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처럼 부서져 안아온 승리, 고양시 행주산성 -

 행주산성에서 만난 쌍용자동차

 

 

산산이 부서진 옥, 그 아름다움

 

옥(玉)은 그 표면이 단단하고 빛깔이 고와 예로부터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장신구나 옥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옥으로 만든 삼국시대 장신구들은 박물관 전시관 쇼윈도우 안에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하지만 옥은 또한 경도(硬度)가 높아 깨어지기 쉬워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자칫 실수로 손에서 놓쳐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 고운 광채를 내면서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옥쇄(玉碎)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옥과 같이 곱고, 단단하고, 타협하지 않는 자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영예로운 최후이다. 헛되게 일생을 보내는 기와의 무르디 무른 운명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기와는 옛 절터에 즐비하게 굴러다녀도 눈여겨보는 이 없는 것이다. 옥은 부서져 깨어질지언정 비굴하게 안위를 탐하지 않는다. 그래서 깨어져 흩어져도 아름답고 아니 그 부서지는 모양조차 눈부신 것이다.

 

대장부 영가옥쇄 하능와전
大丈夫 寧可玉碎 何能瓦全
“대장부 차라리 옥쇄할지언정
어찌 하찮은 기와가 되어 헛되이 명을 부지하랴”
<<북제서(北齊書)>> 「원경안전(元景安傳)」

 

사내들은 처음에 적들의 위세에 기함했다. 적의 수는 무량수(無量數)였다. 셀 수 없었고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적들의 모양은 흡사 해일과도 같았다. 진지를 코앞에 두고 적들이 도열했다. 곧 공격이 개시될 것이다. 적들은 함성을 지르며 시위했다.


“큰 싸움이 되겠구나.”

 

 

 

가슴 속에 부는 바람은 서늘했다.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다. 가족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싸움에 나선 자들이 스스로 답해야 할 물음들이었다. 사위는 삼엄했다.


사내들은 목숨을 걸겠노라 마음먹었다. ‘결사’라는 말이 상투어가 된지 오래지만 사내들에게 있어 지금 그 말은 그렇지 않았다. 결사(決死)란 말뜻 그대로였다. 목숨을 건다는 것이었다. “함께 살자!”라는 건 “다 같이 죽자!”는 결의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필사즉생’과 같은 말이 상투어가 되지 않는 순간은 전쟁의 상황에서이다. 사는 건 전쟁과 같다. 살다 보면 전쟁처럼 목숨을 걸어야 할 순간은 반드시 온다. 지금이 그 순간이고 이 순간 내가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해 보인다. 사내들이 선택한 것은 옥쇄였다. 옥처럼 깨어져 산산조각 나 부서지더라도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사내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목숨을 걸었던 행주산성이 경기 고양시 덕양에 지금도 한강을 굽어보며 몇천년을 굳건히 서 있다. 기와 같은 인생들이 사라진 억겁 같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번 먹은 그 단단한 마음은 설령 깨어져 흩어질지언정 그 단단함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귀하고 아름다우며 드물다. 시대를 넘어 죽음의 그림자를 넘어 옥쇄(玉碎)는 여전히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가장 아름다운 방도였다.

 

임진년에 시작된 7년 전쟁

 

임진년에 쳐들어온 적들의 기세는 맹렬했다. 1592년 4월 13일, 쓰시마섬에서 출병한 왜군의 병선 700여 척은 부산포에 이르러 경상좌수영을 궤멸시키고 상륙, 부산성도 순식간에 함락 됐다. 7년 전쟁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시작되었다. 왜군의 총병력은 20만으로서 3군으로 나누어 북진했다.


4월 말, 충주 탄금대에서 조선의 주력부대는 왜군에 대패했다. 그러자 왕은 수도와 백성들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통치자들의 행태는 어떻게 이렇게 고금을 막론하고 한결 같이 한심한 것일까? 이런 자들이 우리의 통치자일 수 있는가? 분노한 백성들은 두 왕자를 붙잡아 오히려 왜군에 넘겼다. 지긋지긋한 신분의 굴레 속에서 어차피 사는 건 전쟁과도 같았다. 왕이 도망간 궁에 쳐들어가 백성들은 공사노비의 문적(文籍)이 보관되어 있는 전각에 불을 질렀다. 서울에서 개성으로 도망간 왕은 다시 평양으로, 다시 의주로 옮겨 갔다. 망명정부보다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왕은 더 이상 나라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라의 주인은 본디 인민들이었다. 전쟁을 맞아 인민들은 삶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각지에서 의병과 승병이 거병했고 적들을 물리쳤다. 왕은 인민을 믿지 않았다. 대국에 자신의 명운을 맡겼고 이에 명나라는 군을 파병했다. 왜군은 밀렸다.


명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했지만 벽제관에서 왜군과 교전 후 개성으로 퇴각했다. 왜군은 서울에 집결,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몇 차례 격전 끝에 조선군은 왜군을 물리쳤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명량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였다. 이로써 전세는 크게 역전된다.


그 이후 일본의 제안에 따라 5년간의 강화회담이 지루하게 이어졌으나 1596년 결렬, 1597년 일본은 제2차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이를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부른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 총병력은 14만이었다. 7월 명량대첩에서 조선 수군은 열세 척의 전선을 가지고 대승을 거뒀다.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총퇴각했다. 이순신은 총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격파하고 전사했다. 7년 전쟁은 끝이 났다.

 

 

옥으로 쌓아올린 행주산성

 

다시 행주대첩의 현장으로 가보자. 행주산성은 덕양산 위에 백제시대부터 있었다. 덕양산의 해발고도는 125m. 숫자만 보면 그 높이가 낮은 듯하지만 산정에 올라보면 결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위치라 한강수로의 거점이고 또 한양에서 북으로 올라가기 위한 요충지이다. 지금도 방화대교와 서해로부터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 뱃길이 한눈에 조망된다.

 


행주산성은 목책(木柵)을 두르고 흙으로 쌓은 토성이다. 목책이란 나무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로 삼국시대부터 조선 때까지 종종 이것으로 성을 쌓았다. 적이 몰려오고 있어 급히 방어시설을 만들 때 요긴했다.
권율은 충남 금산 이치전투에서 왜군을 무찌른 이후 도성탈환을 추진하면서 수원 독산성으로 들어갔다. 왜군은 2만여 명의 병력으로 공격했다. 전면전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권율은 기습공격하는 유격전을 펼치며 경기지역을 탈환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서울 수복이었다. 권율과 군사들은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왜군은 평양에서 대패한 후 퇴각해 서울에 집결했다. 행주산성 공격은 양측으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 조선으로서는 서울을 수복하느냐 못 하느냐의 기로였고 일본으로서는 다시 한강 이북 전체를 손아귀에 넣느냐 못 넣느냐의 기로였다. 행주산성에는 2,300명의 조선군 정병이 있었고 왜군은 총 3만여 명이 7개 부대로 나누어 성을 포위했다. 사위는 삼엄했다.


조선군은 각종 신무기를 준비해뒀다. 화차, 수차석포, 비격진천뢰 등이 그것이었다. 또 횟가루를 뿌리거나 가마솥의 물, 돌멩이 할 것 없이 재래식 무기들도 준비했다. 목책을 쌓고 언덕 주위에 도랑도 팠다. 흙으로 조총을 피할 둑도 쌓았다.


공격이 개시되었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적들은 맹렬했다. 한 개 부대가 진격했다 퇴각하면 다음 부대가 진격했다. 7개로 나눈 왜군 부대가 번갈아 돌격했고 제5대가 성책 일부에 불을 붙였으나 조선군은 재빨리 물로 꺼뜨렸다. 제7대는 성벽의 한 귀퉁이를 뚫는 데 성공했다. 화살이 떨어지고 각종 무기도 떨어졌다. 중과부적이었다. 돌멩이가 날았고 여인들 또한 돌을 날랐다. 권율은 칼을 들고 몸소 나섰고 조선군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백병전이 전개 되었다. 일본군은 조선군의 무기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전투는 더 치열해졌다. 그때 배 두 척에 화살을 실은 조선군이 한강에 나타나 성에 있던 조선군을 응원했다. 조선군의 환호에 왜군은 병력을 물렸다.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진 싸움 끝에 수많은 적이 목숨을 잃었다. 1만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한다. 왜군은 철수했다. 죽기를 각오한 조선군이 승리를 안았다.


행주대첩을 두고 ‘관민합일의 개가’, ‘위기 앞에 단결한 민족의 승리’ 운운한다. 그러나 백성을 버리고 저 살자고 의주까지 패퇴한 왕의 뒤꽁무니도, 경복궁에 불을 지르며 신분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고자 염원했던 백성들의 원한도 우린 잊어서는 안 된다. 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 하여 행주치마가 비롯되었다는 조작도 믿어서는 안 된다. 행주대첩이 벌어진 1593년보다 66년 전인 1527년(중종 22년)에 간행된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행자쵸마’라는 기록이 나오며 그보다 이전인 1517년(중종 12년)에 간행된 사성통해(四聲通解)에도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그 원래 뜻은 절에서 수행하는 행자(行者)가 부엌일을 하면서 앞에 두른 치마에서 이 말이 비롯되었다 한다. 그러니 엉터리 말장난을 갖고 애국주의의 감상에 빠져 산성에 오를 필요는 없다.


이들은 왕을 위해 싸운 것도, 애국하기 위해 싸운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사는 게 전쟁이었던 터, 살기 위해 싸워온 일상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살기 위해서, 함께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에 나선 터였다. 행주대첩의 기록을 들고 산성 꼭대기에 서면 그 치열했던 싸움의 현장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평택공장 77일간의 옥쇄투쟁

 

몇백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사는 건 전쟁과 같다. 살면서 전쟁처럼 목숨을 걸어야 할 순간은 반드시 온다. “함께 살자!”라는 건 “다 같이 죽자!”는 결의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2008년 12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임진년의 왜란 같은 전쟁이 찾아들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생각했다. “큰 싸움이 되겠구나.” 가슴 속에 부는 바람은 서늘했다.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다. 가족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이고 내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싸움에 나선 자들이 스스로 답해야 할 물음들이었다.

 

좋은 것을 고르는 것이 아닌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이 선택이라면, 그래서 상하이 자본과 사측이 쌍용자동차 대량 해고라는 카드를 선택했다면, 이제 우리도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단 한 사람의 조합원이라도 눈물지으며 한숨을 쉬며 이 공장 문을 나서게 된다면, 정녕 그러한 불행이 우리 앞에 놓인 수순이라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내가 아니어서 괜찮다는 이기심, 어느 정도의 해고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냐는 체념, 그리고 그동안 회사와 상하이 차를 믿으며 고통을 분담하며 참고 견뎌온 세월의 되풀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분명해집니다.

(2008년 12월 30일, 전국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이금주 대의원의 아내 권지영의 연설 녹취)

 

상하이자동차 자본은 2005년 쌍용자동차를 단돈 5,900억 원에 사들였다. 그리고 지금껏 수차례 약속을 다짐했던 투자를 전혀 하지 않았고 3~4천억이 드는 신차 개발을 하지 않은 채, 기존의 쌍용차가 보유했던 기술을 유출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에 통상 관련 전문가들은 먹고 튀는 전형적인 ‘먹튀자본’으로 평가했다. 그럼에도 상하이자본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목을 치지 않으면 철수하겠다는 뻔뻔한 협박을 거듭하다 급기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올해 1월 9일의 일이었다.


이에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투쟁을 준비해 나갔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는 정리해고는 우리의 단결된 힘으로 분쇄할 수 있다고 조합원들을 설득했다. 전 조합원을 대상으로 현대자동차, 대우자동차 등 정리해고 투쟁 사례를 교육했다. 예상되는 시나리오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분석하고 설명했다. 집회를 열고 상하이 자본의 ‘먹튀’ 행태에 대해 고발했다. 언론도 처음엔 쌍용차지부의 말만 받아썼다.


4월이 되자 쌍용차 법정관리인은 2,646명의 정리해고가 필요하다 했다. 쌍용차지부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집회를 열었다. 싸움을 준비했다. 결의를 모아나갔다. 5월 21일, 옥쇄파업을 선언했다. 그날,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던 노동자들은 다음날 배낭을 매고 침낭을 챙겨 공장으로 집결했다. 1,000명의 노동자들은 어제의 노동자들과 달랐다. 조합원들은 도장공장을 점거했다. 휘발성 물질로 가득찬 공장이었다. 올 1월의 용산 참사를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회사와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한상균 지부장은 평택공장을 ‘안시성’이라 칭했다. 645년, 당나라는 고구려를 쳤다. 그러나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옥쇄를 각오하고 완강하게 버텼다.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당나라는 물러났다. 평택공장은 노동자의 안시성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함에서 생존 투쟁을 하고 있는 조합원 동지들 자랑스럽다. 이 동지들이 쌍용차 공장의 주인, ‘안시성’의 주인이다.
(2009년 7월 21일, 미디어충청, 전국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지부장 한상균 인터뷰 기사 가운데)

 

2009년 8월 4일, 노동자의 옥쇄파업을 공격하던 용역깡패들과 사측 구사대가 뒤로 물러나고 경찰이 전면에 나섰다. 경찰들의 수는 무량수(無量數)였다. 셀 수 없었고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경찰들의 모양은 흡사 해일과도 같았다. 도장공장을 코앞에 두고 경찰들이 도열했다. 하늘엔 헬기 네 대가 저공비행을 하며 최루액이 담긴 비닐봉지를 던져댔다.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들이 올라왔다. 경찰특공대가 그 안에 있었다. 곧 공격이 개시될 것이다.


전쟁이었다. 테이저건을 쏴대고 공기총을 쏘며 경찰은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컨테이너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방패가 날고 피가 튀는 아비규환이었다. 옥상을 버리고 노동자들은 도장공장 안에서 다시금 전열을 정비한 채 완강하게 버텼다.

 

<노동과세계, 이명익 기자>


결국 8월 6일, 쌍용차지부는 사측과 합의했다. ‘1년 무급휴직, 영업 전직’ 52 : ‘희망퇴직, 분사’를 48. 1000명의 옥쇄투쟁에 참가한 조합원들 중 48%는 살 것이고 52%는 죽을 것이었다. 77일간의 투쟁의 종결이었다. 굴욕적인 패배였다고 언론은 떠들어댔다. 하지만 도장공장을 나서는 그 누구도 지도부를 향해 욕하지 않았다. 정리 집회를 마친 조합원들은 눈물을 흘리는 한상균 지부장을 차례로 껴안고 공장 문을 나섰다.

 

<조합원들과 껴안는 한상균 지부장, 노동과세계, 이명익 기자>


다시 말하자. 삶은 전쟁이다. 아무리 삶을 미화해도 전쟁은 이미 우리 삶 전 영역에서 벌어진다. 전쟁은 이미 항상적이다. 외부와의 전쟁만이 아니라 내전도 항상적이다. 심지어 스스로도 스스로와 싸운다. 전쟁은 삶이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모든 패배는 일시적인 것이다. 궁극의 승리는 언제나 보이지 않았고 언제 올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패배는 일시적이다. 패배가 일시적인 이유는 우리는 전쟁을 목적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전쟁에 전쟁을! 그 싸움이 “함께 살자!”를 목적으로 하는 한, “다 같이 죽자!”는 건 죽음을 찬양하는 것일 수 없다. 옥쇄란 궁극적으로 삶을 아름답게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쌍용 노동자들은 부서지면서도 아름다운 삶을 지켰다. 우리의 승리는 새롭게 태어나는 자신 속에 있다. 궁극의 승리란 그런 것이다. 세상의 그 모든 비겁 앞에서 이미 그들은 승리했다.


지금, 1000명의 투사들이 고통과 번민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내며 부서졌던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 빛깔을 우리 안에 간직하면서 살아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같은 전선에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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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6 20:59 2009/10/16 20:59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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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19 12:2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2010년 절친 약조는 오간데 없고, 관계는 스산하니, 사는 게 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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