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

 

‘물’과 ‘불’ 가운데 ‘사람’이 있었다. 본디 사람은 흙이었다. 흙에 물을 섞고 불에 구워 만든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은 물을 마셨고 불을 쬐었다. 물을 마셔 시원했고 불을 쬐어 따듯했다.

사람은 자신을 닮은 것을 만들고자 했다. 흙에 물을 섞고 불에 구워 그릇을 만들었다. 사람에 삶이 담기듯 그릇에는 밥을 담았다. 밥은 삶이었다. 밥을 먹어야 삶을 살 수 있었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다. 사람은 그릇을 닮아 제 먹을 것을 나눴고 물과 불을 공경했다. 평화로웠고 정겨웠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재앙이 시작되었다. 재앙의 시작은 밥을 나누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밥을 나누지 않는다는 건 삶을 나누지 않는다는 말과 한가지였다. 혼자 가짐으로써 재앙은 시작되었다. 물이 넘쳤고 불이 끓었다. 홍수가 나고 불이 났다. 그릇을 닮았던 사람은 제 그릇만 가득 채웠고 남의 그릇을 깨거나 빼앗았다. 남이 자신의 것을 빼앗지 못하도록 땅에 금을 긋고 보초를 세우고 병사를 세웠다. 다툼이 시작되고 급기야 사람이 죽어갔다. 그릇에 담기는 밥이 늘어날수록 삶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늘어났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시원하지 않았고 갈증만 더 일었다. 아무리 불을 쬐어도 따듯하지 않았고 으슬으슬 추웠다.

그릇을 만들던 이들이 칼과 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릇을 만들던 불로 쇠를 달궜고 달궈진 쇠를 식힐 때 물에 담갔다. 칼과 창이 강해질수록 그릇에 담기는 물건도 많아졌고 죽어가는 사람도 늘어갔다. 불을 닮아 따듯했던 사람이 물을 닮아 차가워졌다. 물을 닮아 고요하던 사람이 불을 닮아 이글거렸다.

평화롭고 정겨웠던 시간은 갔다. 사금파리처럼 산산조각 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태고의 추억.

 

서울 암사동 출토 빗살무늬토기

 

대홍수가 캐낸 빗살무늬토기의 발굴기

지금으로부터 84년 전인 1925년, 반도 조선에 큰 물난리가 났다. 이름 하여 ‘을축년 대홍수’. 대홍수는 바람과 함께 왔다. 바람과 함께 북상했다. 루사, 매미, 올가, 셀마 등 우리가 익히 들어본 태풍은 모두 2차대전 이후인 1953년부터 미 합동태풍경보센터에서 이름을 붙이거나 2000년 이후 아시아 태풍위원회에서 이름을 붙였다. 그러니 을축년 대홍수는 태풍의 이름도 붙여지기 이전, 3·1운동이 일어난 지 겨우 6년 후니 그 이름조차 없을 때였고 다만 번호로만 불렸다.

어쨌든 을축년 대홍수는 단지 태풍 한 개가 지나간 정도가 아니었다. 무려 네 차례나 태풍이 강타했고 이를 포괄해 이르는 말이 을축년 대홍수다. 1차 태풍은 7월 9~12일 중부지방을 관통했고 한강, 금강, 만경강, 낙동강 물이 넘쳤다. 2차 태풍은 네 차례 중 가장 피해를 많이 준 태풍으로 2560호로 불리는데 7월 15~18일 반도를 급습했고 이로 인해 임진강과 한강이 범람했다. 영등포, 용산, 뚝섬, 잠실 등이 특히 그 피해가 막대했다. 3차 태풍은 관서지방에 호우를 집중적으로 쏟아부었고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 물이 넘쳤다. 4차 태풍은 9월 6일 제주로 들어와 목포, 대구를 거쳤고 그 결과 영호남의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물이 넘쳤다. 한반도의 모든 강이 넘쳤고 반도 전역에 물난리가 났다.

을축년 대홍수로 인한 피해도 막대했다. 사망자 647명, 가옥 유실 6,363호, 가옥 붕괴 1만 7,045호, 가옥 침수 4만 6,813호에 달했고 그 피해액은 무려 1억 300만 원으로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너무 먼 옛날 얘기라 잘 실감이 안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넘쳐흐른 한강 물이 광화문 앞까지 들이닥쳤을 정도라면 할 말 다 했다. 용산 철도청 관사는 1층 천정까지 물이 찼다고 하고 영등포, 용산 일대는 제방이 넘쳐 이 일대가 진흙 바다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정든 땅을 떠나야만 했다. 마포 도화동에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동부이촌동 주민들이 이주했고 원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쓰던 우물은 ‘대동우물터’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온다. 또 심한 피해를 입었던 압구정 쪽 주민들도 하왕십리 쪽에 많이 정착했다고도 전해진다.

피해를 입은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이 땅의 말 못하는 문화유산 역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예컨대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이 말년을 보낸 여유당도 이때 강물에 떠내려갔고 조선 후기 5대 한강 나루 중 하나였던 송파진도 극심한 피해를 입어 마을이 사라졌다. 그래서 중요무형문화재 49호인 송파산대놀이도 사라졌다. 효령대군이 지어 마포 강변에서 한강을 굽어보던 망원정도 멸실되었다.

또 한편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새로 생겨난 문화유산도 있고 그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기도 하다. 봉은사 주지였던 나청호라는 스님은 대홍수 당시 절의 재물을 풀어 떠내려가던 사람 708명을 구해냈다. 그래서 지금도 강남 봉은사에는 수해구제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또 당시 대홍수를 겪은 사람들이 후세에 경각심을 잃지 말자는 의미에서 이듬해인 1926년 7월 15일 세운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는 송파구 한 동사무소에 남아 있다. 일제는 을축년 대홍수를 겪은 후 1931년까지 용산, 마포, 성동구에 둑을 쌓기 시작했고 그래서 서울 한강변의 풍광은 크게 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을축년 대홍수가 우리에게 선사해준 선물도 있었으니 그것은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유적지였다.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다음 풍납토성에는 청동초두, 금귀걸이, 유리옥 등 갖가지 유물이 드러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암사동이었다. 백제 문화층 아래에 잠자고 있던 반만 년 전 암사동 선사유적지도 대홍수로 인해 세상에 그 모습의 일부를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대홍수는 고고학자처럼 유물을 ‘발굴’했지만 직업적 투철함은 없었던지 마치 근대적 토건업자처럼 거칠게 땅을 파헤쳐 놓았다. 홍수로 인해 깎여 나간 강기슭 흙더미 단면에 빗살무늬토기들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자연의 암사동 발굴사는 여기까지다. 삽과 트라우얼, 붓을 든 고고학자들에 의한 발굴사는 훨씬 이후로 내려가야 한다. 일제시대 고고학의 주관심사는 온통 역사시대 옛무덤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정식 발굴 조사는 해방 이후에나 이루어졌던 것이다. 1968년 6월 고려대, 숭실대, 경희대, 전남대에 의해 합동 발굴이 있었고 8월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 역사과에서도 8일간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많은 수의 유구, 유물이 보고되는 한편 움집 터도 확인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험 발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드디어 1971~1975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네 차례에 걸쳐서 본격적인 발굴에 나섰다. 1979년에는 사적 267호로 지정되었고 또한 1981년 사적 공원화 계획이 수립되면서 1983~1984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긴급 발굴조사가 또 한 차례 이루어졌다.

 

서울 암사동 발굴 현장. 움집터가 보이고 화덕자리와 움집 기둥을 꽂았을 구멍들이 보인다.


‘빗살인’들의 생활사와 공생ㆍ공유의 삶

한국 신석기시대 하면 빗살무늬토기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지사다. 각종 화보에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이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이기 때문이다.

빗살무늬토기는 ‘빗살’, 그러니까 ‘머리빗의 살’과 같은 도구로 새긴 기하학적 무늬의 토기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1920년대 북유럽 핀란드, 스웨덴, 북부 독일, 폴란드 등에서 발굴되어 이름 붙여진 ‘캄케라믹’이라는 말을 1930년 일본 학자 후지다(藤田亮策)가 ‘즐목문토기(櫛目文土器)’라 번역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 말이 195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남북한 양쪽에서 모두 우리말로 풀어내 ‘빗살무늬토기’가 되었다.

빗살무늬토기를 쓰던 사람들(편의상 ‘빗살인’이라고 부르겠다)은 언제 이 땅에 살기 시작했고 어떻게 살았을까. 이들의 집터가 만들어진 시점은 기원전 3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터는 지상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을 깊이 1m 정도 파고 들어가 다져 만들었고 그 집터 위로는 볏짚이나 수풀로 움집을 세웠다. 집터 안에는 화덕 자리가 하나씩 발견되는데 화덕 주위로는 돌을 둘렀다. 또 음식물 등을 넣어 두는 저장 구멍이 간혹 발견되기도 하는데 집 안 혹은 그 옆에 설치했다.

암사동에서는 돌도끼와 화살촉, 어망추와 같은 것이 발견되어 수렵, 어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터에서는 갈판과 갈돌도 발견된다. 이것들은 농경의 증거로 제시되곤 하는데 곡물이나 도토리, 호두 따위를 위에 두고 갈돌로 갈아 먹었던 것이다. 신석기시대, 농경, 이런 단어들을 들으면 교과서에서 배운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신석기혁명’이 그것이다. 농업이 시작됨으로 인해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는 얘기로 그 이전 시대와 혁명적으로 단절되는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오해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예를 들어 ‘빗살무늬토기’의 ‘빗살’이 농경을 하던 선사시대 사람들이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소망해 빗줄기의 모양을 연상하고 무늬를 새긴 것이라는 오해가 있다. 시인들의 여러 시구에 이러한 비유가 등장하곤 한다. ‘빗살’은 ‘빗줄기’가 아니라 머리 빗는 빗의 살이다. 빗과 같이 생긴 도구를 사용해 새긴 무늬라는 거다. 이러한 도구를 ‘시문구’라고 부른다.

또 중요한 오해는 당시 빗살인들의 주 생업이 농업이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물론 신석기시대도 몇 천 년에 걸친 시대이기 때문에 하대로 내려갈수록 농경 중심성이 강화되었겠지만 적어도 암사동 빗살인들은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이들이 주로 한 생업은 농사는 아니었다. 곡물이나 과일을 채집하거나 짐승을 사냥해 먹거나 혹은 고기잡이나 굴, 조개 따위를 캐서 먹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한국 중서부 신석기시대는 대동강, 한강 유역과 서해안을 아우르는데 그 중심지는 역시 암사동이다. 암사동식 빗살무늬토기는 중서부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기원전 3500년경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다. 토기가 제 발로 걸어갔을 리는 없고 결국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남한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얘기일 텐데 이들은 어떻게 이동했던 것일까?

빗살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동을 하며 살았다. 첫째는 몽고의 유목민들처럼 자원이 풍부한 곳에 살다가 그 자원이 다 떨어질 때쯤 새로운 곳으로 집단 전체가 이동을 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산악인들처럼 일종의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살다가 필요한 재화를 위해 일부가 원정을 떠나는 방식이다.

그 결과 현재 남아 있는 주거 유적은 수적으로는 적은 반면 특별한 목적을 위해 거쳐 갔던 유적은 여러 곳에 산포되어 있다. 빗살인들이 잠시 왔다 간 곳, 주로 서해안인데 여기에는 주거지, 저장 시설, 조리 도구 같은 것도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그 유물도 대부분 자원 획득과 관련한 도구 정도에 국한된다. 안산, 군산, 서천, 서산, 안면도, 영종도, 용유도 등이 그곳들인데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화덕 자리나 패총에서는 주거지가 발견되지 않고 굴이나 어류를 위해 일부 사람들만 보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비교적 자원은 풍부하나 식수와 같은 것이 부족해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바닷가에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곳을 고고학에서는 ‘자원집중처’라고 부르는데 당시 빗살인들은 멀게는 80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원집중처에도 빗살무늬토기는 남아 있다. 주거유적의 경우 빗살무늬토기의 문양이 중복되지 않는 데 반해 이러한 자원집중처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는 다양한 형태가 중복되어 있다. 즉, 여러 곳의 빗살인들이 이곳에 와서 함께 자원획득 활동을 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인 셈이다.

늦은 가을에서부터 이른 봄이 되면 여러 지역에 사는 빗살인들이 서해안으로 몰려들었다. 빗살인들이 특히 채취하려고 했던 굴이 이 계절에 집중적으로 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여러 곳에서 온 이들이 한군데에서 마주쳤을 것이다. 어족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모두 다 가져가야 할 이유를 갖고 있었다.

요즘이라면 어떨까? 사람들은 쌍끌이어선이 물고기들을 고갈시키는 것처럼 아마 굴을 싹쓸이해갈 것이다. 혹은 굴이 나는 해안가에 철조망을 치고 다른 마을에서 온 빗살인들을 가로막거나 한판 싸움박질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빗살인들은 공생과 협력, 관용과 타협의 방법을 알았다. 먼저 온 빗살인들을 힘으로 위협하거나 패악을 부려 내쫓거나 하지 않았다. 바다는 바다의 것이었고 물새와 파도의 것이었다. 땅은 땅의 것이었고 나무와 덩굴의 것이었다. 그것을 나눠 가질 뿐인 빗살인들에게 독점은 발생할 수 없었고 다툼이 있을 수도 없었다.

굴을 따고 고기를 잡던 이들이 자신들과 끼니 거리를 기다리고 있을 땅을 향해 떠나면서 아마도 무거운 그릇 따위는 버려 두고 갔을 것이다. 혹은 한창 작업 중이던 이들에게 선물로 주고 갔을 것이다. 그렇게 여러 곳에서 온 다양다종한 무늬의 빗살무늬토기들은 마치 바람처럼 햇살처럼 공유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 자원집중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코뮨, 공동체를 이루었을 것이고 코뮨의 흔적이 남아 반만 년 전의 신화를 들려주는 것이다. 사람이 그릇을 닮아 제 것을 나누던 시절, 그 시절은 밥을 나눠 삶을 나눴고 흙도 땅도 물도 불도 그 누구의 것이 아니었고 모두의 것이었다.

 

암사동 선사유적지의 복원된 움집


대홍수를 기다리며

언젠가부터 시작된 재앙이 있다. 한쪽은 어마어마하게 큰 그릇에 재화가 가득한 탓에 빈 공간이 없었다. 한쪽은 터무니없이 작은 그릇마저 텅텅 비어 갔다. 가난한 자들은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땅에서 반복해서 쫓겨났다. 그냥 쫓겨난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며 쫓겨났다.

그러나 가만히 굽신거리며 쫓겨날 수는 없었다. 이기고자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 죽더라도 임해야 할 전쟁, 삶을 걸고 자기 자신을 걸어야 할 전쟁, 이기지 못할 것을 알지만 존엄을 지키며 죽어야 하기에 벌이는 전쟁.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망루를 세우고 그곳에 올라가야 했다. 더 많이 가진 자들이 한줌 가진 자들의 그 한줌마저 빼앗으러 쳐들어왔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을 닮아 고요했고 불을 닮아 따듯했던 이들이었다. 더 많이 가진 자들은 물을 닮아 차갑고 불을 닮아 이글거리던 이들이다.

새벽녘 전투는 개시되었다. 물대포가 발사됐고 불길이 치솟았다. 물은 불을 겨냥하지 않았고 사람을 겨냥했다. 불은 가난한 이들을 향해 타올랐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수천 년 동안 매번 반복된 그 결과는 또 한번 반복되었다. 가난한 이들이 해방되는 건 죽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다섯 명이 죽었다. 가난한 이들의 피붙이 하나도 부자의 편에 동원되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가진 자들은 단호했다. 한 번 죽이는 것으로 모자라 언론과 정당, 국회와 행정부, 경찰력과 수사력, 사법부의 힘과 수단, 열정과 정력을 총동원해 두 번 죽이고 세 번 죽였다. 죽은 이의 손에 칼질 하고 어버이를 잃은 이를 감옥에 넣으며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 2차 가해와 3차 가해를 일삼았다.

인류 역사가 이처럼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에 행한 연쇄살인의 역사였던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역사시대의 이전, 밥을 나눔으로써 삶을 나눴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적다. 흙도 땅도 물도 불도 그 누구의 것이 아니었고 모두의 것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적다. 사금파리야 흙을 파 꺼낸다고 하지만 깨져 버린 추억의 태고는 어떻게 꺼내야 할 것인가. 그래서 “혁명은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썩고 병든 것들을 뿌리째 뽑고/ 너절한 쓰레기며 누더기 따위 한파람에 몰아다가/ 서해바다에 갖다 처박는/ 보아라, 저 엄청난 힘을/ 온갖 자질구레한 싸움질과 야비한 음모로 얼룩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벌판을/ 검붉은 빛깔 하나로 뒤덮는/ 들어보아라, 저 크고 높은 통곡을/ …” 1

다시 올 대홍수는 비단 반도를 휩쓰는 정도로 그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도 안 된다. 대륙을 휩쓸고 바다를 휩쓰는 것이어야 한다. 몇 천 년을 거스르고 그 꿈을 끄집어내는 것이어야만 한다. 심해에 가라앉은 대륙을 건져 올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추억의 편린을 발굴하는 정도가 아니라 발굴된 꿈을 전면화하는 홍수. 바람은 가난한 이들을 향해 불길을 품고 용산에서 불고 화왕산에도 불었다. 지금 이 “도시로 진주해 들어오는 겨울바람의 풍향과 풍속은 설명되지 않는다.”2 하지만 여름이 되면 이 바람이 무엇인지 모두 알게 될 것이다. 더 큰 바람을 불러일으킬 바람, 대홍수는 바람과 함께 북상한다. 홍수가 납득되지 않는 것처럼 바람도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부자들에게는. 을축년 같은 기축년 대홍수를 기다리며.


1 신경림, 「홍수」에서
2 김훈,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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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5 02:54 2010/07/05 02:54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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