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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유일의 한인타운, 산티아고가 슬픈 이유

[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 36]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의 수도, 칠레 산티아고

14.01.31 18:25l최종 업데이트 14.01.31 18:25l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의 수도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넘나들던 험난한 일정을 끝내고, 마침내 칠레의 중심부인 산티아고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마음씨 좋은 숙소의 안주인은 안전을 당부하며 다음에 올 때 가게에 걸어둘 태극기를 잊지 말라는 인사를 전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바람을 채워주면 좋으련만. 

이제 파타고니아를 떠나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눈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 있는 두꺼운 점퍼를 마치 숨기기라도 하듯 가방 제일 깊숙한 곳에 처박은 뒤에 우리는 기나긴 버스여정길에 올랐다.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까지는 국경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지만 우리는 말도 안통하는 그 곳에서 단 한 번의 사건사고도 없이 버스에서 제공되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떼우며 각자 지난 몇 주간의 얼음의 세게를 되새김질 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보인다라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조금씩 가까워지는 선명한 빛깔의 호수가 나를 완전히 집어삼킬 때 즈음, 나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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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도심 중심에서 휘날리는 대형 칠레국기. 가로로 넓게 칠해진 붉은색은 스페인으로 부터의 독립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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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버스 맨 앞좌석의 위력. 다시 눈을 떠보니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하나둘씩 드러나는 높은 건물들,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 자동차들의 행렬과 시끄러운 소음, 수트를 입은 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데스 산맥을 제외하면 서울의 어느 도심이나 마차가지다 싶은 순간 대형 칠레 국기가 창 밖을 스쳐지난다.  

도착한 산티아고 버스터미널의 아침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양손 가득 짊어진 짐을 버스에 싣기 바쁜 가족들, 터미널 안에 가득찬 상가들은 하나씩 문을 열면서 도시를 깨우고 검은 수트에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은 앞뒤로 커다란 가방을 들쳐맨 독특한 차림의 여행자는 투명인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휙휙 지나친다. 버스터미널만 해도 세개나 있는 대도시 산티아고를 보고 있자니 일 주일 전 우리를 죽음에 가깝게 한 빙하의 땅, 토레스 델 파이네와 같은 나라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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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하와 사막과 바다와 도시. 어찌보면 칠레는 여행자들에게 종합선물세트 같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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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수도는 독특한 이미지를 하나씩 갖기 마련인데, 사실 칠레는 지구에서 가장 긴 나라다. 지구본 상의 모습을 보면 폭은 겨우 175km 밖에 안되지만 길이가 무려 4300km에 달하는 독특한 나라다. 언젠가 '칠레를 가려면 한국에서 지구 반대편으로 땅을 파고 뛰어드는 것이 가장 빠르다'라는 농담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장 북쪽에는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인 아타카마 사막이 진을 치고, 남쪽은 눈과 빙하로 덮힌 산맥이 장벽을 쌓았다. 왼쪽은 태평양이고 오른쪽은 안데스 산맥이 가로 막고 있으니 어찌보면 빠져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는 칠레의 상황을 잘 표현한 말이다. 산티아고는 불의 사막과 얼음의 빙하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구어낸, 어쩌면 신기루와도 같은 도시인 것이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산티아고에서 찍었노라 사진을 보여주면 돌아오는 대답은 '아, 여기가 그 순례길이구나?'다. 스페인 남부에 있는 순례의 도시 산티아고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와 글자와 발음까지 똑같지만 이는 우연이 아니다. 

남미의 여느 대도시가 그렇듯, 1540년 스페인 정복자 발디비아가 이끈 군대에 의해 토착 원주민들은 몰락하고 그 땅 위에 새로 지어진 도시가 바로 지금의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Santiago)다. 한 나라의 수도가 외세의 침략에 의해 지어진 도시라니. 이상한 느낌이 든 건 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온 여행자의 기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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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아르마스 광장에는 정복자 발디비아(좌)의 동상과 자신들의 땅을 침략한 발디비아를 죽인 칠레 원주민 마푸체족 지도자의 초상을 새긴 석상(우)이 모두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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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중심가인 아르마스 광장에 들어서자 나의 기우는 깊어졌다. '정복자'와 '침략자'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발디비아의 동상과 유럽풍의 교회들은 오늘날 눈부신 발전을 이룬 산티아고의 위상을 나타내지만 보란듯이 광장의 다른 한 켠에는 침략자에 맞섰던 원주민 독립전쟁 지도자의 초상이 돌로 새겨져 있다. 광장의 한쪽에는 정복자의 동상이, 반대쪽에는 독립전쟁의 지도자의 석상이라니. 칠레는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일까.

한눈에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칠레의 원주민 마푸체 족은 지금도 제법 그 수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칠레 국기의 빨간색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원주민들이 흘렸던 피를 상징하는 반면, 그 후손들은 유럽풍의 도시에서 스페인어를 국어로 쓰며 살아가고 있으니 역사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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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국적인 풍경을 간직한 문화도시 산티아고의 다양한 모습들. 한국의 대도시와 비교해도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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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산티아고는 남미 제일의 문화도시로 손꼽힌다. 언제나 붐비는 아르마스 광장의 한 켠에 가득한 예술가들과 오래된 유럽의 고성 같은 모습의 중앙우체국, 바로크 양식을 본 뜬 대성당에 구 시가지를 벗어나면 마주치는 아기자기한 카페들까지, 산티아고는 과거의 상처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평화롭고 아름답다. 

거기에 일년에 300일 이상 맑은 날만 이어지니,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산티아고는 남미에서 유럽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쉬어가는 그런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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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궁인 모데나 궁전. 정원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장미 공예는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죽어간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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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과거는 묻어둔 채 앞으로 나아가던 산티아고에도 한 때 혹독한 비가 내린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미국 9·11테러와 같은 날짜인 1973년 9월 11일, 수도 산티아고 국영 라디오에서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라는 방송을 반복해서 내보냈고 미국 CIA와 피노체트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그들의 작전명이었던 셈.

지금은 평화롭게만 보이는 저 모네다 궁전은 장갑차와 탱크로 포위당했고 결국 궁전과 함께 통째로 날아가버린 산티아고의 평화의 끝에는 피노체트의 긴 독재가 이어졌다. 1년에 300일 이상 맑은 날이 이어지던 도시가 1년 내내 '비'가 내리는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까지도 피노체트의 추종자들이 시위를 열고 그의 악랄했던 정치를 미화하여 사건사고를 일으키고 있으니 어쩌면 칠레 사람들이 겪어야 할 정체성의 혼란은 스페인 정복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를 일으켰던 피노체트일지도 모른다.
 
간략여행정보
한국에서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가는 항공편은 파리, LA, 토론토 등을 경유해야 하기 때문에 24시간이 넘게 걸리는, 쉽지 않은 여정이다. 스페인의 영향을 받았던 중남미의 모든 대도시는 '아르마스' 라는 이름을 가진 광장이 꼭 있는데 이는 도시의 중심임과 동시에 여행의 시작점이다. 산티아고 역시 마찬가지. 모든 관광안내소와 숙소, 오래된 대성당들이 모여 있으며 광장에는 언제나 여행객과 거리의 예술가들이 뒤섞여 활기가 넘친다. 

서울만큼이나 큰 대도시인 산티아고에서는 특별히 무언가를 한다기 보다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쉬어가기에 좋다. 남미에서 제일가는 문화복지 도시답게 세련된 건물들이 옛 시가지와 조화를 이루고 잘 정돈된 거리 곳곳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은 여행자에게 활력을 불어넣는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면 유네스크 세계 문화유산도시로 지정된 발파라이소가 2시간 거리에 있다. 이외에도 세계3대 와인 생산국인 칠레의 대표 와이너리, 해변도시 비냐델마르도 가까우니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좋으며 남미에서는 유일하게 한인타운이 생성되어 있어 한국의 다양한 식품의 구매도 가능하다.

좀 더 자세한 칠레 산티아고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2258853
태그:세계에서가장긴나라, 칠레, 산티아고 태그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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