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1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캠프 데이비드 1주년 한미일 협력 주요 성과 등 관련 현안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24.08.18 ⓒ뉴시스
윤석열 정부 외교안보 실세로 꼽히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말이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다. 지난 16일 KBS 뉴스에 출연해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내놓은 말이다. 김 차장은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이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면 엄중히 따지고 변화를 시도해야겠지만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며 “마음 없는 사람을 억지로 다그쳐 사과를 받아낼 때 그것이 과연 진정한가, 한일 관계에 도움 되는가를 생각하면 지금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신뢰는 상당하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 말에는 여러 함의를 담고 있다. 일본 정부는 현재 한국에 ‘사과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고, 한국 정부는 그런 일본 정부에 ‘사과를 받아낼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사과할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건 진정하지 않다’는 기적의 논리도 담았다.
나아가 사과할 마음이 없는 일본 정상과 윤 대통령 사이 신뢰가 상당하다는 김 차장의 말은 놀라움의 정점을 찍는다. 윤 대통령은 사과할 마음이 없는 기시다 총리를 신뢰하고, 기시다 총리는 사과할 마음이 없는 자신을 신뢰하는 윤 대통령을 신뢰한다고 한다.
황당한 말이지만, 보통 이런 말은 힘의 우위가 확실한 관계에서 때때로 성립하기도 한다. 힘이 약한 쪽에서 자신이 당한 명백한 피해에 대해 따지지 않고 접고 들어가는 굴종적 태도를 취할 때 그렇다. 한 예로 미국은 일본에 2차대전 당시 핵폭탄 투하로 인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에 대한 공식적 사과를 하지 않지만, 두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가장 끈끈한 동맹국이다.
이런 관계는 상식적이지 않지만, 의외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학원가에서는 가해자 ‘일진’과 피해자가 과거를 잊은 척 ‘우정’을 운운하고, 재계에서는 작은 회사들이 대기업의 패권에 굴복해 온갖 착취를 당하지만 ‘협력 관계’로 포장된다. 우리 역사에서도 중국과의 관계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다.
김태효 차장의 말이 딱 그렇다. ‘사과할 마음이 없는’ 일본을 대변한다는 문제도 있지만, 그런 일본에게 더 이상 ‘과거를 묻지 말아야 잘 지낼 수 있고, 우리의 미래가 있다’는 굴종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 차장은 저 말을 하기 전에 “우리 청년세대, 기성세대들도 이제 자신감을 갖고 일본을 대하는 것이 더 윈윈 게임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한다”고 했다. 정부는 일본에 굴종적인데, 국민들에게는 “자신감을 가지라”는 모순적인 태도다.
대통령실이 추가로 내놓은 설명은 이러한 굴종적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18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의 마음을 잘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언급은 앞뒤 맥락을 이해하면 될 것”이라며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한일 관계, 한미일 관계가 우리 대한민국 기업과 국민에게 안겨다 주고 있는 여러 가지 혜택, 그리고 기회 요인을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야당은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한민수 대변인은 “가해자가 사과를 거부하면 죄를 묻지 않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정의관이냐. 윤 정부는 국민을 어디까지 절망시키려고 하느냐”며 “이런 망언이 어떻게 대한민국 외교ㆍ안보 정책을 컨트롤하는 국가안보실 1차장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느냐”고 발끈했다.
조국혁신당 김보협 대변인도 “윤 대통령이 일본에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주고, 받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기시다 총리 입장에서는 윤 대통령에게 상당한 믿음과 신뢰를 갖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 그러니 일본 집권당 의원이 일본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대해 ‘친일 정권’ 덕에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고 평가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 말을 듣고도 용산 대통령실은 물론, 정부 인사 누구 하나 항의도 못하는 걸 보면, 윤 정권은 정말 ‘극우 친일 밀정 뉴라이트’ 정권이 맞는 것 같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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