. 나무 그늘에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까이서 누군가가 “평소보다 좀 많은 것 같네요”라고 했다. 이 정도가 ‘좀 많다’는 걸까. 늘 이 정도로 많은 사람이 추도하기 위해 모였다면,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높은 밀도의 바닥에는, 어딘가 긴박감이 떠돌고 있었다. 다수의 경찰이나 경비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리라. 도쿄도 완장을 찬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공안 경찰일까,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에 검은 파우치를 어깨에 비스듬하게 걸치고, 한쪽 귀에 검은 이어폰 코드를 내려뜨린 남자들도 몇 사람 눈에 띈다.

오전 11시, 식전 개시 직전, 누런 장삼을 입은 승려 한 집단이 큰북을 울리며 인의 장막 사이를 지나 추도비 앞에 서서, 독경을 한 다음, 또 큰북 소리와 함께 퇴장했다. 그리고 식전이 시작되었다.

사회자의 인사와 개회 인사말 뒤, 정토진종淨土真宗 혼간지本願寺파 승려, 오야마 고센小山弘泉 씨가 독경하고, 추도문을 낭독했다. 학살 사실을 지금도 밝히지 않는 정부와 사실을 애매하게 만드는 고이케 도쿄도 지사에 대해, 정면 비판을 담은 말을 얘기하고 있어, 무난한 말로 회피하지 않는 자세에 예상치 못한 감동을 맛보았다.

그리고 김순자 씨의 진혼 춤이 시작되었다. 추도 식전의 기사에는 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김 씨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었는데, 드디어 직접 볼 수 있었다. 반쯤 일어선 자세로 부드럽게 선회하는 김 씨의 춤을 넋을 잃고 보고 있는데, 내 마음 저 밑바닥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흔들림이 조금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식전 관중도, 보도진도, 물론 나도, 아까부터 독경하는 오야마 씨와 한국 무용을 추는 김 씨에게 스마트폰과 카메라 렌즈를 향했다. 추도비 바로 뒤쪽에 해당하는 일본 정원 쪽에 진을 치고 오야마 씨와 김 씨를 촬영하는 언론 쪽 사람들도 있다. 거기에 있으면, 추도비로 얼굴을 향한 모습을 정면에서 촬영할 수 있기 때문에, 사진의 이미지도 좋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렇게 모두가, 추도비 쪽이 아니라, 그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에 집중할 때, 추도해야 할 희생자로 향한 추모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 기도를 올리는 대상(학살된 사람들)의 모습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을까.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휑뎅그렁한 텅 빈 동굴이 펼쳐져 있다. 무참하게 살해된 사람들의 절망과 고통에 추모의 념을 보내고, 사건을 만들어낸 구조(조선과 조선인들 위에 군림한 일본의 식민지주의)에 대한 분노를 품고 여기에 왔는데, 추도하려고 해도, 희생된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나는 ― 또는 주변의 여러분도, ‘조선인’ ‘학살된 참혹한 사람들’이라는 ‘기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금 전부터 계속 마음 저 밑바닥에서 흔들리는 당혹감은, 거기에서 온 듯했다.

간토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조선인 시신

특정 집단을 학살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일인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상대가 자신과 완전히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과 완전히 같은 일상의 희로애락이 있는 것도 무시하고, 단순히 하나의 기호(당시로 말하면, 멸시와 경계의 뉘앙스를 포함한 ‘조선인’ ‘선인’ 등의 단어)로 묶어, 상대의 삶의 실상을 표백하고 공동화한다. 살해된 시체의 신원도 살피지 않고, 성명을 조서에 기재하지 않고, 유체는 서둘러 태우거나 묻거나 하고, 묻은 유체는 뒤에 다시 파내어 유골을 어디가로 갖다 버린다. 학살에 관계된 문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고 우긴다. 그 결과, 그녀․그들의 모습을 떠올릴 실마리는 철저하게 소거되고, 거기에 생긴 빈 동굴에 학살을 부정하는 언설이 파고든다.

■ 저물녘

오후 4시 반에 집회를 연다는 ‘산들바람’의 한 무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3시 40분. 이제 올 때가 됐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데, 추도비 뒤쪽 일본 정원 쪽에 있는 기자들이, 일제히 건너편에 있는 정자 쪽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챘다. 나도 서둘러 시선을 그쪽으로 향했더니, 정자 밑에 대여섯 명의 모습이 보이고, 그 가운데 한 명이 일장기를 내걸었다. ‘산들바람’의 면면이었다.

추도비 앞에서 ‘진실한 위령제’를 연다고 했는데, 왜 떨어진 맞은편에 있는 것이지. 정자 더 안쪽에는 ‘이시하라마치石原町․미도리쵸緑町 진재전재震災戰災 추도비’가 있는 모양이다(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산들바람’ 사람들은 지금까지, 일부러 추도 식전이 거행되는 시간에 맞추어, 인접한 그 비 앞에서 집회를 열고, 증오 발언을 던졌다고 한다. 말하자면, ‘산들바람’ 사람들은 예년과 같은 장소에 있었다. 거기서 준비하고 있다가, 이제부터 이쪽으로 오는 것일까.

일본 정원 쪽에는, 울타리 사이에 경찰과 도쿄도 직원이 가로막아 서 있어, 일부 보도 관계자만 들어가 있었다.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지만, ‘산들바람’의 집회 참가자는 20명 정도로 보였다. 더위 때문일까, 수건으로 자꾸 뒷머리를 닦는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모인 사람들이 모두 왼쪽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이동 전 정렬인가 했는데, 과연 천천히 왼쪽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원 바깥쪽 둘레를 돌아서 들어오듯이, 점점 추도비 이쪽으로 왔다.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서 “인종차별주의자 돌아가!”라는 소리가 퍼지고, 곧바로 “돌․아․가! 돌․아․가!”라는 대합창이 일어났다. 그 사이 사이에는 도쿄도 인권부를 향한 “너희는 반인권부냐?”라는 욕설도 터져 나왔다. “반인권이야 인마! 고이케를 불러와 인마!”라고, 불량배를 꼭 닮은 말투로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어, 엉겁결에 그쪽을 보니, 나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백발의 좀 마르고 자그마한 남자가 그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산들바람’ 사람들을 “코딱지”라든가 “쓰레기”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일단 글을 써서 먹고 사는 나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말을 사용하면, 차별주의자가 하는 짓과 같은 행위를 하는 거라고 여겨서, 그런 말투는 극력 피하고 있다. 차별주의자와 최전선에서 대치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다루는 데 배려가 없는 것에 곤혹스러웠다.

“돌아가” 합창이 왕왕대며 울려 퍼지는 가운데, 추도비를 둘러싼 디귿자 모양의 공간에 수십 명가량의 사람들이 일제히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그 장소의 점유 허가를 가진 쪽은 ‘산들바람’이었지만, 만약 그 사람들이 오더라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나도 이제 그것 밖에 없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붐비는 인파 건너편 쪽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을 멋대로 촬영하던 와이셔츠 차림의 경찰에, 2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사람이 대들고 있었다. 인권을 무시한 권력의 앞잡이로 본 것일까, 격앙한 젊은 사람은 카메라를 고정한 지지대의 한쪽을 잡고, 심하게 흔들었다. 경찰은 저항했지만, 이윽고 촬영을 포기했다. 경찰도 항의를 받고 포기하는 일이 있는가, 의외였다. 그러나 지지대를 내리치듯이 하며 접는 동작은 분명히 분노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은 다른 조치 없이 끝났다고 여겼는데, 조금 있다가 성난 목소리와 함께 인파 일부가 크게 흔들리고, 그 젊은 사람은 몇 명의 경찰에 그러안겨 인파 밖으로 끌려 나갔다.

■ 혼란 뒤에

돌아가 합창, 욕설, 연좌 농성, 체포. 추도비 앞은 시끄러워졌다. 차분한 마음으로 치러져야 할 추도장이, 소란한 장소가 되고 말았다. 이게 뭐지. 이 혼란의 원인을 낳은 것은 누구인 거지, 라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당연히 고이케 도쿄도 지사와 도쿄도 공원녹지부에 책임이 있다. 사료에 근거하는 학문의 학설과 역사수정주의자의 주장을 양론으로 병기하는 자신들의 태도가 이런 소란을 초래한 것을, 철저하게 깊이 반성하기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도 식전 중에도 복수의 인사들이 지적한대로, 당시 내무성과 경찰이 있지도 않은 조선인 범죄와 폭동에 경계를 호소함으로써 학살이 확대된 것을, 백 년 동안, 정부는 한 번도 정식으로 사죄하지 않은 것이, 이 혼돈의 근본에 있다. 사죄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사람이 죽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사람이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언제까지 변하지 않을 작정일까.

‘산들바람’ 측은 “약속대로 사용을 허가하라”고 핸드 마이크로 어필하고 있었다. 허가를 받았으니까, 그럴 수밖에. 경찰이 기지를 발휘해 막고 있는 것일까, ‘산들바람’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저들이 강제로 돌입해 온다면, 난투가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공원 폐쇄 시간이 다가오자, 단념한 것인지, ‘산들바람’ 사람들은 정자로 돌아갔다. 잠시 거기에 머물렀지만, 그 뒤 마침내 경찰에 둘러싸여 돌아갔다. ‘산들바람’으로서는, 소요를 일으켜 대립하는 양쪽이 모두 공원 사용을 허가받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니까, 이날의 전말도 패배가 아니라, 목표 달성의 하나로 넣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학살로부터 백 년이 지난, 현재 일본의 광경인 것이다.

추도식전이 한창일 때 느꼈던, 희생된 사람들의 상을 결락한 것이 마음에 걸려, 뒷날 나는,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거나, 휩쓸렸던 사람들의 증언을 모은 『증보 신판  바람이여 봉선화 노래를 전해다오風よ 鳳仙化の歌をはこべ』를 읽었다. 처참한 수많은 증언과 함께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요. 그렇게 간절하게 사무쳐요”라는, 한국의 유족의 슬픔도 기록되어 있었다.

거기서 비로소 깨달았다. 무참히 살해된 것은, 내게 가족과 친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가족이며, 그저 열심히 하루하루의 삶을 살고 있던,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世界』, 20231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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