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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순이들, 노동운동에서 평화를 찾다


평화여성회, 70~80년대 여성노동자 목소리 듣기 개최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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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9.11  16: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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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불리할 때는 분단을 이용한다. 노동운동을 빨갱이라고 해서 위협했다. 북한에서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줄 때는 슬프고 안타깝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이라면 읽어봤을 책 『서울로 가는 길』을 쓴 여성노동자 송효순 씨는 노동운동의 경험을 통해 통일된 한반도를 소망했다.

'평화를만드는여성회'(상임대표 안김정애)는 10일 오후 서울 당산동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여성,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말하다'라는 라운드테이블을 마련, 세 번째 주제로 '70~80년대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를 다뤘다. 이 자리에는 남영나이론 노동자였던 김연자, 대일화학 노동자로 일한 송효순 씨가 나섰다.

   
▲ 평화를만드는여성회가 10일 서울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여성,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세 번째 70~80년대 여성노동자 목소리 듣기 라운드테이블을 마련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가난 속에서 '공순이'의 길을 걷다"

1960~70년대 한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가난과의 전쟁을 벌이던 시기다. 그리고 집안의 딸들은 학교가 아닌 공장으로 가야했고, 그것도 자신이 아닌 오빠와 남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공순이'라고 불렸다.

1955년생인 김연자 씨도 마찬가지였다.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그는 7남매 중 여섯째로 다섯 명의 오빠를 뒀다. 공부를 잘해 천안의 한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어려운 살림에 통학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베트남전에 참전한 셋째 오빠가 전쟁 트라우마로 자리에 눕자 학교를 그만두고 병수발을 도맡아야 했다.

16살에 천안 가발공장에 처음 취업한 김연자 씨는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해야 했다. 기숙사가 있는 공장이라고 하지만 문짝 하나가 일터와 기숙사의 경계선일 뿐이었다. 게다가 월급도 못받았다.

"그때 일하는 것은 집에있는 것보다 일단 돈을 번다고 생각하니 좋았어. 그런데 월급을 안주는 거야. 3개월만 하다가 나왔어. 사장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이용한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억울해."

19살이 된 김연자 씨는 서울 문래동 허리를 펼 수 없는 하꼬방에서 바로 위 오빠와 생활하며 가발공장인 서울통상에 발을 들였다. 당시 서울통상은 최대 가발생산업체로 최준규 사장은 1971년 종합소득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종합소득세 1위의 배경에는 노동자들이 있었지만 당시 서울통상은 지각한다고 때리고, 일 못한다고 때리는 등 대우가 상당히 열악했다. 그래서 어린 김연자는 그 광경에 놀라 친구의 소개로 남영나이론에 취업했다. 남영나이론은 우리가 잘 아는 '비비안'을 만드는 회사다.

"내가 지금도 키가 작지만 그때도 작았어. 150cm였거든. 1년반을 시다만 시키는거야. 거기가 브래지어, 팬티같은 거 만드는 곳인데. 원단이 얼마나 무거운지...한 달에 100시간 넘게 잔업을 했어. 일당 210원이었거든. 야간작업하고 그러면 한 달에 만원 넘게 받았어."

"남영나이론은 다른 공장보다 좀 좋았는데. 출.퇴근하면 카드를 찍어야해. 그런데 출근해서 카드를 찍으면 카드를 숨겨놔. 퇴근 안 시키려고. 그럼 그때 실업계 야간학교 다니는 애들은 울고불고 난리나는 거야 카드 달라고... 그때 위장병이 생겼어. 맨날 약을 달고 살았지."

   
▲ '남영나이론'에서 노동운동을 한 김연자 씨. 취업 당시 사진 속 모습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1957년생인 송효순 씨도 당시 공장에서 일한 소녀들과 다르지 않았다. 익산에서 태어난 그는 언니 둘, 남동생 둘을 뒀다. 둘째 언니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돈벌러 갔듯이 그도 같은 길을 걸었다.

"꿈을 가진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됐어요. 내가 돈벌어서 남동생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웠지요. 어떻게 꿈이라는 게 있어요? 돈을 벌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죠."

16살에 서울로 올라와 목욕탕 심부름꾼으로 일한 송효순 씨는 18살이 돼야 취업이 가능했지만 17살에 나이를 속여 '대일화학'에 취업했다. '대일화학'은 '대일밴드'를 생산하는 업체다.

"8시 반에 출근해서 6시 퇴근이지만 야간작업이 많았죠. 일당이 188원이었는데 점심은 주지 않아서 회사식당에서 60원을 내야 밥을 먹을 수있었어요. 남영나이론은 점심이 꽁짜였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았지. 우리에 비하면 남영은 천국이었어요."

"내 별명은 '송순진'이었어요. 그럴 정도로 일만 했죠.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회사에서 모범상을 받아서 밍크이불을 선물로 받았어요. 최고의 모범직원이었죠. 내가 열심히 일하면 동생이 열심히 공부하겠지 생각했어요.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했지요."

   
▲ 영등포산업선교회. 도시산업선교회로 출발한 이 곳은 1970년대 노동운동 성장의 통로였다. [사진출처-영등포산업선교회 홈페이지]

"우리는 '산선대학' 출신..내가 아니라 우리였다"

1970년대 열악한 노동현실을 깨기 위한 노동운동 성장의 통로가 있었다. 바로 '영등포산업선교회(산선)'. '도시산업선교회(도산)'로 출발한 이 곳을 거쳐간 노동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없을 정도다. 그래서 '도산이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말이 언론에 나올 정도였다.

김연자 씨와 송효순 씨가 산선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는 당시 산선이 운영하던 신용협동조합(신협)이었다. 은행에 월급을 저금하러 갈 시간조차 없던 이들에게 산선의 신협은 1원, 10원 짜리도 받아줬다. 하지만 처음 이들이 바라본 산선은 '빨갱이 소굴'이었다.

"월급날 한 친구가 10원짜리만 모아서 저축을 한다고 모아갔어. 그걸 보고 난 빨갱이단체다. 빨갱이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유혹한다는 문구를 많이 봤기 때문에 그걸 확인해보려고 갔어. 1974년도에 가니까 시범아파트 지하에 사무실이 있더라. 아 여긴 정말 빨갱이다라고 생각했지."(김연자)

"그때 똘똘한 어떤 언니가 1원도 저축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얘기를 듣고 많이 망설이다가 따라가봤어요. 한발 넣고 여차하면 한발 빼야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공장에서 할 수없는 꽃만들기, 바느질하기 등등을 가르쳐준다고 하더라. 기대가 됐어요."(송효순)

공부의 기회에서 멀어졌던 이들은 신협 저축으로 산선과 인연을 맺고 많은 것을 배웠다. 꽃꽂이, 인형만들기 등에서 시작한 이들에게 산선은 노동자의 권리, 인권, 여성인권 등을 깨우치게 했다.

그리고 영국노동운동사, 종교, 문학 등의 공부를 했고 문동환, 문익환, 고은, 장명국, 김근태, 백기완, 김동길, 김옥길 등이 강사로 나섰다. 쟁쟁한 강사들을 둔 이들은 그래서 '산선대학' 출신이라고 자부한다.

   
▲ '대일화학'에서 노동운동을 한 송효순 씨. '서울로 가는 길'의 저자이기도 하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내적 성장의 계기가 됐어. 나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지. 나도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 나는 내가 노동운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해야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했어. 활동 전에는 관심이 나에게 머물렀다면 활동 후에는 '전체 속의 나'를 볼 수있게 됐지. 그때는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 힘이 됐어."(김연자)

"노동법도 배우고 문인이 와서 강의도 했어요. 그것이 너무 좋아서 야간을 빼먹고 오기도 했지요. 그 과정을 통해 생각이 변화됐어요. 주눅이 들어있을 때인데 '너희들 노동자가 없으면 세상은 안 돌아간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존감이 높아졌어요."(송효순)

이를 토대로 김연자 씨는 회사의 부당한 처우개선에 앞장섰다. '강제잔업거부', '생리휴가', '잔업수당' 등을 요구했다. 6시 퇴근시간이 되자 동료들과 미싱기의 전원을 끄고 버티고 앉는 투쟁도 벌였다. 그리고 성과를 거두자 회사가 만든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일에 나섰다.

"대의원 진행연습도 했지. '가하면 예하시오. 나하면 뭐하시오' 얼마나 연습했는지 몰라. 그런걸 잘 몰랐으니까. 그렇게 회의가 열렸는데 계속 정회되는 거야. 회의가 열리지 않더라고. 그래서 노조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였어. 깡패가 끌고가서 누굴 겁탈했다느니 소리도 듣고. 무서웠고 힘들었지." (김연자)

"내가 모범을 보여야 하더라구. 내가 모범을 보여야 동료들이 나와 함께할 거 아니야. 그래서 많이 성숙해졌지."(김연자)

"산선 야유회에 간다고 일요일에 7명이 빠졌어요. 그걸 회사가 알고 산선에 다니지 말라고 협박하고 회유하는 거야. 그래서 산선에 이야기했죠. 노동법 지키라는 탄원서를 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서명을 받았어요. 그 일이 있고 나서 강제야간금지, 식당 밥 질 높이기, 동복 작업복 지급 등이 바뀌었어요."(송효순)

"우리는 빈틈을 보이지 않도록 지각하지 말고 조퇴하지 말자고 약속했어요. 내가 일의 기준이었는데. 내가 60개면 다른 사람은 55개해. 그럼 내가 더 해서 다른사람 채워주고 그랬어요. 그때 관심사는 당당하게 사는 거였죠. 그리고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생각을 했어요."(송효순)

사회가 무시하던 중퇴, 국졸들이 노동현장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일로 확대됐다. 그러나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노동정화'는 이들에게 시련을 안겼다.

송효순 씨는 산선의 인명진 목사가 잡혀가는 모습을 목격했고 회사로부터 해고당했다. 그리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이 어렵게 됐다. 게다가 경찰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경험은 『서울로 가는 길』에 녹아있다. 김연자 씨도 민주노조가 좌절되고 회사의 협박에 못이겨 1981년 퇴사해 결혼했다.

   
▲ 여성노동자로 1970년대 노동운동의 길을 걸어온 이들은 한반도 평화통일이 답이라고 강조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노동운동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찾다"

김연자 씨와 송효순 씨는 70~80년대 노동운동 현장에 뛰어들면서 사회의식을 키웠다. 그리고 이들의 눈은 한반도 평화통일로 가 있었다.

"나는 아들이 크면 통일이 되어 군대가 없어질 줄 알았어. 한 사람은 2년이지만 그 기간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거지. 재원낭비, 시간낭비, 인간성낭비다. 그래서 평화는 꼭 필요해."(김연자)

"국가가 불리할 때는 분단을 이용해요. 정부에서 궐기대회할 때는 동원됐고, 불리할 때는 의식화교육시키고. 노동운동을 빨갱이라고 해서 위협했어요. 북한에서 쳐들어 올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줄 때는 슬프고 안타깝죠."

김연자 씨는 노동운동의 경험을 살려 10년동안 구로의원, 갈릴리교회 외국인노동자상담소, 서울의료생협 이사장 등으로 일했다. 현재 인천 결식아동을 후원하는 도시락사업을 하고 있다.

송효순 씨는 해고 후에도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후배노동자에게 경험을 나누고 깃발도 만들어줬다. 그리고 가슴 한 켠에 1986년에 분신한 박영진 열사가 남아있다.

"1970년대의 저임금정책이 빚은 결과가 노인빈곤으로 연결되고, 지금은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고 취업을 하기가 힘든 것이 노동자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어요. 분단사회에 사는 것은 상당히 고난이에요.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에요." (송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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