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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눈… 야권은 대권탈환에 성공할 수 있나?

 
 
다수의 지리멸렬 vs 소수의 강력함, 선택은 야권 몫
 
임두만 | 2015-09-05 09:19:0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북한과 중국 등 대외 변수에 힘입어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50%를 넘겼다는 뉴스가 포털 뉴스창을 장악하고 있다. 반면 이에 대항하는 야당 정치권은 어떤 돌파구도 찾지 못하고 오늘(4일)도 ‘혁신안’을 두고 서로 죽일듯 치고박는 지리멸렬하고 있는 가운데 지지자들까지 서로 비난하는 등 미래가 없는 싸움만 열중이다.

그러면 이대로 야권은 지리멸렬, 이전투구로 세월을 보내면서 현 집권층의 차기 집권 도우미로 전락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돌파구가 있는가? 차기 대권은 어느 쪽이 유리한가? 대선 2년 전의 잠룡들은 어떤 행보를 했으며 그중 누가 대권을 잡았는가?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 된 1987년 이후 대선실시 2년 전의 역사를 살펴본다. 그 안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


1. 1992년 대통령 선거 2년 전 무슨 일이 있었나.

1990년 1월 22일 김영삼은 노태우 김종필과 3당합당을 발표, 전 국민을 패닉 상태에 빠뜨렸다. 이어 2월 9일 민주자유당을 창당, 당 대표에 취임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거대여당을 만든 뒤 국내정치에서 한 발 빼고 북방외교에 돌입, 그해 10월 소련과 수교협상을 체결했다.

3당합당 후 국내정치는 민자당 김영삼 대표가 이끌었다. 거대 여당의 등장으로 여소야대로 사라졌던 날치기가 등장하는 등 일방통행식 정치가 횡횡했다. 이에 김대중 신민당 대표는 민자당의 방송관계법 등의 날치기 통과, 정기국회 단독소집, 지방자치제 법안 시행 연기 등 여당의 일방통행에 항의, 10월 8일부터 20여 일의 단식을 강행했다. 그리고 이 단식으로 지방자치제 실시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듬해 실시되었던 전국 광역 기초의원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에 김대중의 돌파구는 꼬마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한 단일야당 체제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꼬마민주당 측의 거의 모든 요구조건을 들어주면서 결국 전체 야권을 통합하는 단일야당 체제를 갖췄다. 하지만 단일야당 체제가 선거승리를 담보하지는 못했다.

특히 이듬해 현대그룹 회장이던 정주영씨가 국민당을 창당하면서 결과적으론 김대중 도우미 역할도 했다. 정주영의 국민당은 민자당 내분으로 김영삼 체제에 반기를 들고 탈당한 민정당 TK세력을 흡수함과 동시에 1992년 총선에서 TK지역 승리를 통한 31석의 의석을 획득하는 등 기염을 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정주영씨가 대선에 출진했다. 김영삼 표 갈라치기 였다. 확실한 김대중 도우미였다. 그래도 대선은 김영삼이 이겼다.

엄밀히 말하면 당시 선거는 여권분열, 야권 단일화였다. 그래도 야권이 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권의 치밀한 선거전략이 이겼다. 그 전략은 북한변수를 이용한 전쟁위협 부추기기다. 이를 위해 대선 직전 칼기 폭파범 김현희를 귀국시켰다. 또 이선실 간첩사건을 통한 재야인사 124명을 검거, 이들과 김대중 연계설 의혹전파 등을 통한 선거전술을 썼다. 그래도 힘들자 막판 ‘초원복집’사건으로 통칭되는 지역감정 극대화 선거전략까지 이용했다. 결과적으로 거기에 당했다.

분열 또는 통합 등과 같은 정치세력 변화가 승패를 가져 온 것이 아니라 대선 2년 전의 정치지형 안정화를 통한 전 여권의 치밀한 선거전략(관권선거)이 승패를 좌우한 것이다.


2. 1997년 대통령 선거 2년 전 무슨 일이 있었나?

1995년 3월 30일 민지당을 탈당한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원내 3당으로 등장했다. 90년 3당 합당 후 5년 만에 다시 분가를 한 것이다. ‘여권 분열’이다. 여기에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나 508명의 사망자와 93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또 7월 23일 씨프린스호가 제3호 태풍 페이에 휩쓸려 좌초되어 총 99000톤의 기름이 유출되면서 남해안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이런 피해를 낸지 이틀 후 7월 24일 태풍 재니스가 상륙. 28일까지 지속되면서 전국에 엄청난 피해를 냈다. 인공재해와 자연재해의 합작으로 정부를 코너에 몬 것이다.

9월 5일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정계에 복귀했다. 통합민주당 의원 65명이 탈당, 가세했다. 야당도 분열한 것이다. 12월 6일, 김종필계가 탈당하면서 흐트러졌던 민자딩은 이회창 전 총리를 영입하면서 전열을 정비, 신한국당으로 거듭났다. 공식적으로 원내는 4당체제(신한국당, 국민회의, 통합민주당, 자민련)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이는 1988년 국민들이 투표로 만들어 준 4당 체제(민정당, 평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로의 복귀로 볼 수 있었다. 이후 4당은 이듬해인 1996년 총선에서 3당으로 변했다. 신한국당, 국민회의 자민련은 살아남고 통합민주당은 원내교섭단체에 실패한 것이다.

이윽고 1997년 대선… 김대중이 이회창을 이겼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실패한 이인제의 탈당과 국민신당 창당을 통한 여권분열, 여권에서 미리 분열한 자민련의 김대중 합세가 가장 크다. 이 와중에 원래의 김대중 세력이었던 통합민주당이 이회창에게 넘어갔지만 큰 임팩트는 없었다.(1997년 11월 21일,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이 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당명은 한나라당)

그 외에도 김대중이 승리한 이유 중 가장 확실한 근거는 김영삼 정권의 경제관리 실패로 인한 IMF구제금융 사태다. 그리고 또 하나, 정권 책임자의 공정한 선거관리를 들 수 있다.

당시 선거에서 신한국당은 강삼재 사무총장이 나서서 김대중 비자금 의혹을 이슈화 했다. 이는 그동안 전가의 보도였던 북한변수를 통한 냉전선거가 통하지 않았음이다.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서 창당 주역이었던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의 돌연한 입북이 있었음에도 이회창 후보의 아들 2명이 모두 병역을 면제받은 의혹이 더 커서 오익제 건이 효과가 없었다.

이에 김대중 비자금 건을 이슈화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이 “선거 중에 검찰의 수사는 선거 개입으로 비칠 수 있으므로 중단한다”고 발표하는 등 중립을 선언했다. 그래서 외적 변수가 사라졌다. 승리는 김대중이 가져갔다. 결국 김대중의 승리는 정권의 공작적 선거개입이 없었던 점과 IMF구제금융이라는 외적 효과, 그리고 여권분열 등 복합적 상황의 에스켈레이트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은 DJP연합이란 '적과의 동침'...반면 애초 우군이었던 영남야권인 통합민주당 세력의 '이탈 및 적진귀순'이다. 즉 내부 분란보다 적과의 동침이라도 일사분란이 더 효과적이란 교훈이다.


3. 2002년 대통령 선거 2년 전 무슨 일이 있었나?

2000년 1월 20일 집권여당 새정치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재창당되었다. 1997년 대선 당시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신당을 꾸렸던 이인제 세력과 통합한 신당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그동안 재야 민주세력으로 불렸던 진보진영은 1월 30일 민주노동당을 창당, 정치세력화를 완성했다. 반면 야권은 3월 8일 한나라당 공천에 탈락한 김윤환, 이수성, 신상우, 조순, 이기택 등과 새천년민주당에 참여치 않은 박찬종 장기표 김상현 등이 조순을 당 대표로 민국당을 창당했다. 여권통합, 야권분열을 통한 4당체제가 다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해 4월 13일 치러진 16대 총선은 한나라당 133석, 새천년민주당 115석, 자민련 17석. 민국당 2석이란 결과를 냈다. 여권통합 야권분열이었음에도 야당이 승리했다. 이유는 다들 말하는 지역주의 선거가 이유이기도 하지만 김대중 정권의 검찰총장 부인이 개입된 옷로비 의혹과 대통령 아들들이 개입된 밴쳐 비리 등 이른바 3홍비리로 여당이 인기를 잃은데 있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은 노무현이 이겼다. 노무현은 2000년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종로구를 내놓고 고향 부산으로 낙향 출마한다. 이미 1992년에 낙선했고, 1998년 지방선거 당시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뒤 종로 재보선으로 통해 당선하여 정계에 복귀했음에도 당선이 가능한 종로를 던지고 다시 부산으로 간 것이다. 이때 얻은 별명이 ‘바보 노무현’이다.

선거 결과는 당연히(?)낙선...그러나 6월 13일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고 6월 15일 6.15 공동선언을 발표한 김대중 대통령이 귀국 후 개각을 하면서 7월 1일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하는 것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줬다. 이후 노무현의 대통령 후보 당선 과정은 생략해도 된다. 다만 적법하게 후보가 되었음에도 후보단일화 세력이란 후단협 사태를 통한 당내 후보흔들기… 그리고 그 세력들의 탈당과 적진가세 등 여권분열 현상이 심각했다는 점은 기록해야 한다.

이들이 떠나고 유시민 문성근 등의 개혁당 세력이 가담했으나 실제 득표효과는 정몽준 지지층의 가세가 더 컸다. 즉 ‘여권분열’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자리를 노리는 정치인들의 움직임일뿐 실제 유권자의 분열은 없었다는 점(김대중 지지층의 올인투표) 여기에 정몽준 지지층의 가세가 당선의 주 요인인 셈이다. 특히 당시 선거는 대통령 직선제 후 최초라고 할 수 있는 1-1선거였다. 여당 노무현 야당 이회창의 1-1선거… 최초의 실질적 세력싸움의 승리다. 따라서 이 승리의 교훈은 양 세력의 결집일 때 '후보의 경쟁력'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4. 2007년 대통령 선거 2년 전 무슨 일이 있었나?

2005년 3월 2일, 행정도시 특별법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행정도시 특별법은 신행정수도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자, 몇몇 부분을 수정한 뒤 입안한 법이다. 그해 10월 이명박 서울시장은 전국 모든 언론, 정치권 여야 수뇌부 등을 초청한 가운데 5.84㎞ 길이의 청계천 복원사업을 완료, 통수식을 가졌다. 이명박을 말하려면 빠질 수 없는 2개의 사건이 그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계천 복원사업은 사실상 청계천변 노점상과의 전쟁이었다. 이명박은 총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을 이주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이 여세는 비록 ‘4대강 사업’이란 이름으로 변질 되었으나 애초 ‘한반도 대운하 사업’으로 명명되어 세간의 여론을 장악했다. 여론은 물론 찬반이 팽팽한… 그러나 이는 이명박을 강력한 대권주자로 만드는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다. 그 원동력은 물론 청계천 복원과 서울시 대중교통체제 일원화다. 버스 중앙차로제, 요금환승제와 함께 실시 된 전면적 시내노선개편과 버스공영화 사업 완성 등이 포함된 대중교통체제 일원화는 이명박의 “내가 해봐서 알아”를 트레이드마크로 만들어 주면서 ‘한반도 대운하’의 성공을 장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는 곧 한나라당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박근혜를 당내 경선을 통해 물리칠 수 있는 원동력도 되었다.

그러나 반면 노무현 대통령이 있는 여권은 대통령 스스로 가장 강력했던 대권주자들을 저격했다는 점이다. 고건을 향해서는 “고건 총리의 기용은 실패한 인사”라는 말로 저격했다. 대통령에게 저격당한 고건은 예비 대권주자 중 가장 앞선 지지율이었음에도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퇴장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야권의 잠룡 거의 모두를 저격한 대통령이었다.

한나라당 출신 손학규는 ‘철새’,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1등 공신 정동영은 ‘배신자’, 이 같은 노무현 대통령의 직접 저격에 노무현 골수 지지자들은 앞장서서 손학규 정동영을 향한 총질을 계속했으며 최종적으로 0번 운동이라는 우리 선거 사상 어처구니없는 행태도 보였다. 2007년의 교훈은 대통령의 아군 저격, 그리고 이 교훈으로 박근혜는 5년 후 대통령이 된다.


5. 2012년 대통령 선거 2년 전 무슨 일이 있었나?

2010년 6월 2일, 이명박 정권의 각종 실정에 따라 민심이 극도로 이반된 가운데 치러진  6.2 지방선거에서 전면적 야권연대를 성사시킨 민주당과 야권이 승리했다. 이 여세로 야권은 6월 29일 '세종시 수정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시켰다. 그러나 세종시 부결 건을 야당의 승리로 보는 언론은 없었다. 여당 내 야당으로 불린 박근혜 의원의 승리로 보았다. 이 사건을 통해 대통령과 친이계의 압박으로 대중정치를 구사하지 못하고 정중동이던 박근혜 의원이 급부상했다.

7월 29일, 박근혜 의원과 세종시 수정안을 두고 격렬히 대치했던 정운찬 총리가 물러났다. 역사에 가정은 없으나 당시 ‘세종시 쟁투’에서 정총리가 승리하고 박근혜가 패배했다면 지금 대통령은 정운찬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정 총리가 물러나자 8월 21일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를 불러 청와대에서 단독 회동을 했다. 회동 후 양측은 “두 사람은 차기 정권 재창출에 대해 협력하기로 했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들이 줄을 이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2011년 12월 22일, 2012년 9월 2일 등 두 차례 더 단독으로 회동했다. 호사가들은 이 3번의 단독 회동으로 '이명박은 박근혜의 대권을 방해하지 않으며 박근혜는 이명박에게 보복하지 않는다'는 밀약이 성사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실제 국정원 기무사 정보사 등 권력기관의 대선개입은 2012년 9월 이후 기승을 부렸다. 앞선 2007년의 사례와 정 반대다.

반면 야권은 지방선거에 승리했음에도 이렇다 할 대권주자없이 백가쟁명이었다. 손학규 대표가 앞장선 것처럼 보였으나 손 대표 비토세력이 강고했다. 앞서 ‘폐족’ 운운으로 정치일선에서 빠졌던 ‘친노세력’은 그 전 해인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란 외적 요건에 힘입어 기세가 등등해졌다. “정치를 하지 않는다”며 장외에 있던 문재인은 이해찬과 장외에서 ‘혁신과 통합’이란 조직을 만들어 당 밖에서 손 대표를 흔들었다. 문성근은 ‘백만민란’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전 야권 통합 운동에 나서면서 ‘친노결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끝내 이들이 문재인을 앞세워 당권도 대선후보도 쟁취했다.

그러나 앞에 거론한 ‘이명박근혜의 밀약’을 통한 대선대비에 대한 정보가 없이 자기들만 움직임으로 결국 국정원 기무사 정보사 등 권력기관의 대선개입을 막지 못했다. 이런 싸움은 권력을 갖지 못한 측의 100전100패다. 따라서 2012년의 교훈은 ‘단일후보라도 강력한 일사분한이 아니면 이길 수 없다’이다. 적의 공작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6. 2017년 대통령 선거 2년 전인 지금 우리에겐 무슨 일이 있나?

2015년 현재… 야권은 지리멸렬이다. 김무성은 미국까지 가서 읍소를 통한 확실한 눈도장을 받기를 하고 있고, 유승민 김문수 등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세월호, 메르스, 경제실정 등 모든 국정에서 낙제점인 대통령은 쇼맨쉽과 순간적 위기탈출 능력을 바탕으로 북한 변수와 중국 변수, 이를 이용하여 ‘여왕’을 만드는 종편 등 언론들을 이용 지지율 50%를 회복했다. 정권의 실정이 아무리 벌어져도 야권은 반사이익도 보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제1야당은 분당 위기에 처해 있다. 지리멸렬이 오래되면서 장외의 신당창당 여론은 팽배하다. 야권의 이런 상황은 1995년과 매우 흡사하다. 당시 이기택 민주당이 87체제 후 단일야당으론 가장 많은 의석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지리멸렬, 김영삼 정부의 삽질에 전혀 반사효과를 얻지 못했다. 장학로 홍인길 김현철로 이어진 권력형 비리, 민자당 합당세력인 김종필 자민련 세력의 이탈,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TK 민정계 핵심들의 이탈, 1회 지방선거의 야권 승리 등 야권으로는 호재가 다분했음에도 야당의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는 김대중의 신당창당이었으며 민주당 분당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여론도 신당창당과 민주당 분당은 야권이 공멸로 가는 길쯤이었다. 즉 지금과 같이 분당은 곧 민자당 도우미 행위라고 모든 글쟁이, 모든 야권의 입들은 주장했다. 그래서 김대중의 신당창당은 ‘실패’가 예견된 행위였다. 총선 결과도 그렇다. 이듬해인 1996년 총선에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도 이기택의 민주당도 다 실패했다. 그러나 1년 후 대선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최초로 선거를 통한 정권탈환에 성공했다. 다수의 지리멸렬보다 소수의 강력함이 더 큰 힘을 발휘한 셈이다.

현재의 난국을 돌파할 방법에 대한 결정은 정치권이 할 일이다. 나는 이런 사실들이 있었다는 것만 기록한다. 과연 오늘 현재 혁신위를 두고 불붙은 논전과. 당 밖에서 움직이는 신당창당 세력이 어떤 결정을 할 것인지…‘분열은 죽음… 분열은 새누리당 도우미’란 여론에 굴복, 지리멸렬이라도 단일대오가 강하다는 유인에 끌려갈 것인지, 모든 욕을 감수하더라도 강력한 소수가 더 승리에 가깝다는 신념을 따를 것인지… 결정도 행동도 그들이 해야 한다.

우리는 그다음을 역사의 눈으로 지켜볼 것이다. 그러나 기록한대로 내부총질, 다수의 지리멸렬은 어떤 성공도 없었다. 지리멸렬 세력의 타파와 강고한 세력의 거듭남… 그 이후 상대의 실책과 허술함을 공격하면서 ‘전략적 대비책’을 세울 수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승리의 길이란 교훈은 있다. 어떻든 현존하는 권력층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의 권력사용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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