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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살 아이의 생이빨을 뽑는 고문

6살 아이의 생이빨을 뽑는 고문

 
청전 스님 2012. 12. 14
조회수 9375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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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총사령관의 아들 목촉린포체

 

 

 

며칠 전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이 왔다.

 

멀리 프랑스 땅 남부 마르세이유에서다. 너무 반가웠고 그 옛날 함께 했던 시간들이 죽 이어진다. 이 스님(목조: MogChok 린포체)과의 인연은 필자와 유별났다. 그것도 필자가 첫 인도 땅, 이곳 다람쌀라에 1987년 첫 발을 디디면서다. 유달리 왜소한 몸매와 병색이 짙은 모습에 보기가 좀 그랬다. 늘 소화가 안 되고 속 쓰림의 고통을 하소연 한다. 그러다가 일 년 후에 정식으로 티벳 불교 수학으로 다시 왔을 때서야 이 스님의 사정을 알아 차렸다. 필자와 동갑 나이로 당시 서른다섯 살인데도 어찌 치아가 하나도 없는 어설픈 틀니를 하고 있었다. 왜 벌써부터 치아가 없느냐고 물으니 그냥 웃음만 지었다.

 

1959년. 우리가 다 알다시피 중국이 티벳을 무력 합병과 함께 마지막 방법으로 달라이 라마는 측근과 비밀리에 인도 땅에 망명을 시도한다. 이때 만일 한시 한발이 어긋난다면 탈출은커녕 망명객 모두가 생명은 고사하고 이 지구촌에서 흔적도 없어질 그런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탈출을 도맡은 최고 군인 책임자가 바로 이 스님의 아버지였다. 티벳군 야전 총사령관이었던 것이다. 탈출 시 누구에게도 이 기밀을 얘기 할 수도 없었기에 집에 있는 가족에게도 어떤 언질조차 할 수가 없었던 극비의 문제였던 것이니 말이다.

 

그러면 달라이 라마 일행의 인도 망명 이후 티벳내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말할 것도 없이 탈출에 가담한 측근 일행의 가족 친지부터 혹독한 조사가 된 것은 당연, 일차로 그 스님의 가족이 무서운 고문과 폭력의 조사를 받았다. 얼마나 그 조사가 심했겠는가는 그 스님의 어머니는 연행 되자마자 감옥에서 고문으로 며칠 안에 죽고 만다. 얼마나 심한 고문이었을까 상상이 간다. 그때 이 스님은 여섯 살, 그런대도 생 이빨을 빼는 혹독한 고문과 함께 아버지가 어디 있는가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이후 천만다행으로 죽음까지는 면했어도 그 어린 나이에 감옥이라니. 그것도 십년이 넘는 감옥생활이라니.

지금처럼 열린 이 시대에도 중국내의 판첸 라마(본명: 최기 니마 린포체)는 나이 일곱 살 때부터 지금까지도 감금 상태이니, 60년 전의 티벳 상황은 어땠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세계 최연소 나이로 감옥에 있음은 세계 인권단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일이기도하다. 물론 지금까지도 공산당에서 임명한 가짜 판첸 라마가 그 역할을 공산당 구미에 맞게 충실히 해내고 있다.

 

막상 감옥에서 나왔을 때도 삶에 문제가 컸단다. 가족이나 친인척이 거의 죽고 흩어진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자기는 어린 나이에 이미 어느 고승의 환생자, 즉 린포체로써 승가에 있어왔는데 밖에 나왔을 땐 자기가 있던 절이 다 파괴되어 실제로 승가가 없어진 현실이었다. 린포체로써 해야 될 공부나 승려로써 어떤 승가교육이나 자리매김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인도로 넘어오는 계기를 만들어 천신만고 끝에 1987년 살아 넘어 올 수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막상 넘어와서도 친부인 티벳 총사령관이었던 아버지는 몇 해 전 돌아가셔 만나 볼 수도 없었다. 바로 이 때 필자와 첫 조우였다. 이후 필자에 소속된 불학 연구소에서 근 십년을 함께 생활 할 수 있었다. 혈육으로는 친누나가 지금 이곳 다람쌀라에 살고 있다.

 

티벳 전통 승가에서는 린포체라면 수행원과 수족이 있게 되지만 이 스님의 상황은 너무도 달랐다. 자기 개인 혼자 달랑 남아 있는 꼴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해야 할 승가 교육이 전혀 안 된 것이었다. 그래도 늦었지만 이곳 다람쌀라에 있는 불교학당에서 기초 불학을 공부할 수가 있었다. 필자도 그곳에서 티벳말 부터 배워온 인연 터로 지금까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인도 체류 비자 문제도 그 학당의 학생으로서 뿌리를 두고 이 나이에도 학생 비자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프랑스 불자들의 주선으로 10여 년 전 이곳을 떠나더니 조그만 절을 꾸며 지금은 승가의 어른이 되어 민중의 귀의처로써 잘 계신다는 연락에 너무도 기쁜 마음이다. 유럽 방문 길에 꼭 자기를 찾아달란다.

 

지금 티벳내의 종교적인 상황은 참 암담하다. 이미 매스컴에 잘 알려진 대로 종교 자유와 달라이 라마의 환국을 요구하며 분신자만 근 백 여명에 이른다. 공식적으로 오늘까지 밝혀진 분신자만 94명에 이른다. 오늘도 이곳 큰 법당에서 추모회가 있었다. 현재 티벳내에서는 우선 감시와 어떤 자유로운 종교행사를 제약 받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중국 공산당에서 주장하는 “서장 자치구의 종교자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분신이 있고나서는 그 모든 책임을 달라이 라마의 사주라고 몰아 부친다.

 

달라이 라마는 몇 번이나 천명을 해왔다. 불법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어떤 자해나 분신을 삼갈 것을 누누이 말해왔다. 이번 중국 최고 통치권자로 등극한 시진핑은 분신을 돕거나 방조한 사람에게도 사형으로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선언 했다. 또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이곳 달라이 라마에게 살인죄를 적용하겠다고 한다.

 

필자가 이 한자리에서 25년을 티벳 난민들과 함께 하면서 꼭 불교를 위하고 달라이 라마를 위해서 티벳이 자유 독립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지구상에서 마지막 인간의 때 묻지 않은 인간의 영혼을 지닌 민족으로써 세계의 마지막 인류의 빛으로써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티벳 땅을 여행한 사람은 그저 독특한 풍경을 구경하는 여행이 아닌 티벳 사람을 만나본 이후에 느끼는 순수한 참인간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들을 만나보고는 누구나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거듭 생각해 보게 하는 인류의 마지막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 한민족과 가장 가까운 몽골리언의 조상이며 시조이기도 한데서 더욱 애정과 관심이 일어나는 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우리 한국 땅의 착한 민중들이 티벳내에 벌어지는 인권탄압에 남 일로 보며 무관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겨울 입구에서 티벳 장탕 고원의 혹독하게 추운 유목민이나 승가의 착한 스님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숙연해진다. 필자에게 겨울이 오면 생각이 깊어지는데 오늘따라 심한 악천후에 눈발이 진해간다. 20년 전 1993년 도보 카일라스 성산 순례가 내 일생 수행 길에 어찌 잊혀 질 수가 있겠는가. 끝까지 법에 희망을 두고 그 자리를 지켜나가는 용감한 그러나 비폭력의 티벳족으로 그리고 인류를 지킬 순수한 인간의 영혼을 지닌 사람으로 길이 남아지기를 기원한다.

 

2012년 12월 천축 겨울 스물다섯 번째를 지내며, 비구 청전 두 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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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광주 대건신학대에 다니다 송광사 방장 구산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1988년 인도로 떠나 히말라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매년 여름 히말라야 최고 오지인 라다크를 찾아 고립된 티베트 스님들과 오지 주민들에게 약과 생필품을 보시하고 있다. 어느 산악인보다 히말라야를 많이 누빈 히말라야 도인.
이메일 : cheongjeon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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