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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 수용소' 같던 제주도 비극, 책임은?

 
[기자의 눈] 대설경보에도 '이륙 희망 고문'한 공항
 
| 2016.01.27 08:23:08

 

지난 23일부터 제주도를 강타한 폭설과 한파로 제주공항이 44시간 마비된 사태가 벌어졌다. 제주도 도심에 폭설이 쏟아진 것은 32년만의 처음이라는 천재지변이기에 공항 마비 사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제주공항에 2000여 명의 체류객이 몰려 노숙을 하는 사태는 '인재'다.

비슷한 시기에 '94년만의 폭설'이 내린 워싱턴에서도 공항들은 마비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워싱턴 등 미 동부 지역에서는 22~23일 이·착륙하는 모든 항공편 운행을 '선제 조치'로 결항시켰다. 제주공항처럼 비행기 운행이 재개되기까지 노숙하는 체류객들은 없었다. 또한 워싱턴에 폭설이 내리기 하루 이틀 전에 이곳을 찾았다가 졸지에 발이 묶인 관광객들도 없었다. 제주도에서는 주말을 맞아 제주도를 찾았다가 체류자가 된 사람들이 수만 명이었다. (관련 기사:"제주공항 노숙 이틀째, 아무 생각 나지 않는다")

이런 큰 차이를 보면 제주공항이 이재민 수용소로 변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체류자가 된 것이 결코 '천재지변'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는 '인재'의 성격이 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 한국의 기상청 역량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23일 제주도에 폭설이 시작되기 전부터 지구온난화에 따라 북극의 한파가 그대로 한반도를 덮쳤고, 한파가 남하하면서 해안지역의 폭설이 우려되는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었다. 

폭설을 예상한 워싱턴 시는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지난 22일 눈이 내리기 시작한 오후 1시(현지시간)보다 무려 30시간이나 앞선 21일 오전 7시부터 선제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지하철 운행을 중단시킨다고 발표하고, 워싱턴 등 미 동부 지역에서 22~23일 사이 이·착륙하는 모든 항공편 운항도 일찌감치 결항조치했다는 것이다. 
 

▲25일 오후부터 운항이 재개된 제주공항 활주로 주변에 여객기들이 대기하고 있다.ⓒ프레시안(이승선)


대설경보에도 이륙도 못할 탑승은 계속

 

  

한국에서 이렇게 선제적으로 결항조치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실 23일 오전 4시에 기상청이 제주도 산간에 대설주의보를 발효했는데, 기상청이 이날 오전 10시를 기해 제주도 산간에 내려진 대설주의보를 대설경보로 대치한다는 예비 특보를 내리자 그제서야 한라산 국립공원은 오전 9시30분 입산을 전면 통제했다. 하지만 이렇게 늑장 통제 조치를 하는 동안 입산객은 이미 수천 명에 달했다. 한라산 국립공원에 따르면 이날 한라산 입산객은 3500여 명으로, 이들은 모두 입산 통제 시간 전인 오전 9시30분 이전에 산에 올랐다. 

이때문에 한라산과 올레길 등에서 고립되는 사고는 15건에 53명이나 됐고, 수많은 입산객들은 고립까지는 아니어도 생사의 위기를 느끼며 하산해야 했다. 한라산 주변을 지나는 산간도로들에서는 빙판길에 교통사고가 잇따랐다. 

한라산 국립공원은 제주공항보다는 그나마 빠른 조치를 했다고 억울해 할 것이다. 제주공항에서는 활주로 운행 중단 조치가 오후 5시50분에야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미 활주로와 주변에서 대기중인 항공기들은 빙판과 쌓인 눈 때문에 이륙할 수 없는 상태였다. 위험해서 다시 공항 대합실로 나오도록 문을 열어줄 수도 없었다. 이때문에 오후 12시 이륙 예정인 여객기에 탑승한 승객들은 5시간 넘도록 비행기 내에 갇혀 고문을 당했다. 활주로 운영 중단 조치로 풀려난 승객들은 점심까지 굶은 채 공항 구내 식당 쿠폰 한 장 지급으로 위로를 받아야 했다.    


제주공항의 노숙 사태는 대형항공사가 아니라 일부 저가항공사들의 민낯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저가항공사들은 상대적으로 대형항공사에 비해 노후된 기종들을 보유하고 있고, 보유수량도 몇 대밖에 안된다. 이렇게 적은 수의 항공기를 최대한 자주 운행에서 수익을 내려고 하니, 제대로 정비하면서 운행하기 어렵다. 최근 저가항공사들이 차레로 아찔한 안전 사고를 일으켜 국토교통부의 긴급 점검 진단을 받기에 이른 이유다. 
 

▲ 25일 저가항공사를 이용하는 한 체류객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1300번이 넘는 대기표를 보여줬다.ⓒ프레시안(이승선)

 

▲제주공항에서 졸지에 노숙자 신세가 된 체류객들. ⓒ프레시안(이승선)

 

 

저가항공사들, 선착순 줄서기 강요로 노숙 사태 초래  

 

게다가 이번 같은 결항 사태가 발생하면, 저가항공사들은 자동적으로 예약된 순서대로 재예약되는 전산망도 갖추지 않은 것이 드러났다. 심지어 어떤 저가항공사는 대기표를 발급하는 시스템도 없어서 운행이 재개되면 선착순으로 보내준다면서 그냥 줄을 서게 만들었다. 사실 이런 항공사를 이용한 분들이 할 수 없이 제주공항에서 노숙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한 저가항공사는 25일에서야 대기표를 지급하는 장비를 갖추고서는 그동안 선착순 줄은 무시하고 대기표를 나눠줬다. 마침 자리에 없어 대기표를 받지 못한 체류객들은 밤새 줄 선 보람도 없이 뒤로 밀려버리는 일도 있어서 항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대기표를 간신히 받아도 탑승 시 호명해서 응답이 없으면 그 다음번 대기표를 받은 승객으로 순번을 넘기는 방식을 취했다. 대기표를 받고도 공항에서 노숙을 하고 줄을 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면 대형항공사들은 예약된 순서로 다시 탑승시간이 정해져 3시간 전에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시스템을 갖춰 오히려 "공항 접수는 불가하다"고 안내했다.  

"싼 게 비지떡"이어서 저가항공사 수준을 나무랄 수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시민들의 기대 수준과는 너무 동떨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난 순간이다. 결국 제주도에서 벌어진 비극은 '천재지변'만으로 초래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체류객들이 겪은 고통과 혼란은 어찌보면 '인재'의 책임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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