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 농업혁명이 고대문명 창조의 어머니라면, 청동기 문화는 고대문명 창조의 아버지이다. 일반적으로 고대문명은 곧 청동기 문명이라고도 한다. 청동기 문화에 기초해 계급이 발생하고 계급 지배도구로서 국가권력이 형성되면서 인류 최초의 고대문명이 탄생했다. 기원전 3000년경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기원전 3000∼2500년 사이의 인더스강 유역의 문명, 기원전 2000년경 황하 유역의 문명이 인류 4대 문명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이들 인류 문명 발상지는 신석기 농업혁명, 청동기 문화, 고대 국가, 문자의 발명 등의 과정을 통해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독자적인 고대문명이 창조된 지역들이다. 물론 이집트 경우처럼 청동기 문화가 성립하기 이전 신석기 시대에 고대국가가 성립된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고대문명은 청동기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4대 문명에서 주목할 점은 중국의 경우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약 1000년 후에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는 유럽지역보다 1000여년 늦게 고대문명이 형성되었는가? 바로 이 점에서 한반도 청동기 문화와 고대 국가의 성립시기가 주목되고 있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연원을 밝히는 문제는 한반도 고대문명의 탄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된다. 한반도에서 언제 고대문명이 발생했으며,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가는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연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연원을 외래에서 유입된 수입문화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대표적으로 기원전 13세기경에 시작된 카라수크 청동기 문화 전파론, 스키타이 청동기설, 오르도스 청동기설, 은나라 청동기설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어느 것 하나 청동기 문화의 이동경로나 유적 유물적 증거들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 외래 유립론들은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상한이 올라감에 따라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상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난무하고 있어 아직 확정된 견해는 없다. 하지만 한반도 지역에서 기원전 12~13세기를 훨씬 뛰어넘는 청동기 유적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해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도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문화와 공존하면서 점차 본격화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교과서는 가장 보수적으로 연대를 설정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상한은 적어도 기원전 15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증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기원전 20세기를 훌쩍 뛰어넘는 청동기 유적들이 다수 발굴되고 있어, 한반도 청동기 시대 개시 연대는 갈수록 올라갈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전남 영암군 장천리에 있는 두 곳의 청동기 시대 주거지 유적에서 수집된 숯에 대한 방사성 탄소 측정결과 그 연대가 각각 기원전 27세기, 기원전 24세기경으로 나왔으며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5기의 고인돌 유적에서 채취한 숯에 대한 방사성 탄소 측정결과 기원전 24세기경으로 나왔다. 또 한반도 청동기 문화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 동북지역(만주)의 청동기 문화도 기원전 20세기 이전으로 소급된다. 결정적으로는 북한에서 최근 청동기 유적 유물들이 다수 발굴되었는데 기원전 35세기까지 소급된다. 이러한 자료들은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외부유입론이 틀렸다는 확실한 증거들이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창조된 독창적 문화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중국이나 시베리아지역의 청동기 문화보다 훨씬 앞서 창조되었을 뿐만아니라 그 성격이 매우 독특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비파형 동검이다.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데, 그 형태나 제작방법이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으로, 중국의 동주식 동검이나 오르도스 동검과는 전혀 다른 문화양태에 속한다. 중국의 동주식 동검이나 오르도스 동검은 검몸과 손잡이가 일체형이지만 비파형 동검은 검몸과 손잡이가 분리형으로 되어 있다. 또한 비파형 동검은 다른 지역의 동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파형태의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어 독창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유물로는 고인돌, 비파형 동검, 세형 동검, 팽이형토기, 미송리형 토기 등이 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독창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러한 점들은 한반도 청동기 문화가 그 어떤 다른 지역에서 창조되어 전래된 수입문화가 아니라 이 땅 한반도에서 살던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독창적으로 창조된 자주적 문화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즉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는 신석기 농업혁명을 이룩한 옛 유형의 한반도인(현대 한반도인의 직계 선조)들이 이 땅에서 독창적으로 창조한 자주문화이다.
▲ 비파형 동검(왼쪽) 동주식 동검(오른쪽) |
그렇다면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이전까지는 현재 중국 동북지역(요동반도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기 때문에 이 지역이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었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비파형 동검이 요령식 동검으로도 불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북한에서 대동강 주변의 청동기 유적유물들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한 결과, 이 지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원해서 한반도 전역과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이 밝혀졌다.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표지유물은 팽이그릇(팽이형 민무늬 토기)이다. 이 그릇은 생긴 모양이 팽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대동강 유역 청동기 시대 집터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남쪽 한계선은 한강 하류 유역이다. 이 그릇은 신석기 시대의 밑창이 뾰족한 새김(빗살)무늬 그릇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그릇은 대동강 일대의 고인돌에서도 자주 나오며, 대동강 일대의 청동기 시대 집터에서는 반드시 출토된다. 이렇게 볼 때 팽이그릇을 남긴 집터의 주민들이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동강 유역의 청동기 문화를 팽이형토기 문화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동강 유역에서 발원한 팽이형 토기 문화의 분포영역은 남쪽으로는 한강 하류지역에 이르고, 북서쪽으로는 청천강 일대에 이른다. 이러한 분포지역은 고조선 초기 영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팽이형 토기(질그릇)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민무늬 토기(질그릇)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 팽이형 토기 |
그렇다면 대동강 유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창조된 시점은 언제일까? 북한 고고학계에 따르면 대동강 유역의 팽이형 토기 문화는 1기~4기로 나뉜다. 1기는 고조선 건국 이전 팽이그릇만 쓴 청동기 시대이며, 2기는 고조선 건국 이후 팽이그릇과 미송리형 토기를 함께 쓴 시기이며, 3기는 팽이형 토기와 묵방리형 토기가 함께 나오며, 화독이 2개인 집터를 사용하던 시기이며, 4기는 집터에 주춧돌을 놓기 시작한 시기이다. 팽이형 토기 문화의 절대연대는 비파형 창끝이 나온 표대유적 집터에 의해 알 수 있다.이 유적 10호 집터에서 나온 묵방리형 단지를 열형광법으로 측정한 결과 4450±380년 전(측정 당시로부터)으로 나왔다. 이것은 비파형 창끝이 나온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의 절대연대(기원전 26세기)와도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 따라서 묵방리형 단지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팽이형 토기 3기는 대체로 기원전 3천년기 후반에 속한다. 이 연대를 근거로 하면 미송리형 단지가 나온 2기는 기원전 3000년기 전반기로, 그보다 더 이른 팽이형 토기 문화 1기는 기원전 4000년기 후반으로 편년할 수 있다. 이러한 편년은 팽이형 토기 문화 1기에 속하는 평양시 삼석구역 표대유적 8호 집터에서 출토된 토기를 핵분열흔적법으로 절대연대를 측정한 결과, 5238±777년전(기원전 4000년기 후반)으로 나온 것으로도 증명된다. 또한 청동조각이 나온 성천군 용산리 1호 고인돌 무덤의 경우 뼈를 시료로 전자스핀공명법(ESR)으로 측정한 결과 측정 당시로부터 5069±426(기원전 31세기)이며, 핵분열 흔적법(FT)으로 출토된 질그릇을 시료로 측정한 결과 측정 당시로부터 5037±853(기원전 31세기)로 나왔다. 이러한 제반 사실들을 종합하면 대동강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원전 35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이는 신석기 시대 이래 우리겨레가 살았던 한반도와 요동반도 연해주 지역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해당되어, 이 지역이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발원지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 대동강 지역에서 기원전 4000년기 후반에 시작된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0세기 초 고조선이 건국된 이후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어 기원전 3000년기 후반에는 전 지역이 청동기 시대로 돌입했다.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동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가장 빠른 시기에 시작됐다. 중국은 기원전 20세기 초 하나라 건국과 함께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시베리아 지역의 청동기 시대는 그보다 훨씬 뒤쳐진다. 만주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000년기 후반경부터 출토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우리겨레 청동기 문화에 속한다. 따라서 대동강 유역에서 발원한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는 동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 문화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가 그 어떤 외부에서 유입된 수입문화, 모방문화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겨레의 창조적 지혜와 힘에 의해 독창적으로 창조된 토착문화라는 것을 실증해 준다.
한반도 문명의 탄생과정
인류의 고대문명의 발상지라 할 때 신석기 농업혁명을 통한 항구적 정착생활, 사회정치조직의 탄생, 청동기 문화의 탄생을 통한 농업과 수공업의 분업 체계의 형성, 잉여생산물 축적, 계급의 발생을 통한 계급사회로의 진입, 지배계급의 지배도구로서 고대국가의 탄생의 과정을 거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신석기 농업혁명을 통한 농경문화의 탄생, 청동기 문화의 탄생을 살펴봤으며,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고대문명 탄생의 전제조건들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한반도에서 계급의 형성과 고대 국가 성립과정을 밝히게 되면 한반도 고대문명 탄생과정의 비밀이 풀리게 된다.
한반도에서 계급이 언제 발생했을까? 계급의 발생은 신석기 농업혁명의 결과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고,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이 발생하고, 사적 소유가 발생한 역사적 조건과 맞물려 이루어지며, 그것은 대체로 청동기 시대의 출발과 함께 한다.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은 신석기 농업혁명으로 인해 농업생산물이 증대됨에 따라 잉여생산물을 비축할 수 있는 대형 질그릇이 필요했을 때 발생하며, 청동기의 발명과 더불어 확고히 고착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과정이 진행된 것은 신석기 후기부터 청동기 초기이다
대동강 유역에서 기원전 4000년기 전반기에 이르러 농업생산이 증대되어 잉여생산물을 축적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이는 이 시기에 해당되는 신석기 시대 유적인 남경 유적 31호 집터에서 높이 84cm나 되는 독을 비롯해 낟알을 담아두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그릇이 10여개 나온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형 질그릇의 제작은 가내 수공업 형태로는 만들 수 없으며, 전문 수공업자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즉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위에서 예를 든 남경유적 31호 집터에서 질그릇이 120개나 쏟아져 나온 사실이 이를 방증해 준다.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에서 청동기가 초보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으며, 이로부터 수공업은 하나의 독자적인 생산 분야로서 지위를 확고히 차지하게 되었다. 청동기란 원래 전문적인 수공업자에 의해서밖에 생산될 수 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이 더 필요치 않다. 농업과 수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교역도 함께 발전해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 순수 팽이그릇 집터에서 돌돈과 같은 원시 화폐가 출현했다. 이러한 과정은 원시공동체적인 사회관계를 붕괴시킨 객관적 조건으로 되었다.
사회적 생산의 이러한 발전에 따라 가족 형태도 달라졌으며 사회관계에서도 일정한 변화가 발생했다. 생산의 기본단위가 가족농으로 바뀌고 이에 따라 일부일처제의 가족형태가 지배했으며 사회관계 역시 모계 씨족공동체 사회로부터 부계 씨족 제도가 확립되었다. 한편 공동체적 경리도 점차 촌락공동체(부가장적 공동체)로 바뀌었다. 이후 생산이 더욱 발전하고, 사유재산이 발생하였는데, 사유재산의 발생과 발전은 곧 촌락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했다. 혈연적 유대에서 벗어난 촌락공동체(마을공동체)에서는 집과 텃밭은 개별 가족이 소유하고 농경지와 벌목지 산림 같은 것은 공동소유로 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촌락공동체에서 재부의 축적은 집단의 공동경리와 종교 행사 등을 주관한 족장(추장)들에게 집중되었으며, 족장을 중심으로 한 그 친족들은 그들이 차지한 특권을 이용해 공동체 소유의 토지를 자신들의 사적 토지로 만들었다. 이로부터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소유가 발생했다. 사적 소유의 발생은 필연적으로 생산수단을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가 생기게 하였다. 생산수단에 대한 이러한 소유에서의 차이는 빈부의 차이를 낳게 되었고, 재산상 불평등을 낳았고, 그리고 사회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로 분화되었으며, 그 결과 계급이 발생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노예 소유자와 노예라는 적대되는 계급이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 계급이 발생한 것은 청동기 시대에 해당되는 기원전 35세기경이다. 이는 기원전 31세기에 해당되는 용산리 순장 고인돌 무덤에서 확인된다. 이 고인돌 무덤에 순장된 자들은 노예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고인돌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노예 노동이 사역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용산리 고인돌 |
결국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에 이르러 대동강 일대의 종족 연합체 내에서는 계급관계가 형성되어 권력과 재부를 독점한 계급과 그것을 갖지 못한 계급이 확고히 갈라지게 되었다. 권력과 재부를 독점한 계급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이용해 권력과 재부를 독점했을 뿐 아니라 더 많은 재부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이웃 종족들과의 전쟁을 빈번히 벌였다. 기원전 4000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는 것은 금탄리 유적과 남경 유적을 비롯해 불에 탄 집터들이 뚜렷이 보여준다. 평양시 사동구역 금탄리에 위치한 금탄리 유적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1, 2층은 신석기 유적이며, 3층은 팽이그릇 시기 청동기 유적인데, 팽이그릇 시기 청동기 유적에서 불에 탄 집터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또한 이 시기 발굴된 집터에서 그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뿌리나루 활촉, 단검을 비롯한 전투용 무기들이 다수 발견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원전 4000년기 후반기에 대동강 유역일대에서 생산력의 발전을 통한 잉여생산물의 축적, 농업과 수공업의 사회적 분업과 교역관계의 발생 발전, 사적 소유의 발생과 계급분화의 진행, 혈연공동체의 붕괴와 지역공동체의 형성 등의 과정이 진행됨으로써 고대 국가 형성의 역사적 전제 조건이 마련되어 갔다. 이와 함께 빈번한 종족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전쟁시대를 끝낼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강력한 힘을 갖춘 국가체제에 대한 시대적 열망이 높아져 갔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전제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여 기원전 30세기 초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 국가인 단군조선이 건국되었으며, 이 땅 한반도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문명이 창조되었다.
박경순 우리역사 연구가 minpl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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