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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의 수상 소감 "앞으로도 힘들겠지만 결국 나아갈 것"

광주연극계성폭력사건해결대책위원회가 4일 오전 11시 서울 영등포구 하이서울유스호스텔 대강당에서 열린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시상식에서 '성폭력 수사·재판 특별 디딤돌상'을 수상했다. 왼쪽부터 피해자 김산하(가명)씨, 장도국 대책위원장, 도담 광주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 ⓒ 전선정

연극계 성폭력 피해자가 연대자로서 무대에 섰다. 배우로서 여러 번 오른 무대였지만 상을 받기 위해 무대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때 피해를 겪은 것에 침묵했던 그는 이제 입을 열어 수상 소감을 말한다.

김산하(가명)씨는 4년 전 연극계 동료들, 광주여성민우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과 '광주 연극계 성폭력 사건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를 만들었다. 피해 당사자인 그는 문제를 공론화하고 연극계 권위자로 불렸던 이들을 고소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엄벌을 촉구하고 권위주의적 문화를 바꾸기 위해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이 노력은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전성협)가 매년 선정하는 '특별디딤돌상'으로 이어졌다. 전성협은 "문화예술계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 보장과 반성폭력 의식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오마이뉴스>는 서울 영등포구 하이서울유스호스텔에서 시상식이 열린 4일 오전 산하씨와 장도국 대책위원장(배우), 도담 광주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를 만났다. 이날 산하씨는 "피해자로서 대책위 활동을 하며 힘들었던 순간도 분명히 있었지만, 구성원들 덕분에 놓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라며 "최근 재판에서 힘 빠지는 일들이 있었지만, 연대의 힘을 믿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라고 밝혔다.

대책위 출범 전, 산하씨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준 연극계 동료 도국씨는 "지금 순간만을 특별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라며 "2심 재판이 진행 중인데, 위기의 순간을 또 마주한 것 같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분들의 연대와 응원이 많이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누군가에게 용기가 된 내 이야기"

광주 연극계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산하(가명)씨와 장도국 사건해결대책위원장이 4일 오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 전선정

- 수상을 축하드린다.

산하 "뜻깊은 상을 받아 감사하고 기뻤다. 최근 2심 재판을 받으며 한창 힘들었다. 다시 힘을 내 이 싸움의 의미를 찾으라는 뜻에서 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도국 "같은 마음이다. 대책위는 그 동안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했고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함께 겪었으며반성폭력적인 제도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과정들에 좋은 의미를 부여하고 인정해줘서 감사하다."

도담 "대책위는 사법적 처벌을 촉구하는 것을 넘어 또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연극계의 권위주의적 환경을 바꿔내려는 활동까지 이어갔다. 지난해 광주여성가족재단에서 시행한 공연예술계 성불평등 실태조사 과정에서도 소위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활동을 이어나가는 불합리한 구조를 짚는 등 큰 역할을 했다."

- 당사자로서 공론화에 나서고, 적극 활동하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나.

산하 "사법 절차만 밟을지 공론화도 할지 100일 가까이 고민했다. 피고인들은 연극판에서 소위 말하는 주류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었다. 공론화를 하지 않으면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공론화는 또 발생할지 모르는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책위 회의에 거의 매번 참여하며 힘들었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특히 사건 초반에는 경찰에서 했던 진술을 대책위 회의에서도 이야기하며 과부하가 오기도 했다. 또 사건의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래도 오히려 단단해졌다. 상처 받으면서도 놓지 않았다. 정말 열심히 활동했기에 재판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아, 끝났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책위가 여기까지 끌어줬다. 감사하다."

광주연극계성폭력사건해결대책위원회가 지난 2022년 6월 29일 오전 광주 동구 광주지방검찰청 앞에서 '광주 연극계 권력형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하고 엄중한 수사와 처벌, 성폭력 전수조사 및 징계, 재발방지책 마련, 지지와 연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소중한

- 연대의 힘을 가장 크게 느꼈던 대책위 활동이 있다면.

산하 "대책위에서 치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매년 떠나는 캠프가 기억에 남는다. 2022년 한창 경찰 조사에서 2차 가해성 발언을 들으며 정말 힘들었을 때도, 구성원들과 함께하며 그 순간만큼은 머리를 비울 수 있었다. 2024년 캠프도 특별했다. 그해 5월 광주 퍼포먼스 아트계에서도 공론화된 성폭력 사건이 있었는데 그쪽 대책위화 함께한 캠프였다. 피해자 분과 만나 대화를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대화를 나누며 내 사건을 지켜보고 지지를 보내는 사람이 정말 가까이에 있다고, 내 사건이 어떤 씨앗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그 분이 내 이야기로 힘을 얻는다는 것에 나도 힘을 얻었다. 그리고 무너지지 않게 책임감을 갖자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그분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

"피해자답길 원하는 법원"

- 1심 재판에서 극단 대표 A씨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산하 "5년 전 성폭력으로 인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진단 받았다. 머리를 감거나 길을 걷다가도 특정한 장면이 눈 앞에 보여 그걸 깨기 위해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런 내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PTSD 증상이라는 것을 알고 나선 나를 이해하게 됐다. (재판에서) A와 그 측근들이 이 인과관계를 부정할 때마다 힘들었는데 1심 재판부가 그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도담 "1심 재판부는 피해 이후 발현된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피해자들이 사법 절차를 통해 권리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중요한 판례를 남겼다. 그런데 A는 지금도 산하의 PTSD가 자신의 범행과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디 2심 판결에서도 A에 대한 유죄가 유지되기를 바란다."

- 2심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산하 "2심 재판을 시작하며 판사가 '이건 고소인의 재판이기도 하지만 피고인의 재판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피고인 중심의 이야기 같아 의아했지만) 판사는 그런 (공정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문제 삼고 싶지 않다. 다만 판사가 '고소인의 재판'이라고도 했는데 재판 과정에서 '내 재판이 아닌가' 싶은 일이 발생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하나를 말하자면 검사가 나를 상대로 증인신문을 하겠다고 신청한 적이 있다. 이때 나도 참여 의사를 밝혔는데 판사가 '필요 없다'며 기각했다. 이 시점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아 무력감을 느꼈다."

도국 "물론 재판부가 피고인의 주장에 대해 피해자 측에 확인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묻는 방식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심 재판에서 판사가 '이걸 왜 사건 발생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공론화했냐'고 산하에게 질문했다. 이건 판사가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 있다. 그 질문으로 피해자는 위축돼 신문 내내 하고자 했던 말을 잘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산하씨가 마지막 연출을 담당한 광주의 한 극단. 2022. 06. 28. ⓒ 소중한

- 이 사건 외에도 여러 연극계 성폭력 사건 재판을 방청했다.

도국 "재판을 방청할 때마다 재판부가 피해자다움을 지나치게 요구해 피해자로 하여금 삶의 주도권을 쥐지 못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피해자가 피해자다움만을 움켜쥐며 살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 여러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면 사람의 성격이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 피해자다움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법원은 그런 모습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건을 공론화하고 고소 이후 산하가 했던 모든 실천은 객관적 증거로 입증할 수 있다. 만나서 회의하고 통화했던 수백 시간, 자신의 사건을 넘어 다른 피해자와 연대했던 시간들... 나는 재판부도 법정 바깥의 일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해자와 연대자가 약 4년 간 온몸으로 나서 하나하나 만들어간 변화들, 그리고 그 변화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알려고 노력해줬으면 한다."

-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산하 "힘든 순간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거다. 하지만 2018년 미투, 2022년 대책위 활동 등 우리 사회가 쌓아온 용기와 연대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일들은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사회가 결국은 나아갈 거라고 믿는다."

산하씨는 처음 들어간 극단의 대표 A씨와 작가·연출가 B씨, 다른 극단의 대표 C씨를 강간, 강제추행 등 혐의로 2022년 6월 고소했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2월 A씨에게 징역 3년형을, B·C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며, 현재 2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광주연극계성폭력사건해결대책위원회가 4일 오전 11시 서울 영등포구 하이서울유스호스텔 대강당에서 열린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시상식에서 '성폭력 수사·재판 특별 디딤돌상'을 수상했다. 왼쪽부터 도담 광주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 피해자 김산하(가명)씨, 장도국 대책위원장. ⓒ 전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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