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네오콘의 근본적 차이는 역사적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1776년 독립 이후 오랫동안 해외문제 불개입 원칙을 고수했다. 1930년대까지도 의회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유럽과 아시아 개입을 막고자 '중립유지법 (Neutrality Act)'을 네 차례나 통과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미국의 대외정책은 급변했다. 전후 대영제국을 대체하며 패권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냉전기에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개입주의로 선회했고, '공산권 봉쇄'를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
1947년 '국가안보법'으로 국방부, 중앙정보국(CIA),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을 설립해 대통령 중심의 통합 국가안보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후 1950년대 한국전쟁과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거치며 군수산업과 정보·군사 조직이 긴밀하게 연계된 '군산복합체'가 탄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61년 고별 연설에서 군산복합체의 막강한 영향력을 경고한 이유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네오콘이 등장했다. 이들이 신보수주의라 불린 이유는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의 고립주의 노선과 달리, 적극적인 해외 개입과 미국의 세계적 지도력 행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흥미롭게도, 이들 상당수는 원래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논쟁 과정에서 신좌파(New Left)의 급진적 반전운동에 반발하며 보수화됐고, "공산주의 확장을 막으려면 군사력 사용도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취하게 됐다.
1970년대 네오콘의 입장은 더 체계화됐다.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의 영향으로 국제정치를 "절대적 선과 악"의 구도로 해석했고, 랜드연구소와 헤리티지재단 같은 보수적인 싱크탱크를 통해 영향력을 키웠다.
네오콘이 실질적인 정책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레이건 행정부 시기다. 많은 네오콘 인사들이 국방부와 국무부의 요직에 진출했고, "힘을 통한 평화"라는 레이건 대외정책을 정책적,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며 군산복합체와의 결합을 공고히 했다.
1990년대 냉전 해체 후 잠시 주춤하던 네오콘의 영향이 새로운 탄력을 얻은 것은 2001년 9·11 테러였다. 부시 행정부의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하며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끌었고, 워싱턴의 외교안보 정책을 장악했다.
오바마 정부도 아프가니스탄 증파와 드론 작전을 확대했으며, 바이든 정부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형적인 네오콘 노선을 보여줬다. 이는 네오콘을 중심으로 한 기존 국가안보 카르텔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넘어 워싱턴 전반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시사한다.
트럼프와 네오콘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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