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된 쿠데타>가 전하는 '8월 종파사건'의 진실
언급한 책은 북한사를 다룬 굵직한 저서를 발표해온 역사학자 김재웅의 <예고된 쿠데타, 8월 종파사건>(푸른역사, 2024)이다. 무려 650쪽에 달하는 이 대작은 흔히 '8월 종파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1956년 북한 내부의 정치적 충돌을 다룬다. 이 사건은 북한 현대사에 관한 책에는 빠짐없이 등장할 만큼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다. 그러나 이 사건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책은 의외로 없었다. 이런 배경만 놓고 봐도 <예고된 쿠데타>는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한데 1956년 8월 사건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저작이기만 한 게 아니다. 이 책을 접한 독자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예고된 쿠데타>는 해당 사건의 '결정적' 분석이자 정리라는 인상을 준다. 엄청난 공을 들여 구소련 1차 자료들을 섭렵하지 않고는 찾아낼 수 없었을 생생한 증언과 희귀한 기록으로 600여 쪽이 꽉 채워져 있다. 다른 관련 서적에는 그저 이름만 소개되고 문장 몇 줄로 정리되던 인물들이 이 책에서는 마치 지금 여기에 함께 살고 있는 동시대인처럼 저마다의 고뇌와 사연을 짊어지고 다가온다. 이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긴장감 넘치는 정치 드라마이자 한반도와 세계를 넘나드는 대하소설이고 가슴을 옥죄는 비극이다.
<예고된 쿠데타>는 이제껏 조선노동당 내 '연안파'가 김일성 중심의 당권파와 충돌한 분파 투쟁 정도로 이해되던 1956년 8월 사건의 배경과 전개, 내막을 소상히 펼쳐 보인다. 거기에서 마주하는 것은 한국전쟁 후 북한 민생경제의 일상적 위기,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 이후 불어 닥친 탈스탈린화 바람, 스탈린주의 체제의 북한판인 김일성 주도 체제에 대한 자생적 반성과 문제제기가 서로 급박하게 교차하던 당시 정황이다. 그리고 이 정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주소대사 이상조를 비롯한 노동당의 40대 간부들이다.
<예고된 쿠데타>는 이러한 당 내 비판세력의 인적 구성을 상세히 밝힌다. 그 중 핵심인 이상조, 윤공흠, 서휘 등은 물론 일제 말에 중국 연안에서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운 화북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출신, 즉 연안파다. 그러나 연안파만이 아니라, 더 일찍부터 김일성 세력의 견제를 받던 재소 고려인 출신, 즉 소련파 간부들도 가담했다. 또한 연안파 전부가 함께 한 것도 아니어서, 독립동맹 계열 중진 중에는 최창익만 정변의 구상과 실행에 적극 참여했다. 뿌리 깊은 당 내 분파 갈등이라기보다는 북한 사회의 진로를 둘러싼 새로운 개혁파의 대두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들이 노동당 공식회의를 통해 관철하려 한 것은 김일성 개인숭배 중단, 사당(私黨)화된 노동당의 민주적 운영 회복, 농업 및 경공업과 중공업의 균형 발전을 지향하는 경제계획 등이었다. 하나같이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 이후에 현실사회주의권에서 새로운 상식처럼 부상한 내용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소련과 중국 모두 노동당 내 김일성 비판세력에 동정적이었고, 몇몇 경로를 통해 지원 의사까지 밝혔다. 그러나 당 회의 석상에서 쏟아지는 비판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김일성 그룹의 당 장악력을 확인한 뒤에는 두 나라 다 입장을 바꿨다. 게다가 동유럽의 탈스탈린화 흐름이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두 '형제국'은 기존 노동당 당권파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하고 나섰다.
모처럼 등장한 당 내 개혁파의 시도는 삽시간에 무참히 좌절됐다. '8월의 대전환'이 될 수도 있었을 사건은 결국 '8월 종파사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북한 사회 전체가 전보다 더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정변 기획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던 연안파 인사들도, 심지어는 형식적 국가원수였던 김두봉까지 숙청당했다. 중경 임시정부의 좌우합작 체제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연안파 인사들의 옛 지도자였던 김원봉은 덩달아 탄압을 받다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 정부가 홀로 도망가는 바람에 납북당하고 만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들 역시 대숙청 대상에 포함됐고, 조소앙은 이에 자결로 항의했다.
어쩌면 현재 북한 사회의 원형이 이때 확립됐다고 할 수 있다. 나라 밖 사회주의권의 동향에 잔뜩 주눅 들었던 처지에 대한 반작용으로 "주체"라는 말이 새로운 깃발이 됐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할 '주체사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조선노동당은 이견 따위는 존재할 수 없는 김일성 유일체제의 조직적 수단이 됐고, 20년쯤 흐르고 난 뒤에는 더 나아가 '세습'을 통해 이 체제의 연속성을 유지하려 하게 된다.
저자도 강조하듯이, 바로 이 점에서 <예고된 쿠데타>는 수십 년 전의 망각된 사건을 끄집어내려는 시도만은 아니다. 이 책은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현재가 시작된 원점으로 돌아감으로써, 북한 사회가 '가지 않은' 길,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이제 가야 할' 길의 방향을 확인한다.
북한의 8월과는 달랐던 남한의 4월
1950년대 후반이라는 비슷한 시간대 탓인지 나는 '8월 종파사건'에서 늘 남한의 진보당 사건을 떠올리곤 했다. 1956년에 휴전선 북쪽에서 노동당 내 개혁파의 시도가 좌절되면서 대숙청의 파도가 일 무렵, 휴전선 남쪽에서는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뜻밖의 바람을 일으킨 진보당 대선 후보 조봉암이 2년 뒤에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1959년 7월 조봉암은 끝내 사형을 당했다. 마치 데칼코마니마냥 한쪽에서 체제에 가장 진지하게 문제제기한 이들이 청소당할 때에 다른 쪽에서도 체제에 가장 근본적으로 도전한 이들이 제거된 것이다.
그러나 <예고된 쿠데타>를 읽으면서 계속 떠오른 것은 조봉암과 진보당 탄압이 아니었다. 조봉암이 희생되고 1년도 안 돼 폭발한 민주혁명이었다.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으로 새겨진 1960년 4월 혁명이었다.
이승만을 '국부'라 부르는 요즘 일각의 복고 풍조에 따르면,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기원'에 해당한다. 대한민국을 반공과 친미,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로 점지했다는 시작점이고, 이 기원에서 비롯되는 거룩한 계보로부터 이탈하는 현실의 모든 존재는 그 이탈의 정도만큼 철퇴를 맞아야 할 운명이다. 이승만 외의 독립운동가들이나 해방정국 지도자들을 애써 공식 역사에서 지워 버리려 하고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을 기리자고 하는 현재 뉴라이트 주도의 소란은 이 "이승만=기원"론의 변주인 셈이다.
한데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계승해야 할 두 전통 혹은 기억(또 하나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중 하나로 명기된 4월 혁명이란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원'이라는 그 이승만의 부정이고 전복이다.
그 해 봄,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부정선거에 맞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수많은 시민이 총알이 빗발치는 경무대로 돌진했다. 국민을 학살하는 경찰에 맞서 급기야 시민이 무장하기 시작했고, 절체절명의 그 순간에 이승만은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였다. 분노한 시민들이 남산에 서 있던 25m 높이의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리는 장면이야말로 이 혁명의 절정이자 축도(縮圖)였다. 1956년 10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혁명 군중이 똑같이 25m 높이였던 스탈린 동상을 무너뜨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가장 치열한 상징 행위이자 상징 그 이상의 행위였다.
<예고된 쿠데타>가 다루는 북한의 '8월'을 마주하며 4년 뒤 남한의 '4월'을 떠올린 이유는 이러한 '기원'의 부정과 극복이라는 4월 혁명의 의의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기원'이 이승만이라는 사고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그대로 대입한다면, 이 경우의 '기원'은 당연히 김일성이다. 1950년대, 즉 한국전쟁 직후의 시간 속에서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자신이 '기원' 노릇을 한 한반도의 양쪽 지역에 나름대로 견고한 독재 체제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서 1960년대로 넘어가는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 남한과 북한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이 갈라졌다. 1956년 북한의 '8월'은 실패한 반면 1960년 남한의 '4월'은 성공했다. 아니, 이렇게만 말해서는 안 된다. '실패'와 '성공'을 나누는 그 결정적 기준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이 점을 분명히 한다면, 이렇게 다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95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신의 '기원'을 부인하지 못한다는 점을 통렬히 확인했으나, 1960년 대한민국은 그 '기원'을 과감히 부정했다.
사회의 모든 복잡다단한 소통과 교섭, 결정 과정이 일당 체제의 집권당 내 구조에 말도 안 되게 집중된 상황(스탈린주의=국가사회주의 체제)에서 몇몇 당 간부들은 참으로 진지하게 체제의 모순과 한계에 손을 대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체제가 시작되면서 받아들인 근본 전제들을 뒤집기는커녕 철저하게 그 틀 안에서 궤도 수정을 시도했다. 몇 겹의 장벽을 통해 대중과 분리된 당=국가의 공식 회의에서 정변을 시도했고, 건국의 후견 세력이었던 '형제국'들의 개입으로 정치적 실력을 대신하려 했다. 이런 극도로 제한된 도전 앞에서 김일성 그룹은 권력을 오히려 더 확고히 다졌고, 정말로 '기원'이 철두철미 지배하는 국가, 세습 수령의 나라를 만들었다.
반면에 1960년 봄에 거리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거침이 없었다. 잇단 부정선거를 통해 선거정치의 잠정적 무용성을 확인하자 정치의 더 근본적인 통로, 즉 거리의 정치를 스스로 열었다. 남한 쪽 후견 세력인 미국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힘을 빌어야 한다거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 결과, 김일성 체제와는 달리 이승만 체제는 일단 무너지고 말았다. 4월의 시민들은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의 '기원'이 이승만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다. '기원'은 곧 그날의 그들 자신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심오한 진리가 토착화하는 경이로운 역사적 순간이었다.
물론 불과 1년 뒤에 다시 세상이 뒤집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그토록 찬란한 산업화의 성과를 냈어도 그것이 독재자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된다고 믿는 국민은 늘 압도적 다수에 미달했다. 그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수가 그러길 거부했다. 4월의 긴 그림자가 거기에 있었다. 무법천지가 된 1980년 광주에서 시민군이 조직될 때에도, 대한민국의 다른 도시들이 무려 7년이나 지나고 나서 이에 화답했을 때에도 4월의 기억이 지표면 저 밑에서 흐르고 있었다. 헌법 전문에 괜히 "4.19"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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