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속불이(聖俗不二), 금정산 범어사

 

속(俗)은 비루하고 고루하고 지루하며 남루하다. 하루는 길고도 험하다. 그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아 예순, 일흔 살을 살아내기란 비굴하고 고단하고 지난하며 난만하기만 하다. 어찌 살아낼 것인가? 살아낼 힘이 내게 있는가? 살아갈 날은 많이 남았고 죽을 날은 멀다.

그럴 때 우리는 성(聖)을 찾는다. 절집을 찾아 깎아지른 산을 오르는 건 삶을 닮아 있다. 고되고 지난하다. 하지만 저기 저 숲길 너머 불국토가 있다. 어서 올라 이승의 넌더리를 떨치고 싶다. 떠나지 않고서는 떨칠 수도, 얻을 수도 없다. 성스러움을 얻기 위해서는 수렁같이 컴컴한 속세의 그림자를 떨쳐야 한다.

봄은 산에서 오는가. 겨울 같은 도시, 굴속 같은 지하철을 나와 깊숙한 산사를 향해 오르다 보면 가지마다 봄이 만개했다. 범어사 가는 길에는 성큼 다가온 봄이 있었다.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

범어사는 크다. 경남 3대 사찰이자 한국 5대 사찰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그 3과 5의 으뜸이라 할 만하다. 절집의 규모만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다. 대웅전 앞마당을 번잡스럽게 오가는 불자들을 눈여겨보고 있노라면 부산 땅에서 사람들이 공력을 들여 찾는 절이라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서 가장 신도 수가 많은 종교는 불교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불자들이 사는 땅이 바로 영남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부산 인구 중 불교 신자 수는 42%에 달한다. 울산도 43% 가까이 된다. 서울의 불교 신자 수가 20%인 것을 감안한다면 불교가 영남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범어사는 통일신라 678년(문무왕 18년) 의상(義湘)이 창건한 화엄사찰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고 1602년(선조 35년) 중건했지만 또다시 화재가 났다. 범어사의 『명부전중수유공기』에 따르면 1613년(광해군 5년) 묘전(妙全) 등이 해회당(海會堂) 세 칸을 이듬해까지 지어 세우면서 중창했고 이어 지장전, 용화전, 비로전을 차례로 세웠다. 지금의 범어사가 있는 절터는 신라시대 개창 당시의 절터에서 옮긴 곳이라 한다.

범어사 가람 배치를 살펴보면 산기슭 면을 따라 하단, 중단, 상단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단에는 세 개의 산문이 있다. 조계문(曺溪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이 그것이다.

 

선찰대본산 금정산범어사 조계문. 그 기둥이 돌로 되어 있어 다른 절집의 일주문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다.


맨 먼저 마주하는 조계문은 다른 절집의 일주문에 해당한다. 일주문이란 속계와 성소를 나누는 문턱이자 경계이다. 조계문에는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禪刹大本山 金井山 梵魚寺)’라 적혀 있는데 이는 범어사가 선종사찰, 즉 참선을 기본으로 하여 깨달음을 얻는 선불교 사찰임을 알려준다. 그 이름인 조계는 동아시아 선불교의 실질적 개창주인 육조 혜능(慧能)이 살았던 중국의 지명인데 여기서 한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종명이 비롯되었다. 통합 종단 조계종이 만들어지던 당시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한 동산 스님이 계시던 절집이 바로 범어사였다. 조계문은 그 생김이 독특한데 여느 절집의 일주문과는 달리 문이 세 칸이고 그 기둥은 돌로 만들어졌다.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 길 모습, 범어사 걷는 길의 백미로 삼나무와 대나무 등이 심어져 있어 보는 눈이 즐겁다.

조계문을 지나면 천왕문, 그리고 다음으로 불이문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천왕문은 불국토의 가람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봉안되어 있다. 불이문은 하단을 구성하는 마지막 문으로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빈과 부, 나와 너, 생과 사, 그리고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는 불이사상을 담고 있다.

이 하단의 조계문-천왕문-불이문, 그리고 중단의 보제루(普濟樓), 상단의 대웅전(大雄殿)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은 범어사 가람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하늘에서 찍은 범어사 지도를 보면 이 축이 이 절집의 가장 중심축임을 알 수 있다. 그중 하단의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에는 전나무, 삼나무 등과 나지막한 담장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바로 이 길이 있기 때문에 범어사는 가장 아름다운 절집의 길로 손꼽힌다. 뿐만 아니라 이 길이 바로 속세로부터 벗어나 성스러운 불국토의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을 한껏 안겨 주면서 마음을 정화하고 위안을 얻어 가는 길이기도 하다.

불이문을 지나면 중단으로 올라서게 된다. 거기엔 ‘널리 구제하는 누각’이라는 이름을 지닌 보제루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서 있다. 보제루는 예불이나 법요식 등이 이루어지는 건물인데 상단의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 보면 그 지붕 규모 등이 큰 절집의 강당답게 당당하다.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있는 상단의 대웅전은 보물 434호로 범어사의 가장 중심적인 전각에 해당하고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식 가구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맞배지붕을 올리고 있어 매우 특이하다 할 수 있다.

 

나한독성팔상삼전 모습. 가운데 독성전의 문 입구가 특이하다.

그 외에도 범어사에는 다른 절에서 찾아보기 힘든 매우 특이하게 생긴 전각이 있는데 그것은 나한독성팔상삼전(羅漢獨聖八相三殿)이다. 이는 나한전, 독성전, 팔상전이 한 건물로 된 것인데 20세기 초 이어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독성전 문은 매우 특이하게도 아치가 문 앞을 장식하고 있는데 이 아치에는 정교하고도 섬세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거기에 있는 남녀 인물상은 해학적이고 또 아담해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범어사와 한국 근대 불교

범어사는 한국 불교가 근대 불교의 지향과 모색을 해 온 핵심 사찰이다. 구한말에는 경허 스님을 중심으로 한 전통 선의 흐름이 있고 1920년대에는 역경사업을 펼치는 한편 선농불교를 주창한 백용성 스님이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불교를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11년 일제는 불교계를 30본사 체제로 재편하고 그 주지의 임면권은 조선총독에게 귀속시켰으며 조선총독의 허가 하에 사찰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 3·1운동 이후인 1920년대에는 친일적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출범시킨다. 1930년대 중일전쟁 도발 이후 일제는 총력전 체제를 구축했는데 이에 불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사불란한 총독부 명령 체계로 재편하기 위해 총본사를 설립하고 전시체제에 협력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절집마다 무기 제작을 위해 범종, 징, 바라 등을 자발적으로 헌납하기도 한다. 또 해방 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권상로 같은 친일승은 “완벽한 지혜를 얻은 자는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죽여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니 전선에서 살인을 해도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선동하며 조선인들이 2차 대전에 참전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와 그에 붙은 친일 승려들의 행태에 맞서 1910년대 만해 한용운은 궐기대회를 주도하면서 범어사에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했다. 그리고 만해의 제자들이 포진해 있던 범어사의 승려들은 3·1운동에 참여하고 불교 교리를 더욱 공부하기 위해 해외 유학을 감행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김법린(1899~1964)을 들 수 있다. 그는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수학하고 명정학교 보습을 맡고 있었다. 김법린은 3·1운동 이후 검거를 피해 상해로 갔고 1920년 4월에는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 다시 1923년 11월에는 파리대학 철학과에 입학, 1926년에는 파리대학원에 입학해 근세철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김법린은 1928년 2월부터 불교와 쇼펜하우어 철학, 인도 철학사상 등을 강연하기도 하면서 「불란서의 불교학」 등의 저술 활동도 펼친다. 김법린 외에도 김경주, 김경홍, 허영호, 김홍수, 박성희, 안장호, 오계운, 유성갑, 정중환, 조은택 등이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들 유학파의 상당수는 속세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식민지 시기를 살아가는 조선 민중의 삶에 무관심했고 그네들의 살림과 형편을 살피지 않았다. 일단의 불자와 승려들이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물심불이의 원리」(1929), 「부루조아와 푸로레타리야」(1930), 「불교에서 본 사회주의」(1931) 등의 이론적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이들 유학파는 주로 그러한 영향의 반대편에 섰다. 그 결과 이들은 1930년대가 되면 서서히 친일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한국 불교는 억압 받는 조선 민중의 편에 서기보다는 일제와 야합했다. 예컨대 범어사 출신인 허영호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신간회 동래지부에도 참여하기도 한 항일 전력이 있었지만 30년대 말 친일로 급선회한다. 1937년에는 대표적인 친일 불교잡지였던 『신불교』의 발행인이 되기도 한다.

해방이 되자 한국 불교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고 또 대처승을 종단에서 몰아내기 위해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는데 그걸 주도한 것이 범어사에 있던 동산  스님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쿠데타 이후 정권을 찬탈한 군사정권은 대처승과의 타협을 종용했고 그 결과 1962년 통합 조계종단이 출범한다. 이에 보다 더 근본적인 정화운동이 필요하다 느낀 이들은 1920년대 백용성의 선농불교를 계승해 총림건설사업에 뛰어들게 되는데 1960년대 범어사의 김지효 선사가 중심이 되어 추진된 총림건설사업 역시 그러한 일환이었다.

허나 이는 산사에서의, 종단 내부에서의 움직이었을 뿐 중생들의 삶, 세속과는 유리되어 있었다. ‘참선을 통해 개인적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전근대적 불교관에 한국 불교는 여전히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산사에 머무르지 말고 민중들 사이로 나아가야 한다는 만해의 사상과도 거리가 멀었다. 성과 속은 철저히 유리되어 있었다. 속세에 대한 무관심은 그러나 사실 불의한 권력에 대한 용인과 혹은 적극적 협력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해방 후 표면적으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지만 불교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세속과 유리되자 역설적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에 결탁해 지속적으로 협력했다.

선사들은 암자에 틀어박혀 수행에 몰입했고 종단은 독재 정권의 하부 기관이 되어 ‘불심으로 대동단결’을 실천했다. 그러면 불자들은 또 어떠했나? 불자들은 세속의 욕망을 성소에 와서 빌었다. 불자들은 세속과 유리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속을 성소에 들여왔다. 범어사의 창건 설화인 금정설화처럼 금 물고기가 사는 금정산 우물에 기우제를 지내듯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부처님의 힘을 빌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학력고사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는 계절이 돌아오면 절은 미어터졌다. 부처님의 힘으로도 자녀들을 모두 합격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불자들은 빌고 또 빌었다. 다른 집 자식들은 떨어지든지 말든지 우리 집 애들만큼은 꼭 합격시켜 달라 기원했다. 절집에서도 빌고 관악산 연주암에 올라서도 빌고 팔공산 갓바위에도 올라 빌었다. 불자들의 기복신앙 행태는 기이했지만 꼭 그 기이한 만큼 절은 번창했고 스님들은 이를 외면한 채 암자에 틀어박혔으며 총무원의 중들은 군인들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풀빵구리 쥐 드나들듯 요정을 드나들었다.

이쯤 되면 성소의 세계도 속세만큼 비루하고 고루하고 지루하며 남루하다. 기와불사, 개금불사 하겠다고 꺼내 놓은 불전함 곁에는 저마다의 욕망을 새긴 기와들에 이름과 주소가 깨알같이 새겨 있다. 그 곁을 지나쳐 속세로 돌아가는 하산길 뒤로 대웅전 처마의 풍경 소리가 퍼진다.


김정한과 성속불이

범어사를 나와 큰길을 향해 도로변을 내려오다 보면 무수히 많은 문학비가 서 있다. 이름 모를 시인에서부터 시조 시인, 동화 작가 등의 문학비를 지나치다가 문득 기운에 끌려 바라보자면 요산 김정한(1908~1996) 선생의 문학비가 있다. 요산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문학계의 큰 어른이셨고 부산 시민사회의 큰 어른이셨다.

 

요산 김정한 문학비. 1994년에 금정구청에서 범어사 입구에 세웠다.

요산 선생과 범어사의 인연은 길다. 그는 부산 금정구 남산동 663-2번지, 지금의 범어사 인접한 아랫마을에서 태어났다. 요컨대 ‘사하촌’에서 태어났던 셈이다. 어릴 적 종조부가 가르치는 서당에 나가다가 1919년 범어사에서 세운 사립 4년제 소학교인 명정학교에 입학한다. 만해의 제자 김법린 등이 선생으로 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비록 나이 어린 요산이었지만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다.

요산은 명정학교를 마친 후 서울 중앙고보에 다니다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동래보고를 졸업, 이후 울산 대현공립보통학교 교사를 맡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문과부를 다니기도 한다. 1933년 남해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던 요산은 남해에서 「사하촌」을 집필하고 1936년 이 작품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사하촌」은 절 아래 마을인 보광리와 성동리 사람들의 고난을 그리고 있다. 이 마을 농민들은 보광사라는 절이 소유한 땅을 부쳐 먹는 소작인들인데 절의 중들은 무거운 소작료를 물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제 행정관청도 각종 세금을 중부과하고 이에 농민들은 분노를 품고 빈 짚단을 든 채 절을 향해 행진한다.

요산이 「사하촌」을 썼던 시기는 불교의 친일 행각이 극성했던 때였다. 절집마다 ‘천황폐하 성수만세’ 등이 걸려 있었고 게다가 절집은 땅을 가진 지주로 농민들을 착취했다. 대쪽 같은 요산으로서는 불교의 친일 행위와 부패상을 두고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사하촌」의 배경은 요산이 소설을 집필했던 경남 남해에 위치한 지금의 용문사로 그 옛 이름이 바로 ‘보광사’였다. 그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는 목원(牧原)이라는 필명을 썼으나 조선일보사에서는 당선자 이름을 김정한이라 밝혔다. 이 때문에 범어사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난다. 범어사 중들은 고향 출신인 김정한이 범어사를 모델로 하여 썼다고 노발대발하고 반종교 선동 소설이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1940년대 요산은 교원직을 사직하고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운영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피검되고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붓을 꺾고 해방 후 부산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1966년이 되어서야 「모래톱 이야기」로 문단에 복귀한다. 1970년대에는 한국 앰네스티 위원을 맡아 일찌감치부터 사형제 폐지운동에 앞장서기도 했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데, 특히 1987년 6월항쟁 때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87년 그의 나이 팔순에 접어들었던 때였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 깃발처럼 나부끼던 성명서들에서 요산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요산은 속세의 논리와 힘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지만 그곳을 떠나 예술이라는 또 다른 성소로 달아나지도 않았다. 성소나 속세나 그에게는 하나였다. 성속불이. 우리의 고단함은 산사로 달아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세속을 성소로 바꿔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불이문을 지나 해탈의 길로 가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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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5 02:53 2010/07/05 02:53
글쓴이 남십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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