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투쟁의 성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가다(17)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준비과정과 창건 후 항일투쟁
6.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반일조직의 확대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 등판에서 김일성 주석의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이 선포되었다. 앞서도 여러 번 언급을 했듯이 당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치밀하게 준비를 한 다음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것이다. 여기에는 우선 가장 중요한 유격대원들이 손에 들고 적들과 맞서 싸울 무장장비를 준비하고, 또 동북만주와 남만을 무대로 투쟁을 할 때 유격대원들의 투쟁을 도와줄 백성들이 조직적으로 묶여져 있어야 한다. 동북만주는 중국의 영역이었기에 유격대가 원활하게 투쟁하기 위해서는 반일사상을 가진 중국인들과의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유격대를 묶고 투쟁하는 것이 일회성이라거나 단시일 내에 끝나는 것이 아니기에 장기전을 해야 하고, 드넓은 만주광야에서 강력한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한 두 개의 유격대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주 각지에 조직적으로 연대를 해서 싸울 유격대를 창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치밀한 준비를 하지 않고는 당시 세계 최강국에 속하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맞서 가열 차게 유격투쟁을 벌일 수가 없다.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이전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방향의 항일투쟁을 준비하던 젊은 조선인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정확히 인식을 하였다.
이에 따라 유격대창건에 앞서 위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공작하고 투쟁을 벌였다. 유격대를 창건하고 본격적으로 유격투쟁으로 넘어가기 전에 필요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동시적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은 대단히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었다. 심지어 목숨을 던지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 이러한 준비가 갖추어진 후에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것이다.
《반일인민유격대》를 묶는데 필수요소인 유격대원들이 무장하기 위해 무기를 획득해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전 장들에서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유격대를 묶기 전 유격대원들의 유격활동을 후원하고 원호할 일반백성들을 조직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백성들을 유격활동을 후원하고 원호할 수 있는 조직성원으로 참여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1920년대 말 이전 이미 만주 각지에는 민족주의계열을 독립운동단체들이 있었고 또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었다. 물론 당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치열하게 무장투쟁을 벌여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젊은 층에 속하는 반일·항일세력들이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 사이에 새로운 조직을 내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더구나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은 젊은 조선인들이 받아들인 새 사조 즉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세력에게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버금가는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 단체들에서는 자신들과 같은 민족이면서 반일·항일투쟁의 길에 나선 공산주의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을 대상으로 백색테러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반일의 길에 나선 것 자체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겠다는 것으로서 자신들과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시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단체들에서는 반일·항일의 일념으로 투쟁에 나선 동족들을 대상으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백색테러를 감행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도 서러운 일인데 자신들과 같은 지향을 가진 동족을 대상으로 테러를 감행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만주각 지역과 북부조선일대에 반일·항일유격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길은 이처럼 험난하였다. 비단 적의 무기를 빼앗아 자체 무장을 하는 것만이 목숨을 내대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적과 투쟁을 해야 하고 또 다른 편으로는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당하는 백색테러와도 투쟁을 벌여야 했다.
백성들 사이에 유격투쟁을 지원해줄 조직을 묶어낸다는 것이 이렇게 험난하였다. 하지만 당시 젊은 조선인들은 가는 길이 위험하다고 물러서지 않았으며, 험난하다고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젊은 조선인들은 백성들 사이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하면서 설득하고 때로는 함께 노동을 하면서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가열차고 치열하게 노력을 했기에 백성들은 점차 젊은 조선인들이 지닌 민족주의사상과 새로운 사회의 건설방향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백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젊은 조선인들의 투쟁을 도와 나섰으며, 때로는 유격대원들과 한 전호 속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무기를 들고 싸우기까지 하였다.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지대에 사는 백성들을 하나의 반일조직으로 묶어내기 위해 젊은 조선인들이 얼마나 간고한 투쟁과 노력을 기울였는가.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신의 조상들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얼마나 간고한 투쟁을 벌였는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악랄하고 야수적인 탄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런 후라야 2015년 12월 28일에 있었던 《한-일 정신대문제 합의》와 같은 얼빠진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쪽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이런 매국적이며 배족적인 합의를 지지하는 백성들이 무려 35.6%나 된다니 필자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이에 대해 보도한 오늘자 뷰스엔 뉴스의 소식을 아래에 간단히 올려준다.
❝5일 <중앙일보>에 따르면, 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전국 성인 1천명을 상대로 지난해 12월 29~30일“‘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며 재단 기금에 정부 예산을 투입하기로 한 것은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본다’는 정부 입장에 동의하느냐”고 물어본 결과 “동의한다”가 47.6%, “동의하지 않는다”가 47.9%로 팽팽했다. “모르겠다”가 4.5%였다.
……
정부의 위안부 협상 결과에 대해선 불만족스럽다(‘매우 불만족한다’ 또는 ‘약간 불만족한다’)는 응답이53.7%로 만족한다는 응답(35.6%)보다 많았다.
정부 발표 중 “일본 정부가 합의사항을 이행한다는 전제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는 응답(58.2%)이 “동의한다”(37.3%)보다 많았다.❞
참으로 할 말이 없는 현재 배달겨레 반쪽이 살고 있는 남쪽의 현실이다. 위와 같은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40년간 이 나라를 빼앗고 세계사에 있어본 적 없는 악랄한 방법으로 식민지지배와 수탈을 한 역사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민족반역자들의 후손들이 권력과 재부 그리고 이 사회의 모든 기득권을 틀어쥐고 자신들의 직계조상의 반민족 반역행위를 숨기기 위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일본의 만행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오늘의 남쪽 현실에 대해 후세들은 과연 뭐라고 역사적 평가를 내릴 것인지 두렵기만 하다.
오늘자 새 소식을 올려준 것은 필자가 현재 연재를 하는 것도 기록으로 남아 후세들에게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연재를 하는 내용과 직접 관련을 가지고 있기에 인용을 해보았다.
그럼 이제부터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 젊은 조선인들이 동북만주와 남만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벌인 조직사업에 대해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1) 연변조선족자치주 자료
젊은 조선인들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 동북만주와 남만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벌인 조직사업에 대한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될 수 있으면 자료를 전면 개제를 한다. 투쟁과정에 대한 생생한 기록과 또 증언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 먼저 오래 된 기념비를 가보았다. 한자리에 두 개의 기념비가 쌍둥이처럼 세워져있는데 앞쪽것은 화강암으로 다듬은 석비이고 한자쯤 뒤에 세워진 기념비는 오래된 목비였다. 석비엔 “화룡시문화유물보호단위 약수동항일기념지 화룡인민정부 1985년6월1일”이라는 조한문으로 된 붉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
1930년 5월 27일 이곳에서 동북에서의 첫 번째 쏘베트정부가 성립되였다. 1930년 6월 10일 중공약수동지부가 성립되고 서기로서는 리봉삼이였다. 1930년 7월 10일 중공평강위워원회가 성립되고 서기는 주현갑, 조직부장은 리주헌, 선전부장은 황룡문, 비서는 윤준걸, 유일환이였다. 아래에 12개 지부가 있었다. 평강구위는 선후로 약수동-어랑촌-마고령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에 전부 파괴되였다. 1930년 8월 13일에 중공연화중심현위가 성립되고 서기로는 김창일, 조직부장은 정만준, 선전부장은 한별,군사부장은 박윤세였다. 1932년 음력 11월 4일에 항일녀영웅 김순희와 호조회장 정태준 등 13명 동지들이 이곳에서 희생되였다.
약수동쏘베트정부 탄생
1930년 5월에 진행된 “붉은 5월 투쟁”은 5월 23일부터 부분적 농촌에서 토지혁명투쟁에로 넘어갔다.약수동, 투도구, 달라자, 삼도구 등지의 농민들은 공산당조직의 령도밑에 선전대와 특무대를 조직하여 친일주구와 토호렬신을 청산하고 소작료계약서와 고리대문서를 불살라버렸다. 그들은 또 지주, 토호렬신 및 친일주구들의 식량과 재산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1930년 4월말 황포군관학교출신인 조선족공산당원 신춘(申春)을 혁명군중기초가 좋은 약수동일대에 파견하여 토지혁명을 전개하도록 했다. “붉은 5월 투쟁”속에서 약수동의 농민들은 농민적위대를 조직하여 지주의 장원으로 쳐들어가 지주의 고리대문서를 태워버리고 량식과 재물을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930년 5월 27일은 약수동과 그 일대의 농민군중들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날이다. 약수동 상촌의 팔간집마당에서 열린 군중집회에서 신춘은 “약수동쏘베트정부가 창립되였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였다.이는 동북에서의 첫 민중정권의 탄생이였다. 그것도 일제치하와 봉건통치배들의 코앞에서 벌어진 력사적장거였다.
신춘은 쏘베트정부의 창립대회에서 약수동쏘베트정부창립의 력사적의의와 그 사명에 대하여 얼음에 박밀 듯 피력했다. 신춘의 열정적인 연설은 대회에 참가한 군중들의 가슴에 뜨거운 물결을 일으켜주기에 족했다. 대대손손 착취와 빈궁의 멍에에 짓눌려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온 가난한 무권리 농민들로 놓고보면 이건 크나큰 경사였다. 군중들은 쏘베트정부의 성원들을 선출하고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단행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군벌정부를 타도하자!”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고농들에게 나누어주자!”
“토지혁명을 실행하자!”
“쏘베트수립을 옹호한다!”
수백명 군중들은 목터져라 구호를 부르면서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 약수동학교의 소선대원들은 붉은넥타이를 날리며 행진하였다. 구호와 노래소리가 삽시에 약수동 하늘가를 진감하였다.
나가자 나가자 싸우러 나가자
용감한 기세로 어서 빨리 나가자
제국주의 군벌들은 죽기를 재촉코
강탈과 학살은 여지없이 하노라
시위대 군중들은 지주와 일제주구놈들의 집앞에서 더 힘차게 구호를 웨치면서 단결된 힘을 과시했다.시위는 사흘동안 계속되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죄악이 하늘에 사무치는 일제주구 몇놈을 붙잡아 처단했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자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그자들의 고리대문서와 소작료계약서를 들춰내여 불태워버렸다. 리경천 등 10명으로 조직된 농민적위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순찰하면서 농민들의 시위투쟁을 보위하였다.
약수동의 농민들은 쏘베트정부창립대회의 결의에 따라 “5.30”폭동의 거세찬 투쟁에 뛰여들었다. 폭동후 일제경찰들은 약수동에 덮쳐들어 100여명의 청년을 체포하였다.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일제의 련속부절한 탄압으로 활동을 전개할수 없게 되었다. 하여 약수동쏘베트정부는 창립되여 3일만에 부득불 지하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
쏘베트정부의 수립은 연변에서의 하나의 큰 사변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필경 중국공산당의“좌”경로선의 산물이였다. 이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 ‘붉은 5월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하여 일으킨 첫 번째 반제반봉건투쟁입니다. 이 운동을 통하여 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비록 성숙되지 못한 투쟁이였지만 이번 투쟁은 거쳐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조선인군중가운데 파급시켰습니다. 이번 투쟁을 거친후 동북에서 처음으로 되는 쏘베트정권을 수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투쟁의 교훈은 ‘좌’경이였습니다. 경황없는 상황에서 진행하였기에 리론과 실천을 결부시키지 못한 오유를 피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
약수동은 또 중공연변제1차당원대표대회가 열렸던 고장이기도 하다.
……
1930년 7월,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인 왕경(조선인)은 중공만주성위 비서장 료여원과 함께 연변으로 되돌아왔다. 료여원은 성당위의 파견을 받고 중공연변특별지부를 협조하여 원 조선공산당원들이 개인의 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는 일을 심사하러 왔던 것이다. 료여원과 왕경은 친히 각 현에 가 원 조선공산당원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흡수하는 사업을 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연변의 중공당조직은 신속한 발전을 가져왔다. 이런 토대에서 7월하순 료여원과 왕경은 연길현 의란구 남동에서 중공연화중심현위건립준비사업에 관한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6일간 열렸는데 도합 15명이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동북에서의 조선인농민투쟁과 조선인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할데 관한 지시정신을 학습하고 구당위를 건립하고 당원대표대회를 선거하는 등 문제들을 연구하였다. 회의후 회의에 참석했던 당간부들은 각지에 내려가 연화중심현위의 건립을 위한 준비사업을 하게 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은 친히 약수동에 내려가 평가구당원대표회의를 열고 주현갑을 서기로 한 중공평강구위를 건립하였다. 공산당조직에서는 약수동을 당사업의 토대가 매우 좋아 당의 회의를 열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지목하고있었다.
1930년 8월 13일, 각지에서 온 당원대표들은 약수동 웃마을에 모였다. 대표대회의에서는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의 책략과 총로선을 관철할데 대한 조치를 세우고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중공당원으로 흡수한 사업을 총결하였으며 7명의 위원과 2명 후보위원으로 구성된 중공연화중심현위 지도기구를 선거하였다. 이들가운데는 원 중공연변특별지부 서기였던 왕경, 중공만주성위 특파원 박윤서, 마준, 원 조선공산당 당원이였던 김성도, 한별, 리용국의 전(全, 양말제조로동자), 최(건축로동자), 리(빈민)씨 성을 가진 당원대표도 있었다. 중공연변연화중심현위 위원회 부서와 간부진영은 아래와 같았다.
서기 왕경(조선인), 조직부장 마준(조선인), 선전부장 한별(조선인), 군사부장 박윤서(조선인), 청년부장 리용국(조선인), 녀성부장 김여신(녀, 조선인)
중공연화중심현위는 중공만주성위산하 직속인 연변에서의 공산당의 최고기관이였다. 중심현위 산하에는 개산툰구위 등 10개 구당위와 61개 기층당지부가 있었으며 당원은 도합 480명 있었다.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농민운동을 힘껏 발전시키였으며 공산당조직과 공청단조직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농민협회 등 대중단체를 결성하여 토지혁명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적위대, 유격대 등 무장단체를 조직하고 혁명위원회를 건립하여 지방폭동을 구체적으로 지도하였다. 이리하여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연변지구의 당산당원, 공청단원들은 근 천여명이나 되었고 여러 대중단체들에는 5000여명의 군중이 참가하였으며 이런 조직영향하의 군중들은 5만여명에 달하였다.
❞(김철호《연변항일사적지연구》)
새 사조를 받아들이고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젊은 조선인들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김일성 주석 주도로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선포하였는데, 인용문은 유격대창설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사업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다만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당시 동북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일반조선인들을 반일 항쟁에 나설 수 있도록 활발하게 조직사업을 벌인 조직은 새 형의 투쟁방향을 설정한 젊은 조선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인용문에도 언급이 있듯이 약수동 소비에트정권을 담당했던 인물들이 거의 조선인들이었다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물론 인용문에는 조직사업을 중공당에서 발기하고 조직했다고는 하지만 성원들 대다수가 조선인들이다. 당시 조선인들이 조선의 독립을 떠나 어떤 투쟁을 한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더구나 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인 사상을 통해 혁명정신을 높이고 이를 통해 항일투쟁을 강력하게 벌임으로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불타고 있었다.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공연화중심현위 지도기구 선거에 참석한 사람들이나 선출된 사람들 모두가 조선인들이다. 물론 인용문은 1931년에 있었던 《5·30 폭동》, 《8·1폭동》을 일으키기 직전에 조직된 기구로서 위에서 언급된 조직원들은 당시 중공당에 입당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들이 저지른 좌경모험주의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조직에 가담을 하는 것은 자신들 개인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데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지향을 하는 것은 조선의 독립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되어 민족 앞에 씻지 못할 죄악을 저지르게 된 투쟁가도 있다.
위 인용문에 나오는 이들 가운데 민족 앞에 씻지 못할 죄를 저지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원 조선공산당 당원 이었다”라고 언급된 “김성도”이다. 김성도는 반민생단투쟁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였다. 그는 반민생단투쟁을 이끌면서 수많은 조선인 항일혁명투사들을 처형하였다. 그가 주도하여 처형한 항일혁명투사들은 유격대간부들도 많았으며 심지어 작식대원으로 있는 조선인 여투사들도 민생단원이라고 몰아붙여 처형을 하였다. 결국 김성도 자신도 민생단 혐의자로 몰려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본 내용은 이송덕 선생이 답사 길에 반민생단투쟁을 이야기 하면서 들려준 이야기 이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 와서 투쟁을 하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동족인 공산당 간부에게 아무런 죄도 없이 모략을 받고 처형을 당해야 한다니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연변조선족자치주 학술자료 인용문은 당시 항일혁명투사들이 일반 백성들 사이에 들어가 조직사업을 하고, 그 사업이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물론 후일 조직성원들과 백성들을 폭동으로 내몰아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조직이 혹심하게 파괴가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여기서는 논하지 않는다. 다만 초기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조직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만 참고를 하면 될 듯하다. 더해서 당시 만주지역에서 치열하게 투쟁을 하던 조직성원들은 거의 조선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 한다.
후일 젊은 조선인들은 《5·30 폭동》, 《8·1폭동》의 오류를 심각하게 고찰을 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다시는 이전과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하고 조직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이제 젊은 조선인 항일투사들이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국경일대에서 일반백성들을 상대로 벌인 조직사업에 대한 남쪽의 자료를 보도록 하자.
2) 조직구성에 대한 남측자료
남측에는 체계적으로 항일유격대 창건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 북부국경 일대에 반일조직을 꾸리고, 조직 확대를 위해서 투쟁을 한 사실에 대해 정리된 자료가 거의 없다. 앞서 참고자료로 활용을 했던 이종석 전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의 논문이나 한양대 신용하 교수의 논문에는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해 만주지역과 조선북부 지역에 반일조직을 내온 것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물론 항일유격대를 연이서 창설을 하여 치열하게 항일전을 벌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있다.
이렇게 남쪽 빈약한 남쪽 자료의 한계로 인해 본 문제에 대한 분석대상으로 인용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다만 이전 장들에서도 인용을 하였지만 필자가 소유한 자료 중 유일하게 서적자료 한 가지만 이에 대해 간략히 기술이 되어 있기에 인용을 한다. 아래에서 이에 대한 자료를 인용하기로 한다.
❝ …항일유격대가 결성되는 데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광범한 민중과의 연계를 강화하여 튼튼한 대중적 토대를 닦는 것이었다.
유격전은 본질상 민중들의 적극적인 참가를 전제로 하는 민중전쟁이다. 민중의 적극적인 참가와지지 ·성원은 유격대의 끊임없는 확대 · 강화와 유격전의 승리를 보장하는 기본 조건이다. 유격대는 튼튼한 대중적 지반을 쌓고 민중과의 혈연적 연계를 강화할 때만 장기간의 간고한 투쟁에서 부딪치는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고 최후의 승리를 달성할 수 있다.
새 세대 청년공산주의자들은 대중과의 연계를 무시하고 유격활동을 단순한 군사활동만으로만 인정하려는 군사모험주의적 경향을 배척하면서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민중과의 연계를 밀접히 하며 그들과의 사업을 강화하였다.
❞(항일무장투쟁사. 남혀우. 대동신서. 1988년 8월 29일. 135쪽)
비교적 간략히 언급이 되어있지만 정확한 분석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 북부국경일대에 반일조직을 내오는 구체적 사례를 거론했다거나 그 수행과정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위성과 의미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한 안목을 가지고 분석하였다.
유격대가 유격투쟁을 벌이는 지역의 백성들과 광범위하게 그리고 혈연적으로 유대를 맺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유격대가 백성들과 혈연적 유대를 가짐으로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유격투쟁에 필수불가결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
첫째. 유격대원들을 끈이지 않고 보충할 수가 있다. 새로운 유격대원들이 보충이 되지 않는다면 초기 창설된 유격대원들이 영활무쌍하고 연전연승을 한다 해도 그 유격투쟁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단기간의 유격투쟁을 한다면 몰라도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데 유격대원들을 보충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지 않고는 장기간의 유격투쟁에 대해서는 생각 할 수 없다. 따라서 당시 유격대를 창건하려던 젊은 조선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정확히 인식하였으며, 본격적인 유격투쟁에 들어가기 위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주요한 사업으로 정하고 치밀하게 조직사업을 벌였다.
둘째.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의 북부국경일대에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반일조직을 꾸리고 그 조직을 부단하게 확장해나가는 것은 넓은 지역에서 반일·항일유격투쟁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인 일본관동군과 조선주둔 일본군이 유격대토벌에게는 매우 어려운 장애가 된다. 유격대가 넓은 지역에서 투쟁을 벌이게 되면 아무리 많은 수의 군대를 가졌다 해도 군사력에 분산을 가져옴으로서 효율적인 토벌을 할 수가 없다. 이는 결국 유격대 토벌의 실패를 가져오게 되며 그 결과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의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이 한 낮 개꿈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이다.
또 유격대가 일부지역에서 활동을 한다면 그 유격대는 우세한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대병력을 거느린 일본군에게 쉽게 토벌을 당할 위험이 대단히 높다. 따라서 광범위한 지역에 유격대를 조직하고 유격투쟁을 벌이는 것은 필수이다. 이를 위해 넓은 지역에 유격대를 창설하고 투쟁을 해나가는데 지역 백성들과 치밀한 연계를 맺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셋째. 유격대가 유격활동을 하는 지역의 주민들과 혈연적 관계로 맺어지면 유격활동에 필요한 후방지원이나 원호물자를 일정 정도 조달을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전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들처럼 나라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듯이 강제로 모금 액수를 정하고 징수하는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 절대 아니다.철저히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하였다. 때로는 유격대원들이 백성들의 살림을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활동도 하였다. 유격대원들은 유격구내의 주민들과 한 집안 식구처럼 함께 농사도 짓고 연료문제도 해결하고 농경지도 개간을 하는 등 강대한 일본제국주의 침략군대에 맞서 투쟁을 하면서도 끈임 없이 백성들과 함께 하였다. 즉 실천 속에서 백성들과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넷째. 적들에 대한 비밀자료를 정탐해내는 등 정보자료를 획득할 수 있는 통로도 되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 군대들이 주둔하고 있는 각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적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찰을 하였으며, 그 사실을 즉시로 유격대에 통보를 하였다. 물론 당시 유격대가 적들의 움직임을 포함한 적의 정보자료를 주민들에게만 전적으로 의존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유격대가 획득할 수 있는 정보와 백성들이 전해준 정보자료를 종합하여 적들과 맞서 유리한 상황에서 투쟁을 벌일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다섯째. 백성들을 반일조직에 내세워줌으로서 나라를 잃고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 이주해와 힘들게 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조국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는 조선인들에게 조국해방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유격대와 한 전호 속에서 싸울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뒷 장들에서 다루겠지만 유격대와 백성들이 한 전호 속에서 싸워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들을 물리치고 연전연승을 거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이미 다루었던 유격대의 《내도산 전투》도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여섯째.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짧은 기간에 벌이는 유격투쟁이 아니기에 전투를 벌이는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과 하나로 뭉치는 연계관계는 필수적이다. 장기간 벌이는 유격투쟁에서 지역주민들과 혈연적 관계로 연계가 되는 것은 유격대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공급하는 물 원천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위에서 이미 예를 든 것처럼 장기간 유격투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유격대원들이 끈이지 않고 보충이 되어야 하며, 비록 그것이 크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후방지원과 원호물자의 끈임 없는 지원은 일정한 기간을 정하지 않고 장기간 투쟁을 하는 유격대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들이 유격대를 창설하기 전에 그 준비과정으로 백성들 사이에 반일조직 사업을 적극적으로 내밀었던 이유가 바로 위와 같은 것들이다. 바로 남측 자료는 비록 짧기는 하지만 위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3) 반일조직 사업에 대한 북측 자료
이제 반일조직 사업에 대한 북측 자료를 보기로 하자.
❝ 우리는 무장대오를 꾸리는데서 사람과 무기를 가장 중요한 두가지의 필수적요소로 보았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이 두가지가 다 부족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란 군사정치적으로 준비된 인간을 의미한다. 우리한테는 정치를 알고 군사를 아는 사람, 조국과 인민을 위해 장기간 무장을 들고 싸울 준비가 되여있는 그런 청년들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한해반사이에 조선혁명군의 골간들을 거의다 잃어버리였다. 김혁, 김형권, 최효일, 공영, 리제우, 박차석과 같은 혁명군의 주력이 한해사이에 모두 전사하거나 감옥행을 한데다가 1931년 1월에는 중대장으로 활약하던 리종락이마저 조선혁명군과 관련된 소책자를 가지고 무기공작을 하러 가다가 김광렬, 장소봉, 박병화와 함께 일본령사관 경찰에 체포되였다. 군사물계에 밝은 김리갑도 감옥에 끌려갔고 백신한은 전사하였다. 최창걸과 김원우는 어떻게 되였는지 소식조차 알길이 없었다.
혁명군의 나머지력량가운데 군사경험이 있다는 대원들은 손가락으로 꼽을수 있는 정도였는데 얼마 안되는 그 대원들마저도 군중정치공작에 돌리다보니 무장대오에 망라시킬수 없었다. 내가 안도에서 유격대를 내오느라고 바쁘게 뛰여다닐 때 내곁에 있은 조선혁명군출신의 청년은 차광수 한사람뿐이였다.
국가권력을 쥐고있는 사람들 같으면 동원령이나 의무병력제와 같은 법으로 필요한 군사인원들을 손쉽게 충당할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모집할수 없었다. 법적장치나 물리적힘으로써는 대중을 혁명에 동원시키지 못한다. 한때 상해림시정부는 모든 국민들이 납세, 병역징발에 응할 의무를 지닌다는 조문을 헌법에 박아넣었지만 인민들은 그런 법이 채택되였다는것조차 모르고있었다. 국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남의 나라 조계지 한구석에 앉아 국권을 행사하는 망명정부의 법이나 지령이 효과를 낼수 없다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리치이다.
식민지민족해방혁명에서는 동원령이나 의무병력제와 같은 법적수단으로 사람들에게 총을 메울수 없다. 이 혁명에서는 혁명을 령도하는 수령과 선각자들의 호소가 법을 대신하며 매개 사람들의 정치도덕적자각과 전투적열정이 참군을 결정하게 된다. 대중은 그 누구의 요구나 지령이 없어도 자기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스스로 총을 멘다. 이것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여있는 인민대중의 본성적행위이다.
우리는 이런 원리에 기초하여 안도와 그 주변에서 유격대에 망라시킬 대상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적위대, 소년선봉대, 로동자규찰대, 지방돌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에는 참군을 요구하는 끌끌한 청년들이 많았다. 추수, 춘황투쟁의 폭풍속에서 반군사조직들은 급속히 확대되였고 그 폭풍의 한복판에서 청년들도 몰라보게 성장하였다.
……
우리는 상비적인 혁명무력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다그치면서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축성하는 사업에도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인민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단련시켜 그들을 항일전쟁에 튼튼히 준비시키는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필수적요구였으며 광범한 대중이 자각적으로, 거족적으로 동원되는 여기에 바로 최후승리의 담보가 있었다.
1930년의 전례없는 흉작과 그에 따르는 혹심한 기근은 우리가 동만에서 추수투쟁에 이어 새로운 대중투쟁을 벌릴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다. 우리는 추수투쟁을 통하여 앙양된 군중의 투쟁기세를 늦추지 않고 일제와 친일지주들을 반대하는 새로운 춘황투쟁을 벌리도록 하였다. 춘황투쟁은 지주에게 쌀을 꾸어달라는 차량투쟁으로 시작되여 일제와 친일지주들의 량곡을 몰수하는 탈량투쟁으로, 일제의 앞잡이들을 청산하는 폭력투쟁으로 급격히 발전하였다.
춘황투쟁의 불길속에서 동만지방인민들을 혁명화하는 사업은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하였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의 공세가 그처럼 악랄해지고있는 환경속에서도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속에 깊이 들어가 인내성있게 그들을 계몽하고 교양하였다. 대중단체들은 관문주의의 틀을 마스고 문을 활짝 열어놓았으며 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부단히 단련시키였다.
그러나 이 사업이 어디서나 순풍에 돛단것처럼 그렇게 헐하게 진행된것은 아니였다. 한 마을을 혁명화하는 과정에 여러명의 혁명가들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참기 어려운 수모와 불신을 당하면서도 자기가 혁명가라는것을 밝히지 못하고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푸르허마을에서 겪은 체험도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고 말할수 있다.
…… (푸르허 마을에서의 머슴꾼 노릇에 대한 자료는 이미 올려주었기에 여기서는 인용하지 않는다.)❞(세기와 더불어 중에서 푸르허마을 혁명화)
혹 위의 자료를 참고하고자 하면
[항일연재 8]반일조직 구성을 위한 푸르허에서의 "머슴살이" 일화를 보기 바란다.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4575§ion=sc46§ion2=>
북측 자료에 인용된 내용 중에서 추수·춘황투쟁에 대해서도 이미 《[항일연재3] 1930년 "5.30폭동"과"8.1폭동"이 조선인들에게 끼친 참혹상》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항일연재3]을 보지 못한 독자들은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4150§ion=sc46§ion2=>
인용문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그나마 어렵게 꾸려왔던 조직은 1931년 극단적 좌경모험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 사적 목적 실현을 위하여 조선백성들을 《5·1폭동》과 《5·30폭동》 그리고 《8·1폭동》을 내몰게 됨으로서 혹심하게 파괴되었다. 조직을 이끌던 지도자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철창 속에 갖히었으며 다행히 잡히지 않은 조직원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도망자의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렇게 혹심하게 파괴된 조직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당시 새 사조를 받아들인 젊은 조선인 지도자가 걸었던 길은 얼마이며 위험을 무릅쓴 사지판을 넘나든 것은 또 얼마였던가. 위 인용문은 이를 그저 함축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았다. 또 그 과정에서 희생된 항일혁명동지들은 몇이었던가. 물론 인용문에는 “김혁, 김형권, 최효일, 공영, 리제우, 박차석 … 리종락” 등 주요인물에 대해서만 언급을 했지만 실제 혁명의 길에 나섰던 반일·항일투사들의 희생을 어찌 한 두 마디의 필설로서 다 나열을 할 수 있겠는가.
참고로 위에 든 예 가운데 박차석과 리종락은 중도 배신을 하고 후일 김일성 주석이 투항할 것을 회유하기 위해 일제의 개가 되어 사령부에 침투를 하였다. 박차석은 그나마 자신의 잘 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를 하였지만 리종락이는 끝내 자신의 반역죄를 합리화 하면서 끝까지 김일성 주석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이에 격분을 한 유격대원들에 의해 처단을 당하고 만다. 물론 세기와 더불에는 “처단을 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유격대원들이 격분하여 처리를 하였다”고 하여 민족의 반역자 리종락이를 처단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리종락이와 박차석은 김일성 주석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화전에 설립한 화성의숙을 다닐 때 함께 수학을 하던 동료이자 1926년 10월 17일에 있었던 《ㅌ·ㄷ》의 성원이기도 하다. 또 리종락이와 박차석은 독립군에서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출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들이 민족을 배신을 하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의 개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이와 같이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한 그 준비과정은 대단히 험난했다. 적들과의 직접적인 싸움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을 당했으며, 일부는 일본 영사관 경찰들에게 체포를 당하였고, 게 중에는 일시적 난관을 이겨내지 못하고 적들에게 투항을 하고 예전의 동료들에게 총을 들이대는 배신자들로 나왔다. 얼마나 간고했던가에 대해 굳이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우리는 한해반사이에 조선혁명군의 골간들을 거의다 잃어버리였다. 김혁, 김형권, 최효일, 공영, 리제우, 박차석과 같은 혁명군의 주력이 한해사이에 모두 전사하거나 감옥행을 한데다가 1931년 1월에는 중대장으로 활약하던 리종락이마저 조선혁명군과 관련된 소책자를 가지고 무기공작을 하러 가다가 김광렬, 장소봉, 박병화와 함께 일본령사관 경찰에 체포되였다.”라고 하여 그 과정이 얼마나 간고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앞에 주저앉을 젊은 조선인들이 아니었다. “대중은 그 누구의 요구나 지령이 없어도 자기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스스로 총을 멘다. … 우리는 이런 원리에 기초하여 안도와 그 주변에서 유격대에 망라시킬 대상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적위대, 소년선봉대, 로동자규찰대, 지방돌격대와 같은 반군사조직들에는 참군을 요구하는 끌끌한 청년들이 많았다. 추수, 춘황투쟁의 폭풍속에서 반군사조직들은 급속히 확대되였고 그 폭풍의 한복판에서 청년들도 몰라보게 성장하였다.”라고 하여 당시 젊은 조선인 반일·항일투쟁가들은 부딪히는 어려움과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끈임 없이 가열 차게 조직을 내오기 위하여 투쟁을 벌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 1931년 가을과 1932년 봄에 벌어졌던 추수·춘황투쟁에서 고양된 백성들을 반일의 대오에 묶어 튼튼한 유격대지지 세력으로 키워나갔다. 이에 대해 인용문은 “우리가 동만에서 추수투쟁에 이어 새로운 대중투쟁을 벌릴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었다. 우리는 추수투쟁을 통하여 앙양된 군중의 투쟁기세를 늦추지 않고 일제와 친일지주들을 반대하는 새로운 춘황투쟁을 벌리도록 하였다.”고 하여 백성들이 일본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맞서 투쟁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는 곧 유격대창건에 필수 요소인 일반백성들의 반일단체조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성들을 반일조직에 묶어 세울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유격대원들 스스로 실천하는 실천투쟁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도 간단히 언급을 하였다. 인용문은 “인민대중을 실천투쟁속에서 끊임없이 각성시키고 단련시켜 그들을 항일전쟁에 튼튼히 준비시키는것은 우리 혁명발전의 필수적요구였으며 광범한 대중이 자각적으로, 거족적으로 동원되는 여기에 바로 최후승리의 담보가 있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일반백성들이 유격대와 혈연적으로 묶여질 조건은 그들에게 그 어떤 강압을 쓴다거나 회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격대원들 스스로 그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하고 하나가 되는 실천투쟁을 함으로서 유격대에 망라되는 것이 자신을 지킨다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 “김일성 주석 푸르허 마을에서 머슴살이 일화”인 것이다. 이 말은 대중을 혁명화하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푸르허 마을을 혁명화 하는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지도자가 직접 머슴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주민들을 반일·항일혁명화를 했겠는가.
푸르허 마을 혁명화 과정에 대한 자료를 보면 마치 단편소설 한 편을 보는 듯하다. 그것도 웃음을 자아내는 그러나 웃음 보다는 눈물이 먼저 앞을 가리는 간고한 투쟁을 형상화 한 단편 희곡 소설 같다. 우리 조상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간고한 투쟁을 했는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일화이다. 필자는 푸르허 마을 혁명화 과정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웃음, 눈물, 비장함이 동시에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른다.
인용문은 푸르허 마을 하나의 예만 들었을 뿐이지 나머지 지역을 혁명화 하는데 그만한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결코 아니다. 이미 앞선 답사기에서 다루었지만 흥륭촌을 일치된 하나의 반일조직으로 묶어세우는데도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렇듯 당시 동북만주와 남만 그리고 조선북부국경일대에 반일조직을 내오는 것은 간고한 투쟁이었다.
당시 젊은 조선인들이 백성들 사이에 내온 반일 조직으로는 아동단, 소년단, 공청, 반일부녀회, 적위대,소년선봉대, 노동자 규찰대, 지방 돌격대 등이 있었다. 그 조직은 나이와 종사하는 분야에 따라 매우 다양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조직이 성장을 하면서 항일유격대를 지원하고 원호하였으며, 유격대원을 공급하는 풍부한 원천이 되었다.
→ 《계속》
자료제공: 연변항일독립운동역사학자 이 송덕
사진제공: 이 창기 기자
※※※애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구합니다.※※※
그동안 주2회씩 하던 [항일연재]를 필자 개인사정으로 인해 주 1회(수요일)만 연재합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2015년 1월 5일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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