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다음 스토리펀딩에도 동시에 연재합니다. 중증장애인 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고, 후원금은 벌금을 대신 내는 데 쓰입니다. - 기자 말
이경호씨는 장애인 인권 활동가다. 의정부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으로 장애인 보행권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의정부 시장실을 찾았고 이틀간의 점거 농성을 했다. 이씨는 그 이유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벌금 90만원을 내야한다. ⓒ 이희훈
이경호씨가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아 이동을 준비하고 있다.ⓒ 이희훈
오늘도 실패할 게 뻔하지만 일단은 해본다. 오른팔을 일자로 뻗는다. 왼팔을 그 밑에 내려놓는다. 화장실까지 가려면 일단 윗몸을 일으켜야 한다. 혼자서는 힘들어 몇 년 전, 작은 탁자를 개조해 리프트를 설치했다. 리모컨을 누르면 탁자가 어깨까지 올라온다. 일단 탁자까지만 가면 된다.
온 힘을 집중하기 위해 숨을 세 번 고른다. 하나둘 셋. 탁자에 얼굴을 뭉갠다. 짓이겨진 얼굴을 탁자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다. 왼손 두 번째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누른다. 힘을 준다고 주는데, 움직일 기미가 없다.
"여기, 여기요."
결국 방에 있던 활동보조인을 부른다. 거실에 펴 놓은 이부자리에서 화장실까지. 혼자 기어가는 5m는 오늘도 실패다. 활동보조인의 도움으로 화장실로 향한 이경호씨는 뿌연 소변을 눈다. 몸의 근육을 이루는 단백질은 속절없이 소변으로 빠져나간다. 이제 남은 근육도 얼마 없는지, 뿌연 소변마저 그 양이 줄어들고 있다. 70kg였던 몸무게는 어느새 52kg이 됐다.
근육도 기력도 갈수록 줄어들어 웬만하면 멀리 나가지 않는다. 요즘 같은 뙤약볕은 더 위험하다. 의정부 집에서 서울로 나가는 건 근 몇 달 만이다. 그만큼 중요한 일정이기도 하다. 구치소에 가기 전,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다.
약속지켜 달라 외쳤지만, 돌아온 건 벌금
이경호씨가 의정부 자택에서부터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가기 위해 경전철과 지하철을 이용했다. 환승이 필요한 창신역은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리프트를 3번 이용해야 1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 탈 수 있다. 이마저 역무원들의 운용미숙으로 환승을 위해 30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 되었다. ⓒ 이희훈
이경호씨가 의정부 자택에서부터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가기 위해 경전철과 지하철을 이용했다. 환승이 필요한 창신역은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리프트를 3번 이용해야 1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 탈 수 있다. 이마저 역무원들의 운용미숙으로 환승을 위해 30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 이희훈
이경호씨가 의정부 자택에서부터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가기 위해 경전철과 지하철을 이용했다. 환승이 필요한 창신역은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리프트를 3번을 이용해야 1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 탈 수 있다. 이마저 역무원들의 운용미숙으로 환승을 위해 30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 되었다.ⓒ 이희훈
17일부터 21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경호씨는 구치소에서 노역을 산다. 90만원의 벌금을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법원은 그에게 "법을 어겨 잘못했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그는 따를 수 없었다. "장애인도 사람이다. 움직이고 싶다"고 외친 게 죄라는 건가. 그는 억울했다.
"약속했어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의정부시인데, 잘못은 우리가 했다고 합디다."
2015년 6월. 경호씨가 활동하고 있는 의정부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의정부 장차연)는 의정부 시장실을 찾아갔다. 의정부시는 장애인을 위한 활동 보조시간을 5시간 더 늘려준다 했지만, 같은 해 1월 이를 없던 일로 했다. 경호씨는 약속을 지켜 달라 애원했다. 서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경기도 내에서 어디든 움직일 수 있도록 장애인 특별교통수단을 늘려달라고도 했다. 의정부시에만 4400여 명의 장애인이 있는데, 장애인 콜택시 22대로는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한 시간여 면담하던 시장은 다음 일정이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 "일정 마치시고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시장을 부여잡으며 말했지만, 시장은 답이 없었다. 오후 9시가 넘어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기다리셔도 소용없습니다."
시장은 간단하고 명확하게 말했다. 더는 들을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다는 투였다.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은 많지 않았다. 시장실에 머물러 기다리는 수밖에. 이틀간의 점거 농성이 시작됐다.
의정부시는 경찰을 불렀다. 시장실을 점거한 7명에게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폭력행위등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상해, 공용물건손상, 공무집행방해, 재물손괴. 다섯 개의 죄목이 붙었다. 경호씨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에 해당했다.
"피고인들의 행위가 개인적 이익 도모가 아닌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있는 장애인들의 인권과 생활환경 향상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달라."
경호씨의 호소는 통하지 않았다. 판사는 사적 이익을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시장실 점거는 불법이라 판결했다. 결국 벌금 90만 원이 선고됐다. 매달 기초생활수급비로 80만 원을 받아 월세를 내고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을 키우고 있는 그에게 90만 원은 버거웠다.
"벌금 사회봉사제도가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벌금 대신 사회봉사를 택할 수도 있다고 해서요."
사회봉사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마침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도 있었다. 근육장애로 몸은 움직이기 어렵지만 읽고 말하기는 할 수 있었다. 시각 장애인을 위해 책을 읽을 수도 강의를 할 수도 있었다. 가능한 게 많다는 건 그만의 생각이었다. 경호씨가 사회봉사를 신청한 지 일주일 만에 법원은 '사회봉사 불가' 통지를 보내왔다. 그와 함께 벌금을 받은 비장애인은 사회봉사가 받아들여졌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판정을 받은 거죠. 사회봉사를 신청하고 아무도 내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않았어요. 서류에 지체장애 1급이라고 나와 있으니 무슨 사회봉사를 할 수 있겠나 생각했겠지요."
결국 90만 원은 고스란히 그의 빚으로 남았다. 선고받은 지 30일 이내에 벌금을 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독촉장이 날아왔다. 벌금을 내라는 전화도 걸려왔다. 그의 이름으로 된 예금통장 역시 입출금이 불가능했다. 그는 손과 발이 제 맘대로 되지 않는 것보다 더한 답답함을 느꼈다. 삶이 묶였다.
10년 사망선고 받았지만...
이경호ⓒ 이희훈
이경호씨가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전동차로 이동을 하는 동안 차들이 수없이 옆을 지나갔다. ⓒ 이희훈
이경호씨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아파트 건물 외부로 나가고 있다. 이곳은 아파트에 설치된 장애인 통행시설이 유일한 통로다.ⓒ 이희훈
연대는 그에게 생명줄이었다. 의정부 시장실을 찾은 건 그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4400명, 의정부시에서 각자의 장애를 멍에처럼 짊어지고 사는 이들을 위한 투쟁이었다. 방안에 틀어박혀 죽음만 기다리며 살았던 10년의 세월을 보충하는 건 남보다 더 열심히 외치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뿐이었다.
경호씨는 20대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 아무것도 떠올릴 게 없었다. 시작은 열일곱 살 때다. 책상에 앉으면 종아리가 저렸다. 축구를 하거나 산에 오르면 발목 위로 다리가 당겼다. 위암으로 투병 중인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부모님은 모두 그와 떨어져 지냈다.
"누나, 나 다리가 좀 이상해."
어렵사리 큰 누나에게 증상을 설명했다. 당시 이십 대 중반이던 그의 누나 역시 근육병 진단을 받았던 터였다. 누나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근이영양증(근디스트로피)라는 병명을 말했다. 쉽게 말해 근육병이라고도 했다. 1970년대 후반, 근육병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경호씨를 진단한 의사가 근육병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길어야 10년 살 수 있습니다."
의사의 말을 듣고 경호씨는 책을 내려놨다. 10년 후 찾아올 죽음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하루, 눈을 뜨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어차피 10년 후면 죽을 목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의사가 틀렸다. 삶이 생각보다 오래갔다. 매일 조금씩 빠져나가는 근육을 부여잡지 못한 채 지체장애 1급으로 40년을 더 살아내고 있다. 의사 역시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몸에서 근육이 빠진다고 10년 안에 사망하는 것은 아니다. 근육병을 치료할 방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죽음이 찾아오지도 않는다. 어차피 죽을 목숨만 되새기며 방안에서 20대를 보낸 경호씨는 30대가 되어서야 '살아야겠다' 다짐했다.
근육병 환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있다는 곳을 찾아갔다. 매달 그들을 만났다. '이번 달은 근육이 얼마나 빠졌니' 우스갯소리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러자 주위가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혹은 사고로 팔을 잃고 말을 잃고 눈을 잃고 움직임을 잃어가면서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팔이 없으면 턱으로 자판을 치고 발가락으로 의사 표현을 하면서 '장애인도 사람이다'를 외치고 있었다.
이경호씨가 의정부 자택에서 부터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가기 위해 경전철과 지하철을 이용했다. 환승이 필요한 창신역은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리프트를 3번을 이용해야 1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 탈 수 있다. 이마저 역무원들의 운용미숙으로 환승을 위해 30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 되었다.ⓒ 이희훈
"부끄러웠죠. 나는 20대를 고스란히 먹고 자고 싸면서 내 인생을 한탄하며 보냈는데... 내 슬픔에 갇혀 살았는데 '우리의 장애'를 알리고 조금이라도 사회를 변화시키려 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렇게 30대부터 '발을 달라'며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하고, 활동보조 서비스를 요구했다. 27년을 외쳤다. 세상의 변화보다 그의 몸이 먼저 굳어졌다. 발에서 시작해 손가락까지 찬찬히 굳어져 이제는 바지 지퍼를 혼자 내리기 어렵다. 움직이지 않으면 곧바로 욕창이 생겨 활동보조인이 수시로 그의 몸을 뒤척이게 해야 한다.
구치소로 향하는 그가 걱정하는 것 역시 대소변이다. 먹지 않아야 싸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사회봉사 기각됐다고 불만을 표하는 건가요. 어떻게든 사회봉사 받아 볼 테니 굳이 들어오지 마세요. 우리도 골치 아픕니다."
노역을 살러 가는 당일, 검찰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다시 생각해보라는 전화는 부탁보다는 강요, 호소보다는 짜증이었다.
"들어가서 살아보겠습니다. 이제 와서 구걸하듯 사회봉사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예정대로 구치소로 갑니다."
경호씨는 단호하게 답했다. 누구하나 진즉에 물어본 적 없었다. 사회봉사로 무엇을 하겠냐고. 무엇을 하고 싶냐고. 관심도 질문도 없이 '불가' 통보를 내리더니 이제야 '다시 생각해보라'며 독촉한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세상에 직업이 일흔 가지가 넘는다는데,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그 중 한 가지를 못하겠습니까. 여러분 보시기에도 내가 그래 보입니까. 이건 장애인 차별 아닙니까. 무시당한 거 같아 기분이 나쁩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정문 앞에서 장애인인권 활동가 박옥순,이경호,이형숙 벌금탄압 규탄 및 자진노역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벌금 90만원에 대한 자진노역을 신청한 장애인인권활동가 이경호씨가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정문 앞에서 장애인인권 활동가 박옥순,이경호,이형숙 벌금탄압 규탄 및 자진노역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이희훈
벌금 90만원에 대한 자진노역을 신청한 장애인인권활동가 이경호씨가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정문 앞에서 장애인인권 활동가 박옥순,이경호,이형숙 벌금탄압 규탄 및 자진노역 기자회견에 참석해 물을 마시고 있다. ⓒ 이희훈
1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정문 앞. '이경호 벌금 90만 원', '이형숙 벌금 100만 원', '박옥순 벌금 300만 원'. 벌금을 갚을 길 없어 노역을 살기 위해 구치소로 향하는 세 명이 자신의 이름과 벌금 액수가 적힌 피켓을 목에 걸었다. 휠체어를 끌며 밀며 20명이 넘는 친구들이 자리에 함께했다.
경호씨는 손가락의 힘이 빠져 전동휠체어 이동도 수월하지 않지만 당당하고 싶었다.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삿대질한 법원에 지고 싶지 않았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죽기야 하겠습니까.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올게요. 신 나게 기사 쓰세요."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