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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중항쟁과 미국의 개입

5.18광주민중항쟁과 미국의 개입 (1) 항쟁 발발 이전
 
 
 
우리사회연구소 이준영 상임연구원 
기사입력: 2015/05/13 [16:33]  최종편집: ⓒ 자주시보
 
 
 

 

 

유신체제의 붕괴는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큰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5.18광주민중항쟁은 군사독재정권의 재등장을 저지하고,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민중들의 위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유신의 암흑 속에서 숨도 쉬지 못했던 이 땅의 민중들은 박정희의 죽음 이후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습니다. 유신헌법이 철폐되고 민주헌법이 제정되어 민주권력이 성립하기를 바라던 국민들의 소망은 전두환 일당의 쿠데타와 광주에서의 유혈 진압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지만, 광주 민중들의 숭고한 희생은 끝내 1987년 6월의 민주화를 이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 광주항쟁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항쟁의 과정에서 한미관계의 모순이 새롭게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특히 1970년대 말 한미관계의 악화 분위기 속에서 한국에 박정희를 대신할 정권이 들어섰으면 하는 미국의 희망이 전두환 군벌을 묵시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는 점은 광주항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싸이러스 밴스(Syrus Vance)는 1979년 2월, 주한 미 대사 글라이스틴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습니다. “미국의 목표는 점점 더 번영하고 있는 남한과의 경제적 관계를 통해 미국의 경제적 이익의 몫을 최대한 얻어내는 것이다.”이는 1970년대 말, 미국이 한국에서 더욱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시켜 줄 세력을 찾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오직 안정을 원했을 뿐

 

  박정희가 살해당하고 난 이후의 한국정치는 그야말로 한편의 스릴러 영화처럼 긴박하게 흘러갑니다.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는 그날 밤 즉시 체포되었고,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수사를 진행합니다. 최규하는 12월 6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전두환은 12월 12일 ‘민주주의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축출하고 군부 내 사조직인‘하나회’를 중심으로 하극상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미국은 야당이나 민주화운동세력이 정권을 잡을 경우 한국사회가 위기로 치달아 갈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미국은 한국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자신들의 대한반도 정책인 강력한 반공정권 수립과 이를 통한 안정적인 체제 유지를 모두 실패하게 될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국 독재정권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미국은, 10.26이후 소위 야당이나 민주화세력을 아예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의 공식 외교문서들은 민주화운동세력을 “방해주의자, 야권의 완강한 충돌주의자, 소수의 극렬 기독교 재야인사들” 등으로 폄훼했습니다. 그러면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10.26 이후 한국의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집권을 위해 미국에 접근해왔다면서 실제적인 민주화보다 자신들의 권력 차지에 혈안이 된 한국 정치인들을 비웃었습니다.  

 

▲ 10.26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 자주시보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 신군부의 등장

 

  결과적으로 10.26사건은 전두환의 신군부체제를 탄생시켰습니다. 신군부체제는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로, 여전히 반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의 연장이었습니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은 10.26 이후 신군부의 등장을 예고하는 듯 “민주주의는 쿠데타나 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 입니다.”라며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10.26이 김재규의 말처럼 ‘혁명’이 아니라 사건에 그치게 된 것 역시 이 때문입니다. 10.26은 김재규 식의 테러방식으로는 군사독재가 해체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민중들은 광주민주항쟁이라는 유혈투쟁과 6월민주항쟁이라는 전국민적인 투쟁 없이는 민주화도, 미국으로부터의 자주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었습니다.

 

 

신군부와 미국, 오래된 밀월관계

 

  미국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이전부터 신군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아니, 전두환 등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미국이 양성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현재 자료공개의 범위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지만 1971년 미 국방성에서 나온 ‘군사원조 및 해외 군수판매자료’를 참고하면 1950년에서 1970년 사이 제3세계 군부의 장교들 중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군이 세계에서 최고로 많았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전체 도미 유학 훈련생의 숫자가 8만9342명인데 이 중 한국은 2만 1063명으로서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2만 3878명과 맞먹는 수준이었습니다. 한국 다음으로 대만이 1만 9732명, 3위가 통일 이전의 베트남으로서 1만 6364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둔 미군 고문단을 포함한 군사지원단의 수를 보아도 1971년 현재 한국이 716명으로 두 번째인 대만의 216명과 비교해 볼 때 미국이 한반도에 두는 군사적 비중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1971년은 닉슨정권하에서 미국의 세계전략이 유럽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을 때인데도 이 정도이니 이후 레이건 시대에는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만합니다.

 

 

▲ 베트남전쟁 당시 백마부대 29연대장이었던 전두환이 예하부대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미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 자주시보

 

  쿠바혁명 이후 제3세계의 군사정권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 케네디 정권 하에서 발생한 5.16쿠데타는 한국에 친일군벌 인맥의 장성급과 신진친미군부세력의 정치권력적 결합을 가져왔습니다. 1960년 당시 위관급 장교였던 전두환·노태우·차지철·최세창·장기오 등은 미국의 특수훈련부대 유학을 다녀왔으며, 이들은 공수부대로 불린 특전사 창설의 주축세력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장기적인 구상 하에 친미군부인맥을 육성해왔습니다. 전두환 등 이들 친미장교 그룹은 이후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지휘 하에 반게릴라전 실전경험을 축적하고 돌아와 군의 중책을 맡게 되었으며, ‘하나회’라는 군부 내 사조직을 만들어 결국 자신들의 정권 창출에까지 성공하게 됩니다. 유신말기 박정희 정권의 2인자 행세를 하던 차지철은 하나회의 대부를 자처했으며, 독재자였던 박정희 자신도 하나회를 친위세력으로 여기며 특별히 보호해 주었다고 합니다.

 

 

10.26사태와 12.12쿠데타, 미국은 어떻게 움직였나

 

  10.26사태와 12.12쿠데타가 연달아 일어났을 때, 미국은 매우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미국의 동북아 군사전략의 핵심적인 지역이었던 한국에서 대통령이 살해된 사건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북아 전체에서 미국의 이해를 뒤흔들 수 있는 사변이었습니다. 미국은 박정희가 살해된 다음날 즉시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에게 ‘미국 정부가 즉각적인 협조와 지지를 보내기로 함’을 알렸습니다. 12.12쿠데타가 발생했을 때에도 한국군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John A. Wickham)은 노태우가 전방을 지키는 9사단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들어오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으며, 전두환 대 정승화의 군부 내 갈등에 대해 자제를 요청하면서 ‘중립’을 지켰습니다.(서중석, 2007, 161쪽)

 

결국 미국은 신군부를 한국의 새로운 통치집단으로 인정했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3월 들어 이른바 ‘K공작’(King의 머리글자)을 가동하고, 4월에는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현역 군인이라 정식 부장에는 취임하지 못함)하며 본격적인 집권 야욕을 드러냅니다. 5월이 되자 이른바 ‘80년 서울의 봄’이라고 하여, 신군부와 재야·대학생들의 기싸움이 전면화됩니다. 신군부군은 ‘서울의 봄’ 시기에 일어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의 투입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 봄, 전두환의 ‘K공작’이 진행되는 동안 미 대사관과 주한미군은 신군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이 당시 상황에 대한 미국의 인식과 개입양상은 다음과 같은 외교전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 1980년 2월 미국은 전두환이 38선 후방에서 북한과 싸우기 위해 훈련을 받은 특전사단을 시위 진압을 위해 광주로 동원할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   


• 1980년 5월 8일 미 국방정보국이 합동참모국에 7공수 특전여단(광주에서의 최악의 만행에 책임이 있는)이 “전주와 광주의 대학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고 보고함.

 

• 1980년 5월 8일 글라이스틴이 특수부대가 “가능한 학생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옮겨졌다고 워싱턴에 보고함.

 

• 1980년 5월 9일 글라이스틴이 전두환과 만나서 미국은 남한이“만약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는 긴급대책”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언함.

 

• 1980년 5월 9일 미 국무부와 국방정보국의 전문: 미국은 전두환에게 군대를 학생시위에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적절한 승인을 해주었음을 명시함.

 

• 1980년 5월 10일 미 국무부 차관 크리스토퍼가 글라이스틴에게 보낸 전문: “우리는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려는 남한의 계획에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

 

• 1980년 5월 16일 미국은 제 20사단을 그들의 작전통제권에서 방출함. “워싱턴에 있는 그의 상관들과 의논한 후에” 위컴은 제 20사단이 광주로 배치될 수 있도록 승인함.  

(조지 카치아피카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2008-5-29 (강연자료)  

 

   1980년 5월 미국의 ‘개입’은 은밀하면서도 매우 치밀하게 추진되었습니다. 미 국무부와 국방부는 전두환의 군대 동원 계획을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적절한 승인’을 통해 군대 동원을 가능케 해주었습니다.

 

  1980년 5월 15일, 십 만 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서울역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을 지켜본 신군부와 미국은 사태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는 시위대 중 일부가 미 대사관 담장을 넘으려 시도하는 모습을 보며 실질적인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이에 신군부는 드디어 ‘권력 접수’를 위해 계엄의 전국 확대, 비상기구의 설치, 국회해산 등을 결의하고 5.17쿠데타를 일으킵니다. 허수아비 대통령을 옆에 낀 신군부가 대한민국을 접수해버린 것입니다.

 

 

*5.18광주민중항쟁의 전말

 

10.26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되자, 당시의 국무총리이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당연히 유신헌법이 철페되고 민주적 헌법이 제정되어 직선제 선거로 새로운 권력이 성립되기를 바라던 국민들의 소망과는 동떨어진 일이었습니다.

 

최규하가 대통령이 된 이후 헌법개정이 논의되면서 이른바 이원집정제 등이 거론되는 한편, 박정희 암살사건의 조사를 맡았던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과 9사단장 노태우 소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마침내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가 박정희 암살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을 벌여 정승화를 보안사령부 취조실로 연행한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공수특전단장 정병주 등의 부대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출동했지만, 그 속에도 전두환 등과 내통한 세력이 있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수도권지역의 주요 지휘관을 교체하려고 하자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12.12쿠데타로 전두환 등이 군부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이후 전두환은 최규하를 압박하여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찬탈의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전국의 대학생들과 재야세력 등은 강력한 반대운동을 펼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1980년 ‘서울의 봄’입니다.

 

그러나 전두환 등은 10.26사태로 내려졌던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1.정치활동 정지, 언론·출판·보도·방송의 사전검열, 2.대학에 대한 휴교조치, 3.북괴와 동일한 주장이나 용어 사용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10호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야당지도자 김대중을 체포하고 김영삼을 연금했습니다.

 

광주에서는 전두환 일당인 ‘신군부’의 계엄 확대와 휴교령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은 휴교령이 내린 교내로 진입하려 하다가 계엄군의 제지로 실패하자,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계엄군의 저지가 격렬해졌고, 그 과잉진압에 분개한 일반 시민들이 가담하여 시위는 하루 사이에 시민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학생과 시민이 합세한 민중항쟁은 곧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어갔습니다.

 

학생시위에서 시작하여 민중항쟁으로 변한 광주항쟁은 2백여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시위를 계기로 노동자·도시빈민·회사원·점원 등이 폭넓게 참가하여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무장’함으로써 폭력 저항으로 변해갔습니다.

 

정부 쪽에서는 최규하 과도정부의 신현확 내각이 물러났고, 현지 ‘신군부군’ 내에서는 광주지방의 향토사단과 그와 별도로 투입된 공수부대 사이에 ‘지휘체계의 이원화’가 빚어졌습니다. 시민대표와 도지사 간의 협상이 결렬되자 항쟁 참가자들은 본격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심에 모인 약 10만명의 군중 속에는 각처의 무기고에서 탈취한 카빈총으로 무장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시민의 일부는 근처 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를 탈취하여 무장하는가 하면, 이웃 고을 화순탄광 광부들의 협조로 다량의 화약과 뇌관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나주·영산포·화순 등지의 경찰관서에서 카빈총·엠원총 등 8백여 자루와 5만여 발의 탄환을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반입함으로써, 본격적인 ‘무장시민군’이 형성되었습니다.

 

▲ 경찰서 무기고 등을 습격해 카빈총·엠원총 등으로 무장중인 시민군     © 자주시보

 

주로 노동자, 공사장 인부, 구두닦이, 넝마주이, 접객업소 종사원, 부랑아, 날품팔이, 학생으로 구성된 ‘시민군’은 계엄군 임시본부인 전남도청을 기관총과 소총으로 맹렬히 공격하여 ‘신군부군’을 ‘전략상 후퇴’하게 만들었습니다.

 

민중항쟁 발발 4일만에 ‘신군부군’이 후퇴함으로써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시 전체가 ‘시민군’의 점령 아래 들어갔습니다. 후퇴한 계엄군은 항쟁의 확산을 막기 위해 광주시 외곽을 봉쇄했습니다. 계엄군에 의해 포위된 광주시내에서는 관료·목사·신부·기업가 등 15명으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군대 투입반대, 연행자 석방, 사후보복 금지, 부상자·사망자 치료와 보상 등의 조건으로 신군부와 교섭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교섭조건은 항쟁 당초의 요구였던 계엄철폐, 김대중 석방, 군사정권 퇴진 등이 포함되지 않은 반면 시민군의 일방적 무장해제만이 제시되었다 하여 항쟁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신군부군’쪽도 이들 조건을 수용하지 않아서 교섭은 성과 없이 끝났으나, 이 과정에서 이미 시민군이 가진 무기의 절반 정도가 반납되었습니다.

 

교섭이 결렬되고, 광주 시내에서 시민궐기대회가 계속되면서 항쟁의 확산을 주장하는 기층민중 출신의 새로운 집행부가 구상되었습니다. 이 집행부는 시민군 조직을 갖추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미국의 압력이나 일반 국민들의 여론 및 저항으로 ‘신군부’세력의 집권 기도가 좌절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시민군이 보유한 무기는 총 5400여 점이었으나, 반납 후에는 1000여 점 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군부군 쪽은 전투사단과 공수여단 약 4천 명의 병력으로 5월 27일 새벽 3시를 기해 ‘진압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이 진압작전은 신군부군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약 4시간 만에 종료되었습니다. 이로써 10일간에 걸친 광주민중항쟁은 일단락되었습니다.


5.18광주민중항쟁과 미국의 개입 (2) 항쟁 발발 이후
 
 
 
우리사회연구소 이준영 상임연구원 
기사입력: 2015/05/13 [16:47]  최종편집: ⓒ 자주시보
 
 

5.17쿠데타와 광주에 대한 군대투입, 미국은 알고 있었다.

 

  19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신군부가 민중들의 열망과는 반대로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총칼로 군부독재를 연장하려고 했을 때 미국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리고 신군부의 5.17군사정권 연장 쿠데타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광주에서 격렬하게 일어났을 때, 미국은 광주에서의 항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국이 한국인들의 생명이나 민주화보다, 친미 군부정권의 안정을 더욱 중요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무렵 미국은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한국의 정국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둔 것으로 보입니다. 신군부는 1980년 초부터 적 후방에 투입되어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최정예부대인 공수특전단들에게 ‘충정작전’이라는 이름의 폭동진압작전을 대대적으로 지시합니다. 공수특전단은 이미 부마항쟁과 서울 일부 지역에 투입되어 시위 진압과정에서 가공할 잔인성을 보여주며 야만성을 드러낸 집단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주한미국과 미국정보당국은 이들의 속성과 훈련동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의 외교전문에 따르면 미국과 신군부는 1980년 5월 무렵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격화될 경우 이들 특수부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문제에 대해서 긴밀하게 조율했으며, 신군부가 군사적 행동을 하기 전에 상호 간에 사전 협의를 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군부는 시위 진압을 목적으로 이동하는 부대의 동향을 한미연합사에 상세히 보고하고 있었고 상호간에 긴밀한 조율이 오갔습니다.(박만규, 2003, 223쪽)

 

 

미국과 신군부의 긴밀한 조율 속에서 결정된 공수부대 투입

 

  5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광주에는 금마에 주둔 중이던 제7공수특전여단 33·35대대 병력이 투입되었습니다.이들은 2월부터 폭동진압을 위한 ‘충정작전’ 훈련을 받은 인간병기들이었습니다. 광주는 선혈이 낭자한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시민들의 저항은 오히려 더 거세지고 조직화되어 갔습니다. 광주에서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자, 5월 22일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한미연합사 소속의 한국군 20사단의 네 개 연대를 ‘폭동진압(Riot Control)’용으로 허용해 달라는 신군부의 요청을 승인해주었으며, 데프콘3 수준의 경계태세를 발동해 신군부의 광주 진압을 전후방에서 지원해주었습니다.

 

  한편, 미국은 나중에 여러 인터뷰에서 광주에 대한 무력진압작전을 5월 25일에서 27일로 늦춘 것은 자신들의 인도적 배려에 기초한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이것 역시 거짓말이었음이 탄로 났습니다. 도청 진압작전이 27일로 연기된 것은 오히려 신군부와 미국 간의 주도면밀한 군사작전 모의의 결과였습니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도청 진압작전은 미국의 공중지휘용 공군기와 항공모함 코럴시호의 한국 작전배치시간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5공 청문회 당시 이희성의 증언)

   

 

▲ 해제 및 공개 된 5.18당시의 CIA비밀문서     © 자주시보


 

미국은 방조자가 아니라 공모자

 

  미국 정부는 1989년에 광주학살을 해명하면서 자신들은 광주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고, 사태를 제어하려 했지만 신군부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미국의 변명은 거짓이었습니다. 5.18 이전부터 공수부대의 훈련과 작전이동을 상세하게 알고 있던 주한미군과 미 정보당국의 행태를 본다면, 이들은 충분히 광주에서의 학살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참상을 보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고 믿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 미국은 광주학살을 묵인한 방조자가 아니라, 명백히 책임이 있는 공모자였습니다. 미국은 5.17쿠데타를 용인했고 공수특전단의 광주 및 주요도시 출동을 승인했으며, 한국군의 학살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미국은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만든 일종의 군사혁명위원회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통해서 파쇼권력을 행사할 때 이를 지지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보수정권인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 후 첫 방미인사로 전두환을 초청함으로써, 신군부 정권이 국제적인 정당성을 얻게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백악관은 전두환의 방미가 “전두환의 입지를 공고히 해 주면서 전두환 정권의 합법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해 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미국에게서 신군부의 잔인무도한 학살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광주항쟁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위컴은 한국인을 들쥐에 빗대면서 비하했다.     ©자주시보

 미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광주항쟁을 ‘폭동’과 ‘무질서’에 대한 군부의 정당한 ‘질서회복 노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은 광주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한국인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는 복종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한국의 국민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1980년 8월 27일 AP통신과의 회견에서 “10월 사태 이후 미국이 한국 공작에서 가장 성공한 일은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 보람도 크다.”고 말해 노골적으로 전두환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5월 21일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은 본국으로 보낸 전문에서 “군부가 상당한 무력을 사용해서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광주항쟁의 원인을 ‘지역주의적 정서’, ‘호남인들의 오랜 소외감과 불만’, 그리고 ‘김대중 등 특정 정치인 차원의 문제’로 치부했습니다. 이는 이후 신군부가 광주항쟁을 매도할 때 사용하던 전형적인 궤변이 되었습니다.

  다음의 외교전문들은 미국이 광주항쟁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짐작케 해주는 것들입니다.

 


• 1980년 5월 19일 한미연합사령관 존 A 위컴 주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빨리 힘을 규합하고 어떤 형태로 그것을 가져갈 것인가이다.”

 

1980년 5월 21일 글라이스턴이 DC에 보낸 전문: “광주에서의 대규모 반란은 아직 통제밖에 있으며 걱정스러운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 “…대규모의 폭도가 일시적으로 도시를 장악하고 있으며…”

 

1980년 5월 22일 미 국방부 대변인, 위컴이 “한국 정부로부터 나의 작전 지휘권 아래 있는 특정 한국군을 시위대의 진압작전에 동원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이를 수락, 동의하였다”고 시인했음을 발표함.

• 1980년 5월 23일 워싱턴에서 미 국무부 대변인 호딩 카터(Hodding Carter), 카터 정부는 “남한의 정치 자유화에 대한 압력을 연기하는 한편 안보와 질서의 회복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고 발표.

 

• 1980년 5월 24일 미국, 한국에 미국군의 코랄함대가 도착할 때 까지 광주 진압을 연기해달라고 요구함.

 

• 1980년 5월 25일 국무장관 무스키의 전문: “광주의 상황은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언급”. 그의 정보통은 “온건파 수습위는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과격파가 등장해 세력을 장악했다. 인민재판이 열렸고 약간의 처형이 이뤄졌다. 학생시위대는 혁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신원미상의 무장한 과격파들로 대부분 대체되었다”라고 보고함.

 

• 1980년 5월 26일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보낸 전문: “광주의 상황”은 “더욱 나쁜 쪽으로 과격한 전환을 했다.과격파들로 이뤄진 무장그룹과 심지어 인민재판과 처형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 1980년 5월 26일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글라이스틴에게 미국이 평화로운 해결을 중재해줄것을 요청. 글라이스틴은 대답을 거절함.

 

• 1980년 5월 31일 카터 대통령, CNN과의 인터뷰에서 “때로는 안보의 중요성이 인권의 중요성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고 발언 함.

 

(조지 카치아피카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2008-5-29 (강연자료) 
 

  

5.18광주항쟁을 통해 드러난 미국의 맨얼굴

 

  전두환 일당이 벌인 12·12쿠데타가 국가 내부의 권력구조를 뒤바꾼 격변이었다면, 공수부대의 학살에 뒤이은 광주항쟁은 한국의 국가와 민중과의 관계 뿐 아니라 한미관계를 재구조화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민주주의 수호자로서의 미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미국은 반공을 지향한다면 그 정권이 비록 독재정권이라 할지라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광주항쟁 이후 한국에서 미국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1980년 6월에 만들어진 「광주 시민 의거의 진상」이라는문건입니다. 문건은 광주항쟁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의 맨얼굴을 직시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미국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미국을 참으로 오랫동안 혈맹의 우방으로 생각하고 신뢰해왔다. (…) 그런데 이번 광주사건을 비롯한 10·26 이후의 일련의 미국의 태도에 대하여 우리는 종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한미 협의 하에 실시되는 국군의 작전이 어떻게 동족을 살육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미국은 이에 동의할 수 있었을까. (…)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옹호가 미국의 국가이익에 우선할 수 없다는 미국의 기본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난 이상 우리는 미국을 새로운 눈으로 주시해야 한다.” 

   

▲ 1985년 5월 23일, 70여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 미국문화원을 기습 점거, 농성을 벌였다.     © 자주시보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은 물러가라’, 반미운동의 시대 개막되다

 

  광주의 시민군까지도 미국을 자신들의 구원자라고 여기고 있던 친미국가 한국에서 드디어 반미운동이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광주학살에 미국의 동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데 이어 레이건이 ‘학살의 원흉’ 전두환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자, 미국에 대한 한국 민중들의 적개심과 배신감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그 결과 1980년대 한국의 역사는 군사독재와 미국적 세계관에 대한 치열한 저항의 기록으로 점철 되었습니다. 많은 대학생들이 구속당할 각오를 하면서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고, 때로는 미 문화원을 점거하거나 미 대사관에 대한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생들의 반미시위는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광주항쟁과 뒤이은 1980년대의 반미시위는 미국을 영원한 ‘우방’으로 여겨왔던 한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광주항쟁을 통해 한국인들은 냉정한 ‘제국’이자 탐욕적인 ‘외세’로서 미국의 면모를 각성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미국에 대해 자주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끝)

 

*참고문헌
 

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0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3』, 돌베개, 2010

김기협, “1987년 6월, 전두환은 왜 군을 출동시키지 못했나?”, 2011-11-04, 프레시안

박만규, 「신군부의 광주항쟁 진압과 미국문제」, 『민주주의와 인권』, Vol3. No1.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2003

조지 카치아피카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 2008-5-29 (강연자료)

이삼성, 「광주학살, 미국·신군부의 협조와 공모 : 최믄 미국 외교문서를 통해 본 5·17쿠데타, 광주학살과 미국의 대외정책」, 『역사비평』, No.34, 1996

이삼성,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당대, 1995

이삼성.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의 민족주의 : 광주항쟁·민족통일·한미관계』, 한길사, 1993

장준갑, 김건, 「1980년대 초반(1980-1981) 한미관계 읽기」, 『미국사연구』, Vol.38, 한국미국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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