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이 오면>은 봄에 대한 약속을 하지 않는다. 제일의 미덕은 그것이었다. <꽃피는 봄이 오면>, 그것은 겨울에 관한 영화였다. 겨울, 그건 견뎌야 하는 것,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것, 걷지 않으면 멈춘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있다. 곧게 걸어야 한다. 도계에도 봄이 올 것인가? 눈 내린 광산촌, 허파에 낀 새까만 탄가루까지 봄이 씻어낼 수 있다고 정녕 말하려 하는가? 그렇게 믿는 자가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도계, 버려진 땅, 그건 여느 오지와도 다르다. 무덤과도 같다. 거기에 희망을 말하려는 도시의 관객들이여, 그건 값싼 동정이 아닌가? 기만이 아닌가? 타인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려는 건, 네가 편하기 위함이 아닌가? 당신들의 삶도 곧 폐광이 될 것이다. 그걸 잊기 위함이 아닌가? 영화는 그렇게 쉽게 ‘희망’을 얘기하려 하지 않았다. 영화의 미덕을 간취할 수 있어야 한다.

<브래스트 오프>보다 이 영화가 한 수 위인 건 그래서이다. 알버트 홀은 영광이 아니다. 뜬구름 잡는 치욕이다. 그걸로 막장의 동바리를 버티게 할 수 있을까? 그건 범죄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가 꾸는 꿈은 ‘약한 꿈’이다. <꽃피는 봄이 오면>은 그래서 엉거주춤하다. 그 꿈은, 꿈이라는 걸 알고 꾸는 꿈에 가깝다. 가수면 상태에서, 그 경계에서 애면글면 하는 그런 꿈이다. 그 꿈이 경계의 이 편과 저 편을 모두 넘어설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란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더욱 간절하고 곡절하다. 곧게, 한 발 한 발 꾸어야 한다.

스스로의 원칙을 저버리지 않았던 음악가가 도계에서 비로소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꿈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꿈을 지키고자 하는 방편이었고 도계와 마주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살아 왔던 곧았던 삶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릇이 눈을 담아 물을 빚는다. 접시에는 물을 담을 수 없다. 오지로 떠난다고 성불할 수 있는가? 오지가 줄 수 있는 건, 도시에서 얻을 수 있는 바로 그 만큼이다. 그릇만큼 담기는 법이다. 네 그릇은 봄을 담을 수 있을 만큼 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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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7 14:21 2006/11/07 14:21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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