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일본 정치를 옥죄어온 무기력은 바로 이 오래된 구조의 파열에서 비롯되었다. 문제는 이 무기력이 자각되지 않은 채 일상화되었다는 점이다. 불신도, 분노도 없이, 그저 관성처럼 반복되는 정치의 풍경 속에서 유권자의 기대는 서서히 식어갔다.
이제 정치적 위기는 제도의 실패가 아니라 관계의 단절로 나타나고 있다. 정당과 유권자 사이, 권력과 국민 사이에 놓인 신뢰의 끈은 점차 느슨해졌고, 일부는 이미 끊겨버렸다. 자민당이 단순히 의석을 잃은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정당으로서의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신뢰의 단절과 감정의 동요가 겹치는 틈을 비집고 새로운 세력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산세이토(참정당)의 악진은 그 대표적 사례다. 균열된 자민당 체제를 흔들고자 하는 비주류 정치의 상징적 징후이며 기존 정당 정치가 놓친 정서의 틈새를 채운 결과다.
산세이토는 구체적 정책보다 정서적 메시지를 앞세운다. "자유로운 일본", "진실한 교육", "백신 반대", "글로벌리즘 반대" 같은 구호는 논리보다는 감각에 호소하며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배신이라는 이중 서사를 만든다.
그 결과, 유권자들은 정당 정치에 대한 냉소와 회의 대신 '직접 말 걸어주는 정치'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전통적 이미지보다 비주류적 서사에 끌리고, 구조적 해결책보다 정체성의 확신에 기대는 흐름이다.
산세이토의 등장은 아직 서구의 극우 정당들처럼 완결된 정치 기획이라 보긴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출현한 공간 자체가, 극우 정치가 자라날 수 있는 조건을 일정 부분 갖추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감정의 공백과 신뢰의 진공 속에서 정치를 조롱하거나 외면하던 이들이 이제는 분노와 상처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결속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일본 정치의 본질적 위기를 보여주는 징후다. 그것은 단순한 정당 지형의 재편이 아니라 정치가 감당해야 할 정서적 책임과 공동체적 의미가 붕괴되고 있다는 구조적 경고이기도 하다.
보수는 원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지켜야 할 가치가 갱신되지 않으면, 그 기술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채 과거의 관성에 갇힌다. 일본 자민당의 쇠퇴는 하나의 정당이 무너진 사건이 아니라 보수 정치가 본래의 책임을 상실한 결과이며, 변화에 대한 조율 능력을 잃고 제도의 틀 안에 정체된 체제의 붕괴다.
변화 앞에서 다시 울타리를 덧칠할 수 있을까. 질서를 지키고자 했던 기술이 새로운 시대의 불안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일본은 결국 보수의 몰락과 극우의 부상이 교차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다음 사례가 될지도 모른다.
#일본 #자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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