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신촌유플렉스 앞에서 열린 ‘신촌·구로·병점 100억대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구로구에 거주 중 1억 2천여 만원의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스무 살 청년(오른쪽 두번째)이 발언하고 있다. 시민단체 민달팽이유니온에 따르면 서울 신촌과 구로, 경기 병점에서 대학생·사회초년생 등 97명의 세입자가 임대인 최씨 일가로부터 전세사기 피해를 당했으며 총 피해액은 100억원 대 규모다. 2024.6.23. ⓒ뉴스1
“전세사기 당함과 동시에 나라에서 연구비를 삭감하는 바람에 저는 제 연구자의 꿈을 접을까, 아니 삶을 접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했습니다. 제 꿈을 지지해주던 가족들도 절망에 빠졌고, 모두 우울한 나날을...”
전세사기 피해자 이솔(가명, 1998년생 26세) 씨의 말이다.
23일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 열린 ‘신촌·구로·병점 100억대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이솔 씨는 “저를 포함 90여명의 청년들이 꿈과 미래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집주인으로부터도, 정책으로부터, 심지어 피해자를 보호해야 하는 법으로부터도 보증금을 돌려받을 방법이 없는 것을 알고 점차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면서 “제발 (전세사기특별법) 법안과 정책 보완으로 국민들, 청년들을 지켜 달라”고 호소했다.
“삶을 접을까” 고민하는 청년·학생들
“하루하루 말라죽는 심정”
“준비하던 결혼도, 미래도 모두 불투명해져”
“저출생 인구 걱정할 때가 아니다”
20대의 이솔 씨는 20년 넘게 연구자를 꿈꿔온 연세대 대학원생이다. 하지만 전세사기를 당한 후 그 꿈뿐만 아니라 “삶을 접을까” 매일 고민하고 있다. 학교 기숙사가 없어 월세 집을 구하려 했던 그는, 월세보다는 전세가 훨씬 유리하다는 공인중개사의 설득으로 전세계약을 맺었다. 당시 공인중개사는 직접 카카오뱅크의 청년전세대출에 대해 설명해줬고, 대출 계약서 작성을 도왔으며, “집주인은 바보같이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설득까지 했다고 한다. 또 “시세가 60억 가까이 되기 때문에 혹시나 잘못되어도 보증금 전액 문제없이 반환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근저당이 높아 우려하자, 중개인은 “2~3개월 내로 해결될 예정”이라고 했다.
전세계약 후 1년 반 뒤, 이솔 씨는 자신이 살던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 후 알게 된 빌라의 감정평가액은 겨우 29억. 중개인이 알려준 시세(60억)의 절반이었다. 앞서 다른 전세사기 피해에서도 공인중개사가 잘못 알려준 시세를 믿고 계약했다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일이 다수 발생한 바 있는데, 정부의 안일한 대책으로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다른 피해자들과 만난 이솔 씨는 “공인중개사가 계약 당시 설명해 준 말 중 사실인 것이 단 한 줄도 없음을 깨달았다”라고 탄식했다.
대책위에 따르면, 신촌·구로·병점에 있는 최 모 씨 일가의 8개 빌라에 거주하다 전세사기를 당한 세입자는 90여명이다. 대책위와 접촉한 응답자 84명 중 89%인 76명은 20대와 30대다. 1996~1998년생은 무려 29명이었다. 만 20세인 학생도 있었다. 응답자 84명 중 19명은 학생이었고, 58명은 사회초년생 또는 직장인이었으며, 7명은 자영업자였다. 최 씨 일가가 피해자들과 전세계약을 맺은 7개의 주택 중 4채는 불법건축물이었다.
심지어 집주인은 집이 경매에 넘어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양산되던 시기에도 학생, 사회초년생들과 전세계약을 맺으며 피해를 키웠다. 더욱 황당한 점은 이 같은 위험한 계약을 공인중개사가 적극적으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피해자 겨울(가명, 2003년생 20세) 씨는 지난해 4월 모아둔 돈 2천만원과 중소기업 청년전세대출 1억원으로 전셋집을 마련했다가, 올해 5월 전셋집이 경매에 넘어간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제가 계약할 당시 신촌 건물은 이미 경매가 진행 중이었고,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 없는 상황에 제가 세입자로 들어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세입자 중 제일 마지막에 들어와서 배당 순위도 늦고, 최우선변제금도 해당되지 않아 경매로 돈을 받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면서 “저는 경매가 종료되면 1억의 빚을 가지고 나가야한다”고 했다.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손솔 전 진보당 대변인 등에 따르면, 겨울 씨 또한 다른 집을 알아보던 중 공인중개사의 소개로 문제의 집주인과 계약했다.
또 다른 피해자 대현 씨도 공인중개사의 소개로 문제의 집주인과 계약했다. 당시 공인중개사는 “집주인이 건축업을 해서 돈이 많기 때문에 나중에 보증금을 못 받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현 씨가 살던 집도 경매에 넘어갔다. 대현 씨는 “거짓말과 기망으로 올해 준비 중이던 결혼 계획도, 신혼집 마련도, 미래도 모두 불투명해졌다”고 말했다.
문제는 ‘사인 간 거래’라면서 실질적인 지원 대책은 마련하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정부·여당의 안일함이다. 심지어 전세사기 피해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시했던 ‘경매 유예·중지’마저도 현장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집주인과 당국은 경매가 재개될 것이라는 소식조차 사전에 피해자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다. 한 피해자가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6월 중순에 경매사이트에 접속한 뒤에야 오는 7월 30일부로 집 경매가 재개된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법원에 왜 경매 재개 사실을 알려주지 않느냐고 묻자, 법원은 “아직 시간이 많아 알리지 않았고 조만간 알릴 참이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퇴거당하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인데, 느긋하게 경매 재개 직전에 알려주겠다고 답한 것이다.
민달팽이유니온 지수 씨는 “저출생 인구 걱정할 때가 아니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옥 같은 일을 겪고 있다. 피해자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왜? 지금 임대인이 계속 건물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당당하다. 여기 임대인뿐이겠나? 전국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다. 전세사기 피해자 인정 못 받는 사람까지 보면 10만 명 넘었다고 생각한다. 언제 정책을 바꾸고 특별법을 개정할 것인가? 진짜 국가비상사태는 여기서 발생하고 있다. 직시해야 한다.”
한편, 이날 전세사기 피해자들과 대책위는 ▲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상황에서 대책 없이 퇴거당하는 일이 없도록 전세사기특별법 개정 ▲ 현실과의 괴리가 극심해진 최우선변제 제도 개선 ▲ 대출 미이용자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 ▲ 은행이 이윤추구에 활용하는 허술한 청년전세대출제도 보완 ▲ 무책임한 공인중개사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 등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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