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정부는 2011년 중국계 미국인 게리 로크를 주중 미국대사로 보냈다. 중국인의 얼굴을 하고 중국문화를 이해하는 인물이라면 미국 상품과 기업의 중국시장 진출을 돕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처음에는 검소한 모습으로 중국인의 호감을 샀지만 인권운동가 천광청의 미국대사관 피신 사건과 중국의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깊어졌다. 그는 부임한 지 2년 반 만에 가족을 이유로 물러났다. 중국 관영매체는 떠나는 로크를 ‘황피백심(黄皮白心)의 샹자오런(香蕉人)’, 겉은 황색이지만 속은 백색인 ‘바나나 인간’이라고 조롱했다.
우리말로 바꾸면 ‘검은 머리 미국인’, 줄여서 ‘흑발미인’이다. 2006년 7월 25일 미국 대사 버시바우에게 전화해 자신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죽도록 싸우고 있다”(fighting like hell)고 말한 통상교섭본부장 김현종과 같은 인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예 국적을 미국으로 바꿔 한국을 공격하는 한국계 미국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모스 탄, 영 김, 애니 챈, 그리고 미셸 스틸이 그들이다. 한국인의 얼굴과 이름과 언어로 한국의 주권을 흔들려는 자들이다.

미셸 스틸은 게리 로크보다 출생국과의 연결이 훨씬 직접적이다. 서울에서 박은주로 태어나 미국 정치인이 되었고, 이제 미국의 대사가 되어 돌아왔다. 상원 인준 과정에서 반대가 39표 나왔다. 역대 대사들이 개별 의원의 찬반을 기록하지 않는 만장일치나 음성표결(voice vote)로 인준된 것과 비교하면 사상 초유의 반대였다. 앤디 김, 태미 덕워스, 메이지 히로노 등 아시아계 상원의원들은 그녀의 극우성향과 분열적 행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녀는 한국에 도착한 날 영락교회부터 찾았다. 미군정의 비호를 받은 반공 폭력 서북청년회의의 온상이다.
스틸은 극렬한 반중 강경파에다가 대북 압박주의자다. 중국공산당을 미국에 대한 최대 위협으로 지목했고, 문재인 정부가 추진한 종전선언에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만 해협 유사시 주한미군이 출동하면 한국군도 함께 진격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을 대신해 대중국 대응을 주도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도 했다. 미국 정치인이 그런 견해를 갖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주한 미국대사가 자신의 반중·반북 신념을 한국의 외교·안보정책에 주입하려 든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대만해협에 한국군이 나갈지, 한반도에서 평화협상을 추진할지 여부는 한국 정부와 국민이 결정할 일이다.
경제 분야에서는 벌써 방향이 드러났다. 스틸은 한국행에 앞서 워싱턴에서 쿠팡과 구글의 대표들을 만났다. 두 회사는 한국의 개인정보 보호, 공정거래, 디지털 규제 등 입법주권 행사에 거칠게 반항하고 있는 미국 기업들이다. 스틸은 인준청문회에서도 미국 기업이 한국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챙기겠다고 했고, 한국이 약속한 3,500억 달러 대미투자의 재원과 집행을 따져 묻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를 만나기도 전에 자신들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변하는 미국 기업들의 요구부터 들었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임무를 우선할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물론 미국대사가 미국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쿠팡이 한국에서 사업하는 한 미국법이 적용될 수 없고, 구글이 미국 기업이라고 해서 한국의 입법권이 멈추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정보 유출이나 독점, 조세 회피와 불공정행위가 문제라면 한국 기업과 똑같은 기준으로 조사받아야 한다. 미국정부든 미국대사든 한국 국회에 법을 고치라고 압박하고, 규제기관의 정당한 법 집행을 미국 기업 차별이라고 몰아가며, 관세와 안보를 협박의 지렛대로 삼는다면 그것은 한국의 주권과 법질서를 침해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전 주한 미국대사였던 ‘흑발미인’ 성 김은 현대자동차 사장이 된 뒤 미국의 자동차 관세가 다시 25%로 오르면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국회에 대미투자특별법의 신속한 처리를 요구했다. 미국이 관세로 한국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전직 미국대사가 그 위협을 기정사실화해 한국의 입법을 재촉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미국의 강압이 한국 기업의 요구로 번역되고, 특정 기업의 이해가 수백조 원 규모의 국가적 의무처럼 포장되는 것 말이다. 한국은 미국과 협상하기도 전에 밑지고 들어가게 된다.
컴프라도르(comprador)라는 말이 필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본래 서구 상사와 중국시장 사이에서 거래를 중개하던 현지인을 가리켰다. 매판(買辦)이라고 번역한다. 컴프라도르는 서양 상인이 모르는 중국의 언어와 제도, 관행을 알았다. 서구 자본은 이들을 앞세워 시장과 이권을 적은 비용으로 장악했다. 오늘날의 컴프라도르는 외국군의 길잡이로 성문을 열 필요가 없다. 관세 위협을 전달하고, 해외투자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만들며, 외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내법과 제도를 바꾸라고 설득하면 된다. 문제는 국적이 아니라 그런 중개 기능이다.
이 점에서 미셸 스틸은 박춘금을 떠올리게 한다. 박춘금은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 중의원 의원이 되었고, 내선일체와 황민화, 침략전쟁에 앞장서 협력했다. 지금의 미국과 과거의 일본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또 지금의 미셸 스틸을 식민시대의 박춘금과 동일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이 동맹국을 수탈하려 혈안이 되어 있고, 출생국을 잘 안다는 사람을 이용해 상대를 더 효과적으로 압박하려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구조적 유사성은 생긴다. 비교의 목적은 배신자 낙인이 아니다. 스틸이 선을 넘는 순간을 경고하려는 것이다.
‘흑발미인’이라는 오명을 피하려면 스틸은 다섯 가지 선을 지켜야 한다. 첫째, 대한민국의 주권과 법률과 관습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 국회와 법원, 수사기관과 규제기관의 결정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극우세력과의 야합을 통한 정치행위, 투자와 입법을 강요하는 내정간섭은 허용되지 않는다. 넷째, 한국의 대북정책과 대중국정책, 한국군의 작전에 자신의 이념을 밀어 넣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한국 출생과 한국어, 종교와 인맥을 공식 외교경로 밖의 압력 통로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 가장 중요한 준칙은 첫 번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한국 정부도 미국대사를 대하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 다른 모든 외국대사와 똑같은 한 나라 정부의 대표일 뿐이다. 식민 총독이 아니다. 선을 넘으면 먼저 비공개로 경고하고, 다시 넘으면 외무부로 초치(summon: 소환)해 공식 항의해야 한다.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항의 사실을 공개하고 고위급 접촉을 제한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미국 정부에 소환과 교체를 요구하고, 중대한 내정간섭이 계속되면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즉 기피인물로 지정해 추방해야 한다. 외교관계에 관한 빈협약은 주재국에 기피인물을 거부할 권리를 부여한다.
언론과 시민사회도 스틸의 발언과 행보를 꾸준히 기록하고 감시해야 한다. 내정간섭과 주권침해 언행에는 공개질의와 항의, 시위와 저항으로 선을 그어야 한다. 한미관계는 중요하지만 그래서 예속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스틸은 대한민국을 푸에르토리코와 같은 미국의 식민지로 취급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동맹은 대등한 주권국가 사이의 협력이다. 스틸은 선을 넘으면 게리 로크처럼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흑발미인’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일개 대사 나부랭이에 대해 이런 글을 써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한심할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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