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보이는 창> 2008년 5-6월호 (통권 62호, 발간 예정)


 
깃돌이에 대한 추념, 굴산사지 당간지주
 

깃돌이에 대하여

 
독재의 시대, 최루탄 난무하는 포도(鋪道) 위, 페퍼포그 매캐한 연무(煙霧) 속, 질주하는 백골단, 흩어지는 본대오, 그러나 다시금 모여드는 시위대, 그 중심엔 깃돌이가 있었다. 1987년 6월항쟁과 1991년 5월투쟁 영상을 나란히 비교해 본 이는 안다. 그 4년 사이, 얼마나 많은 깃발이 등장했는지를. 6월에 깃발은 없었다. 6월, ‘빵’ 소리만 나도 흩어지던 군중은 5월, 안개 자욱한 종로 한가운데 우뚝 솟은 자기 깃발을 찾아 다시금 전열을 정비했다. 깃발이란 그런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랄탄 연기 속에서 갸름하게 눈을 떴을 때, 저 멀리서 펄럭이는 깃발. 우리 위에 솟아 우리를 모이게 하는 힘을 지닌 것. 그것은 ‘전투 상황’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어떤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글은 깃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사진연구소, ‘내릴 수 없는 깃발이여!’,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동광출판사, 1989, 272쪽

당신은 깃돌이를 아는가? 날아드는 전투경찰 날 세운 방패를 코앞에 마주하고도 한 걸음조차 뒤로 물러서지 않는 이, 시위대가 몸을 돌려세워 한 정거장쯤 걸음아 나 살려라 달릴 때조차 몸 돌리지 않고 천천히 이동하는 이, 사복체포조의 일차적 타격 대상이 되는 책임막중한 자리, 그것이 깃돌이다. 깃돌이는 왜 달아나지 않는 것일까? 깃발이 조직의 상징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전투의 성패를 가름하기 때문이다. 깃발이 서지 않으면 우리는 미아가 되고 엉엉 울며 엄마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깃발이 서지 않으면 동지는 군중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 보았다’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

 

당신은 깃돌이의 고독을 아는가? 혼자 그 바람과 오롯이 홀로 맞서야 하는 자의 고독을. 한바탕 데몬스트레이션이 파하고 더 이상 사람들은 깃발을 보고도 모여들지 않아 소용을 다한 깃돌이의 비애를. 내려진 깃발을 고이 접어 가슴에 품어야만 했던 슬픔을. 어둠이 내리는 도시, 방금 전까지 거리를 가득 메웠던 함성 소리 대신 러시아워의 클락션 소리와 빨간 후미등만 깜박거리는 거리에서 목도하는 먹먹함을.

 

그 고독과 비애와 슬픔은, 마침내 그를 돌로 굳게 만들었다. 돌이 되어 버린 깃돌이. 강릉시 구정면 학산 기슭에 가면 한국에서 가장 큰 굴산사지 당간지주, 돌이 되어버린 깃돌이를 만날 수 있다. 깃돌이는 그렇게 말없이 서서 한때 펄럭이던 깃발을 보고 구름떼처럼 모여들던 사람들을 천 년을 하루처럼 아직 기다리고 있다. 보물 86호, 높이 5.4m, 깃돌이에게는 이런 말들은 한갓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오지 않았고 깃돌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당, 간, 그리고 지주  

 

당간지주(幢竿支柱)란 무엇인가? 한자어란 늘 풀이가 필요한데 당간지주라는 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 간, 지주를 쪼개어 곱씹어보는 것이 현명하다. 당간지주란 깃대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고 버티는 기둥이다, 지주다, 깃돌이다. 깃대를 양 옆에서 튼튼하게 버티도록 만드는 것, 그래서 짝을 맞춰 서 있다.

 

그렇다면 당간이란 무엇인가? 당간(幢竿)은 ‘당(幢)을 거는 장대(竿)’를 말한다. 깃대라는 얘기다. 당간은 보통 철이나 동으로 만든 관을 이어 붙여 당간지주 사이에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당간은 몇 개 되지 않는데 충남 공주 갑사나 충북 청주 용두사지에 가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기둥 머리에 용이나 사람 모양을 한 장식을 붙이는데 그에 따라 용두당(龍頭幢), 인두당(人頭幢)으로 구별해 부른다.

당(幢)은 또 무엇인가? 당(幢)은 깃발이다.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당이라는 깃발을 내건다. 사람들은 절 입구의 당을 보고 절로 몰려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 매달아야 하는데 그래서 당간, 즉 깃대는 길고도 높아 바람에 흔들리기 십상이고 그 자체만으로 지지하기가 어렵다. 그러한 이유로 양 옆에 지주를 세워 깃대를 튼튼하게 붙잡는 것이다.

 

절집은 다른 만물이 그러하듯 흥과 망이, 성과 쇠가 교차하는 법이라 흥성했을 때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또 그 사람들이 각지에 그 절집의 법력과 신통을 설파하지만 쇠락할 때는 썰물처럼 빠져나가 적요함이 가득하다 마침내 와편이 나뒹구는 폐사지로 전변하는 법이다. 그 주기는 대개 짧아 천 년 넘는 절집은 흔치 않다. 이름난 절집도 쇠락하면 여느 여염집과 다를 바 없고 쓰러져 땅 속에 묻히면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도 잊혀져 어디인지조차 찾기 어렵게 된다.

 

굴산사 역시 그러했다. 범일(梵日)은 어릴 적 절에 들어와 22세가 되자 당나라 유학을 떠난다. 그 후 귀국, 서기 851년 명주 땅 학산 아래 절 하나를 창건하고 신라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일으킨다. 그것이 굴산사고 그래서 굴산사는 사굴산파의 종가다.

신라말, 당대를 지배하던 교종의 틈바구니에서 선종은 힘차게 교세를 확장해 간다. 사굴산파는 그 선종의 물줄기 중 한 갈래로 굴산사 폐사지에 들어서면 그 당시 이 절의 사세가 얼마나 막강했을지 단박에 짐작할 수 있다. 허나 이 절집 역시 내리막길을 걷다가 사라졌는데 1936년이 홍수가 휩쓴 후 ‘문굴산사’라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서야 비로소 그 위치를 알게 되었다.

시련과 발견은 또 한번 짝을 이루어 찾아왔다. 2002년에는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덮쳤다. 124명이 죽고 60명이 실종된 엄청난 피해를 남긴 태풍 루사. 루사는 굴산사 터를 비껴가지 않았다. 굴산사 터 앞을 지나는 학산천이 넘치고 수해가 나자 긴급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굴산사 터의 전체 크기가 드러나게 된다. 굴산사는 동서로 140m, 남북으로 250m 크기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가장 넓은 절터로 알려져 있는 경주 구황동 황룡사지의 크기가 동서로 169m, 남북으로 149m라고 하니 이 절은 실로 엄청난 크기였던 것이다.

 

굴산사가 번창했을 무렵, 그 절집엔 수많은 사람들이 불심을 구하고 원력을 얻고자 드나들었을 것이다. 밥 시간이 되면 굴산사 앞 학천의 개울물이 쌀뜨물로 허옇게 흘렀다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것인가. 허나 언덕 위 드넓은 농지로 변한 지금, 겨울 한설 내려 대관령이 막히고 영동지방이 고립되기라도 하면 그곳은 하얗게 내린 눈밭으로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한국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만이 홀로 숙설(宿雪)을 뚫고 우뚝 서 이곳이 과거 영화로웠던 절집이 있었던 자리였음을 굳세게 증언한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문화재청.
 
굴산사지 당간지주 앞에 서면 무엇보다도 그 큰 규모에 압도당한다. 한국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라니 그럴 법도 하다. 마치 거대한 탑 앞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높이는 사실 큰 탑, 이를테면 감은사지 삼층석탑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 중량감은 못지않다. 그 이유는 굴산사지 당간지주의 독특한 질감 때문이다. 자연석 그대로인 것처럼 거칠게 다듬어놓은 그 질감은 대단히 현대적이다. 매끄러움은 찾아볼 수 없고 깎다가 만 화강암처럼 강인하다. 그 거친 질감은 마치 후기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작품들처럼 힘차고 육중하다.

 

당간지주는 폐사지에서 몇 안 되는 볼거리 중에 하나다. 뒤집어 말하면 신도가 북적거리는 이름난 절집에서 당간지주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없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다른 볼거리가 많아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번창한 절집도 결국 쇠퇴의 내리막길에 서면 가장 오래도록 남는 것은 돌로 만든 것들이다. 석불, 탑, 부도, 기둥을 세웠던 심초석, 그리고 당간지주가 그것이다. 당도, 당간도 사라지고 몰아치는 태풍에 맞서 깃대를 부여잡고 있었던 깃돌이만 남는다.

 

다시 변주하여, 반복해 묻는다. 당신은 깃돌이의 고독을 아는가? 혼자 그 바람과 오롯이 홀로 맞서야 하는 자의 고독을. 한바탕 법회가 파하고 더 이상 깃발을 보고도 모여들지 않는 산사의 비애를. 내려진 깃발을 고이 접어 가슴에 품어야만 했던 슬픔을. 어둠이 내리는 법당 처마, 방금 전까지 산사를 가득 메웠던 불경 소리 대신 적요함을 깨는 산새 소리, 새파랗게 내리는 달빛과 북두칠성 쨍그랑 비치는 고요함 속에서 발견하는 먹먹함을.
 
침묵으로 말하다, 깃발은 바람의 것이다

 

폐사지에서 시대의 무상을 읽는 건 자연스럽다. 허나 그것에만 그친다면 그건 무엇보다도 우뚝 서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당간지주에 대한 모독이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던 절, 이제 그 깃발마저 사라지고 깃대조차 부러져 간데온데없으나 홀로 그 자리 지키고 선 이가 있다. 흥망성쇠에 주기가 있다는 것은 흥한 것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역도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순환의 법도다. 깃대는 다시 세우면 될 일이고 깃발은 다시 묶어달면 될 일이다. 하지만 깃대는 홀로 설 수 없고 깃발은 작은 바람에도 위태롭게 펄럭이기에 단단히 잡아줄 그 누군가가 필요하니 깃돌이는 역사의 쓰임을 위해 아직도 대지에 발을 깊게 담그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금양년을 거치며 한 시대의 순환이 다하고 이제 다른 순환이 갈피를 잡았다. 갑이 논하고 을이 박하며 여기저기 깃발이 새로 솟고, 한 깃발이 두 깃발로 쪼개지는 혼돈과 여러 깃발이 하나로 합일하는 재편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 어제의 것이 시효를 다해 역사적으로 소멸하였으니 새로운 깃발이 필요하다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제 같은 오늘과 오늘 같은 내일이 이어지고 있으니 아직 새 깃발이 마련될 필요가 없다는 이들도 있다. 깃발을 선택하는 건 그 무리와의 친소 정도, 취향, 정치적 지향, 정서적 코드 등에 따라 다기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다 좋다.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본디 깃발은 바람의 것이다. 바람은 흐르되 물처럼 목적지를 갖지는 않는다. 바람이 목적지를 갖지 않는 것만큼, 깃발 또한 목적처럼 보일 때조차 궁극적으로는 한갓 천 조각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깃발을 부여잡고서 깃대가 부러지지 않도록 지지하는 이들만이 돌처럼 굳셀 수 있다. 깃발을 갈아 올려도 깃돌이들이 굳세다면 천 년 넘도록 절은 폐사하지 않고 불력이 온누리를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온몸에 새겨진 상처에도 불구하고 깃돌이는 천 년 비바람과 눈과 별밤과 열기를 굳세게 기억한다. 그래서 깃돌이의 고독, 비애, 쓸쓸함, 먹먹함은 우리가 이입한 투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무상하게 여기는 것에 머물면 안 된다.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역사가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겐 아직 더 나아가야 할 역사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허나 그 역사가 목적지를 갖는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아니 우리가 생각했던 목적지란 한갓 그 계절에 불던 바람의 방향에 불과하다고, 그래도 좋다면 깃발을 잡으라고, 허나 아니라고 생각될 때 깃발을 새처럼 날려 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그것을 패배로 기억하지 말자고, 다만 굳세자고 속삭이는 듯하다. 우리에게 깃발의 의미를, 우리가 그것을 부여잡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려줄 것이 아니었다면 저 당간지주가 천 년을 하루처럼 서 있을 이유가 없었을 터이니 사람들아, 깃돌이와 이야기를 나누자. 곧 살이 데일 정도로 뜨거울 여름이 올 터이니 그 전이라도 바람의 지평에서 천 년을 침묵으로 말해온 돌기둥을 만나러 가보는 것이 어떠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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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5 14:07 2008/04/15 14:07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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