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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군인들 넘쳐나던 그 때... 대한민국 구한 전쟁 영웅

[어떤 어른] 한국전쟁의 명장 김홍일

민족·국제 김종성(qqqkim2000)

25.11.01 19:16최종 업데이트 25.11.01 19:16

지난 100년간의 역사적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 형성에 기여했다. 3·1운동과 8·15 해방은 항일투쟁을 했거나 지지한 사람들의 가치관을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관으로 정착시켰다. 홍범도나 김구 등이 영웅으로 부각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편 사람들이 명분도 없이 부와 권력을 거의 독차지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친일청산이 과제로 남아 있다.

4·19혁명과 6월항쟁은 민주화 투쟁을 했거나 지지한 사람들의 가치관에 보편성을 부여했다. 이 투쟁을 통해 부각된 김대중·김영삼은 대통령이 됐고, 그 외 사람들은 새천년 들어 정치권 주류세력이 됐다. 그러나 반대편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여전히 점유한 채 사회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2016년에는 촛불혁명이 타오르고, 8년 뒤에는 빛의 혁명이 발사됐다.

인민군의 진격 막아내고, 대한민국을 구하다

김홍일 장군위키미디어 공용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가치관이 그 뒤 오랫동안 보편적 가치관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런 속에서 백선엽이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됐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군인은 독립투사 김홍일(1898~1980)이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 김홍일 편은 황해도 경신학교 교사였던 그가 1919년 3·1운동 이전에 학생비밀결사사건 때문에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1921년 이후에 독립군단체인 대한의용군사회를 거쳐 중국 국민혁명군에 들어가 사단 참모 등을 역임했다고 기술한다.

김홍일은 중국 군관학교 교관 시절인 1937년에는 "한인 학생 100여 명을 훈련시켜 이들을 조선의용대로 편성하여 항일투쟁에 참여"시키고, 1944년에는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참모장이 되어 국내상륙작전을 준비했다. 이처럼 3·1운동 이후부터 전쟁 무대를 누빈 김홍일의 관록이 투영된 무대가 1950년 6·25전쟁이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인민군의 진격으로 인해 대한민국 영토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났다.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것은 8월 1일이다. 인민군의 진격은 그처럼 빨랐다.

인민군이 부산을 점령했다면, 유엔군은 한국이라는 성곽 밖에서 공격을 해야 했다. 이렇게 됐다면 미군이 성 안의 인민군을 제압하기가 곤란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유엔군이 일본 등에 진을 쳐야 하므로 전쟁의 범위와 파급력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산은 함락되지 않았다. 유엔군이 전열을 갖출 때까지 인민군의 진격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의 향방을 갈랐다. 이는 김홍일이 인민군의 발목을 한강 이북에 묶어놓은 직접적 결과다.

개전 사흘 만인 6월 28일,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이날 한강인도교와 한강철교가 폭파된 것이 인민군의 도강을 지연시켰지만, 이것이 주된 원인은 아니다. 주원인은 한강 이남의 국군이 여러 날 동안 버틴 점에 있다.

국방부 국방홍보원이 발행한 <국방저널> 2021년 제569호 기사 '6·25 개전 초 한강방어전으로 대한민국을 구하다'는 전쟁 발발 직전만 해도 육군참모학교(지금의 육군보병학교) 교장이었던 김홍일 소장이 야전사령관으로 전격 발탁되는 극적인 상황을 기술한다.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고 나서야 채병덕 참모총장은 뒤늦게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홍일 소장은 이때부터 일분일초를 쪼개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며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개전 직후에 김홍일은 '서울을 빨리 포기하고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제안했지만, 국군 지도부는 상황을 오판해 이 건의를 무시했다. 그랬다가 전방 병력을 대거 상실하고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기자 김홍일에게 구원투수 역할을 맡겼던 것이다.

처음부터 김홍일 말대로 했다면, 국군 정예부대가 한강 이남에 일찍 진을 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군 전력이 삼팔선에서 대거 와해됐기 때문에, 김홍일은 패잔병을 모아 한강 이남을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훨씬 약화된 전력으로 한강을 지키게 됐던 것이다. 이런 상태로 길이 24km짜리 방어선을 구축한 김홍일은 그야말로 기적적인 결과를 연출했다. <국방저널>의 설명이다.

"30일 새벽부터 북한군은 한강 도하를 시도했다. 하지만 완강한 국군의 저항에 실패했다. 북한군은 도하 첫날에는 노량진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점차 여의도와 영등포까지 전선을 확대했지만, 번번이 국군의 방어전에 막혀 꼼짝없이 묶이고 말았다."

미국 육군 제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상륙한 것은 7월 1일이고, 이 부대가 경기도 평택·안성에 진지를 구축한 것은 7월 2일 밤이다.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한강을 넘은 것은 7월 3일이다. 인민군이 한강을 넘기 직전부터 미군이 한강 남쪽 지역에서 대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7월 3일 이후에는 인민군의 진격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김홍일은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의 닷새 동안 패잔병들과 함께 인민군의 도강을 저지했다. 이것이 밑받침이 되어 유엔군이 반격을 가했으니, 더글러스 맥아더의 전공도 김홍일의 전공에 기초했다고 볼 수 있다.

육군본부가 발행한 <유엔군 전사(戰史),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제1집은 "6월 25일 현재 98,000명이었던 한국군은 6월 말에는 22,000명"이었다며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제외한 전 부대는 최초 공격을 받아 와해되었으며 반격 작전 능력은 전혀 없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한국군이 현저히 약화된 6월 말부터 김홍일은 기적을 연출했다. 이로써 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유엔군은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후퇴하라"는 김홍일의 말 거부한 백선엽

1995년 8월 8일 오전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거행된 김홍일 장군 제15주기 추모식.연합뉴스

서울 함락 전날인 6월 27일 오후, 채병덕 총참모장(참모총장)은 문산지구 제1사단장인 백선엽 대령에 대한 작전지도권을 김홍일 소장에게 부여했다. 이에 따라 김홍일은 백선엽 부대의 전투 상황을 관찰하다가 그 부대가 포위망에 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김홍일은 한강 이남으로 신속히 후퇴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백선엽은 거부했다. 총참모장이 김홍일에게 부여한 것이 백선엽 자신에 대한 지휘권이 아니라 지도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위 책은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제외한 전 부대는 최초 공격을 받고 와해"됐다고 기술한다. 백선엽이 지휘한 부대는 제1사단이다.

그 뒤 백선엽이 거둔 전공은 유엔군과의 공조하에서 나온 것이다. 김홍일은 그런 지원 없이도 닷새간이나 대군을 강 건너에 묶어놨다. 누구의 역량이 더 큰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김홍일은 전공과 역량을 인정받아 제1군단장으로 승진했다.

대통령 이승만이 군을 지휘할 자격이 없다는 점은 얼마 뒤 증명됐다. 그는 한국전쟁 최고의 명장을 이유도 없이 갈아치웠다. 이때가 9월 1일이다. 이날 한국군은 김홍일이라는 노련한 야전지휘관을 잃었다.

국방부 군사(軍史)편찬연구소의 <군사> 2016년 제99호에 수록된 이동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원의 논문 '6·25전쟁 초기 김홍일의 활동과 예편'은 백선엽·정일권 같은 친일군인들을 통해 군부 장악력을 높이고자 했던 이승만의 구상과 더불어 김홍일이 작전 수행 중에 미군과 마찰을 빚은 것이 김홍일 퇴진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한다.

지난 29일 경주 한미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가 '공식적인 전쟁 상태'에 있다는 말을 했다. 휴전 상태를 환기시키는 발언이다. 트럼프의 말처럼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나게 만든 핵심 인물은 김홍일이다.

한국전쟁의 한국측 최대 공로자는 독립군 출신 김홍일이다. 백선엽의 과오를 명확히 적시하고 김홍일을 이 전쟁의 명장으로 기억해야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올바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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