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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김낙중, 사형선고만 다섯 번…후회하지 않는다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강천(剛泉) 김낙중 "나는 여전히 '무기수'"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31 07:33:53

 

 

 

 

 

 

이쪽은 착한 편, 저쪽은 나쁜 편이라 했다. 이 선을 분명 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저쪽을 넘나드는 한 녀석이 있다. 한 대 콕 쥐어박아도 소용이 없다. 동무들도 그 존재가 귀찮다. 여러 번의 지적에도 변함없는 걸 보니 저 녀석은 문제아가 틀림없다. 순결한 우리, 바닥에서 돌멩이를 찾아 꼭 쥐어라. 저 선을 넘은 더러운 아이에게 힘껏 던져야 한다.  
 
아이는 전쟁 가운데 다시 전쟁이 나던 시절 태어났다. 화약 냄새를 맡으며 그것이 원래의 풍경인 듯 자라난다. 청소년 시절 폐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깊은 의문에 빠진다. 부처님에게 자비를, 예수님에게 사랑을, 공자님에게 인을 배운다.

 

"일요일 아침엔 새문안 교회를 갔다가 2시에는 조계사에 가고, 4시에는 YMCA에서 하는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장자 강의를 들었다. 무엇이 참된 삶의 의미일까를 물었다. 그 와중에 6.25가 터진 것이다. 나는 인민군 치하에서 의용군에 나가서 국군을 죽이기를 요청받았고, 9.28 수복 후 국군 치하에서 나는 다시 국군에 나가서 인민군 죽이기를 요청받았다. 그러나 내가 왜 의용군에 나가서 국군에 나간 중학교 동창들을 죽여야 되는지? 또 나는 왜 내가 국군에 나가서 의용군으로 나간 고향 국민학교 동창 친구들을 죽여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우리가 왜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 거다. 그러면서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 일단락된 후 모두가 북진 통일을 외칠 때 이제 청년이 된 소년은 혼자서 평화를 외친다. 그가 배운 것은, 그가 지켜야 할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메말라 버린 마음들에 대고 감히 눈물을 찾는다.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이 난리 통에 감성팔이를 해 대는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이다.

 

"'탐루(探淚, 눈물을 찾는다)'라고 등불에 적어 혼자 평화시위를 했다. 삭발을 하고 소복을 입고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제 전쟁 그만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느냐. 도대체 눈물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없느냐. (통일을) 평화적으로 하자는 사람이 없느냐'고 거리에 나가 외쳤다."

 

청년은 진심은 모두에게 통하는 것이라며 겁도 없이 지난 시절 형제였을지언정 지금은 속이 시꺼먼 놈들로 가득할 북한으로 건너간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통일방안을 만들었기에 전해 주겠다고 한다.

 

"남북한의 젊은이들은 지금까지 서로 죽이라고 강요를 당했는데 그럴 게 아니라 공존을 통해 같이 살 수 있고 통합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것이다. 이 제안서의 내용은 20세 미만의 청년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에서 제외하고, 이를 주축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이들이 자치적으로 운영되게 양쪽 국가가 공동으로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제안서를 남한에도 북한에도 전달해 주면 되겠다 싶었다."

 

청년은 무려 1년이나 그곳에 있었다. 그는 어떤 세뇌를 받아왔을까. 어떤 잔인한 북한의 지령을 들고 와 우릴 잡아먹으려 할까. 이미 속이 시꺼먼 간첩임이 틀림없는 저놈은 누군가를 다치게 할 것이 분명하다.
   
“1년 동안 북에 있으면서 무슨 간첩교육을 받았느냐는 취조를 집중적으로 받았다. 나를 이렇게도 매달고 저렇게도 매달아 물속에 집어넣고 별짓을 다 했다. 고통스러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저 ‘예, 예’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예’라고 하려고 해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그냥 ‘아니오’만 하니까 온갖 방법으로 고문을 당했다.”

 

결국 그 문제아 바보 빨갱이는 양쪽 모두에 버림받고 다섯 번의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18년간의 수감 생활을 한다. 청년은 이제 83세의 온통 머리가 하얀 노인이 되었다. 그는 ‘무기수’이며, 투표권도 없고, 해외여권도 나오지 않는 부자유한 신분의 소유자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나라를 전복하려 하는 간첩이라고 손가락 질 한다. 모진 삶 가운데 겹겹이 쌓인 원망이 그의 시야를 다 막아 버렸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보는 여전히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이 땅에 눈물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난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굳이 '평화통일'을 목이 터져라 외치지 않아도 젊은이들이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살고 있잖아요. 세상은 그렇게 가고 있는 거예요. 눈물을 가진 이들이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온 것처럼 말이지요.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여 사랑의 인류공동체가 만들어질 것으로 생각해요. 아직 살아서 이렇게 젊은이들을 마주하고 있으니 참 기뻐요."

 

노인의 여직 맑은 눈망울엔 아직 다 쏟아내지 못한 눈물이 있다. 진짜 까만 것은 누구에게 있었던가. 잘못된 것은 그 인가, 우리인가, 혹은 이 사회인가. 깊이 주름진 그의 눈 안에 통일 동산을 뛰어놀던 해맑은 소년이 있다. 탐루(探淚)를 외치며 혼자 시위를 하던 열정 가득한 청년이 있다. 그의 눈에서 '평화'를 읽어낸다.

나는 슬며시 내 손안의 돌멩이를 내려놓는다.

 

 

- 1931년 일제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서 태어나셨다고 들었다.

 

내가 태어난 해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전쟁 통에 태어나 화약 냄새를 맡으며 자랐다. 6살 때는 일본 비행기들이 중국을 향해 날아다녔다. 그 후 일제 말기에 지금은 서울농업대학이 된 경성농업이라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일본이 태평양전쟁 중에 일반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모두 근로동원으로 보냈다. 반면 농업학교의 학생들은 학교 실습지에서 일을 하고 기숙사에서 숙식을 했기 때문에 동원에서 제외됐다. 그래서 일부러 농업학교에 갔다. 그러다 거기서 폐병에 걸려 잠시 고향 파주에 내려갔다가 회복 된 후에 다시 서울로 와서 서울중학교 2학년에 입학해서 학교를 다녔다.

 

- 광복 후 1950년 당시 스무 살이던 시절 6.25전쟁이 있었다. 우리는 간혹 전쟁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쓰곤 하는데 선생님이 직접 겪으셨던 전쟁이란 무엇이었나?

 

나는 8.15를 '광복'이나 '해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8.15는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것이 끝난 것뿐이다. 조국해방이 아니라 일제보다 힘이 센 나라들에 의해서 남북으로 분할 점령된 것이다. 일제의 점령지에서 다시 미소의 점령지로 바뀐 것을 마치 우리가 해방된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더구나 수백 년간 함께 살았던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미국은 미국이 원하는 정권을, 소련은 소련이 원하는 정권을 세웠다. 각각 자기들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서로를 괴뢰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냥 ‘8.15’라고 말하는 게 맞다.

 

내가 스무 살 때 6.25가 터졌는데 당시 서울중학교 5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부모님이 계시는 파주에 갔다. 걸어서 무악재 고개를 넘어 파주로 가는데 가다 보니 여기도 시체, 저기도 시체가 즐비했다. ‘왜 이렇게 서로 싸우면서 죽여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려갔다. 고향에 도착해 아버지를 도와 밭도 매고 책도 보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의용군을 모집했다. 난 당연히 의용군 모집대상이었다. 내 초등학교 동창들은 거의 다 의용군에 나가서 3분의 1 이상 죽었다. 나는 그 길로 도망을 쳐서 산골짜기에 땅굴 파고 숨어서 살았다. 밤이면 몰래 밥을 가져다 먹으며 한 3개월쯤 살았다. 그러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어 미군과 국군이 올라온 것을 보고 혹시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을까 하고 굴에서 나와 서울로 올라갔다. 학교는 미군이 주둔해 철조망이 쳐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영어 선생님이었던 분이 나와서 왜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공부를 하려고 왔다고 하니 전쟁 중에 학교가 언제 개학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대신 미군부대에서 접시 닦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다시 고향에 내려가는 것보다 여기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 뒤로 1.4 후퇴가 시작되기 전까지 3개월쯤 접시를 닦았다.

 

그러다 중공군과 인민군이 서울까지 내려와 나도 미군 꽁무니를 따라 부산까지 내려갔다. 부산에 있으면서도 계속 미군부대 안에서 접시닦이를 하면서 먹고 살았다. 부대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국군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면 몇 살이냐고 물어보고 죄다 국군으로 잡아갔다. 그러던 중에 학교의 학생들은 국군 징집 보류라는 광고가 나왔다. 중학교든 대학교든 학교에 등록하면 합법적으로 군대를 안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받은 월급으로 당시 부산으로 옮겨 온 서울중학교에 다시 등록했다. 학교에 들어와서 보니 권세가 있거나 돈 있는 집 자식들은 다 부산에 피난 와서 학교에 다니면서 합법적으로 징집보류를 받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중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낮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는 학교를 다녔다. 매일 일선에서 밀려오는 죽은 젊은이들의 시체와 부상자들을 보면서 나는 학교에 갔다. 이 모든 현실이 너무 참혹하고 비참했다.

 

거기서 졸업을 하고 대학은 서울대 사회학과로 갔다. 인생이 무엇인지 따져보기도 전에 서로 죽이는 사회 속에서 살다 보니 이것을 좀 이해하고 싶었다. 도대체 이놈의 사회가 무엇인데 사람을 서로 죽이라고 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 1954년 부산에 있을 때 삭발을 하고 소복을 입은 채 '탐루(探淚)'라고 적힌 등불을 들고 단독 평화 시위를 했다.

 

당시 부산에서 이승만 박사가 휴전이 성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휴전반대, 북진통일' 데모를 시켰다. 나는 내 스스로 미군부대에서 통역하고 학교에서 공부한답시고 군대도 가지 않았으면서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의용군도, 국군도 아니고 그저 도망꾼일 뿐이었다. 이렇게 비겁하게 살 바에는 하루를 살아도 떳떳하게 살다가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깨끗이 목욕하고 머리도 박박 깎고 속옷도 갈아입었다. 백의민족이란 말에 따라 하얀 한복으로 갈아입고 등불 하나를 들고 거기에 눈물을 찾는다는 뜻인 '탐루'라는 글을 쓰고 광복동거리로 나갔다. 남과 북 양쪽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누구 하나 전쟁을 그만하고 같이 평화롭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죽음을 결심하고 "도대체 눈물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 없느냐? 평화적으로 같이 살길을 찾자는 사람은 하나도 없느냐?"고 하면서 외치고 다녔다.

 

눈물의 의미를 아는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얼마나 아프길래, 얼마나 슬프길래?' 하고 그 눈물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얼'이다. 사람의 얼이 병들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너나 할 것 없이 얼이 병들어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더러 '통일운동가'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통일운동가 이전에 평화주의자다. 통일보다 우선 평화가 중요하다. 자기가 싫어하는 원수를 전부 없애고 먼저 통일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얼이 건강해서 서로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때 같이 살 수 있게 된다.

 

- 왜 혼자 그런 시위를 하신 건가? 당시 생각을 같이 하던 사람들은 없었나?

 

대학 동기들 몇몇 사람에게 눈물을 찾는 조직을 만들자고 했는데 함께 한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너의 말은 맞지만 그걸 지금 어떻게 할 수가 있느냐”라면서 다 뒤로 물러나는 분위기였다. 지금까지도 북쪽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언급하면 '종북(從北)'이라고 몰아세우는데 그때는 더 심각했다. 그러니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북한과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시위를 단독으로 하게 됐다.

 

- 청년들을 위한 통일 방안을 만들어 당시 이승만 정부에 정식으로 제출했다고 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나?

 

부산경찰서에서 등불시위를 하던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내게 "평화적 통일을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게 뚜렷한 대안이 없었다. 그 길로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뒤져가며 1년에 걸려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만들었다. 그것의 핵심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면서 젊은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면 그냥 따로 살면서 교류하고 평화적으로 살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거다. 일본과 미국이 과거에는 서로 싸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지금은 두 국가가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평화롭게 산다. 독일과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코리아는 한번 싸운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지금도 으르렁거리며 타도를 주장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 이제껏 서로 죽이라고 강요를 당했는데 그럴 게 아니라 공존을 통해 같이 살 수 있고 통합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주장이었다.

 

1955년 봄에 정식으로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이승만대통령이 있는 경무대에 제출했다. 헌법에 있는 청원의 권리로 청원서로 보냈다. 일주일 만에 치안국에서 나를 불러 취조를 했다. 나보고 타도해야 할 북이랑 같이 살자고 하는 것을 보니 "너 빨갱이가 아니냐?"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한 적도 없고, 사적소유를 없애자고 주장한 적도 없다. 다만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면 따로 살면서, 자식들한테만은 서로 죽이라고 가르치지 말고 같이 살길을 만들어 가자고 이야기한 것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결국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 아직 전쟁의 잔상이 크게 남아 있던 시기에 독단적으로 북한에 갔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나?

 

결국 치안국에서 우리 아버지를 불러 나를 정신병원에서 인계받아 가게 했다. 그렇게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치안국에서 "김일성이 또 전쟁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 "북으로 가자. 가서 직접 한번 알아보고 내가 구상한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제안하자"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파주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지금껏 이런 생을 살지 않았을 거다. 운명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가재 잡고 헤엄쳐 놀던 곳이 바로 고향 파주에 있는 통일동산이었다. 통일동산 앞에 임진강과 한강이 합쳐지는 조강이 있는데 이 조강과 그 앞에 바다에는 휴전선이 없다. 휴전 협정상에 통일동산에서 한 3∼4km 올라와서 임진강으로 내려가는 샛강이 있다. 여기서부터 휴전선을 그린 것이다. 다만 휴전 협정상 조강 쪽은 현재 지배하고 있는 남과 북이 알아서 하라고 되어 있다. 이 조강을 따라 북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내가 단독 북진을 하던 날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하필 그날이 6월 25일이었다. 에어매트리스에 바람을 넣어서 강을 따라 둥둥 떠내려갔다. 오른쪽이 이북이고 왼쪽이 이남이어서 혹시 서해로 떠내려갈까 봐 오른쪽으로 붙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좁은 데로 떠내려가야 하는데 한강하구의 밀물이 올라와 출렁하는 바람에 매트리스를 놓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오른쪽에 도착했다. 나지막한 철조망이 있고 그 뒤쪽으로 보리밭이 있었다. 보리밭을 가로질러 갔더니 민가가 있어 들어가니 할머니 한 분이 있었다. 내가 "평양에 가는 사람인데 잠시 쉬어 가도 되느냐"라고 하니, 아랫목 뜨듯한 데서 쉬라고 했다. 한 30분쯤 쉬고 있는데 "손들어!" 하면서 인민군들이 들어왔다. 할머니가 날 쉬게 하고 나가서 신고한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닐에 싸서 고무줄로 차고 왔던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안'을 보여주며 "이것을 평양에 전달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니 풀어주었다.

 

- 그곳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선고 집행 없이, 1년이나 있다가 다시 내려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평양에 간 지 일주일 만에 방학세 내무상에게까지 갔다. 그가 내게 누가 보냈느냐고 해서 보낸 사람이 없이 스스로 왔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남한 군인들과 북한 군인들에게 한 번도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을 믿지 않았다. 자기들이 잔뜩 지뢰를 묻어놓았는데 어떻게 안 터지고 왔느냐는 거였다. 나는 잘 모르겠고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했다. 결국 고작 몇 분을 만나고, 평양 예심처라고 하는 감옥에 보내졌다. 바로 옆방에 박헌영 씨도 있었는데 그의 심복 부하들이 김일성을 죽이려는 반역을 꾀했다는 의심으로 2년이 가깝게 갇혀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국가의 부수상이었던 박헌영 씨도 의심을 못 풀어서 2년이 되도록 못 나가고 있는데 나 같은 피라미 대학생이 암만 우연이라고 말해도 통하겠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를 했다. 정신을 집중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결론은 그들이 믿고자 하는 대로 남쪽에서 보내서 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백하겠다고 했더니 자세히 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뭘 잘 알아야 쓰지 어떤 것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여기 오기 전 경무대에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냈을 때 나를 잡아다 취조한 치안국 사람들이 생각나면서 나를 치안국 중앙분실장이 보내서 왔다고 썼다. 거짓말로 가득 쓴 것이다. 그랬더니 나보고 "진즉 썼으면 이렇게 고생 안하지 않느냐"라면서 다음날 나를 기소했다. 이제는 간첩으로 사형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당시 북으로서는 남쪽에서 평화적 통일방안을 가져온 사람을 없애는 것이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었다. 당시 북한도 국제사회에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나를 이용해서 다시 남한으로 보내자는 결정을 한 것 같다. 죽이려고 머리까지 다 깎아놓고는 결국 죽이지 말자고 결정하고 며칠 후에 나를 다시 부른 것이다. 그들은 "휴전선에 데려다 줄 테니 남쪽으로 가서 너를 보낸 사람한테 가서 네가 가져온 평화통일방안을 그대로 동의는 못하지만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전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내 꼴을 보니 머리는 박박 깎였지, 단식하는 바람에 살이 많이 빠졌지 이 몰골로는 바로 남한에 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면 남한 치안국에서 '그것 봐라, 네가 다 죽게 되어서 돌아오지 않았느냐'라면서 미친놈 소리밖에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더 있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며칠을 토의한 후 나를 지금의 압록강 하구의 황금평에 있는 상의군인병원으로 후송했다. 거기서 머리도 자라고 건강도 회복된 후에 딱 1년 만에 남한으로 오게 됐다. 내가 6.25 한국전쟁 날에 건너갔고, 그다음 해 6월 22일에 그들은 나를 휴전선에 데려다 놓았다.

 

- 간첩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가 아니었나. 남한에 다시 돌아왔을 때 많은 의심을 받았을 것 같다.

 

휴전선에서 나를 먼저 발견한 것은 미군이었다. "Stop!(멈춰!)" 하고 총을 들이댔다. 내가 "I'm a citizen of Seoul!(난 서울 시민이다)"이라고 했더니, 나를 태워 미군 수용소로 데려갔다. 3개월에 걸친 취조를 받았다. 그곳에서 나는 "왜 자꾸 너희가 나를 취조하느냐? 날 한국에 넘겨라"라고 요구했다. 그랬더니 "그래, 남한 경찰로 가면 좋을 거다"라며 나를 남한 치안국에 특수정보과 중앙분실에 넘겼다. 그때가 1956년 가을쯤이었다.

 

치안국으로 옮겨진 후 미군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대한민국의 고문사를 쓰라면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50년대 고문, 60년대 고문, 70년대 고문, 90년대 고문을 다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통을 주는 방법은 같으나 자국이 안 남게 하는 방식으로 고문 기술이 달라졌다. 그때의 고문은 일제시대에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서 고문하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했다. 결국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가 돼 경찰로 넘어갔다. 여기서 1년 동안 북에 있으면서 무슨 간첩교육을 받았느냐는 취조를 집중적으로 받았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 병원에서 지냈을 뿐이었다. 북에서 잡혔을 때는 남한의 치안국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치안국에서 보냈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아는 게 없었다.

 

취조를 하면서 나를 이렇게도 매달고 저렇게도 매달아 물속에 집어넣고 별짓을 다 했다. 고통스러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저 '예, 예'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런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예’라고 하려고 해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그냥 '아니오'라고만 하니까 온갖 방법으로 고문을 했다. 이후 검찰에 넘겨져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었다. 재판 결과 간첩죄는 무죄로 판결되었으나 국가 보안법 위반죄로 1년 징역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을 뒤엎을 생각도 없었고 군사기밀을 갖다 준 것도 없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상고했더니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됐다. 집행유예도 억울하다고 해서 대법원에 상고하니 1960년 4.19가 난 직후에 면소판결(免訴判決)이 났다. 이렇게 이 사건은 끝났다.

 

당시 남과 북의 집권자들을 보면서, 입으로는 자유를 말하고 평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는 국민들의 자유, 공산주의 사회에서 권력이 없는 인민들의 평등이란 자기의 부와 권세를 확장하기 위한 감언이설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평화통일이 진정으로 필요한 민중들에게는 강력한 외국을 등에 업은 권력자들의 요구를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당국들의 권력투쟁을 위한 동포 간의 상쟁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했다. 

 

- 간첩죄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이후 다시 투옥되고 사형까지 구형받은 것이 여러 번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1961년에 5.16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에 대해 고려대 학생들이 데모를 했다. 당시 나는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석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려대는 내가 일전에 '통일독립청년공동체 수립 안'을 내기 전에 서울대를 자퇴한 후 다시 들어간 학교였다. 4.19 혁명 전 4.18 때도 고려대에서 데모가 있었고, 5.16 때도 먼저 고려대에서 데모가 일어나니 박정희 정권이 이것을 때려잡기 위해서 무언가 명분이 필요했다. 그들은 '김낙중이 북에서 간첩교육을 1년간 받고 돌아와 그 내용을 바탕으로 고려대 애들을 뒤에서 선동하고 있다'는 묘책을 세웠다. 각종 신문에 '간첩 김낙중을 체포했다'고 대서특필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이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아버지가 간첩이라고 TV에 크게 나왔던 거다. 이 사건으로 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느닷없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은 반정부 운동이 조용해지자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 받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군사 정부가 학생 탄압용으로 나를 이용한 것이었다. 

 

징역형을 복역한 뒤에 노동문제연구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산업화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노동자로 변하면서 문제가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를 직장으로 삼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교육을 하고,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협동 교육을 했다. 그런데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에 장기 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이에 반대해 학생들이 유신반대 투쟁을 시작했는데, 정부 당국은 학생들을 공포 분위기로 진압하기 위해 다시금 간첩사건이 필요해졌던 것이다. 나는 또다시 간첩으로 지목을 받았다. 그즈음 독일 에버트 재단의 초청을 받아 독일의 노동문제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여권을 신청했었는데, 그 기록을 가지고 '간첩 김낙중이 독일로 가서 동독을 거쳐 북한으로 탈출하려했다'라는 소설을 구체적으로 썼다. 그 사건으로 '간첩예비죄'라는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7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 이후 실제로 북한 사람과의 접촉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만남이 수차례 이어졌고 심지어 돈을 받아 남한에 북한의 지령을 받은 친북 정당을 세우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전에 모의 된 것이 아니라면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나?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없었나? 

 

수감 생활 후 '민족통일촉진회'라는 단체에서 정책위 의장으로 일했다. 1989년 국회 주최 한 통일관련 공청회에 참석해 '한꺼번에 통일하려고 하지 말고 단계적으로 이뤄가자'는 4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며칠 뒤 어떤 30대 중반의 한 젊은이가 내게 전화를 했다. 자기를 부산의 어느 대학 강사라고 소개하면서 내가 북에 왜 갔는지 쓴 <굽이치는 임진강>이라는 책을 열 번을 읽었고 나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그 젊은이 두 명이 정말로 나를 찾아왔고, 함께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선생님께서 국회에서 발표하신 단계적 통일방안에 대해서 전적으로 좋은 생각이라고 하시면서 '평화통일을 위해서 협력해주시길 바란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하는 거다. 나는 처음에는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날 떠보기 위해서 이 사람들을 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당신들,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 나온 거 아니오?"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더라. 그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어서 갸우뚱하니 그 젊은이가 "제가 선생님께서 옛날 평양에 와서 말씀하신 자술서의 내용을 다 읽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선생님께서 남한으로 돌아오셔서 당했던 일들을 보니 과거에 북에 오신 것이 남쪽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나는 이 사람들이 진짜 북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남한에 와서는 내가 이북에서 허위진술을 하고 왔다는 말을 한마디도 안했기 때문이다. 그러곤 헤어졌다.
 
한국의 실정법상 북한에서 온 사람과는 허가 없이 접촉할 수 없으며, 신고하지 않을 경우 처벌을 받는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신고를 하면 그들에게는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선고될 것이 당연했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가 걱정됐지만, 결국 나는 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방문한 그들과 함께 여러 가지 민족 문제들을 토의했다. 물론 나와 북측 당국의 의견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나는 당시 민중당 사무총장이었던 이재오의 끈질긴 설득으로 민중당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민중당 대표를 하면서 당시 갈라져 있던 야당 세력들을 합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난번에 찾아왔던 젊은이가 또 나를 찾아와 "선생님 민중당 대표를 축하합니다. 열심히 해주십시오"라고 하더니, "정치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해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하고 보따리를 주고 갔다. 그가 간 뒤에 펴보니 달러로 한 200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돌려줄 새도 없이 가버려 남겨진 돈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때 한국 정치는 정말 돈이 없으면 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다들 돈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생긴 돈 공적으로 잘 쓰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남대문시장에 가서 달러를 한화로 바꿔 당시 몇몇 정치인들이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장독 밑에 숨겨뒀다. 우리 할멈한테 지금까지 구박을 받는 것은 그 달러를 잔뜩 묻어놓고도 자기를 위해서 선물 하나도 사다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웃음). 생전 돈 한 푼 제대로 벌어다 준 적 없으면서 달러를 쌓아두고도 내색하지 않았으니 서운해했던 거다.(웃음) 단지 그 돈은 나나 우리 가족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가지 않아 1992년 남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사형을 구형받아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었다. 이북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온 것이 사실이었고, 이번에는 이북에서 달러를 받고 나라를 전복하려는 지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다시 감옥에 투옥되었고,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 의해 형집행정지로 집에 오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무기수'이며, 투표권도 없고, 해외여권도 나오지 않는 부자유한 신분의 소유자다. 지금도 나에게 나라를 전복하려 하는 '간첩'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있다. 나에게만 그치면 괜찮은데 우리 가족들도 쉴 틈 없이 괴롭혀 왔다. 그것이 마음 아프다.

 

 

- '정답사회'에 사는 우리이다. 남들과 다른 행보는 용납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다른 어떤 신념이 있으셨던 건가?

 

중학교 시절 폐병에 걸렸을 때 나는 '인간은 죽을 건데 왜 태어났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그 당시 폐병이면 거의 죽었다. 매일 남대문 도서관에 가서 ‘인생은 무엇이고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면서 종교와 철학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래도 답을 얻지 못해, 일요일 아침 10시에는 새문안교회를 갔다가 2시에는 조계사에 가고, 4시에는 YMCA에서 하는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장자 강의를 들었다. 기독교, 불교, 유교를 다니면서 무엇이 참된 삶의 의미일까를 물었다. 그런 와중에 6.25가 터진 것이다. 전쟁이 터지면서 '우리가 왜 서로를 죽여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 거다. 그러면서 생각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살자고 결심했다.

 

지금도 신문을 보거나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아프다. 상대방을 서로 인정을 하지 않는 상태다. 내가 60년간 한결같이 한 일은 서로를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서하고 같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 길을 찾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평화통일시민연대'라는 곳에서 상임고문으로 일하고 있고 국회에서 여야와 시민단체가 함께하는 '한반도평화통일시민단체협의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왔다 갔다 활동하다 보니 누군가는 나보고 기회주의자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귀가 두 개가 있는 이유는 이쪽 얘기도 듣고 저쪽 얘기도 들으라고 있다고 믿는다. 양쪽의 이야기를 잘 듣고 이것을 잘 조화시켜야 한다. 음양이 하모니를 이루면 오케스트라가 된다. 조화를 시키면 아름다운 교향악이 되고, 조화를 못시키면 잡음이 된다.

 

'구동존이(求同存異)'라고 말이 있다. 다르지만 같은 것을 찾아서 서로 조화의 길을 찾아가자는 거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서로 부딪힌다. 다름을 전제로 하고 하모니를 만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결혼이다. 여자는 이리로 가자고 하고 남자는 저리로 가자고 하는 모순이 있는데, 이 모순을 조화롭게 극복하는 것이다. 이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 혹시 다름에서 오는 속상한 일이 있으면 서로 다른 걸 인정하고 함께 길을 찾아가야 된다. 그렇게 나는 나의 길을 걸어왔다.

 

- '과연 통일을 꼭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통일을 해서 뭐하냐"라고 하는데 그게 맞다. 지금 통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남한은 아직 남북통일을 얘기할 자격이 못된다. 남쪽사회 내부에서 계층 간 지역 간 갈등부터 해결하고 그러고 나서 남북을 얘기해야 한다. 북한사회에서 못 살겠다고 도망 나온 탈북자들이 다시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 와보니 바닥에서 살 수가 없는 거다. 남북통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더불어 살려면 아픔을 서로 느낄 수가 있어야 한다. 옆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데 몇백 억 불을 쌓아두고 외국은행에 빼돌려 자기 새끼만 물려주려고 하는 것은 얼이 병들어 있는 것이다. 남한사회 내부에서조차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통일이 아니라 평화가 선행이다. 네 가족, 내 가족, 박 씨네 가족, 이 씨네 가족 다 다르니까 따로 살 수 있다. 다르지만 크게 보면 같은 민족이다. 저 미국에 사는 흑인도 같은 한 겨레다. 한겨레의 입장에서 보면 '니 꺼, 내 꺼'라고 하면서 서로 죽일 일이 없다. 가족, 씨족이라는 좁은 범위를 넘지 못해서 서로 자기네 가족만 챙기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자기 가족도 안 챙기고 자기만 챙긴다. 내게 통일이란 민족통일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통일의 문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류가 하나가 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코리안의 임무라는 것이다. 인류가 하나 되는 일에 코리아만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는 지금껏 다른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침략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3.1운동 정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우리는 독립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다는 거다. 평화라고 하면 제일가는 민족이 지금 남북 간에 갈등을 겪고 있다. 이 갈등을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해결할 수 있다. 언론이 아무리 차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으로 소통하게 되어있다. 우리가 살 길은 갈등을 폭발시키는 게 아니고 갈등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남과 북이 조화하는 것만이 같이 상생하는 길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코리아가 소련의 탱크나 미국의 비행기, 누구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서로를 용납하면서 하나의 길을 찾아갈 때에 선구자 역할을 할 것이다.

 

함석헌 선생님은 코리아를 '세계문명의 쓰레기통'이라고 강조했다. 고려시대에는 인도문명에서 들어온 불교, 이것이 폐단이 생겼고 조선시대에는 유교, 도교라는 중국문명이 들어와서 살았다. 근데 이것도 노론 소론 싸워서 끝이 났다. 그리고 뒤에 일제가 들어오면서 지중해의 서양문명이 들어왔다. 나일 강에서 흐른 이집트 문화와 로마 문화가 합쳐져 대서양으로 가서 영국으로 갔다가 미국을 통해서 남쪽으로 왔다. 육지로는 동유럽을 통해서 러시아를 통해서 북쪽으로 들어왔다. 세계문명이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음양이다. 이 양과 음이 코리아에 들어와 만나 싸울 것인가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결정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인도문화권, 중국문화권, 지중해문화권이 코리아 역사 속에 흘러들어와 다 겪으며 살았다. 우리의 DNA 속에 다 들어 있다. 통일은 하나의 지배체제를 만든다는 것인데, 하나의 지배체제가 필요한 게 아니다. 같이 더불어 사는 게 필요한 거다. 코리아가 세계사 속에서 자기 구실을 할 때가 온다고 생각한다.

 

-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

 

남쪽에서의 문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거다. 부동산과 현금의 소유 분포를 그려보면 상위층 10%가 모든 부동산과 현금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제도를 부인하면서 사유재산제도를 없애야 된다고 하면서 지적한 것이 사유재산제도를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절대적인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공산주의의 문제는 권력이다. 모든 것을 권력 가진 자가 결정한다. 권력이 있으면 자유가 있고 권력이 없으면 다 노예가 되는 것이다. 북은 권력독재고 남쪽은 금(金)력독재이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인데 어떤 권력자나 부자에 의해서 노예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1989년에 통일이 되기 전에 서독에 갔다. 의료, 교육 다 공공이어서 국가가 다 부담했다. 의료비, 교육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동독을 보니까 정부가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국유화를 했는데 권력을 쥔 사람들이 맘대로 하는 거다. 결과적으로 서독에 비해 동독은 3분의 1밖에 못살더라. 동독사람들이 서독을 보니 이게 진짜 사회주의라는 생각을 했다. 돈이 없이도 의료혜택을 받는 것이 사회주의가 아니고 무언가. 이렇게 해서 동독사람의 민심이 서독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남북이 갈라져서 서로 싸울 궁리만 하고 자기가 쌓아놓고 있는 재산은 나눌 생각을 안 한다. 미국도 빈부격차가 심하기는 하지만 재벌들이 자진해서 사회로 환원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은 가족주의가 심해서 돈을 벌면 자기 새끼한테 물려주려고 외국으로 빼돌린다. 지긋지긋하게 갈등이 심하다.

 

남한사회 내부에 갈등이 심하게 많은 이유는 그 갈등의 밑바닥에 물질적 욕망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이 재산제도에 있어서 ‘공동상속제도’의 도입이다. 한집안에서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의 공동상속 제도를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무개의 재산이 몇조 원이라고 하면 그것을 공동상속의 대상으로 보고, 적어도 몇백 억 원은 사회의 공동상속기금에 내놓고 이 기금을 새로 자라나는 18세 혹은 20세의 젊은이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어서 사유화하는 것이다.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그들의 자식은 똑같이 공동상속을 받는 거다. 상속의 형태는 회사의 주식형태도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느 회사의 사원이면, 그 공동상속기금에서 그 주식을 사서 주면 회사는 내 회사가 되는 것이다.

 

- 전쟁 이후 6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휴전 상태 속에 살고 있다. 이 긴 싸움의 종결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미소(美蘇)냉전이 끝난 것은 고르바초프가 수상이 되면서 무기경쟁을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무기를 줄이면서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이미 충분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역시도 현재에 있는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남북이 다 같이 죽을 수도 있다. 북은 생존을 위해 핵을 절대로 포기 안 할 거다. 카다피도 핵을 포기했다가 망했다. 그런데 한국은 지금 북한과 전쟁할 것도 아니면서 그 많은 무기들을 어디다 쓰려고 계속 사들이는지 모르겠다. 국방부에서 수조를 들여서 무기를 사들이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미국의 군수산업이 가장 많은 로비자금을 쓰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군비 경쟁으로 서로를 위협하는 일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이미 충분한 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눈치를 보며 계속해서 사들이는 것도 그만해야 한다. 평화통일을 하자고 하면서 서로를 믿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끊임없이 공격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가.

 

- 누군가에게는 ‘평화주의자’라는 존경을,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악마 같은 존재'라고 손가락질 받았다. 한 사람의 비난에도 쉽게 쓰러지는 우리이다. 참 모진 삶이 사셨다는 생각이 드는데. 삶이 원망스러웠던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에 삶의 바른길을 찾아가는 게 내 임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갈림길이 참 많았다. 그때마다 앉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 마음으로 결정하고 선택하면서 갔다. 여기에 있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진리요 생명의 길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사명이다'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나는 찬송가 중에서 '내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찬양과 '참 아름다워라'라는 찬양을 좋아한다. 내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때, 무엇을 할 수가 없을 때 ‘내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찬송을 한다. 그리고 이전에 간첩으로 몰려서 사형을 받았다가 사형은 면하고 감옥에 갇혔을 때 본 풀하나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풀, 나무, 새소리 등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게 나를 지켜온 내 생활의 자세인 것 같다. 물론 지난 세월 녹록하지 않았다. 사형을 다섯 번이나 구형받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돌아보니 백 년, 천 년을 살았던 것처럼 까마득하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83년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살아서 청년들을 마주하는 것이 또 얼마나 기쁜가.

 

- 더불어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한마디 해 주신다면?

 

이 사회에 참 많은 갈등들이 있다. 갈등이라는 것은 욕망과 욕망의 부딪힘이다. 부처는 욕망을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욕망을 버리라고 하지는 않을 거다. 욕망은 필요한 거다. 하지만 욕망을 부리게 하는 엑셀레이터가 있다면 욕망을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갈등이 생겼을 때 브레이크를 잡을 때가 있고 엑셀을 밟아야 할 때도 있다. 인생의 행로는 이 둘을 잘 조화롭게 작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모니를 만들어야 한다. 혼자서는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이 사회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가는 거다. 그런 그림을 만들어 주시기를 부탁한다.

 

- 김낙중에게 자유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 자유다. 노예라는 것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국가의 국민이 자기 의사에 의해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유의 전제 조건은 각자 저마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강제하지 않는 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없는 사람의 자유는 고용주의 자유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권력 가진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사는 거다. 피동적으로 사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사람들마다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게 민주주의인데 어떤 말을 하면 ‘너는 빨갱이다, 반동이다’라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얘기를 해도 설득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대화다. 설득이 제대로 먹히려면 이 의미를 서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비판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입장을 바꿔보고 이해하려는 노력, 다름을 받아들이려는 용납의 자세가 자유인의 필수조건일 것이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전공 김예리 씨가 진행하고, 정리는 정치경영연구소 손어진 연구원과 조경일 연구원이 맡았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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