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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운동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다

영화 <암살>, 보고 즐기는 것은 자유지만…
 
김갑수 | 2015-08-03 14:04:4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영화 <암살>을 오락으로 즐기거나 영화적 리얼리즘에 공감하는 것에 유감을 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일부에서 영화의 픽션을 역사적 사실인 양 거론하는 데에는 반대한다. 역사적 사실을 잘 아는 사람 눈에는 이 영화가 재미있거나 진지해 보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므로(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다) 영화에 대한 언급을 하지는 않겠다. 다만 영화로 인해 우리의 독립운동과 무장항쟁이 왜곡되어 알려지는 것 같아 노파심에서 이 글을 올리기로 했다. 이 글에서 나는 우리의 객관적인 독립운동사를 최소한으로 요약, 평가해보려 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크게 셋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상해에서 중경에 이르는 임시정부 중심 세력, 광동봉기에서 대장정 그리고 연안에 이르렀던 중국인민혁명 참여 세력, 마지막으로 (오는 8월 8일부터 시작되는 민갑 답사 노정과 거의 겹치는) 간도 즉 동북만 반일무장투쟁세력이다.

이 셋을 편의상 각각 상해파, 관내파, 동북파라고 호칭한다. 상해파는 광복군, 관내파는 조선의용군, 동북파는 조선인민혁명군을 만들었다. 요즘 북에서 말하는 ‘백두산 혈통’은 바로 이 동북파를 가리킨다.

다만 이렇게 단순히 3분법으로만 논의하다 보면, 국내 항일 의병의 뚜렷한 지도자였던 왕산 허위 선생과 동북에 가서 미리 투쟁했던 이상설 선생과 안중근 의사와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홍범도 그리고 김좌진과 이범석 등을 놓칠 수가 있고, 이른바 북경파로서 무정부주의와 관련되는 이회영. 신채호 선생 등을 또한 놓칠 수가 있다.

그리고 양세봉 장군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조선혁명군 지도자로서 ‘군신’ 칭호를 얻은 탁월한 무장투쟁가였다. 양세봉 장군은 이념을 배격했다. 어느 면에서 그는 가장 순수한 무장투쟁가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는 유일하게 남과 북 국가묘지에 동시 안장되어 있다.

상해파의 최대 공로자는 예관 신규식과 백범 김구이다. 신규식은 상해임시정부를 만든 분이고, 김구는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킨 분이다. 제국주의 군부에 인상 깊은 테러 공격을 감행한 윤봉길의 상해홍구공원 거사는 백범 김구의 작품이었다. 참고로 연길 동북항일연군기념관에는 상해파 중에서는 유일하게 신규식 선생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다.

상해파의 약점은 무장투쟁보다 외교노선에 치중했던 점이다. 또한 무장투쟁 역량이 없다 보니 간헐적으로 테러공격을 수단화하기도 했다. 신규식 선생은 국내에서는 의병투쟁을 했고 중국에 가서 손문혁명대에 투신하여 무장투쟁을 했는데 임시정부를 창업한 이후 임시정부의 분열에 항변하는 단식 끝에 작고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는 윤봉길 거사를 중국군 몇 개 사단의 공로 이상으로 치하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추가 지원을 요청하는 김구에게 “일본군 장군을 하나 죽이면 또 하나의 일본군 장군이 뒤를 이을 뿐”이라며 테러공격의 비효율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아무튼 이들은 8.15 이후 국내로 돌아가, 정확히 말하면 이남으로 가서 또 다른 시련에 봉착한다. 여러분은 한독당, 즉 한국독립당을 알 것이다. 그들을 궤멸시킨 세력이 누구인가? 미군정과 친미 이승만 세력이었고 여기에 친일지주세력 한민당이 야합했다. 이승만이 만든 자유당은 오늘날 새누리당의 전신, 또 다른 친일세력 한민당은 오늘날 민주당 즉 새정치연합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비극이라면,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이었던 한독당이 망해버린 데에 있다. 반대로 말해서 친일세력이 득세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민국의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극이자 모순이다. 한독당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구는 8.15에서 불과 4년도 안 되어 안두희의 흉탄에 숨졌다. 그런데 안두희의 배후는 누구였나? 김구 암살은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과 한민당의 합작이었다.

독립운동 세력의 제2열이라고 할 수 있는 관내파와 제3열인 동북파는 8·15 이후 북으로 귀환한다. 관내파에는 오성륜과 박영과 김산 등이 있었다. 박영은 광저우에서 만난 김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혁명이 완성되기 전까지 내게 평화는 단지 고통일 뿐이다.”

김산의 본명은 장지락으로서 흥미로운 책 <아리랑>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밖에 중국인민혁명군가를 작곡한 음악가 정율성이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욱 본격적인 관내파로서 조선의용군과 관련되는 양림과 무정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중국혁명군 내에서도 크게 인정받은 우수한 혁명 열사들이었다. 특히 무정은 중국 인민혁명군 전체의 ‘포병대장’ 소리를 들었다. 여기에 약산 김원봉을 추가할 수가 있다. 이들은 이북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작업에 참여했다가 몇 년 후 김일성에 의해 정리된다.

독립운동의 제3열, 3열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하며 체계적이고 자주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한 세력이다. 리홍광, 이동광, 허형식, 최용건, 김책, 김일성, 최현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살아남은 최용건 김책 김일성 최현 등은 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 핵심이 되었다.

이들은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군과 합작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조선인들의 자질이 워낙 출중하여 따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호칭이 부여되기도 했다. 김일성이 지휘한 항일유격전 중에서 보천보 전투와 간삼봉 전투는 특히 유명하다. 김일성은 친화력과 리더십이 있어서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모두 인정받았다.

최용건은 김일성보다 13살, 김책은 김일성보다 9살이나 많았지만 러시아 령 하바로프스크에 합류한 이후부터 줄곧 그를 지도자로 받들며 협조했다. 이것은 중국 인민혁명 과정에서 주덕과 주은래가 후임 마오쩌둥을 끝까지 보위한 경우와 비슷하다. 김일성이 첫 부인 김정숙과 결혼한 것도 러시아령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동북 반일항쟁파의 강점과 미덕은 첫째 무장투쟁의 방식이었다는 점, 이것은 독립운동의 본격성을 의미한다. 둘째 유격투쟁 방식이었다는 점, 이는 즉 뛰어난 전략 전술성을 의미한다, 셋째 투쟁 과정의 높은 도덕성에 있다. 그들은 전혀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며, 극한상황,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약탈, 테러, 단식, 이밖에 비인간적인 기만행위 등을 삼갔다.

1958년 북의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인민일보>는 아래 글을 사설로 내놓았다.

 

중국 인민은 북벌의 전화(戰火) 속에서, 장정(長征)의 길에서, 항일의 간고한 세월 속에서, 장개석의 통치를 뒤엎는 승리의 진군에서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중국인민과 공동투쟁을 했으며, 자기 생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중국혁명과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원조한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1958. 11. 22자 인민일보)

 

그렇다. 신해혁명의 혁혁한 조력자 신규식 선생, 광동봉기에 참여한 오성륜, 박영, 김산 그리고 8,000km 대장정에는 1,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참여했으며, 항일무장투쟁에는 2만 명의 조선 젊은이가 참전했고, 국공내전에는 무려 7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이 전투의 고비마다 결정적인 무공을 세웠다.

일신교도들은 ‘신의 역사’를 말한다. 반면 한국의 사학자 김준엽은 ‘역사의 신’을 말했다. 내 개인적 소회로 ‘신의 역사’는 터무니없지만 ‘역사의 신’은 그럴듯해 보인다. 지금 박근혜 정권은 숱한 역사 왜곡으로 역사의 신을 모독하고 있다. ‘신의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의 용어를 빌리면 ‘독신죄’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를 장악하여 미래를 지배하려는 흑심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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