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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빚에 가출한 아내…오갈데 없는 부녀에게 "방 빼"

[도시 속 외딴섬, 임대아파트·①] 임대아파트, 짓기만 하면 끝인가

허환주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1-05 오전 8:30:10

 

1990년대 초반 대거 만들어진 임대아파트에는 기초수급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가 산다. 하지만 관리 소흘, 낙후된 이미지 등이 겹쳐 지금은 '도시 속 외딴섬'이 돼 버렸다. 저소득층에 안정적 주거를 제공했지만 사후 관리를 위한 정책적 고려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대아파트에서 발생한 잇따른 자살, 미라로 발견된 독거노인 등의 뉴스는 이제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대선 후보들은 임대아파트를 늘리겠다는 공약만 내세울뿐, 기존 임대아파트에 관한 정책은 일언반구도 없다. 진보신당 서울시당과 <프레시안>은 공동기획으로 현재 임대아파트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지를 모색해본다. <편집자>


박인서(가명·61)씨는 1993년에 지금 사는 임대아파트에 들어왔다. 그전에는 판잣집에서 살았다. 판잣집이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았다. 박 씨가 사는 임대아파트는 재개발 철거민을 대상으로 지어졌다.

총 96세대다. 보증금으로 540만 원이 들었다. 8평이다. 조그마한 방 하나에 부엌이 전부다. 딸과 함께 사는 박 씨는 딸에게 방을 내주고 자신은 부엌에서 잔다.

아내는 1997년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끊겼다. 실종신고를 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아니, 찾고 싶지도 않았다. 부인은 도박으로 진 빚이 상당했다. 도박 중독자였다. 가출하기 전에는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인 딸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보험금 때문이었다.

부인은 박 씨 몰래 아이 앞으로 보험을 가입해놓았다. 그러고는 방과 후 집에 온 아이를 화장실로 데려가 변기에 얼굴을 집어넣고 질식시켜 죽이려 했다. 다행히 미수에 그쳤지만, 후유증으로 딸은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됐다.

한 달 49만 원으로 딸과 생활하는 박 씨

부인이 집을 나간 뒤로는 박 씨와 딸, 단둘이 임대아파트에서 살았다. 찾지도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쁜 일은 연달아 온다고 했던가. 딸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집에 놀러 온 박 씨 친구에게 딸이 성폭행을 당했다.

박 씨 친구는 징역 8개월 형을 받았지만, 딸은 충격으로 1년 동안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정신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학교도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박 씨 딸을 딸의 동네친구들이 이용하기 시작했다.

동네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일부터, 심지어 성매매에까지 손을 댔다. 급기야 경찰에 신고가 접수돼 박 씨 딸은 1년간 징역을 살기도 했다. 지난 9월에 출소했다. 박 씨는 그런 딸을 보면 자신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아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거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딸을 위해 딱히 해줄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 박 씨다.

몸이 불편해 '막노동'도 그만뒀다. 까막눈이다. 그래서 딸이 구치소에 있을 때 몇 번 편지를 썼지만, 답장은 고사하고 읽지도 못했다. '죄송하다', '사랑한다'는 딸의 표현을 이웃사람의 목소리로 들어야만 했다.

어렵게 일자리를 구했다. 거동이 불편해 일주일에 3번 동사무소에서 청소 일을 한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돼 약간의 돈을 받는다. 그 돈을 다 합하면 한 달에 49만 원이 된다. 이 돈으로 딸과 한 달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매달 내야 하는 월세가 5만 원이다. 관리비도 6만 원이나 한다. 겨울엔 도시가스 비가 장난이 아니다. 따뜻하게 지내려면 가스비가 한 달에 30만 원 넘게 나온다. 겨울이 되면 간이침대 위에 전기장판을 놓고 생활하는 박 씨다. 그래도 관리비가 30만 원 넘게 밀렸다. 인근 교회에서 쌀, 반찬 등의 도움을 주기에 겨우 생활해나간다.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보증금 540만 원짜리 집
 

ⓒ프레시안(허환주)
하지만 이렇게 살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10월, SH공사((Seoul Housing Corporation)는 박 씨에게 그가 살고 있응 임대아파트에서 나갈 것을 명령했다. 이유는 박 씨 부인이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임대아파트는 자신이나 배우자가 집을 소유하면 입주자격이 박탈된다.

청천에 날벼락이었다. 아내는 이미 1997년에 가출을 했고,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혼서류에 도장은 찍지 않았으나 남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서울시에 하소연했지만 '방법이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나마 '겨울이 다가오니 동절기가 지나는 2월까지 시간을 준다'는 '시혜'를 베풀었다.

하지만 박 씨에겐 11월에 나가나 2월에 별 차이가 없다. 보증금 540만 원으론 어디에서도 집을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인서 씨는 "도박 빚 때문에 딸을 죽이려던 여자가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나와 내 딸이 임대아파트에 있어선 안 된다고 한다"며 "이게 어느 나라 법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박 씨는 "여기서 나가라는 건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밖에 안 된다"며 "여기서 절대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임대아파트, 짓기만 하면 끝인가

이런 일은 박 씨에게만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박 씨와 비슷한 이유로 임대아파트에서 쫓겨나는 이는 상당히 많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박남춘 민주통합당 의원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지난 5년간 임대료 체납으로 퇴거당했거나 명도소송이 진행 중인 임대아파트는 3528가구다.

이 가운데 501가구가 강제 퇴거됐고 1253가구는 자진퇴거했다. 올해 강제 퇴거되거나 자진 퇴거한 가구는 224가구에 이르고 퇴거를 지연시키기 위한 명도소송 중인 가구도 2007년 이후 1774가구에 이른다.

임대료를 체납 중인 가구는 영구 임대아파트 4703가구와 임대아파트 1만9296가구 등 2만4000여 가구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에 비해 2만여 가구 증가한 것이며 임대료 체납액은 영구 임대아파트가 47억300만 원, 임대아파트가 66억3400만 원이다.

나경채 진보신당 관악구의원은 "박 씨와 같은 사유를 살피지 않고 일방적으로 나가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임대아파트는 박 씨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그 목적이 퇴색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나 의원은 "서울시 등은 법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인력과 재정을 투자해 박 씨와 같은 억울한 사람들이 임대아파트에서 쫓겨나지 못하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며 "박원순 시장은 임대아파트를 짓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기존 임대아파트에 사는 주민을 어떻게 보호할지를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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