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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피해자에 "걱정 말라"더니 무기징역 선고한 판사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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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읽는 『반헌법행위자열전』 이재훈 편

'7일간 고문' 이장형 허위자백에 무기징역 선고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 판사가 격려금 줬다"

미문화원 점거농성 학생에 장문의 훈계문도

일반 형사사건은 딴판…"증거 없으면 무죄"

새벽 현장 검증, 11시간 30분 마라톤 재판

영천시장 폭발물 사건 사형 구형에 무죄 선고

"촌지·접대 너무 많다" 검사 포기 판사로 변신

현직 판사가 군법무관 공안교육 강사로 유일

농촌 전문가 변신 뒤 안기부 북풍공작에 등장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이재훈(李宰勳, 1942~2022) 항목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그의 두 얼굴이었다. 1985년 영천시장 폭발물 사건에서 그는 사형이 구형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새벽 3시 30분부터 현장검증을 시작하고, 11시간 30분 마라톤 재판을 열고, 대구에서 상경한 증인의 여비를 자기 돈으로 대신 내준 따뜻한 판사였다. 그런데 같은 시기, 같은 법정에서 그는 고문으로 조작된 간첩사건들에 줄줄이 유죄를 선고했다. 정영에게 무기징역, 이장형에게 무기징역, 윤정헌에게 징역 7년, 조일지에게 징역 7년, 이곤에게 징역 5년, 홍종열·변두갑에게 중형, 구명서에게 징역 15년. 모두 재심에서 무죄가 됐다.

같은 판사가 한 사건에서는 진실을 찾아 11시간 30분을 버텼고, 다른 사건에서는 고문피해자의 절규를 "혼냈다"며 법정에서 끌어냈다. 이 이중성이 이재훈이라는 인물의 핵심이다.

 

이재훈(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42년 경북 상주 출생, 개명까지 한 사연

이재훈은 1942년 3월 15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경기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1965년 제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본명은 '장수(長秀)'였는데 사법시험에 한 번 떨어진 뒤 관상가와 작명가를 찾아가 "이름에 중절수(中切數)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재훈(宰勳)'으로 개명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썼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검사로 시작했다가 2년 만에 판사로 전직했다는 것이다. 회고록에서 그는 "검사는 도대체 무소불위였다"며 촌지와 접대가 끊이지 않는 검사생활에 대한 회의로 판사가 됐다고 적었다. 그런데 판사가 된 뒤에는 그 흔한 봉투조차 받지 못해 "판사로 옮기길 잘했다"고 무릎을 쳤다는 일화도 적었다. 이 솔직한 회고가 나중에 그의 법정 운영방식과 묘하게 겹친다.

 

이재훈(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세계사 속의 동류, '선택적 정의'의 판사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구조가 떠오른다. 나치 독일의 일부 법관들은 일반 형사사건에서는 엄격한 증거주의를 지키면서도, 국가가 지정한 '적'(유대인, 정치범)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이중 시스템(dual system)"이라 부른다. 법이 두 개의 평행한 기준으로 운영된 것이다.

이재훈의 법정이 바로 이 이중 시스템을 보여준다. 일반 형사사건(영천시장 폭발사건)에서는 "완벽한 증거가 없으면 무죄"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나 간첩사건에서는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 외에 아무 증거가 없어도 유죄를 선고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전기고문, 물고문, 성고문" 등을 시국사범들이 당했다고 언급하며 "무분별한 국가권력 앞에서 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토로했다. 그러나 자신의 법정에서 같은 고문을 호소하는 피고인은 끌어내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재훈(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84년 정영 사건, "걱정 말라"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재훈의 반헌법 행위의 첫 정점은 1984년 인천지법 부장판사로서 맡은 정영 간첩조작사건이다. 정영은 1965년 조개를 캐다 북한에 납북됐다가 돌아온 어민이었다. 안기부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낸 이 사건에서, 정영이 법정에서 "고문에 못 이겨서 그런 것"이라고 항변하자 이재훈은 그를 끌어내라고 명령했다.

정영은 국정원과거사위원회 면담에서 충격적인 증언을 남겼다.

"내가 막 소란을 피웠는데, 판사가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 검사가 구형 놓은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있으라고, 그러더니 깎아서 깎아서도 무기로 떨어지더라고요."

판사가 직접 "걱정 말라"고 위로하고는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이다. 안기부 보고서에는 이재훈이 정영을 "잘못을 반성치 않고 있어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무기징역을 선고했다고 기록돼 있다. 2011년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27년 만이었다.

이 사건의 배석판사가 신평이었다. 신평은 훗날 부장판사가 봉투를 공공연히 받는 모습을 직접 봤다고 언론에 폭로했고, 1993년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인천지법에서 봉투가 오가던 그 시절, 정영은 무기징역을 받았다.

 

정영 사건을 다룬 김성수 시민기자의 저서, '조작된 간첩들'(드림빅)

1985년 이장형 사건, 고문기술자가 "격려금을 받았다"고 진술하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85년 이장형 간첩조작사건이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장형은 고문기술자 이근안(1941~2026)에게 7일간 잠을 안 재우는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한 끝에 허위자백을 했다. 이재훈은 1985년 1월 30일 이장형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근안은 1999년 검찰조사에서 "이장형 사건에서 이재훈 부장판사로부터 격려금도 받았다"고 진술했다. 재판부가 고문을 묵인하는 정도를 넘어 고문을 조장한 것이다. 이재훈은 "그런 사람은 만나지도 않았다"고 부인했다. 이장형은 15년 가까이 억울한 수형 생활을 하다 가석방됐고, 재심을 기다리던 2006년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10여 일 전 그는 "이근안 과거, 이제는 용서하고 싶다"고 말했다.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고(故) 이장형씨(당시 74세)가 23년만에 간첩 혐의를 벗었다. 지난 2008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광만)는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기소된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피해자 이씨는 이미 고인이 된 후였다.(뉴스포스트)

1985년 서울미문화원 사건, 장문의 '훈계문'으로 자신을 드러내다

이재훈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85년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이다. 함운경(이재명 정부 초대 국무총리 김민석의 동료) 등 학생들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징역 7년을 선고하면서, 그는 판결에 앞서 장문의 '훈계문'을 직접 낭독했다. "피고인들의 주장만이 옳고… 폭력적인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훈계였다.

김민석은 항소이유서에서 이렇게 반박했다.

"그 법정훈계문은 훈계문을 빙자한 권력의사의 강제였다.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로 규탄 받는 상황에서 스스로 '시녀 선언'을 자청하는 경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혹을 금치 못하게 한다."

안기부는 이 재판 후 「농성사건 공판 대책보고」에서 이재훈을 "온순 단정, 국가관 확고, 방침 결정시 강력하게 추진하는 성격"이라며 좋은 평가를 내렸다. 재판이 끝난 후 이재훈은 해외연수까지 받았다.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사건 때의 함운경(나무위키)

현직 판사로 군 공안교육 강사, 유일한 사례

이재훈은 1986년과 1987년, 전두환 정권이 위수령·계엄령 발동에 대비해 실시한 군 법무관 '특별 공안교육'에 현직 판사로는 유일하게 강사로 참여했다. 자신의 미문화원 사건 판결 사례를 바탕으로 공안사건 처리방법을 가르쳤다. 사법부 독립의 원칙이 무색해지는 장면이다.

 

이재훈(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퇴직 후, 농촌운동가, 정치인, 그리고 '북풍공작'의 핵심인물

1990년 판사를 그만둔 이재훈은 농촌문제 전문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1997년 대선에서 안기부의 '북풍공작'(아말렉 공작) 핵심인물로 등장했다. 윤홍준의 허위 기자회견문 작성에 관여하고, 윤홍준이 구속되자 변호인을 맡았다. 사법부를 떠난 뒤 그가 손댄 일이 또 다른 공작정치였다.

이재훈은 1995년 출간한 회고록 『바지 벗은 판사』에서 자신이 재판한 숱한 간첩조작사건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윤정헌은 인터뷰에서 분노를 토했다.

"수사관보다 더 밉다. 서울대 법대 등을 나온 우수한 사람들인데 보안사의 조작을 그대로 추인했으니 그들도 공범이다. 그런데 국회의원으로 출세하고, 변호사로 잘만 산다."

 

‘대선개입-북풍공작’ 이병기가 국정원장이라니, 진실의길, 2014-06-11.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나치독일의 '이중 시스템' 법관들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다. 일반 사건에서의 공정함이 정치범에 대한 불공정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재훈이 영천 기름집 사건에서 보여준 헌신은 그가 간첩조작사건에서 보인 침묵의 폭력을 결코 상쇄하지 못한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이재훈이 정영에게 "걱정 말라"며 무기징역을 선고하던 그 장면을 떠올렸다. 친절한 말투로 행해지는 국가폭력. 그것이 가장 알아채기 어려운 형태의 반헌법 행위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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