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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우물 파기'와 '버티기'

 
김인숙 수녀 2015. 03. 07
조회수 58 추천수 0
 

 

 

네가 할 수 있는 그걸 꽉, 잡아

 

 

 

 

글의 주인공 청소년들은 살레시오 남녀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마자렐로센터>와 <살레시오 청소년센터>에 현재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법원에서 ‘6호처분’이라는 재판을 받았습니다. '6호 처분’이란 소년법 제32조에 의한 보호처분을 말합니다. 비행성이 다소 심화되어 재비행의 우려가 있는 청소년을 교육을 통해 개선하기 위한 법입니다. 센터에 머무는 법정기간은 6개월이며 퇴소 후 집으로 돌아갑니다.

주인공 청소년들 가슴에는 대부분 아픈 가정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 인생의 산전수전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이 글은 유혹과 열정, 막무가내 용기로 살았던 자신들의 경험을 진솔하게 들려주면서 그것을 통해 같은 청소년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을 전하는 또래 멘토들의 이야기입니다.     

 

 

 

 

센터 생활 1년을 마치고 퇴소하던 날, 왠지 슬펐다. 밖에 나가서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아빠랑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어 어색하면 어떡하지? 엄마는 별거상태. 이런저런 걱정에 다시 센터로 들어가야 하나? 그런 생각까지 스쳤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이 평범한 자유를 다시는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1년 전, 나는 분류심사원에서 센터로 옮겨와, 이곳에서 6호처분 기간인 6개월을 무사히 마쳐서 그때 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업이 악화된 아빠의 권유를 받아들여 다시 6개월을 연장했던 것이다. 센터에 왔을 때 난 16살에 초졸이었으나 고등학교 입학 자격증인 고입검정고시 하나를 따고 나왔다.


센터를 퇴소한 나는 아빠가 살고 있는 서울 지역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다시 아빠를 따라 여주로 전학을 갔다. 학교 적응은 쉽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것은 친구 관계였다. 나는 나랑 성적이 비슷한, 그러니까 거의 뒤에서 노는 아이들끼리 어울렸다. 그러나 그 아이들과도 나는 뭔가가 달랐다. 방황하고 놀던 센터 아이들하고는 대화도 잘 통하고 또 그게 정상인 줄 알고 살았는데, 학교 친구들은 대화의 내용도 차이가 났다. ‘내가 많이 미흡하구나.’를 절감했다.


아빠는 평범한 학생의 길을 가고 있는 나에게, 네가 이렇게 잘 할 줄 몰랐다며 여기까지 온 것을 칭찬해 주었다. 내 또래라면 당연한 학교생활을 말이다. 그래서 나도 '여기서 무너지면 이때까지 한 것이 허무하다' 이러면서 마음을 잡았다.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일단 고등학교는 졸업하고 보자 다짐했다. 중학교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듣는 고등학교 수업은 너무 멍했다. 전혀 모르면서 앉아 있는 시간이 정말 아까웠다.

어느 날 국어시간이었다. 못 알아들으면서 멍 때리고 있는 게 싫어서 핸드폰만 만지고 있을 때 선생님이 물었다. 


  “너 뭐하냐?” 
  “핸드폰 만지는데요?”
  “수업 시간에 왜 그렇게 하는데?”
  “수업 재미없어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수업 끝나고 얘기하자.”

 

교무실에 불러간 나는 선생님께 솔직히 말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줄 모르겠고, 선생님이 학생 가르치시는 건 맞는데 왜 잘 하는 아이들 기준으로 가르치냐고,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럼 복습, 예습을 잘 하라 했다. 할 말이 없었다. 짜증도 났으나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교무실을 나오기 전 나는 선생님께 아이들 앞에서 반항해서 죄송하다고 사과드렸다.

 

study.jpg

 

*수업시간 모습. 영화 <써니> 중에서

 

 

얼마 뒤 난 또 다른 선생님이랑 부딪쳤다. 그 분은 나에게 '너는 머리도 나쁘고'로 시작하여 나의 가정사까지 들먹이며 비수를 꽂았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분을 향해 실실 웃으며 비꼬았다.  
  “그래요? 난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너, 잘 하는 거 아무것도 없어. 딴 얘들을 봐라. 아무리 공부는 못해도 하는 시늉은 한다. 넌 겉으로 보면 학생이냐 학생이 아니냐?”


기분이 무척 나빴으나 맞는 말 같았다. '교복만 입으면 학생인 줄 알지만 넌 껍데기일 뿐이야' 이런 뜻으로 들렸다. 사실 우리 학교는 전통있는 학교였다. 그런 학교를 내가 운 좋게 들어온 것이다. 나는 선생님께 야단맞은 적도 많았으며 그때마다 자주 반항하고 대들곤 했다. 그러나 예전과 확실히 달라진 점은 선생님을 대할 때는 ‘선생님’으로 생각하고 대했다. 그래서 실수를 한 후에는 죄송하다고 말했다. 예전처럼, 내가 왜 기를 눕혀야 되느냐 는 식으로 힘을 부리지 않았다.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을 뿐더러, 결과적으로 그런 행동은 내 자신만 더 불리한 자존심 세우기임을 나는 이제 알고도 남았다. 

 

정말 부끄러운 얘기 하나 하겠다. 이 학교에 갓 전학을 오던 고 1때였다. 아이들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전학 온 나에 대해 무척 알고 싶어 했다. “너 왜,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온 거야?” 하면서 내 곁으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다니던 나의 과거 얘기를 했다. 그게 나한테는 자부심, 자랑거리였으며 또 '나는 세다' 이런 걸 아이들 사이에 은근히 알리는 기회로 잡았다. 내 얘기를 들은 아이들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무슨 시나리오를 듣는 것처럼 '와, 대단하다, 신기하다'면서 나의 기대보다 좋은 반응을 보였다. 


그런 얘길 해서 그런지 아이들은 나를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그래서 편하게는 지냈다. 그러나 나의 허세는 중학생일 때나 하는 행동이었다. 나는 센터를 퇴소하면서 ‘아, 나는 이제 충분히 성숙해졌어’ 이러고 나왔는데……. 학생이 술 먹고, 담배 피웠던 일을 무슨 자랑거리마냥 떠벌렸던 그 자체가 너무 철없고 정말 숨고 싶었다. 아니 그냥 가만히나 있으면 되잖아?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니었잖아? 지금 생각해도 진짜 쪽팔리고 숨고 싶다. 나는 그때 그 일로해서 과거는 과정이라고만 생각해야지 자랑거리는 절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고사성어의 '구밀복검'처럼 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앞모습과 뒷모습은 달랐던 것이다. 

 

나는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학교에 적응이 되어가는 것 같았으나 왠지 마음 한편에서는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거 맞아? 이렇게 학교 다니는 거 맞아?'하고 의심이 들었다. 이런 심정을 친구한테 얘기 했더니 고맙게도 그 친구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공부 못해도 그냥 학교 다니는 거 당연한 거야. 대학교까지는 우리가 해야 되는 임무 아냐?"
친구의 대답에 나는 '아, 당연한 것이구나' 하면서 받아들였다. 학교다니는 아이들과 지내다보니 학교 아이들의 환경에 적응하게 되면서 걔네들의 기준에 맞추려고 나는 노력했다. 그런데도 뭔가 내가 많이 뒤쳐진다는 자격지심을 느끼고 그런 것 때문에 친구랑 싸운 적도 많았다.

학교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건 한문밖에 없었다. 어느 날 과학시간이었다. 정말 나가고 싶었으나 나가면 혼나니까 난 갑자기 선생님을 향하여 크게 소리쳤다.


  “선생님, 저 한문하면 안 돼요?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선생님은 수업 끝나고 얘기하자 했다. 나는 선생님께 내가 한문 자격증을 딸 건데 수업 방해 안 되게 한문이라도 공부하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알겠다, 수업에 피해만 안 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난 과학시간에 한자 외우기를 계속했다. 이 사실이 다른 선생님께도 알려졌다. 아마 과학선생님이 내 얘기를 하신 것 같았다. 
  “네가 한자 공부하는 이선화냐. 내 수업도 듣기 어려우면 그렇게 해라. 잘 할 수 있어.”
하시며 나를 도와주셨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이 안 좋으셨을까. 내가 한자 하나라도 잘 하니까 얘들도 그것을 인정해 주었다.

 

나에게 한자는 그림 같았다. 그래서 한자를 영상 시켜서 외우는 게 나만의 한자 암기력 방법이다. 나는 한자를 혼자 공부하여 8급에서부터 계속 올라가 고 3때 2급까지 땄다. 3급 때는 진짜 때려 치려다가 견뎠다. 그 고비를 넘기고 2급 따고 나니까 아. 나도 할 수 있네. 자신감이 생겼다. 한자 때문에 나는 중국어를 쉽게 할 수 있었고 우리 말 단어 뜻을 어림짐작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1급도 도전하려고 했는데 교재를 펴보니 중국책 보는 것처럼 막막했다. 그래도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아빠가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해서 일단 중지했다. 한자는 또한 나를 테스트 하는 도구였다. 오늘 이것만 외우고 놀자. 하면서 하루 외울 수 있는 분량을 내 스스로 정했다. 한 30자 정도였다.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나는 계속 들락날락하면서 외웠다. 바람 쐬고 들어오면 또 하고자 하는 새로운 마음이 생겼다.

 

 

 

 

'난 할 수 없어' 좌절하는 너에게

 

사랑하는 친구야!


고등학교에 입학 한 나는 항상 생각을 하고 살았어. 생각 안 할 수가 없었지.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자극주지.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지. 또 포기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 줄 것은 뻔하지…. 진짜 학교에서 무시받고 그럴 땐 다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었으나 그것도 임시방편 같았어. 앞으로 내가 80년을 산다면 나는 지금 10대 인데, 이제 시작인데 여기서 힘들다고 돌아서면 정말 내 미래는 초라할 것 같았어. 

 

그래서 너무 힘들 때는 내 자신부터 닦아야 될 것 같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일주일 동안 집에 있기도 하고, 그래도 힘들면 학교에 와서 ‘리클래스’에 혼자 있거나 선생님이랑 같이 있기도 했어. 거기서 독서하고 상담도 했어. 그러면 출석체크가 되었어. 수업시간에 잠이 오면 자고, 잠도 안 오고 심심하면 한자를 외웠어.

 

친구야!
난 진짜 많이 수업을 빠졌어. 무단으로도 빠지고 아이들이랑 재미로도 빠졌어. 하지만 학교 규칙 한도 내에서 놀고 도망 다녔어. 학교를 벗어나지 않고도 충분히 놀 수 있었어. 학교 다니면서 즐거웠던 일은 교복입고 아이들이랑 손잡고 군것질 하는 그런 사소한 게 좋았어. 여학생들은 옷에 예민하고 그게 자존심인데 교복을 입으니 옷 걱정 없는 것도 좋았어. 학교에서 밥 주지, 잠이 오면 책상에 엎어져 자면 되었어.

 

친구야
나는 '고등학교 졸업장은 따야지' 이 하나의 타이틀을 붙잡고 다녔는데 막상 고3 끝날 때 즈음 되니 너무 막연했어. 고3 선생님이, “선화 너도, 원서 한 번 넣어봐라. 고등학교도 이렇게 잘 견뎠는데 대학가서도 잘 해봐” 했으나 솔직히 두려웠어. 그래서 대학은 안 가려 했는데 나랑 같이 다니던 꼴통 아이들도 다 대학을 알아보고 있는 거야. 그래서 그런 분위기에 나는 또 물 흐르듯이 따라서 수시 2차 때 대학 원서를 넣었어.

 

친구야!
현재 나는 이렇게 대학생이고 이 생활을 정말 즐기고 있어. 나의 전공은 비즈니스과야. 아빠가 옷 유통 서비스 일을 하고 계셔서 도와드리고 싶어서 이 과를 선택했는데 앞으로 내 꿈은 좀 더 두고 볼 계획이야. 대학에서는 자기 꿈이 명확해지고 좁혀져. 1학년 학점은 3.5학점 받았어. F는 하나도 없어. 
 
친구야! 
어떻게 한자 공부를 하게 되었냐고? 센터에서부터 시작했어. 검정고시 시험이 끝나면 이해력이 바닥인 우리에게 한자를 조금씩 가르쳤어. 그 외에도 컴퓨터, 미용 등 자격증 딸 수 있는 기회가 참 많았으나 엄청 꼴통이고 게을렀던 나는 센터에서 1년 사는 동안 고입검정고시 하나 합격하고 선, '세월아 가거라, 난 퇴소하면 된다' 이러면서 시간을 보냈어. 그래도 한자는 하루에 몇 개씩은 외우면서 말이야. 난 그 한자 외우는 습관을 고등학교 3년 다니는 동안에도 계속 한 거야. 그래서 난 너에게 이걸 권하고 싶어. 뭔가 네가 할 수 있는 거면 놓치지 말고 꼭 한 번 시도는 해보라고. '난 할 수 없어'하면서 자기를 부정적으 보지 마.

어느 날 저녁이었어. 옷장 서랍을 정리하다가 센터 생활 때 썼던 일기장을 발견했어. 다시 읽어보니 진짜 나는 생각하는 게 다 부정적이었어. 내 자신을 진짜 싫어하고 남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받고 싶다는 욕심만 너무 컸어.

 

친구야. 
난 대학에 들어와 자격증 따는 동아리에 들었어. 센터에서 못 딴 미련 때문에 말이야. 자격증은 끈기를 보여주는 거야. 유통과 회계 자격증을 따고 싶은데 일단은 계회부터 하려고 해. 떨어지면 한자 공부처럼 계속 할 거야.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할 수 있는 그걸 꽉, 잡아.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물고 가봐. 그러면 그거 하나가 다른 것까지 다 좋게 연결돼. 정말이야. 
아 참, 하나 더 얘기 할 게. 난 지금도 식당엘 가면 나도 모르게 냅킨을 예쁘게 개고 있어. 센터에서 하던 좋은 습관이야. 한자 공부도, 냅킨 접는 것도 습관이란 게 정말 무서운 거였어.  

 

 

                       
장미는 
자신의 화려함과 함께하는 가시를 거부하지 않고
국화는 
진한 향기를 위해 견뎌야하는 찬서리를 물리치지 않는다.

 

모든 인내의 시간은 기쁨의 꽃을 피우고
사랑 때문에 나를 내어주었던 어제는
오늘 내게 ‘성숙’과 ‘자랑스러움’을 선물한다.

 

주님!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가능성을 품고 세상에 뿌려졌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의 최선은 
결국, 나를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꽃피게 할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묵묵히 이 한걸음을 또 걷게 하소서.
오롯이!

 

남민영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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