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부족주의 유전자를 갖고 있습니다. 무인도에 상륙해서 혼자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는 인간의 원형이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집단적 존재요, 사회적 존재였습니다. 태어나면 상당 기간 부모와 무리의 돌봄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부족에서 쫓겨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낯선 부족은 치명적 위협이었습니다. 수만년, 수천년 동안 인간은 피부색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들을 살해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다른 부족이나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는 각성이 서서히 생겼습니다. 각성은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인류는 매우 오랫동안 봉건제, 군주제, 공화제를 거친 뒤 아주 최근에야 민주주의를 겨우 정착시키고 있습니다. 여성을 포함한 일반 시민이 참정권을 가진 것은 20세기 들어서였습니다.
민주주의는 공동체 구성원 다수가 공동체를 지배하는 체제입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죽이거나 내쫓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체제입니다.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권력 구조는 크게 나누어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제가 있습니다. 유럽의 의원내각제는 의회 다수 세력이 국정을 이끌어가는 시스템입니다. 의회의 정부 불신임권과 정부의 의회 해산권이라는 상호 견제 장치를 전제로 작동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제는 의회와 대통령을 각각 선출하고 두 기관이 상호 협력과 견제로 국정을 이끌어가는 시스템입니다. 연방제와 승자독식이라는 미국의 독특한 체제와 문화 때문에 새로 발명됐습니다. 4년마다 치르는 선거에서 대통령이 바뀔 수 있다는 전제가 필수 조건입니다.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성공한 사례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대통령직선제 개헌 이후라고 봐야 합니다. 그 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은 행정부·입법부·사법부를 다 지배했습니다. 독재자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국회는 대통령의 통치 기구였습니다. ‘청와대 거수기’ ‘통법부’라는 오명으로 불렸습니다. 국회의장은 국회의원들이 선출했지만, 대통령이 미리 후보자를 지명했습니다. 임명직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상임위원장은 당연히 여당이 다 차지했습니다. 승자독식, 여당 독식이 국회 원 구성의 원칙이었습니다.
변화가 생긴 것은 1988년 4·26 13대 총선 이후였습니다. 소선거구제로 치러진 선거 결과는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125석,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 70석,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 59석,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 35석이었습니다.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여당인 민정당의 독식이 불가능해졌습니다. 13대 국회 전반기 원 구성 협상에서 국회의장은 민정당, 부의장 2명은 평민당과 통일민주당이 각각 맡기로 여야가 합의했습니다. 상임위원장은 의석수에 따라 민정당 7, 평민당 4, 통일민주당 3, 공화당 2의 비율로 배분했습니다. 승자독식 원칙을 버리고 비례성 원칙을 도입한 것입니다. 상임위원장을 여야가 나누어 맡은 것은 국회가 만들어진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특별위원회 위원장도 여야가 나누어 맡았습니다. ‘광주 특위’와 ‘5공 특위’가 가동되며 국회 차원의 과거 청산, 5공 청산이 시작됐습니다. 이처럼 13대 국회 전반기에는 의회 중심의 정치가 만개했습니다.
1990년 13대 국회 후반기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1990년 1월 민정당, 통일민주당, 공화당이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습니다. 국회 지형은 거대 여당 민자당과 소수 야당 평민당의 양당 구도로 바뀌었습니다. 민자당은 과거처럼 상임위원장을 독식하려고 했습니다. 김대중 총재가 강하게 반발했고 평민당 몫 4개 상임위원장을 확보했습니다. 만약 이때 김대중 총재가 버티지 못했다면 국회는 다시 승자독식 시대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국회에서 의석수에 따라 상임위원장을 배분하는 비례성 원칙은 그런대로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집권 여당은 국회 보이콧
1997년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 이후 국회의장 선출과 상임위원장 배분 등 원 구성 협상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법안 처리 길목을 지키는 법제사법위원장 자리를 어느 당이 차지하느냐를 놓고 매번 치열한 논쟁과 싸움이 벌어집니다. 4·10 총선 이후 22대 전반기 원 구성 협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사위원장 자리 때문에 집권 여당이 국회를 보이콧하는 희한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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