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와 ‘고공농성’
대학에 와서 방송 작가나 PD가 되겠다는 꿈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유 위원장은 대학 1학년 때, 세월호 1주기 추모대회에 갔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기 1년 전(2013년), 저 역시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어요. 그리고 1년 뒤 발생한 참사는 고등학생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고3이다 보니 많은 관심을 쏟진 못했는데, 대학에 와서 세월호 1주기 추모대회에 가게 됐죠.”
세상에 태어나 처음 참가한 집회였다.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경찰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막아 나섰고, 경찰 차벽에, 캡사이신까지 봤다.
“언론이 별로 주목하지 않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궁금증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내가 봐왔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지극히 일부였구나 싶었습니다.”
또 하나의 장면은, 서울광장 옆 옛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옥상 광고탑에 올라간 노동자들을 만났을 때다. 역시 1학년 때였다.
“‘기아차 불법파견 해결’을 촉구하는 두 분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태어나서 처음 본 노동자들의 모습이었겠죠.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너무 정당한 요구를 하는데 저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얘기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왜 아무도 그들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적으로 힘이 필요한 사람들, 이들 옆에서 함께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대학생’과 ‘정치’
학생들과 사회 문제를 함께 나누고, ‘대학생’과 ‘정치’를 고민하는 시간도 적지 않았다.
학과 통폐합 문제에 처했을 때 느꼈다. “학과 통폐합 문제가 우리 학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구나, 전국의 대학들이 정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구조조정을 하고 있구나, 개개의 학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였어요. 학생들이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었어요.” 대학생활에도 ‘정치’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까지도 다르지 않았다. 코로나 시국이 한창일 때, 그는 ‘코로나대학생119’ 활동에 나섰다. 등록금을 내고도 코로나로 인해 등교하지 못하는 학생들, ‘등록금·입학금 환불 운동’을 발의했다.
“대학생활을 완전히 빼앗긴 학생들이 혼자서는 아무런 힘을 낼 수 없었어요. 집단의 힘으로 해결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온라인 대화방을 만들고, 온라인 서명을 받고, 피해 사례 발표회도 준비했어요. 교육부 앞에서 기자회견도 했죠. ‘환불해줘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높아졌어요.” 학교들에선 ‘장학금’ 형식을 띠고 소정의 금액을 환불해주며 여론 잠재우기에 나섰다. 교육부도, 정치권도 대학생들의 삶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학생들이 스스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며 사회 참여 활동을 해오던 그에겐 ‘가장 유능한 정치인은 민중이다’는 말은 당연한 말이었다. 민중당(현 진보당)을 대표하는 문구다. 대학생활을 마무리할 무렵, “대학생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당 하나쯤 꼭 필요하지”라는 생각에 미치며 진보정당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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