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한국은 미국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무역 장벽을 우리가 철폐하겠다."
지난 17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한 이 말은 단순한 외교 수사를 넘어 외교 협상 주도권 자체를 스스로 포기하는 심각한 발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미국 측 반응이 나왔다. 한미 '2+2 통상협의' 직후 미국의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이 최선의 제안을 가져왔다"고 보고했다. 이어 "빠르면 다음 주 양해 합의가 가능하며, 이제는 한국이 이를 이행할지를 지켜보겠다"고까지 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미 사전 양보가 있었던 것 아닌지 우려스럽다.
사실 지금 진짜 협력이 더 절실한 쪽은 오히려 미국이다. 특히 조선 분야에서 그렇다. 한국과의 조선 협력은 미국의 해군 전략과 에너지 수출, 조선 산업 재건을 떠받치는 핵심 기반이다. 그런데도 이 협상에서 한국이 압도적인 기술 우위를 전략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서글픈 마음이 들 정도다.
한국과의 조선 협력이 절실한 미국
현재 미국 조선 산업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가깝다. 상업 조선의 세계 점유율은 0.1%에 불과하고, 군함조차 제때 건조하지 못하고 있다. 버지니아급 공격잠수함은 한 척 건조에 9년이 걸리고, 핵무기를 실을 수 있는 콜롬비아급 전략잠수함도 첫 번째 함정부터 이미 1년 이상 지연됐다. 신형 프리깃도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일정이 밀리고 있다.
정비 상황은 더 심각하다. 공격잠수함 3척 중 1척이 정비 중이거나 대기 중이다. 바다에 있어야 할 전력이 독에 묶여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미 해군은 2054년까지 유인 전투함 390척 확보라는 확장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국의 현재 조선 능력만으로는 실현이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 중국은 군함과 상업 선박을 병렬로 대량 생산하는 '민군융합' 체계를 바탕으로 조선 역량을 무기로 해양 패권을 강화하고 있다. 2024년 기준 세계 조선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했고, 해군 함정 수도 이미 미국을 앞질렀다. 미국이 중국과의 해군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외부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믿고 협력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한국은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북극처럼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있는 바다에서도 직접 얼음을 깨며 항해할 수 있는 특수 선박(Arc7)을 만들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나라다.
생산성과 기술력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 조선소는 선박 1척 건조에 평균 120만 인시가 걸리는 반면, 미국은 400만 인시 이상 소요된다. 한국의 조선 건조 생산성이 미국보다 3배 이상 높다는 얘기다. 여기에 한국은 스마트 선박, 디지털 시뮬레이션, 인공지능 기반 자동화 기술까지 실제로 활용하고 있다. 이런 조선 기술은 단순한 산업 경쟁력을 넘어, 외교에 쓸 수 있는 국가 전략 자산이다.
실제 한국은 미국 해군 군수지원함을 단 6개월 만에 정비해 인도했다. 이는 미국 평균 정비 기간의 절반 수준이다. 작년 말 의회에서 발의된 '미국의 번영과 안보를 위한 조선 및 항만 인프라(SHIPS) 법안'(향후 10년간 상업 선박 250척 국내 건조 목표)도, 한국의 기술과 생산 역량 없이는 기한 내 달성이 불가능하다. 그만큼 한국의 조선 기술은 미국에 선택이 아닌 필수에 가깝다.
그런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이렇게 압도적인 한국의 조선 기술과 능력을 한미협상에서 활용했다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이 기술을 수출품이 아닌 국익을 위한 협상 자산으로 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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