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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전남도청 앞 미국인과 충장로 DJ의 잊지 못할 '5월 그 하루'

[내 이름은 원덕기: 광주 친구의 기억] DJ 이흥철씨와 팀 원버그의 인연, 죽은 친구 위해 46년 만에 꺼낸 LP판

26.06.23 06:48최종 업데이트 26.06.23 06:48

5·18민주화운동 46주년 및 위르겐 힌츠페터 10주기를 맞아 다큐멘터리 영화 <내 이름은 원덕기>를 제작하기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펀딩 참여자의 이름을 기재합니다. 대한민국, 그리고 광주를 사랑한 팀 원버그(한국 이름 원덕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펀딩 바로가기 https://omn.kr/2i36q[편집자말]

충장로우체국 옆 음악감상실 DJ였던 이흥철씨는 그곳을 자주 찾았던 팀 원버그와 자주 교류했다. 두 사람은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도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만났다. 팀 원버그의 요청에 따라 외신기자와의 인터뷰 자리에 갔던 이씨가 지난 3월 9일 당시 인터뷰가 이뤄졌던 장소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강상우

항쟁 복판에서 그를 마주할 줄 몰랐다. 46년 전 그날, 충장로 음악감상실 DJ는 단골로 종종 만나던 그 미국인을 전남도청 앞에서 발견했을 때 곧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 왜 못 도망갔지? 광주에서 나가야 되는데 저 양반이 왜 여기에 있지?'

그는 당연히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대뜸 "광주 외곽 지역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오월 동지"가 됐다. DJ로 일하다 항쟁에 참여한 이흥철(당시 20세)씨와 미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러 광주에 왔다가 항쟁에 휘말린 팀 원버그(Tim Warnberg, 당시 25세)의 이야기다.

그날은 계엄군이 잠시 물러난 뒤인 1980년 5월 24일이었다. DJ로 일한 덕에 장비를 다룰 줄 알았던 이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주로 방송 차량에 타 있었고 그래서 "광주 외곽 지역을 보고 싶다"는 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다. 쌓인 타이어 너머로 계엄군이 보이기도 했던 주요 대치 지역을 돌며 팀은 이씨에게 유창한 한국말로 "많이 다치고 죽었겠다"고 탄식했다.

팀과 헤어진 후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도청 안에 머물던 이씨는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이야기에 두려운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 팀이 있었고 그는 잠시 자신을 따라와 달라고 했다. 그렇게 도착한 인근 여관에는 외신기자들이 앉아 있었다. 신분이 드러날까 복면을 쓴 채 인터뷰에 응한 이씨는 불안감을 못 이기고 결국 중간에 자리를 떴다. 이씨는 "앞으로 이런 일로 나를 부르지 말라"고 했고, 팀은 나지막히 "미안하다"고 했다. 둘의 5월, 그리고 항쟁은 그렇게 끝나 버렸다.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5·18민주화운동 중인 1980년 5월 24일 촬영한 인터뷰 영상의 화면을 갈무리한 것. 영상 속 인물은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던 팀 원버그(Tim Warnberg, 한국 이름 원덕기)다. 5·18기념재단이 보관하고 있던 이 영상은 그 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으며, 항쟁 한복판에 있던 인물의 현장 인터뷰는 5·18 관련 기록물 중 이 영상이 유일하다.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동네 형" 같던 그 미국인

'원덕기'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팀은 1978년부터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광주에 머물다 5·18을 눈앞에서 마주했다. 그는 목격자에 머무르지 않고 들것에 실린 부상자를 옮기거나 광주 시민들을 보호하려다 계엄군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또 고 위르겐 힌츠페터(2016년 작고) 등 외신기자 통역을 자진해서 맡았고 5·18 직후 자료·증언을 동료에게 건네 북유럽 지역 외신보도를 이끌기도 했다.

특히 팀은 의사가 되려던 꿈을 접고 한국학 전공을 택해 영어권 최초 5·18 논문을 쓰기도 했다. 5·18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사회·문화 영역을 가리지 않고 연구하던 그는 안타깝게도 1993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광주에 머물던 팀이 자주 찾던 음악감상실 DJ였다. 지난 3월 9일 광주 동구 전일빌딩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그는 5·18 당시 낮에는 가두방송을 했고 밤에는 도청 상황실을 지켰다. 1980년 5월 27일, 이씨는 항쟁 마지막 날에도 방송을 한 박영순씨와 상황실을 지키다 계엄군에 끌려가 온갖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이씨는 여전히 46년 전 팀의 손에 이끌려 외신기자 앞에 섰던 때를 "미안한" 기억으로 갖고 있다. 그는 "팀이 광주의 참상을 외부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부탁을 했던 것 같은데 그때 더 (인터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팀은) 도망갈 수 있었는데도 솔선수범해서 광주를 위해 여러 일을 했다. 참 용감했던 사람"이라며 "나는 그를 오월 동지로 생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팀 원버그의 단골 음악감상실 DJ이자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흥철씨가 지난 3월 9일 광주 동구 충장로우체국 옆에 있던 음악감상실 자리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강상우

이씨가 일했던 '타박레 음악감상실'은 이제 건물만 남아 있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와 함께 충장로우체국 옆 음악감상실이 있던 자리에 다시 섰다. 이씨는 "46년 전 이곳에서 DJ로 일할 때 손님으로 팀을 처음 만났다"며 "금방이라도 팀을 만날 것 같이 그때가 새록새록하다"고 옅은 웃음을 내보였다.

"팀이 평일 오후 타박레에 올 때마다 신청한 곡들을 빠짐없이 들려줬어요. 그게 인연이 된 거죠. 팀이 씩 웃으며 신청곡들을 적은 메모를 건네줬는데 그때마다 그 곡을 다 틀어줬어요. 고마워했던 팀은 저에게 음료를 건넸고 기분 좋게 같이 마시며 친해졌습니다."

이씨는 "처음에는 외국인이라 어색했지만,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팀의 한국어 실력에 금방 가까워졌다"며 "편안하게 자신의 일상과 생활을 공유했고 포용력 있게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설명해줄 때도 있었다"라고 떠올렸다. 이어 "외국인이라기보다는 우리 한국의 '동네 형' 같은 스타일이었다"며 "(이흥철이라는 내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때는 발음하기 좋게 나를 '이홍철'이라고 부르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팀이 한국 음식을 매우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비빔냉면을 특히 좋아했다"고 웃으며 회상했다.

"한국음식을 잘 먹더라고요. 매운 것도 잘 먹고. 특히 냉면을 좋아했어요. 서투른 젓가락질로 냉면을 먹는 모습을 보면 웃음도 나왔어요. 어린애들 젓가락질 하듯이 좀 부자연스러우면서도 (비빔냉면을) 맛있게 먹는 모습, 매운데도 표시내지 않으면서 먹고 나서 '맵다'는 표정을 지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이씨는 또 "사람마다 좋아하는 노래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라며 "팀은 그때도 우리나라로 치면 민중가요에 해당하는 밥 딜런(미국 싱어송라이터)이나 캔자스(미국 록밴드)의 노래를 자주 신청했다(두 가수 모두 평화, 반전 등을 주제로 노래 - 기자 말)"라고 추억했다.

미국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한국에 머문 팀 원버그(맨 왼쪽)가 한국인 동료들과 식사하는 모습. (AI로 화질 개선)록산 원버그 윌슨 제공

"동네 형"이 "오월 동지"된 그날

여느 광주 시민들처럼 두 사람의 일상은 5·18과 함께 무너졌고 서로의 얼굴을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했다. 1980년 5월 24일, 이씨는 계엄군이 전남도청에서 잠시 물러나면서 두고 간 차량을 타고 동료들과 광주 외곽 지역을 순찰했다. 전날 주남마을에서 계엄군이 민간인 탑승 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기에 나선 순찰이었다.

순찰을 마치고 전남도청으로 돌아온 이씨는 그곳에서 팀을 만났다. 이씨는 "그렇게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팀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며 "한편으론 많은 시민 사이에서 팀을 보니 반갑기도 했다"고 전했다.

"처음엔 '왜 광주를 안 떠났지?'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팀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무슨 사연이 있겠지' 싶었어요. 제가 눈 표시까지 더해 '별 일 없냐'고 물으니 '별 일 없다' 그러더라고요."

이때 팀은 이씨에게 "나도 외곽 지역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곧장 팀을 뒷자리에 태워 불탄 차 등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던 장소를 돌았다. 이씨는 "백운동 쪽과 쌍촌동 그리고 공단사거리, 지금은 농성광장인 곳을 돌아보고 처참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라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때 팀은 평소와 달리 말수가 적었다"며 "순찰을 돌 때 그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시민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겠다. 많이 아팠겠다'고 탄식했다"고 설명했다.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테이프에 담긴 영상 갈무리. 항쟁 마지막 날인 5월 27일, 계엄군의 도청 재진입 직후의 모습으로 보인다.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이씨는 이날 팀과 헤어진 직후를 "하늘이 꾸중꾸중하고 비가 소름끼치게 부슬부슬 내린" 때로 기억하고 있다. 도청 상황실에 머물다 "누가 너를 만나러 왔다"는 한 동료의 말에 이씨는 "순간 겁이 났지만" 도청 밖으로 나갔다. 팀이 또 그곳에 서 있었다.

"어디 좀 같이 가자."

"어딜 가? 나 안 가고 싶은데."

"가보면 알아. 가까워. 바로 근처야."

평소 이씨가 알던 팀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이씨는 의아한 심정과 겁이 난 마음을 붙든 채 팀을 따라 도청 인근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외신기자들이 숙소로 쓰던 여관이었고 기자 대여섯명이 앉아 있었다.

지금은 건물 대신 '회화나무 작은숲공원'이 조성돼 있는 그 현장을 취재팀과 다시 찾은 이씨는 "평상시에 걸으면 2~3분 걸리는 길인데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던 나를 '네가 꼭 해줘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팀이 설득하느라 5분 이상 걸렸다"라고 설명했다.

"그때 여관들이 밀집된 골목으로 들어가서 한 여관의 2층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뭔 일이지' 조마조마했고, '왜 여기에 데리고 왔지?' 생각했어요. 노크를 하고 딱 문을 여니 독일·영국·일본 등 외신기자 대여섯명이 있었어요. '어떻게 외신기자들이 도청 근처까지 왔을까' 놀라는 저에게 그때서야 팀이 '기자회견'이라며 자세히 설명해줬어요."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테이프에 담긴 영상 갈무리. 팀과 이씨가 만난 전남도청 앞 모습이다.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당시로선 '신분이 알려졌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분위기였기에 이씨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복면을 쓰고 있던 이씨는 "팀이 하도 설득해서 사진 촬영 없이, 익명을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며 "날씨도 우중충한 것이 곧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아 마음이 싸하고 불안해 30분 정도 있다가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그때 팀이 주선하고 통역한 인터뷰를 이씨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외신기자들이 '왜 복면을 쓰고 있냐'고 심각하게 묻더라고요. 헬기가 막 떠다니며 '폭도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가려야만 시민들이 자기 자신을 지키며 활동할 수 있다'고 답했어요. 또 외신기자들이 '앞으로의 계획',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먹고 사는 데 별 탈은 없는지' 등을 물었어요. 팀이 그 질문을 통역해 내가 편하게 느끼도록 물어봐주면 저는 내 눈으로 본 건 설명하고 그렇지 않은 건 말하지 않았어요."

외신기자들이 좀 더 인터뷰하길 원했지만 이씨는 불안한 마음에 여관을 나왔고 직후 "팀이 많이 미안해했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제가 화를 내진 않았지만 '앞으로 이런 일로 나를 부르지 말라'고 단호히 이야기했다"며 "그때 '미안하다'는 팀을 향해 '나 갈란다'라고 말하며 좀 냉정하게 돌아섰다"고 말했다. 이씨는 "팀이 아니라면 따라가지도 않았을 텐데 그를 믿어서 따라갔었다"라며 "지금 생각해보면 팀이 광주의 참상을 밖으로 알리려고 정말 많이 노력한 것 같은데 미안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날 팀은 자신도 용기를 내 카메라 앞에 섰다. 이씨와의 첫 번째 만남과 두 번째 만남 사이, 팀은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독일 제1공영방송)의 요청에 응해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그와 인터뷰했다. 이 영상은 46년 간 잠들어 있다 지난 5월 <오마이뉴스> 보도로 처음 공개됐다(관련기사 : [단독] 46년 만에 공개된 5·18 인터뷰, 힌츠페터가 촬영한 이 외국인의 정체 https://omn.kr/2i71h).

취재팀이 팀의 인터뷰 영상을 내보이자 이씨는 "원래 안경을 안 썼는데 색안경을 쓴 게 눈에 띈다"며 "(팀이) 그렇게 긴박했던 상황에서 인터뷰를 했다니 감회가 새롭다. (영상 속 팀과)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아 금방이라도 안부 인사를 건네고 싶다"고 말했다.

팀 원버그의 단골 음악감상실 DJ이자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흥철씨가 지난 3월 9일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을 <오마이뉴스> 기자와 지나고 있다. 이곳은 팀과 이씨가 항쟁 중 만났던 장소다.강상우

"그곳에선 부디 아프지 않길"

마지막 날까지 도청을 지키다 상무대 영창으로 연행된 이씨는 석 달 후 석방됐다. 이씨는 "그해 가을 팀을 충장로 인근에서 다시 만났다"며 "그때 주변에 죽은 친구들이 많았는데 팀을 보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라고 회상했다.

"석방된 후 문득 팀이 떠올랐어요. '살아있겠지' 생각하면서도 걱정이 됐죠. 그러다 충장로우체국 쪽에서 팀을 봤어요. 그때 '살아있구나' 감격했죠. 그래서 '팀!' 하고 불렀더니 그 친구가 나를 보는 거예요. 포옹하고 손잡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눈을 보고 서로 이야기하는데 그때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죠. 팀도 아마 (항쟁 이후 한미 당국에 의해) 고초를 겪었을 텐데 그래서 제가 '괜찮아?'라고 물었고 팀은 '괜찮다'고 답했어요. 그 말에 그간의 고생이 모두 요약돼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이후 이씨는 팀의 초대로 그의 다른 미국인 친구가 머물던 전남대 기숙사를 찾았다. 그곳에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웃고 떠들다가 팀은 조심스레 이씨에게 "고생 많이 했지?"라고 물었다. 이씨는 "고생 많이 했다"고 짧게 답했다. 이에 팀은 "지금은?"이라고 재차 물었고 이씨도 앞서 팀이 그랬던 것처럼 "괜찮다"고 답했다. 이씨는 길지 않았던 이 대화를 두고 "항쟁을 함께 겪었기 때문에 긴 설명 없이도 서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해했고 서로 이해했다는 것 또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날 만남 후 두 사람은 다시 마주하지 못했다. 이씨는 일하던 음악감상실로 경찰이 찾아오는 일이 반복되자 "이리(지금의 전북 익산), 청주 등으로 여기저기 도망다녔"고 광주에 거의 머물지 못해 팀과도 만나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내가 살아있는 동안 팀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씨는 6년 전 <오마이뉴스> 보도로 팀이 1993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다(관련기사 :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그가 광주를 위해 남긴 선물 https://omn.kr/1nj2u).

그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청천벽력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팀이 광주에서 했던 일,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살 것"이라며 "그곳에서는 부디 아프지 않고 편안히 영면하기를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팀 원버그의 단골 음악감상실 DJ이자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흥철씨가 지난 3월 9일 광주 북구 자신의 음악카페에서 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 <꿈의 대화>가 담겨 있는 1980년 대학가요제 레코드판을 꺼내고 있다.강상우

"팀과 '꿈의 대화' 나누고파"

이씨는 전일빌딩, 옛 전남도청, 충장로·금남로 곳곳에서 인터뷰한 뒤 자신의 음악카페로 취재팀을 초대했다. 이곳에서 이씨는 "팀이 살아있었다면 광주 곳곳의 변화한 모습을 보여줬을 텐데 아쉽다"라며 "그때 참 젊었던 팀이었는데 어떻게 나이를 먹었을지도 상상해본다"라고 말했다.

"특히 그때 돌았던 외곽 지역을 다시 보여주고 싶어요. 많이 변했거든요. 복원된 도청도 보여주고 '너랑 나랑 같이 외신기자들 만났던 그곳은 공원으로 변했다' 그런 이야기도 하고 싶어요. 처음 만난 음악감상실은 지금 다른 가게가 됐다고도 알려주고 싶고, 냉면집에 다시 가서 옛날 생각하면서 같이 먹고 싶고… 내가 뭘 먹자고 하면 팀은 무조건 토달지 않고 '오케이'했으니까. 짓궂은 농담을 해도 다 받아주고 서로 웃었거든요."

한참 추억을 곱씹던 이씨가 몸을 움직였다. 팀을 처음 만난 그때처럼 이씨는 뮤직박스에 앉았다. 신청곡 메모를 건네던 팀과 이를 빠짐없이 틀던 '스무살 이흥철'은 더이상 없지만, 이씨는 이제 신청곡을 요청할 수 없는 친구를 위해 직접 노래를 골랐다. 그는 항쟁이 있던 그해 11월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꿈의 대화>(이범용·한명훈) 레코드판을 턴테이블에 올렸다.

"팀에게 <꿈의 대화>를 들려주고 싶어요. 현실에서 못하는 말을 꿈에서 마음껏 해보자는 노래잖아요. 지금은 세상에 없는 팀과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며 '그동안 잘 지냈냐. 그 동안 어디에 가 있었냐' 꼭 물어보고 싶어요."

이내 레코드판이 돌아갔다.

땅거미 내려앉아 어두운 거리에 가만히 너에게 나의 꿈 들려주네

너의 마음 나를 주고 나의 그것 너 받으니 우리의 세상을 둘이서 만들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석양이 질 때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언덕에 올라

나지막이 소리 맞춰 노래를 부르자 작은손 마주 잡고 지는 해 바라보자

네가 제일 좋아하는 별들이 불밝히리 네가 제일 좋아하는 창가에 마주앉아

따뜻이 서로의 빈곳을 채우리 네 눈에 반짝이는 별빛을 헤리라

외로움이 없단다 우리들의 꿈속에 서러움도 없어라 너와 나의 눈빛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 함께 나누자 너와 나만의 꿈의 대화를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던 팀이 자주 찾았던 충장로우체국 옆 음악감상실의 DJ 이흥철씨가 친구였던 팀의 사진을 턴테이블 옆에 놓고 있다. 2026. 03. 09.강상우

<내 이름은 원덕기> 제작을 위한 펀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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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소중한 취재 소중한·전선정·김화빈·이진민·유지영

촬영 강상우·이희훈 편집 콘텐츠팜 호미

CG 김수연 타이틀 김소설 음향 DMC 사운드 비전 내래이션 이승준

펀딩 기획 장유정·이기종·봉주영

영상 제공 5·18기념재단·루먼 형제(Ben&Sam Luhmann)

영상 번역 자문 로버트 그라찬

사진·자료 제공 고진석·나경택·서나래·유경남·변재원·안영주·록산 원버그 윌슨·데이비드 돌린저·폴 코트라이트·캐롤린 투르비필·케빈 페어뱅크스·로버트 그라찬·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외교사료관·박지원 의원실

촬영 협조 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전남대병원·전일빌딩245·국가보훈부·별밭·필로스팅하우스

제작 지원 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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