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원유의 약 70%는 중동에서 온다. 이 원유의 90% 이상은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들어온다. 2월 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이 해협이 사실상 막혔다. 전 세계 석유 해상 수송량의 20%가 다니는 길이 끊긴 것이다.
3월 11일 국제에너지기구(IEA)는 32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4억 배럴의 전략비축유를 방출하기로 결정했다. 1974년 IEA 설립 이래 역대 최대 규모다. 우리나라도 2,246만 배럴을 풀기로 했다. 1990년 걸프전 당시 494만 배럴,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두 차례 합산 1,165만 배럴보다 많다. 역대 최대다.
그런데 이 발표 이후 유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올랐다. 브렌트유는 3월 13일 배럴당 100.46달러로 마감했다. 2022년 8월 이후 처음으로 100달러를 돌파했다. 사상 최대 비축유를 풀겠다는데 왜 시장은 반응하지 않았을까.
4억 배럴은 4일치다
숫자를 따져보면 이유가 보인다. 전 세계는 하루에 약 1억 500만 배럴의 석유를 쓴다. 4억 배럴은 산술적으로 4일치에 불과하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던 하루 약 2,000만 배럴과 비교해도 20일치다.
게다가 이 4억 배럴이 한꺼번에 시장에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가장 큰 몫을 맡은 미국의 1억 7,200만 배럴은 120일에 걸쳐 방출된다. 대통령 명령이 나와도 실제로 시장에 원유가 도달하려면 13일이 걸린다. 파이프라인을 타고 정유소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따져보자. 4억 배럴을 120일에 걸쳐 풀면 하루에 시장에 나오는 양은 약 333만 배럴이다. 호르무즈 봉쇄로 실제 빠진 물량은 하루 약 1,500만 배럴로 추정된다. 333만 배럴은 이 빈자리의 22%에 불과하다. 빠져나간 기름의 5분의 1도 못 채운다는 뜻이다.
에너지 컨설팅사 래피던에너지그룹의 밥 맥낼리 대표는 14일자 CNBC 인터뷰에서 "비축유 방출로는 호르무즈 봉쇄로 빠진 하루 1,500만 배럴의 극히 일부만 메울 수 있다"고 말했다. 에너지 전략가 나이프 알단데니는 15일자 알자지라에 이번 방출이 "큰 상처에 붙인 작은 반창고"라고 평가했다.
시장은 IEA의 역대 최대 방출 결정 자체를 "이 전쟁이 수주 이상 갈 수 있다는 신호"로 읽었다. 립로우오일의 앤디 립로우 대표는 12일자 CNBC 인터뷰에서 "IEA가 이 정도로 행동한 것 자체가, 분쟁이 상당 기간 이어질 수 있다는 해석을 낳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해협인데 유럽은 빠져나갔다
여기서 한국 언론이 거의 다루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프랑스 공영매체 프랑스앵포(franceinfo)는 3월 15일 팩트체크 기사를 냈다. 제목은 "호르무즈 해협은 유럽에 정말 중요한가?"(Le détroit d'Ormuz est-il si crucial pour l'Europe ?)였다.
직접 원유 공급은 끊기지 않는다는 것이 답이었다. 다만 가스와 산업 공급망 충격은 별개의 문제라는 단서가 달려 있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자료를 보면, 2024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유의 84%가 아시아로 향했다. 중국·인도·일본·한국 네 나라가 전체 호르무즈 원유 흐름의 69%를 가져갔다. 아시아가 몰려 있는 것이다.
반대편을 보자. 독일 경제연구소 이포(ifo)에 따르면 EU 원유 수입 중 호르무즈를 거치는 비중은 6.2%다. 액화천연가스(LNG)는 8.7%다. 프랑스 지중해전략연구재단(FMES) 분석에 따르면 프랑스의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은 2024년 기준 11.9%에 불과하다. 유럽은 미국산(16%), 노르웨이산(13.5%), 카자흐스탄산(11.5%) 등으로 수입처를 나눠놓았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중동 원유 의존도는 약 69%다. 한국무역협회 통계로는 원유의 70.7%, LNG의 20.4%가 중동산이다. 이 중동산 원유의 90%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온다. 일본은 더 심하다. 중동 의존도가 90%를 넘는다. 일본 다카이치 총리는 11일 비축유 방출을 발표하면서 "중동에 대한 극도로 높은 의존도"를 직접 언급했다. CNBC가 이를 보도했다.
유럽에게 호르무즈 봉쇄는 가격 충격이다. 직접 수입이 막히는 건 아니지만 글로벌 유가가 뛰니 영향을 받는다. 우리나라에게는 물리적 공급 단절이다. 기름이 오는 길 자체가 끊기는 것이다.
유럽의 안전판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유럽이 처음부터 호르무즈에 안 묶여 있었던 건 아니다. 1970~80년대에는 유럽도 중동 석유에 크게 의존했다. 그 뒤 수십 년에 걸쳐 노르웨이 북해유, 미국산 셰일오일, 북아프리카에서 송유관으로 들어오는 원유로 수입처를 나눴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는 러시아산 의존도를 급격히 줄이면서 다시 한번 공급망을 재편했다.
다만 유럽도 완전히 안전한 건 아니다. 브뤼겔연구소에 따르면 유럽의 가스 저장량은 2026년 2월 말 기준 460억 입방미터다. 2년 전인 2024년 같은 시기 770억 입방미터의 60% 수준으로 줄었다. 아시아 국가들이 대체 물량을 사들이려 경쟁하면 유럽 LNG 시장도 가격이 뛴다. 석유와 가스는 글로벌 시장에서 거래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학술매체 더컨버세이션에 실린 분석이 직설적이다. "2022년 이후의 다변화 정책은 근본적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의존 대상을 러시아에서 걸프와 미국이라는 '지정학적 지진대'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유럽은 호르무즈 직접 경유 비중이 10% 이하다. 우리나라는 70%다. 이 차이가 이번 위기에서 드러난 구조적 격차다.
한국의 의존도는 왜 다시 올랐나
우리나라도 다변화를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다. 중동 원유 의존도는 2016년 85.2%에서 2021년 59.5%까지 떨어졌다. 미국산 셰일오일 수입을 늘린 덕이다.
그런데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상황이 뒤집어졌다. 서방 제재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이 흔들리자 국내 정유사들은 장기 계약으로 안정적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중동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의존도는 2022년 67%, 2023년 71.6%로 반등했고 2025년에도 69% 수준이다.
위기 때마다 안전한 곳을 찾는 정유사의 선택이, 역설적으로 에너지 안보의 구조적 취약성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이다.
이번에 대통령이 "호르무즈를 경유하지 않는 대체 공급선을 신속히 발굴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주문이 1979년 이란 혁명 때도, 1990년 걸프전 때도, 2003년 이라크전 때도, 2019년 호르무즈 긴장 때도 나왔다. 47년째 같은 지시가 반복되고 있다
중국은 왜 여유로운가
이번 위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IEA 회원국이 아니라 이번 공동 방출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여할 필요도 크지 않아 보인다.
CNBC에 따르면 2026년 1월 기준 중국의 육상 원유 비축량은 약 12억 배럴이다. 미국 전략비축유(약 4억 1,500만 배럴)의 약 3배다. 3~4개월 치 수요를 자체 비축만으로 버틸 수 있다.
노무라증권의 수석이코노미스트 루팅은 9일자 CNBC 인터뷰에서 중국의 호르무즈 의존도가 낮다고 분석했다. 호르무즈를 통과하는 석유가 중국 전체 에너지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6%에 불과하다. 여기에 LNG 경유분 0.6%를 합해도 7.2%다. 미국 외교협회(CFR) 중국전략국장 러쉬 도시도 같은 매체에서 "지난 20년간 중국이 해상 수송 의존도를 낮춰온 결과, 호르무즈는 중국 해상 원유 수입의 40~50%만 담당하게 됐다"고 말했다. 러시아·중앙아시아에서 송유관으로 들어오는 물량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중동 원유 의존도 69%, 일본의 90%와는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OCBC 애널리스트들도 같은 매체에서 "중국이 아시아 동료 국가들보다 호르무즈 장기 봉쇄에 덜 민감하다"고 분석했다.
국가별 중동·호르무즈 원유 의존도 비교
원유 수입 중 중동산(호르무즈 해협 경유) 비중
일본
~90%
한국
~69%
중국
~40%
EU
~13%
출처: 한국석유공사(KNOC) / 에너지경제(2026.03.07) / CNBC(2026.03.09) / 이포연구소·유로뉴스(2026.03.13) / FMES(2026.03)
※ 중국은 호르무즈 경유 원유가 전체 원유 수입의 약 40~50%(UBP·Kpler 추정). EU는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사우디+이라크 등 합산, 유로뉴스 기준).
이유가 있다. 중국은 수년간 유가가 낮을 때 선제적으로 비축량을 늘려왔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중국이 2026년에도 하루 약 100만 배럴씩 전략비축을 확대할 것으로 내다봤다. 거기에 전기차(2024년 신차 판매의 절반이 전기차), 풍력·태양광 발전 설비 약 14억 킬로와트(2024년 말 중국 국가에너지국 기준), 러시아·중앙아시아에서 육지로 연결된 송유관까지 갖추고 있다. 해상 수송이 끊겨도 다른 경로가 있다.
3월 16일 중국 국가통계국은 자국 에너지 공급이 "상대적으로 강하다"고 밝혔다. CNBC가 이를 보도했다.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에 호르무즈 해협 석유 흐름 복원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가 보도했다. 에너지 자급 여력이 외교적 협상력으로 바뀌는 장면이다.
우리나라와 비교해보자. 3일자 CNBC 보도에서 노무라증권은 한국을 유가 상승에 가장 취약한 아시아 국가 중 하나로 꼽았다. 석유 수입에 쓰는 돈이 국내총생산(GDP)의 2.7%에 달해, 유가가 뛰면 무역수지가 곧바로 악화되는 구조다. LNG 비축량은 약 350만 톤으로 2~4주치에 불과하다. 중동 의존도가 90%인 일본도 사정이 나쁘지만, 일본은 비축량이 260일치로 우리(약 165일치)보다 여유가 있다.
비축유 2,246만 배럴 이후 남는 질문
산업통상자원부는 3월 11일 비축유 2,246만 배럴 방출을 발표하면서 "국민경제 부담과 민생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전체 전략비축유 약 1억 4,600만 배럴의 15.4%를 한 번에 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출에는 시간이 걸린다. 레이먼드제임스의 파벨 몰차노프 선임전략가는 14일자 CNBC 인터뷰에서 비축유가 시장에 유의미하게 도달하려면 60~90일이 걸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아시아 정유소에 실제 원유가 닿는 시점은 5월 중순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IEA 파티흐 비롤 사무총장은 11일 방출 발표 현장에서 "호르무즈 해협 통행 재개가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CNBC가 이를 보도했다. KPMG 글로벌석유가스리더 앤지 길디아는 같은 날 NPR에 "비축유를 풀고, 수출 경로를 돌리고, 바다 위에 떠 있는 재고를 동원해도 호르무즈가 열리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말했다.
이란의 새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는 호르무즈 봉쇄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에너지부 장관 크리스 라이트는 해군이 유조선 호위에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12일자 CNBC가 두 사람의 발언을 모두 보도했다. 해협이 언제 열릴지 아무도 모른다.
비축유 방출은 고통의 시작을 늦출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의 구조를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 언론은 비축유 규모, 유가 전망, 주유소 가격에 집중하고 있다. 정작 빠진 질문이 있다. 중동 의존도 69%, 호르무즈 경유 비중 90%라는 구조는 왜 수십 년째 반복되는 위기에도 근본적으로 안 바뀌었는가. 2016년 85%에서 2021년 59%까지 내려간 의존도가 왜 다시 70% 가까이로 올라왔는가. 유럽은 어떤 경로로 호르무즈 직접 의존도를 10% 이하로 낮추었고, 우리나라는 왜 그 길을 가지 못했는가.
2,246만 배럴을 푸는 것은 결정이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정책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결정은 있었고 정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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