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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과 통화하던 그날, "이런, 젠장 할…"

[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화차> 변영주 감독 "꼰대들과 싸우는 것이 임무"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0-01 오전 10:54:38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 서고 싶은 때가 있다. 방향을 잃은 것 같아 한없이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다. 함정에 갇힌 것처럼 마음이 갇혀 헤맬 때, 날 구원해주진 않지만 그 함정에서 빠져나올 길을 살짝 알려주는 이를 만나게 되면 행운이다. 행복이다.

"영화를 안 만든다고 내가 죽지는 않는다. 나는 영화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 나는 영화보다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만약 어느 날 영화감독을 더 이상 못하게 되면 불행해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만약 꿈꾸는 어떤 삶이 있고 내가 세상을 손을 잡고 걸어가려는 어떤 길이 있다면 책 대여점을 하면서 꼬맹이들한테 "야 판타지 재밌는데 이 책 죽여~"라며 책을 권하는 걸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밀애>나 <발레교습소>를 생각해보면 매번 중간에 멈췄던 것이 흥행에 실패했던 것 같다. 바꿔 말하면 <화차>가 그나마 좀 잘된 것은 내가 상업적인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멈춰 서지 않고 끝까지 가 보고 싶은 방향을 향해 걸어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출사표라는 표현을 썼다. '이제 나는 이렇게 영화를 만들 것이고, 더 단단해질 것이고, 더 뜨거워지고, 더 정교해지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화차>를 막 찍기 시작했는데 '희망버스'가 시작되었다. 촬영현장에서 감독은 굉장히 쾌적한 숙소에 독방까지 주는데 침대에서 못 자겠는 거다. 사람들은 끌려간다고 그러지 김진숙 씨는 크레인 위에서 저러고 있지. 심지어는 침대에서 누워서 잔다는 것이 토가 나올 정도여서 맨날 바닥에서 잤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지 않아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화차> 시나리오를 20고까지 썼다는 영화감독 변영주. 한진중공업 문제 때문에 사람들은 저리 뛰어다니는데 혼자 편히 자는 것이 미안해 영화 제작 내내 바닥에서 잤다는 인간 변영주. "나는 영화보다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자신의 말을 그는 그렇게라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살아내고 싶었던 것일까. 갑자기 <화차>가 다시 보고 싶다. 스크린 저 뒤쪽에 변영주 감독이 맨바닥에 웅크려 자는 모습이 혹시 보이지 않을까 해서.

"일단 기본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책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정말 개 쓰레기라는 생각을 한다. 지들이 애들을 저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서 심지어 처방전이라고 써서 그것을 돈을 받아먹나? 애들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무가지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걸 팔아먹나? 아픈 애들이라며? 아니면 보건소 가격으로 해 주던가."

"고흐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대한 벽을 허무는 일'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벽을 한꺼번에 뽀개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끌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긁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올라 허둥지둥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제아무리 제약과 한계가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하며 자신만의 벽 긁기를 포기하지 않고 싶은, 지금 이 순간은 멈춰 있더라도 언젠가 다시 끌을 잡을 거라며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 친구들과 변영주 감독의 인터뷰를 함께 읽고 싶다.

다큐멘터리 <송환> 촬영감독을 했었다.

동원이 형이 그냥 내 이름에 넣은 거지, 영화 전체를 따지면 1분도 채 안 찍었다.(웃음) 그래서 <송환>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한 줄도 없다.(웃음)

<낮은 목소리>의 위안부 할머니나 촬영감독으로 활동한 <송환>의 장기수 할아버지는 우리 사회에 매우 특별한, 하지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들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있었다면?

<낮은 목소리> 전에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비디오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제주도 기생관광에 관한 내용이었다. 원래 김동원 감독 친구분이 김동원 감독한테 부탁했는데, 자기가 어렵고 힘들 것 같으니까 나한테 떠넘긴 거다.(웃음) 김동원 감독이 되게 훌륭한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 굉장히 약삭빠른 사람이다.(웃음) 제주도에서 요정에서 일하고 있는 언니 둘을 만나서 같이 인터뷰를 하는 것인데, 작품이 되게 후지다. 필모그라피(작품목록)에 넣기 싫을 정도로 후졌는데(웃음) 그것이 아무래도 성매매 문제이고 하니까, 교회에 있는 여성인권운동 하시는 분들이 주관을 해주셔서 시사회까지 했다. 시사회가 끝나고 우리 친구들하고 뒤풀이를 하면서 정말 펑펑 울었다.
 

▲ 변영주 감독 ⓒ최형락

그러면서 내가 딱 한마디 했던 것이 기억난다. "정말 감독이 되고 싶다"고. 그때 처음으로 진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어떤 영화를 만들까 하다가, 요정에 있던 언니 한 명이 처음 성매매를 하게 된 이유가 그 언니 어머니가 위암자궁암까지 걸려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다 처음으로 몸을 팔게 되었던, 무슨 이현세 만화와도 같은 현실을 찾기 위해 무작정 당시 합정동에 있던 나눔의 집을 찾아가서 할머니들이랑 놀기 시작했다. 한 일 년 반을 노니, 할머니들이 '젊은 애가 너무 논다' 이러면서 같이 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것은 나에게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런 역사적 사실들이 아니라, 오십 년 동안 세상 사람들 앞에 자기를 철저하게 숨겼던 사람들이 갑자기 세상에 커밍아웃을 했을 때 이후에 할머니들의 삶이 과연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낮은 목소리>가 만들어졌던 것이고 처음부터 연작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8년 동안 세 편을 찍을 줄 알았으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한 편 만들고 났더니 할머니들이 또 만들자고 해서 만들게 되고, 그걸 만들고 났더니 이번에는 이런 게 좀 필요할 것 같다고 그러면서 만들게 됐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이십 대 중반에서 삼십 대 중반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젊었던 시절을 이 할머니들과 보냈던 것은 굉장히 좋았던 것 같다.

어떤 면에서 특히 좋았나?

사건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게 되는 관점을 거기서 배운 것 같다. 어떤 일이 터지면 어떤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안에 누가 있는지, 그 사람은 누구인지에 훨씬 더 궁금해지게 되었다. 전에는 안 그랬다.

'사건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나는 이제 세상의 모든 일이 이슈로 느껴지지 않는다. 쌍용차 문제를 예로 들면 그것은 그냥 대한문 앞에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친구가 죽었고 그들의 가족이 흩어져 있고 아이들이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같은 상표의 라면을 먹고 있으니까 말이다. 주장하러 가거나 손을 잡고 깃발을 흔들러 가는 것이 아니라 들으러 가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인 것 같다. 듣는 것이 나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고, 결국 나로부터 그 대답을 들으려고 애써보는 일이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쌍한 할머니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과 맞서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용감해져야 하는 거지'라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언제나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20대 혈기가 가득한 시간, <낮은 목소리>가 1편에서 2편, 2편에서 3편으로 갈 때의 두려움은 없었나?

<낮은 목소리> 2편을 찍을 때 두려움이 가장 심했다. <낮은 목소리> 2편은 다른 사람들이 둘이 연애 하느냐고 놀릴 만큼 가장 친했던 할머니 한 분이 폐암 말기 판명을 받으시고 죽을 때까지 자기를 찍어달라고 해서 시작한 거였다. 그런데 3개월 판명을 받았던 할머니가 일 년 반을 사셨고, 그 일 년 반이 우리에게는 정말 지옥과 같았다. 우리는 돈이 없었다. <낮은 목소리>가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킨 것 같지만, 극장에서 5000명도 보지 않았다. 우린 그때 이미 7500만 원정도의 빚이 있었고, 일본 개봉을 앞두고 그렇게 쉬운 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두 번째 작품을 만들고 있었으니까 한 6개월이 지나니 돈이 다 떨어졌다. 할머니는 그대로 살아계시지, 대부분의 폐암 말기 환자들이 그렇듯 두 달에 한 번씩 응급실에 실려 가시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한 일 년이 지나니 할머니가 병원에 실려 가셨다고 했을 때 '어떡하지, 할머니?'가 아니라 '이번에는 돌아가시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어느 날 할머니가 또 실려 가셨는데 조감독이 간호사를 보자마자 "이번에는 돌아가시나요?"라고 했던 자기 말에 스스로 놀라 죄의식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우리 모두가 그 시기 동안 죄의식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응급실에 실려 가시면 그것은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말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게 정말로 힘들었다. 당시 병원이 중앙병원이었는데, 난 아직도 중앙병원에 안 간다. 그리고 정말 언젠가 할머니한테 내가 그랬다. 할머니 되게 못됐다고. 치사하고 더럽고 엿 같다고. 할머니가 그렇게 한 것 때문에 지금 나는 너무 힘들다고…. 그러던 중 내가 할머니를 모티브로 한 극영화 시나리오가 로테르담 영화제 시나리오 공모에 붙어서 잠깐 그 영화제에 가게 되었는데, 내가 로테르담에 가자마자 그 다음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연락을 듣자마자 나는 속으로 할머니가 정말 치사한 년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오면서도 '어 갔어? 진짜 갔어?' 이런 느낌이었다.

ⓒ최형락
<낮은 목소리> 2편이 관객들 반응이 가장 좋았던 것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실제로 있고 그 할머니 곁에 세상을 여전히 살아가는 또 다른 할머니들이 있다는 것이 약간의 블랙 코미디 같은 느낌으로 작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2편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그래서 <숨결>(<낮은 목소리> 3편)을 한 편 더 했던 것 같다. 이 할머니로 인해 받은 상처를 할머니로 위안받고 싶었고, 그래서 더 철저하게 촬영감독이 되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이 만나서 동료들의 증언을 듣는 작품이 <숨결>이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굉장한 위로의 영화였다. 촬영이 있었던 어떤 날, 인터뷰를 하는데 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한테 "언니 나는 대만으로 끌려갔었는데, 언니는 어디로 끌려갔었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되게 행복해졌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이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어떤 일을 겪으셨어요?'가 아니라 '나는 이곳에 끌려갔는데, 너는 어디로 끌려갔니? 나는 이 꼴을 당했는데, 너는 어떤 꼴을 당했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지금껏 듣고 싶었던 거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피해자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에서 굉장한 위로를 얻었다.

편하게 덤덤하게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 순간은 못 잊을 일인 것 같다.

못 잊는다. 그런데 워낙 오래전 일이라.(웃음)

<낮은 목소리> 3부작을 마쳤을 때 "영화는 못 봤지만, 정말 수고하셨고 훌륭하십니다"라는 이야기를 제일 많이 들어 극영화로 옮겨올 때 "보지 않고서는 칭찬도 할 수 없고 욕도 하기 힘든 영화를 만들고 싶다.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적으로 지지받지 않을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그런가? 그런데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적으로 지지받지 않을 영화'라는 게 무엇인가?

<숨결>까지 만들고 났을 때 영화로서가 아니라, 내 이름이 유명해진다는 것이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정말 훌륭한 일을 하시네요"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저런 말을 영화를 만드는 감독한테 태연하게 할 수 있지? 어디 뭐, 구의원이라도 출마를 해야 하는 거야?' 이런 농담을 했을 정도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낮은 목소리>와 같이 '보지도 않고 칭찬할 수 있는 영화, 영화를 안 보고도 지면에다가 이 영화는 꼭 봐야 한다'라고 쓸 수 있는 그런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보기 전에는 어떤 평가도 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칭찬받고 싶어서 영화를 한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극영화를 하려고 했던 것이 <낮은 목소리>를 끝내지 못해서 지연돼 있었던 것이라, 이것이 끝난 이후에는 극영화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제 충무로로 가서 극영화를 하겠다고 했을 때 대뜸 제안들이 들어온 게 뭐냐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극영화들이었다. 가장 엿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완전히 공간을 이전해서 나의 욕망을 쫓아갔더니, 거기에서 또다시 위안부 문제와 같은 극영화를 다룬다면 마치 '전 변하지 않았어요~'라고 하면서 코스프레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사회적인 이슈나 정치적인 이야기가 정면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일상적이고 허접한 소재로부터 출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을 먹더라도 사람들이 보고 난 뒤에 욕을 할 거니 말이다. 그때 내 프로듀서가 권해줬던 책이 전경린 작가의 <내 생애 하루뿐인 특별한 날>이었고, 무엇보다도 작가의 페미닌한(여성스러운) 문체가 너무 좋았다. '이러한 문체를 과연 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너무 좋아서 <밀애>를 만들게 되었다. 내용 자체는 '남편 때문에 맞바람을 피고 난 뒤 제 인생은 망했지만, 지금 열심히 살고 있어요. 편집자님'처럼 마치 <선데이서울>에 나오는 독자 후기 같은 건데 말이다.(웃음)

나도 <밀애>를 되게 좋아해 두 번이나 봤다.(웃음) 하지만 '정치적이지 않은, 정치적으로 지지받지 않을 영화'라고 했지만, <화차>나 다른 영화들도 보면 정치적인 것이 녹아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이 글을 쓰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면, 결국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건, 어떤 영화를 만들건 간에 그것을 만들고 있는 나의 시점과 신념과 뇌는 언제나 '나는 지금 2012년을 어떻게 살고 있고, 나는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안에 있는 거다. 정치적인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코미디영화를 만들더라도 새누리당 지지자와 진보신당 지지자의 영화는 다르다.(웃음) 그것은 그 사람의 정치적인 성향이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와 캐릭터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 하고 싶은 것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인 것이다. 채식주의자인 감독이라면 영화에 불고깃집이 나오기는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그것을 그냥 만드는 게 아니라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라는 거다.

비근한 예가 <화차>의 원작자인 미야베 미유키의 일화이다. 그는 전 세계로 책이 출간되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걸어 다니는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지금껏 부모님과 함께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그 집에서 살면서 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한다. 어느 날 출판사에서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납치위험도 있고 하니까 자동차를 타고 다니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운전을 배울 수 없을 테니 기사를 불러서 차를 갖고 다니라고 했더니, 일주일을 고민한 뒤에 그가 하는 말이 "미안합니다. 나는 아침에 집에 나와서 골목길을 걸어서 시장통을 지나 전철을 타고 이곳에 오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전철에서 내가 바라보고 있던 그 사람을 상상하고 만든 캐릭터이고 시장 길을 걸으면서 봤던 어떤 풍경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다니면서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 내가 글을 쓸 수 없잖아요. 납치당하지 않도록 조심할게요"라는 것이다. '그거'라고 생각한다. 생산을 한다는 것은 우아를 떨며 살롱 같은 곳에서 깊은 시름에 잠겨 있다가 어느 순간 시상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이고, 어떻게 살기로 결심했고, 그 세상을 향해 이렇게 전진할 거야'라고 결심하며 사는 어느 순간, 내 시선에 의해서 잡힌 어떤 세상이 영화가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배우들과의 관계나 같이 연기하고 싶은 사람들을 선택할 때 기준은 무엇인가?

배우들도 다 알고 있지만 내가 이제까지 함께했던 배우들은 언제나 내 첫 번째 초이스(선택)들은 아니었다. <밀애>를 시작으로, <발레교습소>도 그랬고, <화차>도 언제나 거절을 당했다. 계속 거절을 당하는 과정에서 '그렇다면 이 친구는 어떨까' 하면서 결정된 것이다. <밀애> 때도 매번 배우들한테 시나리오를 주면 노출수위가 어떠냐가 그들의 첫 질문이었는데, 윤진이는 그것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아, 얜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발레교습소> 때도 열아홉 살 소년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은데 류승범, 원빈한테 다 거절을 당하고 계상이를 선택한 거다. 설마 내가 꿈속에서 윤계상을 보고 캐스팅 했겠나.(웃음) 계속 거절을 당하니 '그렇다면 막 나가 보자' 하면서 캐스팅의 범위를 확 넓혀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예능 프로에 나오는 윤계상의 얼굴을 봤는데 사내아이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실세계 안에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로 하게 된 거다. <화차<의 경우도 여러 후보들 중에 선균이가 제일 먼저 캐스팅이 됐고, 그가 일 년 반을 기다려 주었다. 그 친구 말에 따르면 자기는 이미 <화차,에 탄 것만 같았다고, 사채 빚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한다.(웃음) 민희도 첫 번째 초이스는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이 친구는 어때?'라고 생각하고 그를 만났을 때 느낌이 왔었다.

ⓒ최형락

그래서 나는 시나리오를 쓸 때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배우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망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가 결정되면, 그때부터 배우들과 많은 의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서 촬영이 들어가기 전에 만나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배우뿐만 아니라 촬영감독이라든가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준비기간에 모든 것의 90퍼센트 이상이 결정 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잘 모르겠는 부분은 촬영이 들어간다고 해서 알게 되지 않는다. 촬영 전에 사람들과 만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관계가 깊어지게 되고 또 다른 좋은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떤 감독들은 '그냥 따라와'라고 하는 스타일도 있을 것 같은데, 감독은 같이 얘기하고 뽑아내는 스타일인가?

촬영 전까지는 배우들과 산책하러 나가고 수다를 떤다고 생각한다. 선균이 같은 경우는 아이를 키우니 아이를 재우고 나오면 밤 한 시 반인데, 그때 꼭 전화가 온다. 그때부터 한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그 한 시 반을 대비해 미리 다양한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웃음) 영화가 만들어질 때는 감독의 것이지만, 관객에게 제공된 이후는 배우들의 것이다. 나만 하더라도 내가 좋았던 영화들을 떠올려보면, 그 배우가 어떤 대사를 하거나 그 배우가 어떤 표정을 짓던 그 장면이 좋아서이지 그 감독이 그렇게 연출했던 그 장면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결국 영화가 관객에게 다가가는 순간서부터는 배우의 감정을 관객들이 받아먹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영화를 찍을 때마다 매번 이런 미션을 내 스스로에게 준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친구들이 나보다 더 좋은 감독한테 팔려갔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이를테면 '이창동 감독이 <화차>를 본 후에 전도연이 아니라, 김민희를 캐스팅했으면 좋겠다', '이선균이 강우석 감독하고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런 미션 같은 것이 내게 있다. 항상 성공하지는 않지만.(웃음)

아직까지 한국에서 여성 감독은 흔치 않은 존재다. 여성 감독으로서 현장을 지휘할 때 어려움은 없나? 반면 여성이기에 가지는 장점이 있다면?

임순례 감독이 언젠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 "이 세상에서 참, 너나 내가 대답하기 힘든 게 여성 감독으로서 현장에서 일하는 게 어떠냐의 문제인 것 같다. 너나 나나 등빨에서 밀리지 않지 않냐."(일동 웃음) 그런 질문은 이를테면 이경미 감독과 같은 얄상한 애들이 현장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가로 궁금해야 될 문제인 것 같다.(웃음) 여성 감독은 의외로 많고 늘어나는 추세다. 현장에서 감독의 역할은 세 개가 있는 것 같다. 열심히 듣는 것, 정확하게 대답해 주는 것, 그리고 겁먹지 말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 세 가지만 잘한다면 영화 현장에서 성별이 문제되지 않는다.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있어서 영화 현장이라는 것은 힘든 편이 아니고, 실제로 한국 영화 현장은 굉장히 권위적이지 않은 편이다. 내가 있었던 현장은 아무튼 그랬다. 다른 데는 잘 모르겠고(웃음). 기본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일이 아이를 키우거나 가사 노동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독의 역할 중에 '겁먹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어떨 때 겁이 나나?

어떻게 찍어야 할지 다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현장 컨디션이 바뀌었을 때 과연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는 때가 있다. 원래 여기까지 이 장면을 찍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지연 되는 바람에 해가 떨어지려고 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20분이고, 20분 안에 어떤 것을 찍고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 '배우들은 이미 감정이 다 올라와 있고, 이것을 중간에 끊고 내일 찍자고 하면 아마 전체를 다시 찍어야 되고, 그러면 제작비도 문제가 될 것이고' 하는 수만 가지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가장 원하던 그림을 뽑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결심을 해야 하는데, 그 순간이 두렵다. 그때 주저하거나 비겁해지면서 겁을 먹고 물러서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기치 않게 발생한 상황 속에 겁을 먹지 않기 위해서는 팀워크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그런 팀워크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나.

열심히 듣는다. 아무리 조급해도 상대방이 뭔가 할 말이 있을 때는 듣는다. 그리고 그 말이 정말 쓸데없으면 꼭 얘기해준다. 쓸데없다고.(웃음)

<화차> 제작 시 예산이 부족해 현장 일반 스태프들을 제외한 감독을 포함한 헤드 스태프들의 보수를 깎아서 시작했다고 들었다. 보통은 현장 일반 스태프들의 보수를 깎기 쉬울 텐데, 이렇게 한 것에는 감독의 평소 생각들이 반영된 것인가?

그것은 당연하다. 제작비가 부족하게 된 것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산업 안에서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고 그렇다면 내 연출을 깎는 일이 맞다. 대신 '잘 만들어서 인센티브를 왕창 벌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 된다. 프로듀서한테 부탁해서 깎고, 배우들한테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잘 됐을 때 제일 이익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먼저 깎아야 되는 게 맞다. 현장 스텝은 이 영화가 잘되고 이익 볼 게 없지 않나.

다른 감독들은 어떤가? 변영주 감독처럼 같이 생각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감독들이 있나?

다른 감독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모른다.

관련해서 문화예술계 현장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배우들은 억대 출연료를 받는 상황에서도 최고은 작가는 배고픔에 굶어 죽어야 했던 현실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에는 영화산업노조, 세종문화회관 노조, 개별 예술인 등이 함께 힘을 합쳐 '예술인 소셜 유니온' 출범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여기에 함께 참여하고 있나?

충무로 스텝들은 처우가 나쁘지 않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도 20억 원 미만의 영화의 경우에는 스텝 보수를 보장해준다. 정말 그지 같고 개떡 같고 도둑놈 같은 현장이 아닌 이상, 오버차지(시간 외 수당)도 받고 촬영하는 동안에는 4대 보험도 다 된다. 문제는 찍고 있지 않을 때이다. 영화가 촬영되지 않고 놀고 있을 때 이 친구들의 생활보장은 어떻게 하는가가 고민인 것이다. 유니온의 경우는 오히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디들의 문제를 위해 결성된 것이다. 독립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이라든가 인디밴드로 활동하는 친구들은 정말로 돈을 받을 방법이 없다. 비정규직 문제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이 친구들이 어떻게 정부로부터 보장받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감독도 사실 벌이가 일정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문화예술을 한다는 것이 때로 고통스럽지는 않나?

이제 영화도 좀 잘됐는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웃음) 기본적으로 나는 삶이 불안정한 것이 무섭거나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해야만 하는 일을 선택한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 부모님을 부양하기 위해 직장을 선택하고 돈을 버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사람과 삶의 안정성이 같으면 정말 거지같은 나라 아닌가? 나는 내가 삶의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다.

ⓒ최형락

잘 먹기도 하면서 하고 싶은 일도 한다는 것은 솔직히 웃기는 일이 아닌가. 그건 무슨 시건방인가. 그럼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겠나. 먹고 살 수 있는 안정된 길이 있다면 이런 인터뷰 하겠나. 골방에 앉아서 나올 때까지 자기 글 쓰고 있지 말이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다 먹고 살기 위해 버티며 사는 거지 않나.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걸 하고 있다면 삶이 조금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지금 마흔일곱 살인데 내 집 꿈도 못 꾸고 있고 내년이면 전세금도 올려야 한다. 보험 든 거? 없다. 은행잔고? 요즘 영화가 잘돼서 몇백 단위가 좀 있다.(웃음) 기본적으로 몇십 단위다. 그런데 그래서 불행해지는 거라면 왜 이 일을 하겠나? 나는 모든 것에는 게임값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내 모든 짐이 트렁크 두 개 안에 들어가길 바란다. 요즘은 잘돼서 세 개.(웃음)

'잘 먹기도 하면서 싶은 일도 한다는 것은 솔직히 웃기는 일이 아닌가'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이 없다. 오히려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생활의 안정을 누릴 수 있어야 성공했다라고 생각하는 사회다.

요즘 친구들한테 미안하다. 나도 먹고살려고 시간 강사 같은 것도 한다. 시간강사로 먹고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화차>가 잘 되면 한 학기 또 뛰겠다고, 쓸데없는 약속을 했던 것 때문에 강의를 또 하게 되었다. 사실 애들 가르치는 것 진짜 싫다. 내가 20년에 걸쳐서 깨달은 걸, 요돈 받고 애들한테 풀어 준다는 게 막 억울하고 분하다.(웃음) 그래서 애들이 이해 못 하는 표정 지을 때 되게 좋다.(일동 웃음) 농담이고. 어찌 되었건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하면 애들한테 정말 미안하다. 우리 때문에 애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 우리 세대가 고생하고 세상의 모든 폭력은 다 받고 온갖 피해는 다 받은 것처럼 굴지만, 사실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적어도 우리 때보다 애들이 안 행복하지 않나. 우리는 철저하게 실패한 기성세대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십대들이 세상을 장악해서 우리의 목을 어서 빨리 쳐버렸으면 좋겠다. 우리를 다 끌어내렸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제일 먼저 "네. 죄송했습니다" 그러면서 짐 싸들고 내려 갈 거다.

하지만, 이 미안한 것과 상관없이 요즘 청년들이 '88만 원 세대'라서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현실적 상황이 자기연민의 도구가 되면 망한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생활이 안정적인 것은 우리 세대들도 못해본 일이고 전 세계도 못하는 일이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복지가 잘 된 국가도 잘 못하는 일일 것이다. 얘가 가진 것을 나도 가지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할 수는 없다. 이때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한 걸음의 전진이다. 그리고 사회가 해줘야 하는 것은 이 친구가 한 걸음의 전진을 하다가 벼랑 끝으로 떨어져 버렸을 때 죽지 않도록 밑에 안전한 그물망을 놔주는 것이다. 적어도 얘가 먹고는 살 수 있고, 자기 몸을 누일 수는 있고, 일주일에 한 번은 영화는 볼 수 있는 제도를 보장해 주는 게 사회와 세상이 해야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회가 벼랑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건 보장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나무가 아무리 높이 자라도 부러지지 않는 이유가 마디와 마디가 지주대 역할을 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감독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동일한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어 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 나는 계속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구나'라며 스스로 매듭을 지었던 순간들이 있었나. '영화를 안 만들면 죽겠구나'라고 생각하던 그런 순간들은 없었나?

영화를 안 만든다고 내가 죽지는 않는다. 나는 영화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 가끔 후배들이 "감독님, 저는 영화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면 "영화가 무슨 죄가 있어서?"라고 한다.(웃음) 나는 영화보다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들고 싶다고 느껴지는 그 영화를 만들면서 그것을 관객들이 사랑할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포기해야 할까?'라는 생각도 안 한다. 내가 만약 어느 날 영화감독을 더 이상 못하게 되면 불행해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다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거다. 내가 만약 꿈꾸는 어떤 삶이 있고 내가 세상을 손을 잡고 걸어가려는 어떤 길이 있다면 책 대여점을 하면서 꼬맹이들한테 "야 판타지 재밌는데, 이 책 죽여~"라며 책을 권하는 걸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용산참사, 언론노조, 쌍용자동차, 재능교육, 제주도 해군기지 등과 같은 사회의 날 선 이슈에 늘 함께 있다. 가끔 대중 집회에서 사회를 보기도 한다. 변영주 감독에게 사회참여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나는 영화 덕에 덕 보는 애다. 사실 영화만 사랑을 받으면 되는데, 고맙게도 사람들이 나도 사랑해주면서 얻게 되는 부가적인 것들이 있다. 하다못해 식당에 갔는데 내 영화를 보고 좋아한 식당주인이 뭘 더 줬다고 하면, 그것 역시 부가 소득이며 그렇다면 그것은 사회에 빨리 돌려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영화 때문에 사랑받게 된 어떤 부가적인 것들을 돌려 드릴 수 있는 방법이 뭘까를 고민해 왔고, 그것은 분기마다 달라지는 것 같다. 이번 분기에는 '어떻게 하면 젊은 친구들이 조금 더 용감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해 봤더니 '어떤 해고자도 존재하지 않는 것, 어떤 비정규직도 자기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쫓겨나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고, 그래서 쌍용자동차나 용산에 함께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곳에 갔더니 거기서 고동민(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도 보게 되고 송경동(시인)도 만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꿈에 고동민이 나오는데, 내가 얘를 사랑하나 이런 생각도 잠시 하기도 했는데 그럴 리는 없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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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 때 처음 송경동을 만났다. 얼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애가 전화를 해서 '구로에서 기륭 분들이 농성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문화제를 한다고 와달라'는 것이었다. 갔더니 공동체 놀이 비슷한 것을 하는데, 이상하게 내가 제일 못하는 것이 이런 공동체 놀이 같은 것이다. 손을 잡고 서로 인사하고 이런 것이 정말 미칠 정도로 너무 싫다. 공황장애가 온다.(웃음) NL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에 내가 NL이 될 수 없었던 유일한 이유는 처음 보는 사람과 친숙하게 지내야 하는 일종의 집단주의적 공동체 놀이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웃음) 이념과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다. 그런데 거기서 그런 것을 하는데 막 미치겠는 거다. 그런데 그런 나를 송경동이 바깥쪽으로 끌더니 "밖에서 지켜 보세요" 그러는 거다. 나를 알아차리는 그를 보고 '이 녀석 뭐지?' 하면서 그때부터 이 친구가 너무 좋았다. 이 친구의 시를 좋아했고, 이 친구의 "누나 내일 나와요"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뻔뻔함이 좋았다.

그런데 이후 <화차>를 막 찍기 시작했는데 '희망버스'가 시작되었다. 이 녀석은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전화해서 오라고 하지, 나는 촬영을 해야 하지,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다. 촬영 현장에서 감독은 굉장히 쾌적한 숙소에 독방까지 주는데 침대에서 못 자겠는 거다. 사람들은 끌려간다고 그러지 김진숙 씨는 크레인 위에서 저러고 있지. 심지어는 침대에서 누워서 잔다는 것이 토가 나올 정도여서 맨날 바닥에서 잤다. 그 때 꿈은 '빨리 끝내고 희망버스 탄다'였는데 아마도 송경동은 나에게 어떤 죄의식을 촉구하여 나를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웃음)

그 해 촬영이 끝나고 부산 영화제 때 드디어 '희망버스'를 탔다. 도착해서 김진숙 씨하고 통화를 하는데, 정말 울컥하더라. 크레인 위에서 손전등을 켜 좌우로 움직이는 순간 '이런, 젠장 할…' 하면서 눈물이 나질 않겠나. 나에게 수화기를 주는데 김진숙 씨가 "안녕하세요" 하니까, 그때까지는 울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김진숙 씨가 "저 2회 여성영화제였던가? 감독님한테 싸인 받은 적이 있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펑펑 눈물이 났다. 저기서 저 꼴을 하고 있는 여자가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너무 터무니가 없었다. '내년 3월쯤 <화차>가 개봉을 하니까 꼭 와주셨으면 좋겠다'고 하며 엉엉 울면서 돌아왔다. 나중에 잡혀갔던 경동이는 풀려나서 VIP시사회에 다리를 절며 절뚝절뚝 와서 내 영화를 봤고 김진숙 씨도 크레인에서 내려와 부산 시사회 때 초대하여 영화를 보았다. 영화 엔딩이 추락하는 것이라 마음이 상하면 어쩌나 별생각을 다 했는데, 다행히 김진숙 씨가 좋아했다. 배우들이 직접 인사하러 오고 사인까지 해주어, 자기가 사람들한테 가오(체면)가 섰다고 좋아하는 것을 보니 너무 기뻤다. 김진숙 씨가 부산에서 내 영화 시사회를 온 날이 제일 기뻤던 것 같다.

지난 4.11총선에서 박찬욱, 봉준호 감독들과 함께 문화예술인 269인의 진보신당 지지 선언을 이끌어 냈다. 특별히, 문화예술인들이 진보신당을 이렇게 지지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현장에서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김대중 정부 이후에 민주당에 대한 지지도가 높다. 왜냐하면 김대중 대통령 되면서 검열 없앴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영화진흥정책을 정말 잘 폈지, 독립영화 사전제작 지원도 많이 해줬지 영화인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진 것이다. 마지막에 스크린 쿼터와 한미FTA가 문제가 되면서 엎어진 것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민주당 정부의 영화 정책이 좋다는 정서가 있다. 또 전체적으로 영화 쪽이 왼쪽에 있는 경향도 있는데 이것은 당연한 거다. 대중문화를 하는 사람들이 오른쪽에 있으면 좀 이상하지 않나.(웃음) 할리우드도 그렇고 전 세계의 경향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영화인들 특별히 박찬욱, 봉준호가 대표적으로 진보신당을 지지하고 있고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다.

'진보신당이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문화예술인들이지지 선언을 하니까 진보신당만이 갖는 특별함이 있나 생각했다.

이번 총선 때 좀 힘들었다. 왜냐하면 나를 포함한 진보신당 지지자들 중의 상당수는 노회찬 빠나 심상정 빠였기 때문이다. 나도 지금도 그분들을 너무 좋아하고 그분들이 빨리 민주당으로 가서 큰 정치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드셨으면 좋겠다. 그런다고 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은 계속 작고 후지더라도 이 사회에 의미 있는 발언들을 계속하면서 존재하면 안 되나? 우리가 집권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 않나. 진보신당이 집권하면 난 이민 갈 거다. 무서워서 어떻게 사나.(웃음) 그런 수권능력이 없는 애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웃음) 진보신당을 여전히 지지한다는 것은 이 당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지지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그 당의 기동성에 대한 지지일 것이고 그 당의 과감함에 대한 지지이다.

학부를 이화여대 법대를 나왔다. 그런데 '엄마 시력보다 낮은 평점이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켰고, 그래서 20대의 자신은 인제 어쩌지 정도가 아니라 이제 망했나에 가까웠다'고 했다. 20대에 학점을 내팽개칠 만큼 몰입하게 했던 것이 있었나? 아니면 법학이 잘 맞지 않았나?

1985년에 대학을 들어갔는데 그때에는 대학에 두 종류 학생이 있었다. 학생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학생운동을 하는 것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대를 다녔는데 운동화를 신고 데모하는 애들하고, 하이힐을 신고 데모하는 애들을 도와주는 애들이 있었다. 이 말은 학생운동이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자기가 옛날에 80년대 어디에서 뭘 했다고 하는데, 그 대단한 일 모두가 다 했던 거다. 2002년에 월드컵 응원 간 거랑 똑같다.(웃음) 잘난 척하면서 내가 그때 잡혀가고 그랬다고 하는데, 정말로 누구나 다 했던 일이다. 데모하러 모인거랑 시청 앞에 백만 명 이상이 모인거랑 뭐가 다른가. 다 똑같다. 월드컵 응원 한 거다. 물론 고문당하고 죽은 사람도 있고 대단한 일을 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학생운동이 뭐 대단했던 일이라고는 생각 안 한다.

데모할 때 선두에 섰나?

언제나 선배들이 날 뒤로 숨겼다. 내가 애들보다 기본적으로 머리 하나가 크지 않나.(웃음) 첫날 데모하러 나갔는데, 그날 노량진 경찰서에서 날 불렀다. 데모하는 사진에 찍혔는데 거의 내 독사진처럼 나와서 한눈에 난 줄 알아봤던 것이다.(웃음) 그래서 선배들이 나는 좀 보호해줘야 한다고 해서 항상 뒤에 섰다. 특별히 돌이나 화염병도 못 던지게 했다. 증명사진이 나온다고.(웃음) 그래서 가끔 연세대학교에 가서 시위했었다. 연세대에서 시위를 할 때면 너무 자유로웠다.(웃음)

20대에 느꼈던 벽이 오히려 지금의 변영주 감독을 있게 한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그런 면에서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일단 기본적으로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책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정말 좆같다고 생각한다. 개 쓰레기라는 생각을 한다. 지들이 애들을 저렇게 힘들게 만들어 놓고서 심지어 처방전이라고 써서 그것을 돈을 받아먹나? 내용과 상관없이 애들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무가지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걸 팔아먹나? 아픈 애들이라며? 아니면 보건소 가격으로 해 주던가. 20대들에게 처방전이라고 하면서 무엇인가 주는 그 어떤 책도 팔 생각은 없다. 이 세상에서 제일 못된 선생은 애들한테 함정의 위치를 알려주는 선생이다. 걷다 보면 누구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인데, 그것을 알려준다는 것은 되게 치사한 자기 위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그 친구들이 함정에 빠졌을 때 충분히 그 함정을 즐기고 다시 나올 수 있도록 위에서 손을 내밀고 사다리를 내려주는 일이지, "거기 함정이다"라고 하거나 "야, 그건 빠진 것도 아니야. 내가 옛날에 빠졌던 것은 더 깊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영화가 하고 싶어서 막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 중에 더 훌륭한 선택은 없다. 누구나 자기의 선택이 있는 거다. 다만 행복할 자신은 있으시냐고 묻고 싶을 뿐이다.

'영화라는 것은 늘 실패와 흥행의 굴곡을 거듭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베갯잇을 눈물로 지새운 밤이 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런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나?

크랭크인(crank in) 아침에는 떨려서 다 토하고 간다. 항상 그 전날에 똑같은 꿈을 꾸는데 극장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영화를 보러 와서 나를 비웃고 있는 꿈이다. 그런데 '뭐 어쩔 거야'라는 생각을 한다. 압박은 견디라고 있는 것이고 스트레스는 받으라고 있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살려면 열심히 덕을 쌓아서 다음 생애에 친환경 농장에서 병아리나 소나 돼지로 태어나서 안전하게 스트레스 하나도 안 받고 무항생제로 살다가 맛있는 음식이 되면 된다.(웃음) 압박이나 스트레스는 받고 먹으라고 있는 것인 것 같다. 그런데 무항생제로 스트레스 없이 살면 좋기는 하겠다.(웃음)

<화차>만 해도 시나리오를 20고까지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원래 그렇게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끝까지 가보는 편인가.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시간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말이 쉽지 정말 내공이 필요한 일일 것 같다.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밀애>나 <발레교습소>를 생각해보면 매번 중간에 멈췄던 것이 흥행에 실패했던 것 같다. 바꿔 말하면 <화차>가 그나마 좀 잘된 것은 내가 상업적인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멈춰 서지 않고 끝까지 가 보고 싶은 방향을 향해 걸어갔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상업적인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렇게 끝까지 가본 것이 결국 사람들의 마음까지 건드린 것 같나?

그렇다고 생각한다. <화차>를 찍으면서 촬영 현장에서 한 번도 봉합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화차>가 감독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인가?

그렇다. 그래서 내가 출사표라는 표현을 썼다. '이제 나는 이렇게 영화를 만들 것이고, 더 단단해질 것이고, 더 뜨거워지고, 더 정교해지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조급함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자신을 다스려내나.

커피의 힘이다. 조급해지고 초조할 때는 초코파이다.(웃음)

변영주 감독을 사로잡고 있는 화두가 있다면?

고흐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대한 벽을 허무는 일'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벽을 한꺼번에 뽀개는 것이 아니라 조그만 끌로 아주 천천히,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긁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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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란 뭐냐? 어떻게 해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 있는,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는 것과 같다.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 벽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인내심을 갖고 삽질을 해서 그 벽 밑을 파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럴 때 규칙이 없다면,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흔들림 없이 계속해 나갈 수 있겠니? 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위대한 일은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을 때 이룰 수 있다. 결코 우연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 빈센트 반 고흐

변영주에게 자유란?

나에게 자유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디테일하게 행동하는 거다. 꿈이라는 말보다 욕망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데,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다. 장래희망보다 '누구랑 첫 섹스를 하고 싶은가'가 그 사람의 인생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나 욕망이라고 큰 틀에서 얘기를 한다. 욕망은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는 한 그 근원에 있는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근원에 있는 욕망을 알아내려고 할 때 내 머릿속에 누군가가 그건 아니지, 그건 잘못된 거지라고 해서 제어하지 않는 것이 자유인 것 같다. 가장 더러운 상상에서부터 가장 고귀한 상상까지 마음껏 할 수 있고 그것을 아주 디테일하게 행동하면서 내 삶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은 이렇게 할 거고, 이건 이렇게 할 거야. 그게 싫다면 당당하게 나한테 아니라고 얘기해. 뒤에서 뒤통수치지 말고"까지를 토해내는 게 자유인 것 같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자기를 너무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슈퍼스타K> 같은 것을 보면 10대 아이들이 나와서 "저는 너무 독특해요. 저는 너무 이상한 애고요, 저는 5차원이고 6차원이에요"라고 할 때마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 걔랑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옷을 입은 애를 나는 5분 안에 서른 명을 구해다 줄 수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너와 내가 어디가 비슷한 것인가'이다. '너와 내가 어디가 다른가'가 아니라 '너와 내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를 찾는 것이 더 먼저라는 것이다. 그래야 '너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그것이 연동되어져서 나의 문제도 조금씩 나아지게 되는 것을 찾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손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다들 자기가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서워서 그러는 거다. 스스로 무리 안에 있으면서 그 무리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으니까 자기는 독특하다고 하는 거다. 핵심은 승리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 주는 거지, 애들을 가짜로 독특하다고 인정해 주는 게 아니다. 그러니 제발, 옆 사람이 나와 얼마나 비슷한가를 찾는 일, 아주 전통적인 언어로 '친구 찾기'를 했으면 좋겠다.

자기 연민이야말로 독약이다. 스스로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걔보다 불행한 사람 서른 명을 5분 안에 데려다 줄 수 있다. 자기가 얼마만큼 불행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얘하고 나하고는 어떤 불행함 안에 놓여 있는가'를 상상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88만 원 세대'라는 것이 구조가 변해야 한다는 개념으로써는 중요한 말이지만, 이것이 당신의 핑계거리와 자기연민의 도구로써 존재한다면 당신은 우리 세대에게 끝까지 이용당하다 죽을 것이다. 자기 연민을 벗어던지고 세상을 친구들과 손을 잡고 만들어라.

그래서 트위터에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썼다. "당신들이 세상을 건져서 빨리 우리들의 목을 따 달라"라고.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의 20대들이 건설하는 20년 뒤의 이곳이 내가 생각하기에 정말 못마땅할지라도 상관없다. 어떤 세상이 올지라도 박수를 칠 거고 대단하고 멋지다고 할 거고 지지할 것이다. 다만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그런데 이 부분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하면서 유서처럼 남기고 갈 것이다. 후배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을 하든 지지해 주고 안전망을 마련해주고 손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구경하고 있거나 '너희들을 구원해주겠다'거나 '너희들,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치사하다.

그래서 정말 <아프니까 청춘이다>만큼 엿 같은 게 '20대 개새끼론'인 것 같다. 부끄럽지도 않나. 어쩌면 마흔 살 넘었는데도 저렇게 자기 성찰이 안 되지? 얼마나 게으르면? 얼마나 꼰대길래? 또 한 가지 우리의 임무가 있다면 우리 세대들의 꼰대들과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빨리 젊은 친구들에게 길을 터주고 그 친구들이 신나게 걸을 수 있도록, 적어도 한 걸음 더 걸을 수 있도록 용감해질수 있는 그 어떤 것을 만들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일을 실제로 지금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진숙 씨나 송경동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고 홍세화 선생님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젊은 친구들이 '피시(PC, Politically Correct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하는)'하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홍세화 선생님이 어느 날 트위터에 "아들과 함께 대학로를 걸으며 담배를 물었습니다"라고 썼는데, "선생님 길빵하지 마세요"라고 멘션을 보내는 얘들이 있다. 도대체 이게 뭔가. 홍세화 선생님이 길에서 담배 피는 게 좋지 않다는 걸 모르시겠나. 그럼에도 그 말을 건네고자 한 이야기의 맥락이 있지 않나. 그래서 내가 "정말, 지랄 맞다"라고 썼더니, 거기다 대고 또 "지랄이라는 것은 간질환자들에게 있는…"이라는 멘션을…. 그게 중요하냐? 왜 그러는가. 왜 그렇게 우아들을 떠는가. 인생 좆같이 살면서, 맨날 다 뺏기면서, 이용당하면서 왜 이렇게 우아한 척을 해. "그래요? 지랄이 그런 뜻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랄이라는 말은 그렇게 분석하면서, 그 말에 섞여 있었던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왜 이야기 안 하는가. 그 말부터 해주었으면 좋겠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연구원)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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