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책임을 묻기 어려운 문화적 임계상황에 놓인 군

지휘관에게만 책임을 묻기 어려운 문화적 임계상황에 놓인 군

김종대 2014. 12. 08
조회수 40 추천수 0
 

김종대.jpg

 

   푸르던 날은 가고 이제 가을을 지나 한해를 마무리하는 계절. 저희 디펜스21+ 사무실 바깥 나무들은 이제 앙상한 가지만 남겨둔 채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에 이어 이번엔 서베링해에서 원양어업을 하던 501오룡호가 침몰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가족들을 차디찬 바닷속에 둔채 한해를 보내야 하는 슬픔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군에서마저 비극적인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습니다. 지난 여름부터 푸르른 청춘들이 꽃도 피우지 못한채 사라졌습니다. 
   그 가운데 윤승주 일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한국의 작은 예수가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로마 병정에게 끌려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수난을 겪은 기간과 윤 일병이 자대에 배치 받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타를 당한 시기가 비슷합니다. 거대한 집단으로부터 학대받으면서도 누구를 미워하지 않았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세상에 우리의 잠든 양심을 일깨운 점도 비슷합니다. 마침내 그 죽음을 초월하여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부활로 이끈 점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저는 윤 일병을 한국의 작은 예수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저는 현실을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믿음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군대 생활을 하던 1980년대에도 고문관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정합시다. 그 고문관이 바로 저와 동기입니다. 그런데 어떤 후임이 고문관이라고 제 동기를 무시하는 행태를 보였을 때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당시라면 당연히 그 후임을 나무라면서 “선임을 무시하지 말라”고 했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달랐습니다. 후임보고 “고문관인 선임은 대우해주지 말라”고 거꾸로 가르치는 겁니다. 이게 달라졌습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배경을 보면 ‘썩은 사과 골라내기’라고 하는 집단 심리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됩니다. 사과 상자에 썩은 사과 하나가 있으면 나머지 멀쩡한 사과도 제 값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의 썩은 사과를 골라내는 것이지요. 집단 심리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저 애 하나 때문에 우리 전체가 욕먹는다”, “거저먹으려는 한 명 때문에 우리가 무시당한다”며 집단이 한 개인에게 그 책임을 몽땅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전방에서 지휘관을 한 중견 장교들에 의하면 관심병사 한 명 때문에 소대 전체가 욕을 먹거나 임무수행이 마비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이걸 집단은 참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계급과 무관하게 집단에 폐를 끼치는 개인 한 명을 지목하여 처벌하는 것이 병영 집단문화에 확산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군대 내 인권 유린 사건의 상당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 군은 부대관리에 거의 전념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지휘관들을 보면 마치 유치원 보모같이 병사들에게 관심을 쏟으며 사고 예방에 전전긍긍합니다. 어떤 장교는 “우리 군이 잘 하는 것은 부대관리 하나”라고 자조적으로 말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가끔 일어나는 반인권행위에 대해서는 할 말을 잃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제 지휘관에게만 책임을 묻기도 어려운 문화적 임계상황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도덕적 위기는 지금 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관찰됩니다. 경쟁과 서열이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전체주의 지향의 문화입니다. 어른이건 청소년들이건 제도에서 낙오되어 밖으로 튕겨져 나갈 수도 있다는 공포에 젖어 오직 신분 상승만 꿈꾸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한 번 낙오되면 절대 사회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포는 배가됩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이 공포감에 스스로를 감금시켰습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IMF 사태가 무엇이냐”고 질문하고 그 스스로 답을 내렸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벌판에 혼자 서 있다는 느낌을 문득 갖게 된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그 이후 공포는 체질화되었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 공포를 강요받고 어떻게든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경쟁이 이데올로기화 된 그런 세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입니다.
  여기에 한국사회의 서열문화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강화됩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대학에 교수 식당이 있는 나라가 한국 말고 어디 있습니까? 왜 교수는 학생들하고 밥을 같이 먹으면 안 된다는 문화가 우리에게 있었던 것일까요? 왜 검찰청과 같은 기관에 가면 고위직 인사들만 타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는 걸까요? 왜 이렇게 우리는 서열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일까요? 외국에 가면 그런 게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그나마도 사회에서는 많이 줄어들고 있지만 군대는 다릅니다. 왜 장군 식당, 간부 식당과 병사 식당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왜 장군들은 일반 장병과 달리 검은 혁대를 차고, 왜 장군들은 자크가 달린 군화를 신을까요? 이게 바로 서열 문화입니다. 고위 장성들이 병사들과는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의 세계를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서열이 문화적으로 용인되는 전체주의적 질서를 내면에서 수용합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하면서, “이 전체주의를 끝장내지 않으면 언젠가 자동화된 경제체제에서 적응할 수 없는 개인을 제거하자는 주장이 나올 법하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조지 오웰은 <1984년>에서 사회를 관통하는 전체주의 권력을 ‘빅 브라더’로 상징화하면서 완벽하게 작동하는 전체주의 질서를 묘사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제거해야 할 개인이 상징화됩니다.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이 히틀러에 의해 무력화되기까지는 단 3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도덕과 양심도 사회의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절대화되면서 소수 약자에 대한 처벌을 정당화하는 순간 즉시 마비됩니다.
  저는 강의 중에 여러 기성세대들에게 묻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식이 28사단의 의무대에 배치되었을 때 윤 일병과 같은 소수약자에 가혹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부분 불쾌해합니다. “내 자식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르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28사단 의무대에는 원래 짐승도 악마도 없었습니다. 모두 평범한 대학생 출신이고 남의 집 귀한 아이들입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전체주의로 작동되는 하나의 집단에 개인이 감금되었을 때, 내가 무시당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소수약자를 처벌하는데 가담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생존방식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가담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제도 밖으로 튕겨져 나갈 수도 있다는 공포, 어느 날 거친 들판에 홀로 서서 온갖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 그런 공포가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지배해야 한다는 압박이 가해지고, 그걸 행동으로 옮깁니다. 
  우리는 몇몇 죽음을 통해 이런 집단, 사회, 권력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관통하는 주어진 질서에 대한 체념성을 고발하는 아침의 모닝콜이었습니다. 단지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변형된 질서를 모색하는 그런 사람들도 많습니다. 육군의 한 대령은 이런 죽음의 의미에 다가서는 시민단체에 대해 “사회에 혼란을 조성하려는 세력들”이라고 과감히 진단하며 “지난 보궐선거에서 그런 세력의 허구성이 입증되지 않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런 만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로 공포에 절은 28사단 한 포대의 고립된 의무대입니다. 우리는 이 감옥의 문을 과감히 부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과연 안전한 세상을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