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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준다고 해도 소용없어"... 미군이 '언니'들에게 저지른 만행

2022년 9월 29일, 대한민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8년간의 배상 소송에서 122명의 미군 '위안부'가 승소했다. 2025년 9월 5일, 117명의 미군 '위안부'들은 미군을 대상으로 한 소송을 하겠다고 나섰다. 일본군 '위안부'에 이어 미군 '위안부'는 새로운 한국여성사를 쓰고 있다. 그렇다. 미군 '위안부'들은 국가폭력이 드리운 긴 그림자와 가부장제 성문화의 깊은 낙인, 사회 불평등과 차별의 벽을 뚫고 여성해방과 인간존엄성을 향한 선언을 하고 있다.

2025년 9월 8일 서울 서초구 민변에서 열린 '기지촌 미군 위안부 주한미군 대상 손해보상청구소송'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새움터 공동작업장에는 매일 '언니'[1]들이 모인다. 함께 일을 하고, 함께 점심을 먹고, 서로의 안부와 세상 돌아가는 소식, 그리고 지난해 9월 시작된 소송까지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예전의 기지촌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 시절은 몸이 먼저 기억하는 고통이어서 한 마디만 꺼내도 마음이 무너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가를 훔치고, 숨을 고르고, 끝내 눈물이 떨어진다.

"나는 하도 울어서 눈물이 말랐어." 그렇게 말하던 언니도 또다시 운다. "백억을 준다고 해도 소용없어. 그냥 열여섯 그때로 돌려놓으라고 그래." 그리고 누군가는 조용히 덧붙인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단 한 번이라도 부모님이랑 함께 살아보고 싶어." 언니들이 꺼내는 기억은 결코 개인의 불행으로만 이야기될 수 없다. 폭력이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일상이 되도록 방치되고 때로는 '관리'되었던 구조의 흔적이다.

기지촌은 한국 땅이었지만 오랫동안 한국의 법과 인권이 미치지 못한 미국의 땅이었다. 총을 든 미군 헌병이 매일 클럽과 기지촌 골목을 순찰했고, 미군 부대의 통제와 관리에 놓여 있었다. 기지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일부 강력 범죄 이외에는 한국 사회에서 거론되지도 않았고,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그러나 잊힌다 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그때의 폭력이 남긴 상처를 안고, 지금도 우리 곁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미군 '위안부'들이 존재한다.

미군은 처벌받지 않았다

수많은 여성과 아동, 장애인들이 미군 성매매를 목적으로 기지촌으로 인신매매되었다. 미군 '위안부'들은 돈을 벌기 위해 찾아간 직업소개소와 서울역과 길거리에서 잠잘 곳과 일할 곳을 소개해 준다며 친절을 베풀던 사람들에 의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기지촌으로 끌려갔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납치되어 기지촌으로 끌려온 미군 '위안부'들도 있다.

기지촌으로 인신매매된 '위안부'들은 포주에 의해 성경험이 없다, 또는 숫처녀라는 것을 내세워 미군들과 흥정하는 대상으로 취급되었다. 그 과정에서 강제로 술이나 약물을 먹은 '위안부'들은 저항하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 보는 미군에게 강간을 당해야 했다. 인신매매된 순간부터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빚에 묶였고, 매일 포주의 감금과 감시, 경제적 착취, 폭력과 위협 속에 미군 성매매를 강요받았다.

"(인신매매된 다음날) 포주가 저에게 술을 먹이더니 알약을 몇 개 줬습니다. 이 약이 뭐냐고 했더니 술 먹고 속 안 아픈 약이니까 먹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무 의심없이 그 알약을 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포주에게 끌려 클럽으로 나갔고, 그날 ․․․ 미군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약과 술에 취해 있었던 저는 그날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습니다." (출처: 송연옥, 김귀옥 외, 식민주의, 전쟁, 군 '위안부' <김현선, 한국의 미군 위안부와 기지촌 여성들의 집단 손해배상소송> 277p에서 발췌, 2017, 도서출판 선인>)

심지어 미군 '위안부'들은 포주와 미군에 의해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는 미군 훈련장과 미군 부대 막사까지 들어가 미군을 상대해야 했다. 일부 미군 부대에서는 직접 자치회나 포주에게 연락해 '위안부'들을 모집하였고, 그렇게 모집된 '위안부'들은 미군 부대로 들어가 여러 명의 미군을 상대해야 했다. '위안부'들은 미군이 직접 운전하는 트럭과 지프차에 태워져 이동하기도 했다.

미군의 지속적인 성착취 과정에서 미군 '위안부'들이 겪었던 피해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감금과 폭행, 협박은 반복되었고, 성병과 각종 질병, 원하지 않은 임신과 강제 낙태 같은 피해가 뒤따랐다. 결혼을 약속해 놓고 버리거나 방임하는 일도 있었다. 동료가 끔찍한 폭력과 학대를 당하다 결국 목숨을 잃는 것도 목격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미군 부대에 신고를 해도 무시되었다. 바로 눈앞에서 폭행당한 여성을 보고도 헌병들은 미군을 체포하지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위안부'들의 구조요청도 묵살하였다. 미군들이 대부분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에 '위안부'들은 미군의 보복이 두려워 결국 신고조차 하지 못하였다.

"미군에게 맞아서 얼굴이 퉁퉁 붓고 피가 났었어요. 그래도 도망치는 미군을 잡으려고 부대 정문까지 쫓아갔는데 미군 부대 안으로 쏙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부대 정문에 있는 헌병에게 들어가는 저 미군 좀 잡아달라고 소리쳤는데 대꾸도 안 하는 거예요.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 결국 못 잡았지."

<출처: 기지촌 피해 생존자, 2026년 1월 26일 구술>

미국과 주한미군의 책임을 묻는 싸움

'한미합동(위원회)회의록' 등 관련 기록에 따르면, 미군 부대는 기지촌에서 인신매매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과 미성년자들의 피해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신매매 피해자인 미군 '위안부'들을 구조하거나 보호하는 조치는 하지 않았다. 또한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성구매하는 미군의 행동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의 유흥과 병력관리를 위해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정당화하고 조장했다. 한술 더 떠 미군 위안부들에 대한 성병관리를 강화하고 통제하며 관리했다. 한 마디로 위안부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 대상'이었다.

1971년 11월 24일 열린 제68차 SOFA합동위원회 회의에서 군민관계임시분과위원회가 보고한 자료 중에는 ‘건강과 위생 위원회’에서 군민관계임시분과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와 건의서가 첨부돼 있다. ‘건강과 위생 위원회’가 건의한 내용은 첫째, 한국과 미군당국은 성병 보균자들에 대한 치료를 강화하고 성병 보균자가 완치될 때까지 공중에서 격리할 것, 둘째, 한국 민간과 미군당국의 성병의 원인과 효과, 제거에 대한 협력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강화할 것 등이다. <출처: 외교사료관, 제68차 SOFA 한,미국 합동위원회, 1971> ⓒ 외교사료관

관리 대상이 된 미군 '위안부'는 성병 감염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미군들에 의해 부대 병원으로 강제 연행되었고, 부작용 테스트도 없이 강제로 주사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미군 헌병들에게 끌려가 낙검자수용소에서 며칠씩 감금당하며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많은 '위안부'들은 미군들이 페니실린 주사제와 약품을 낙검자수용소로 실어 나르는 것을 목격하였다. 페니실린 부작용으로 쓰러진 동료들을 지켜봐야 했던 '위안부'들에게 수용소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미군 부대는 성병 통제를 위해 대규모로 '위안부'들을 검거하고, 강제로 페니실린 접종을 하였다. 이는 흡사 군사작전과도 같았다. 일부 생존자는 당시 미군에게 끌려가 길거리에서 강제로 페니실린을 맞은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타국의 여성들을 체포하고 강제 치료할 아무런 법적 근거도 권한도 없었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에 걸친 미군 부대의 불법행위와 미군의 성적학대는 미군 '위안부'들의 삶을 파괴하였다. 그러한 폭력은 '위안부'들이 전 생애에 걸쳐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고통 속에 살아가게 하고 있다. 미군 범죄로 인해 평생 장애를 안은 채 살아가야 하고 기지촌에서 겪은 신체적 학대로 중증질환과 만성 질환,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많은 '위안부'들이 정신적 장애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공황장애, 중증도 우울증, 불안장애, 불면증 등을 호소하고 있다. 사회적 편견과 낙인,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후유증은 '위안부'들을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고립시켰고, 그 고립은 '위안부'들을 평생 빈곤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미성년 시기에 인신매매되어 성적 학대를 당한 피해자들의 삶은 '살아남는 것' 자체가 고문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어린 몸에 남은 상해는 평생을 따라다니며 일상생활을 어렵게 만들었고, 지금도 불안과 심리적 고통으로 남아 있다.

지난 2025년 9월 5일에 117명의 미군 '위안부'들이 주한미군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2022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미군 '위안부' 문제가 모두 밝혀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반쪽자리의 진실이다. 실질적으로 기지촌을 관리했던 것은 주한미군이었다. 하지만 주한미군은 미군 '위안부'들이 국가폭력 피해자로 인정되었음에도 지금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이번 소송은 바로 그 '반쪽의 진실' - 미국과 주한미군의 책임을 묻는 싸움이다. 미군 '위안부'들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다. 더 늦기 전에 미국과 주한미군은 침묵을 멈추고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와 배상,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

덧붙이는 글 | [1] 새움터에서 미군 위안부를 부르는 호칭이다. 누군가를 돕고 돕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동등한 삶의 주체로 존중하겠다는 약속의 호칭이다.

#미군#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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