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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지나간 여름 DMZ의 현실과 풍경

2015 지나간 여름 DMZ의 현실과 풍경

이규정 2015. 09. 30
조회수 343 추천수 0
 

  지난 8월10일~11일 뜨거운 여름 화천, 철원의 민간인통제구역과 동두천 일대를 다녀왔다. 역사문제연구소, 인권재단 사람, 참여연대, 한반도문제를 걱정하는 학자모임(ASCK) 주관으로 30여 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이른바 ‘평화기행’ 이다. 분단기행이기도 하다. 첫째날은 화천, 둘째날은 철원동두천 일대를 둘러보는 코스다. 이틀에 불과하지만, 총 11곳을 둘러보는 짧고 알찬 코스였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머릿속에 막연히 존재하던 분단의 현실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는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첫째날은 8월4일 발생한 목함지뢰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보도된 날이다. 사건이 터진 곳과는 떨어져 있었지만 철원의 DMZ 통문도 언제든 위험천만해질 수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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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수력발전소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던 ‘꺼먹다리’. 그 기초는 일제가, 철골은 소련이 그리고 상판은 한국이 놓았다

 

 문자 하나에 풍경이 변했다

 

 서울을 떠난 버스는 북서로 방향을 잡았다. 도심을 빠져나와 우거진 수풀 사이를 한참 지났다. 그러다 탁 트인 곳이 나왔다. 파로호다. 부술 파에 오랑캐 로, 오랑캐를 쳐부수는 호수라는 뜻이다. 한국전쟁 중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이름을 붙힌 파로호는 화천 수력발전소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다. 그 과정에서 중국군 3만 명이 이곳에 수장됐다. 중국군을 수장시켰다고 ‘파로호’라 이름 붙여진 것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한국의 반공주의를 유사 인종주의로 규정한다. 파로호라는 이름에 이른바 유사 인종주의가 덧씌워져 있다면 비약일까. 이제 방문할 멸공 OP에도 같은 혐의를 씌울 수 있다. 아무렇지 않게 호명하다보면 그 논리에 젖어드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핸드폰에 뉴스특보가 하나 떴다. “DMZ 폭발은 북한군 목함지뢰” 공교롭게도 그 직후에 우리가 간 곳은 DMZ 코 앞이었다. 멸공 OP(관측소)에 도착하니  DMZ 철책의 통문이 보였다. 
  멸공OP 안으로 들어갔다. 평면이 5각형이다. 북쪽으로 3면이 나있어 DMZ 전경이 훤하게 보인다. 3사단 정훈장교가 멸공OP, DMZ 등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연단에 서서 경례를 했다. “멸공!” 정훈장교가 재생한 영상자료에는 멸공OP 부대원들이 부르는 군가가 흘러나왔다. “때려잡자 공산당.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 한국전쟁 당시 구호 그대로다. 마치 전투는 엊그제 있었던 것 같고 휴전협정은 어제 체결한 것 같다. 
  군사분계선 너머 북한지역에는 우뚝 솟은 산이 보인다. 김일성 주석이 “한국군 장교 인식표를 군 트럭으로 갖다줘도 맞바꾸지 않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전략적 가치가 큰 오성산이다. 1,062m에 달하기 때문에 날이 좋은 날에는 수도권까지 관측 가능하다. 오성산은 북한과 중국에 있어, 한국군의 백마고지에 버금가는 상징성이 있는 곳이다. 제공권을 쥔 미군은 오성산 일대를 폭격했으나 중국군은 땅굴을 파고 오성산에서 끈질기게 버텼다. 
  인근의 화천댐과 수력발전소도 큰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현재는 다른 길이 나있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꺼먹다리’가 유일한 통로였다. 이 교량은 본의 아니게 3국이 합작해 세운 다리가 됐다. 기초는 1945년 초 일본이 화천댐과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며 지어졌다가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는 소련 기술자들이 기초 위에 철골 구조물을 얹었다. 휴전 후에는 화천군에서 검은 콜타르를 입힌 목재로 제작한 상판을 놓았다. 그래서 꺼먹다리다. 
  일제는 대륙침략 에너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 댐과 수력발전소를 지었다. 해방 뒤에는 이 철원, 화천 일대가 번성할 수 있는 기초가 됐고 평화적으로 쓰였다.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은 “화천댐 전력의 3/5는 서울로 보내고 5/1은 철원, 나머지 1/5는 금강산 전기철도를 운영하는 데 썼다”라고 말했다. 화천, 철원은 한반도의 중심이다. 철원역은 한때 대전역만큼이나 컸고 식민지 시절과 해방공간에서 금강산 관광전철은 큰 호황을 이뤘다. 
  철원은 경원선과 금강산선이 만나는 곳이다. 철원에서 종착역인 내금강역까지 116.6km 철로가 놓여있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은 한탄강 위 철교다. 철교는 겸재 정선이 화폭으로 남긴 정자연을 배경으로 서있다. 전력 공급선이 달려있던 전주는 녹으로 뒤덮여 있다. 이곳에 전철이 다녔다는 증거다. 1942년 한해만 90여만 명의 승객을 수송할 만큼 호황이었던 관광철도였다. 식민지 백성들도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서만큼은 웃음꽃을 피웠을 것 같다. 
  2015년의 이 지역 풍경은 식민지 시절보다도 못한 것 같다. 철길은 끊겨있고 온통 녹슬어 있다. 사람들의 표정도 심란하며 눈에 보이는 건 군사시설뿐이다. 수색대가 머무는 생활관도 보였다. “저기가 DMZ 수색하는 장병들이 머무는 생활관이다” 평화기행 일행을 안내하던 앳된 얼굴의 병사의 설명이다. 8월4일 지뢰에 다리를 잃은 이하사, 김하사도 이런 시설에서 군장을 갖춘 뒤 DMZ 내로 들어갔을 것이다. 병사에게 “지뢰사건이 터졌는데 겁이 나지 않느냐”고 묻자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늘 다니던 길만 다녀서 괜찮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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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는 수백만 개의 지뢰를 품고 있다. 우리 국방부는 지뢰 제거에 489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민간인 지뢰 피해는 어떡하나

 

  저녁식사를 하고 첫째 날을 마무리하고 묵은 곳은 철원 대마리 두루미마을이다. 저녁식사 뒤에는 마을 내 민간인 지뢰피해자들과 2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배경설명이 필요할 듯 싶다. 대마리 마을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이 건설한 ‘대북선전마을’ 중 하나다. 두루미마을은 그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제대군인 150명이 입주하여 1인당 6천여 평의 농지를 받았다. 문제는 이 지역에 한국전쟁 당시 매설되어 그 정확한 위치도 모르는 지뢰들이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총 23건의 지뢰사고가 발생해 8명이 죽고 1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대마리 마을 주민들은 입주 당시 지뢰 사고 및 기타 사고에 대해 정부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각서에 동의하고 입주했다. 그래서 이들은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해왔다. 김호기씨와 지뢰피해자인 김문빈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두 주민은 1968년, 30대 초반의 나이로 이 마을에 입주했다. 
김호기씨는 “처음 입주했을 때는 오후 5시만 넘으면 DMZ 내에서 남·북이 기관총 쏘고 선전방송하느라 시끄러웠고, 저수지도 없어 4년간 농사를 못했다”며 “그래도 우리는 단지 정부에서 땅을 준다는 말만 믿고 이곳에 살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 땅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지뢰가 터져 이 마을 사람 23명이 죽고 다쳤다. 특히 대전차지뢰로 사망한 주민은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다. 김씨는 대전차지뢰에 죽은 주민의 시신이 “붉은 덩어리가 되서 이 나무 저 나무에 걸려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황무지가 옥토가 되자 토지 소유자들이 나타났다. 박정희 정부가 소유자들로부터 이 땅을 수용한 것도 아닌데 무작정 입주민들에게 준 것이었다. 김문빈씨는 “지역구 의원도 찾아가보고 법률가들도 찾아가봤다”며 “그런데 한국 법에는 지주를 보호하는 법만 있지 우리 같은 입주민들을 보호하는 법은 한 줄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일부 주민들은 원 소유자와 협상을 했으나 대다수 토지 소유권 문제는 미해결 상태다.
  한반도의 허리를 동서로 249km 가로지르는 DMZ는 무장이 금지된 지역이다. 하지만 DMZ는 남북을 통틀어 200만개에서 350만개의 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한 측이 DMZ 내에 매설한 지뢰는 100만 발 정도다. ㎡당 2.4개로 지뢰밀도로 세계 1위다. 지뢰매설 면적은 112.58㎢로 안양시 두 배, 여의도 300배 크기다. 한국 국방부는 지뢰제거에 걸리는 시간을 489년으로 추정했다. 휴전 후 북한 측 지뢰 피해자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남한 측은 1만 명에 가까운 군인·민간인이 죽거나 다쳣다. 
당장의 문제는 비가 쏟아질 때마다 지뢰의 위치가 바뀐다는 점이다. 특히 장마철에는 지뢰가 쓸려 내려가기도 한다. 군 당국은 매년 지뢰 제거 작전을 한다. 올해 합동참모본부는 4∼11월 민간인통제선 이남 지역, 후방 지역 방공기지 등 6만 m² 지역에서 지뢰제거 작전을 실시했다. 지난해에는 대전차지뢰 312개, 대인지뢰 121개를 수거했다. 성향이 서로 다른 전문가들도 최소한 상황을 악화시키지 말자는 방침에는 동의한다. 
  김기호 한국지뢰제거연구소 소장은 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뢰의 위험 때문에 DMZ 내에서 수색정찰작전을 수행하기 어렵다”며 “도발에 항의하되 더 이상 DMZ에 지뢰를 묻지 말자고 남북이 합의해야 한다. DMZ 매설 지뢰에 대한 남북 공동 대응을 북한에 제안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같은 기사에서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확성기 방송 등 대북 선전을 통한 심리전은 과거 냉전시대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전쟁이 부순 건물, 전쟁이 낳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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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노동당사는 한국전쟁 때 훼손되어 외벽만 남았다.  

 

 둘째 날은 철원과 동두천 일대를 둘러봤다. 북한에서 지은 건물은 철원 노동당사, 남한에서 지은 건물은 기지촌여성낙검자수용소다. 전쟁 전의 건물, 전쟁 후의 건물이기도 하다. 남북을 각각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건물도 아니고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있는 성격의 건물들은 아니다. 다만 전쟁을 고리로 엮어질 뿐이다. 철원노동당사는 전쟁이 파괴한 건물이고 수용소는 전쟁이 낳은 건물이다. 
철원노동당사는 한국에 있는 유일한 북한 건물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2층 일부를 제외한 건물 내부는 모두 파괴된 채 외별 골조만 남아 있다. 정문 계단은 바스러져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탱크가 밟고 지나간 흔적이다. 기둥과 벽면에도 총탄과 포탄 자국이 선명하다. 포탄 자국에 벗겨진 외벽의 내부는 벽돌이다. 사실 건물 전체가 벽돌로 쌓은 것이지만 대리석을 덧대거나 회칠을 해 벽돌구조임을 감췄다. 
 <민통선 기행>을 쓴 이시우 작가는 문헌과 증언을 바탕으로 이 건물 3층이 ‘민주전선실’ 즉, 대중 강연, 모임 등을 위한 강당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2층 간부실을 지나야했으며 3층에서의 대중활동으로 2층 간부실은 층간소음에 시달렸을 것이라고도 봤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작가는 이 건물에 ‘쓰러진 이상’이 담겨있다고 평가한다. 
 이 설명은 화천군에서 세운 설명판과는 간극이 있다. 설명판에 따르면 공산당은 “이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수탈과 애국인사를 체포하였고 고문과 학살 등 소름끼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했다”고 씌여져 있다. 무엇이 진실에 가까운지 알려는 노력은 불경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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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여성낙감자수용소는 전쟁 후 주한미군을 붙잡아두기 위해 세워졌다
 

기지촌여성낙검자수용소는 층수만 한 층 낮고 면적은 비슷하다. 이 시설은 소요산 입구 근처에 있다. 수용소 가는 길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등산객들과 섞였다. 수용소 앞에서는 호박엿을 파는 노점이 있었다. 이 수용소는 1960~70년대 정부가 성병이 의심되는 기지촌 여성들을 수용하던 시설이다. 이 건물은 국가기념물이 아니라 철원노동당사에서 봤던 표지판은 없었다. 건물은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고 고물상들이 내부에 잡동사니를 들여놔 어수선했다. 
 이 수용소가 설립된 배경을 짚어보자. 1969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며 주한미군 감축을 추진했다. 동시에 미군은 박정희 정부에 기지촌정화를 요구했다. 흑인을 차별하지 말고, 성병을 관리하라는 요구였다. 이에 청와대는 미군의 요구를 적극 받아들여 ‘기지촌정화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흑인 차별을 금지시키고 성병 감염이 의심되는 기지촌여성들을 이 수용소에 데려와 가두고 치료하게끔 한 것이다. 
 기지촌 여성을 불심검문으로 체포하는 과정을 ‘토벌’이라고 했다. 1층은 진료실 검진실이 2층에는 20명씩 수용할 수 있는 입원실 7개가 있다. 기지촌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치료방식은 폭력적이었다. 이른바 ‘페니실린 쇼크’로 수많은 기지촌 여성이 숨졌다. 미군은 미국에서 사용하는 페니실린의 양보다 4~5배 더 증가시켜 투약했다. 한국 정부는 1972년 3억8천 만원 보건위생비 중 2억2천만 원이 성병치료에 쓸 정도로 기지촌정화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건 미군감축을 막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기지촌에서 벌어들이는 외화가 엄청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산업기반이 미미했던 1964년, 한국 국내총생산의 25%는 기지촌 여성들로부터 나왔다. 때문에 정부는 이들을 ‘산업역군’으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은 “1960~70년대 동두천 인구가 6~7만 명일 때 기지촌 여성의 수는 6~7천 명이었다”라며 “그 당시에는 서울도 이만한 유흥가가 업었다. 기지촌 때문에 동두천 내에는 화장품 가게, 미용실, 목욕탕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라고 말했다. 
수용소 2층에서 창밖을 바라다봤다. 노동당사에는 쓰러진 이상 혹은 치우친 신념이 있었다. 하지만 이 건물에는 그저 지워버리고 싶은 끔찍한 기억 밖에 없는 듯 했다. 
  이후 들른 곳은 상패동 기지촌여성 공동묘지다. 1,000개의 묘가 있는데 그 중 400여개가 무연고 묘다. 동두천 기지촌이 형성되던 1960년부터 1970년까지 사망한 기지촌 여성들이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시절 미군 범죄는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고 상당수의 여성들이 미군에 학대당하고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화기행 참가자들은 여성들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준비해간 막걸리를 묘에 뿌렸다.

 전쟁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DMZ는 지뢰로 가득하고 온갖 공격적인 구호가 난무한다. 민통선 안에는 민간인 지뢰 피해자가, 미군기지 근처에는 기지촌 여성들이 있다. 전쟁시기와 휴전 후에도 가장 많이 죽고 다치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에서 나온다. 아직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1960년대, 위험한 곳인 줄 알고도 민통선 마을에 정착한 사람들 가운데 지뢰 피해자가 나왔다. 기지촌 여성들의 운명도 비참했다. 평화기행은 이 땅에 있었던 전쟁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체험함으로써 평화를 몸으로 깨닫는 과정이었다.

 

글 사진/ 이규정 디펜스21+ 기자 okeygun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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