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자와 그람시 그리고 레닌
1. 서언-세 혁명가들의 실천의 배경
우리는 이들 위대한 실천가이자 이론가들의 저술과 주장이 어떠한 실천적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후세 사람들이 글의 배경을 무시하고 세 사람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에서 국가는 모든 것이었으며 시민사회는 초보적이었고 유동적이었다. 서구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존재하여 국가가 흔들리면 시민사회의 견고한 구조가 즉시 나타났다. 국가는 단순히 외곽의 도랑에 불과하며, 그 뒤에는 요새와 토루의 강력한 체제들이 버티고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엄청나게 많은 국가별 사례가 있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각 개별 국가에 대한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게 된다.’(그람시, 옥중수고)
레닌이 활동했던 러시아는, 부르주아 혁명도 추진할 세력이 없을 만큼 뒤떨어진 나라, 빈농이 인구의 다수이고, 대공장 노동자는 소수인 그런 까닭으로 노동자 농민의 동맹으로 혁명을 추진해야 했던 나라였고, 짜르 전제와 비밀경찰의 감시와 탄압 하에서 조직의 보호가 중요한 그런 나라의 혁명의 지도자였다.
로자는 카우츠키로 대변되는 사회민주주의당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한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활동했다. 또한 당이 체제내화하면서 당의 중앙이 관료화되어, 개량을 쌓아가면 체제가 극복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개량주의자와 타협주의자 그리고 기회주의자가 판치는 그런 환경 속에 있었다. 그 당이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표를 던질 때까지 로자는 당의 중앙과 관료와 투쟁하면서도 새로운 당을 만들 생각은 가져보지 못했다. 그러한 로자에게 관료주의와 기회주의를 극복하는 힘은 대중의 열정과 자발성이었다. 당의 목적의식성과 지도성에 대립하는 자발성과 자생성이 아니었다. 그가 만든 스파르타쿠스단 역시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목적의식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점에서 그녀는 레닌과 전혀 의견의 차이가 없다.
그람시는 산업화된 북부와 봉건적 잔재가 남아있는 남부로 확연히 구분되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다. 그 역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강조했다. 특히 카톨릭의 존재감이 큰 나라에서 그리고 근대국가의 형성이 뒤진 나라에서 활동했고, 무엇보다도, 혁명의 고양기가 지난 다음에 파시즘의 성장을 보았다. 파시즘이 중간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혁명세력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 현상, 왜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계급의 사상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사상에 포획되는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혹은 이데올로기의 국가기구로서 교회와 정당과 학교, 언론 등의 계급적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레닌이 억압에 의존하는 짜르 치하에 있었다면, 그람시는 상대적으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레닌에게는 모순이 심화되고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지배계급을 파탄시킬 기동전의 준비가 과제였다면, 그람시에게는 상부구조의 제 영역에서 지적 도덕적 우월성에 기반한 대항 이데올로기의 창출과 헤게모니의 장악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회에서 활동했다. 혁명의 궁극적 형태는 기동전이겠지만, 그 과정은 진지전의 역할이 필수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했고, 이러한 사정은 언론과 문화의 영역에서 대중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있는 현대자본주의의 혁명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점진주의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그람시에게 있어서 진지전이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이고 따라서 가차없이 수행되어야 할 성질의 투쟁이었지, 선 이데올로기 투쟁 후 기동전의 개념이 아니었다.
그람시 역시 자발성에 대한 당의 역할 즉 목적의식적 지도체로서의 당을 위해 헌신했다.
레닌주의를 구분하는 표지란, 대중과 당과의 관계에서 자발성에 대한 목적의식성의 강조에 있다. 나는 이것을 자발성의 목적의식성과의 통일 혹은 수렴으로 부르고자 한다. 바로 이점에서 로자나 그람시는 레닌주의자이고, 맑스주의를 발전시킨 실천가들이다. 그럼에도 소부르조아 사이비들이 이들 삼자를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은 황당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이하에서 로자와 그람시의 주된 주장을 요약해보고 그것이 현대 혁명과 실천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로자의 주장의 검토
로자의 기여는 먼저 혁명에 있어서 대중파업의 성격과 중요성을 밝힌 데에 있다. 일상투쟁과 혁명적 투쟁,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기계적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특정시기의 파업이 그 발단이 경제적 요구일지라도 투쟁의 의미는 다를 수 있다. 쌍차 해고자들의 투쟁을 자본의 노예되는 투쟁이라고 빈정대면서 탈주나 선동하는 자율주의자들의 반동적 언설까지는 고려할 필요도 없이, 해고는 살인이라면서 해고반대와 구조조정의 반대를 내세우고 장렬한 투쟁을 전개하고 수많은 계급투쟁세력이 합류한 것은, 완성차 업계의 구조조정을 앞두고 자본가들이 가장 조직력이 미약한 쌍차를 선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싸움은 총자본과 총노동자 계급간의 전초전이고 대리전의 성격이 있었다. 단순히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투쟁이 아니라 자본과의 일전이었다. 그점에서 쌍차는 자본과 국가를 한편으로 하고 노동자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정치투쟁이고 결렬한 계급투쟁이었다.
물론 이 투쟁은 많은 한계를 노정했다.
09년 8월초 5키로씩 하염없이 달려야 했을 때, 연속 2주나 달려야 했을 때, 내가 본 것은 이 땅에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이럴거면 종이호랑이로라도 남아야 했을텐데, 총연맹이 참여하고 이끈 연대대오가 헬기에서 내던지는 색소주머니와 몇중대 되지도 않은 전경들에게 밀려버린 것은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수치였다.
대중 속에는 전투할 대오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투쟁할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보도블럭을 몇가마나 깨서 투석전을 준비한 대오도 있었고, 죽창과 파이프를 준비한 대오도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그것은 노동계급의 수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소환장조차 받지 않으려는 지독한 보신주의 때문이었다.
또한 쌍차 해고자들이 77일간 투쟁할 때, 총연맹은 아니더라도, 금속연맹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완성차 노조만은 연대파업을 했어야 했다. 당장 내 목의 칼이 아니라고 외면할 때, 식수나 보내고 성금이나 보낼 때 그 동지들은 얼마나 야속하게 생각했을까? 당신들도 당해보면 그리고 당신들 혼자 힘으로 투쟁을 승리로 이끌 힘이 없으면 그때 얼마나 다른 동지들의 연대가 소중한 것을 알게 된다. 같은 처지의 동지와 연대하는 것 그것이 노동자 계급의 연대다. 그것이 계급의식이고…
이 땅의 노동운동이 위기라는 것은 노동자들이 계급으로서 서지 못했다는 것. 계급으로서 사고하고 저항하고 투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용산투쟁은 보상금의 다과를 둘러싸고 시작되었지만, 공권력에게 학살을 당함으로써 국가와 공권력의 시민에 대한 살인의 차원이 제기되고, 그 본질에 건설자본과 지주자본의 이해에 복무하는 계급국가로서의 공권력의 본질이 관철되는 성격 나아가 상대적 과잉자본인 투기적 자본의 운동이 야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순에 대한 저항과 그에 대한 억압을 담당하는 신자유주의 경찰독재체제와의 모순도 노정되었다. 투쟁의 깊이에 따라 여러 차원의 성격과 모순을 갖는 이 싸움 역시 쌍차 투쟁과 마찬가지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일상투쟁과 혁명투쟁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어리석음을 질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로자는 독일 사민당이 관료적 중앙집권제하에서 대중을 수동적 대상과 동원의 대상으로 사고하는 현실 속에서, 관료제의 위험과 중앙집권제의 위험, 그리고 대중의 자발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코 대중의 자생성에 굴복한 것이 아니었음도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역사적 운동은 소수의 또는 소수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압도적인 다수의, 압도적인 다수의 이익을 위한, 자작적이고도 독자적인 운동이다.’(맑스, 공산주의자 선언)
‘각성되지 못한 대중의 선봉에 선 각성된 소수가 혁명을 수행하던 시기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사회조직의 완벽한 변혁이라는 과제가 있는 곳에서는 대중이 스스로 변혁과정에 참가하여 그들 스스로 과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며 그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 행동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엥겔스, 프랑스 계급투쟁 서문)
맑스와 엥겔스의 정신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각성된 의지와 행동이 없다면 사회주의란 있을 수 없다’라는 로자의 주장은 서로 상통한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강령에서 로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단지 자신의 목표를 굳게 확신하는 노동자계급의 한 부분일 뿐이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광범위한 노동운동을 이 운동의 역사적 책무로 향하도록 모든 국면에서 지도하는 그런 부분일 뿐이다.’
‘전 독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모호하지 않고 분명한 의지에 의하지 않고서는, 즉 이 정치조직의 관점. 목표, 투쟁방법에 대한 의식적인 동의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결코 정부적 권위를 가로채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당이 대중의 선진부대이며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지도의 관점이 관철되고 있다. 다만 오늘날의 의식에서 볼 때 당이 시민사회의 일부분이라면 즉 임의단체라면 시민사회로부터 독립한 국가와 정부의 초월적 권위를 당이 갖는 것은 무리이다. 즉 대중의 자치조직인 소비에트나 평의회가 국가기관 혹은 정부로 전화하여 권력의 담지자가 될 수 있어도 당이 권력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당은 대중조직 속에서 혹은 소비에트 속에서 그의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실천을 통하여 대중의 신뢰 속에서 지도를 관철해야 한다. 당은 다른 당이나 정파와 함께 대중조직 속에서 신뢰와 권위를 다투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무오류 혹은 이성의 화신으로서의 당이 소비에트의 위에 서서 보다 높은 선험적 권위를 가지고 대중을 지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스탈린주의의 오류이다. 당은 지도체가 아니라 헌신체여야 하는 것이다.
로자가 레닌의 지난친 중앙집권주의를 비판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레닌 역시 러시아와 같은 엄혹한 사정이나 대중의 낮은 의식이 아닌 발달한 서구에서는 당이 다른 모습을 가졌을거라고 말한 바 있다. 레닌은 유연하고 유능하고 현실적인 지도자였다. 달리 말하여 레닌의 주장 중 러시아적인 특수성에서 나온 주장과 혁명 일반에 관철되는 보편적인 주장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혁명조직에서 관철되는 민주집중제는 의결의 민주주의와 실천의 통일성에 관한 것이다.
문제는 당내 민주주의가 어떻게 관철되어야 하는가이다. 일반적으로 세포에서 분회, 지역, 중앙 등등 중층적으로 대의제가 시행될 때 중층적 대리주의의 위험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엄혹한 상황 속에서 총회 민주주의를 관철하기 힘들고, 또는 일상사를 모두 총회에서 다루기 힘든 만큼, 유능하고 헌신적인 인재에게 권한과 대리의 위임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이 위임의 단계는 적을수록 좋다. 군림하지 않은 중앙, 언제든지 소환되는 선출직, 총회 또는 그에 버금가는 대의원대회에서의 중요사항의 결정과 일상사와 집행의 위임 이러한 모습은 어느 정치조직이나 갖추고 있는 문제이다.
콤뮨이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라고 하는 것은 대중의 자기지배의 이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대중이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조직은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일 수 박에 없다. 여기에서 아무리 중층적으로 상층 집행부나 대표를 선출하고 위임한다고 하여도, 그들은 권위를 가진 대리인이 아니라 대행인으로서의 혹은 그를 선출한 단위의 머슴으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즉 헌신할 의무 외에는 아무런 특권도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헌신의 원칙과 탈권위주의의 원칙이 갖춰진다면 과두제의 철칙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3. 그람시의 여러 주장과 개념의 검토
토대와 상부구조-국가 그리고 수동적 혁명
‘우리가 대중들에게 훌륭한 역사적 분석과 제국주의의 모순에 대한 경제적 논문들을 제시했을 때, 히틀러는 그들의 감정적 존재인 가장 깊은 뿌리를 움직였다. 맑스가 언급했듯이, 우리들은 주관적 요인의 실천을 관념논자들에게 넘겨 주었고,, 스스로는 기계론적인 경제적 유물론자들처럼 행동했다.’
‘노동자 대중의 총체성 속에는 갖가지 차별적인 의지가 존재한다. 극좌주의적 의지, 개혁주의적 의지, 자유민주주의적 의지 등이 존재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또한 일정한 한계 내에서는 심지어 파시스트적인 의지도 존재한다. 자본가들의 수중에 언론매체가 독점되고 따라서 일반이익으로 표현되는 그들의 이익에 따라서 정부와 정당이 정치적 이슈들을 강요할 가능성이 높은 부르주아 체제가 존속하는 한, 갖가지 상이한 의지들을 내포하는 노동자 계급의 의지는 필연적이다.’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모든 변동은 구조[즉, 토대]즉각적인 표현으로 제기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사적 유물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일반적으로는 초보적인 소아주의로 비판되어야 하며, 실천적으로는 맑스의 진정한 입장과 구분되어야 한다.’
‘즉각적인 경제위기 그 자체가 근본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창출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 위기들은 단순히 어떤 사고양식의 유포에 더 유리한 영역 그리고 계속되는 민족적 삶의 전체 발전을 내포하는 문제제기 및 해결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역사적 정치적] 사건에 직면하여, 경제주의는 “관련된 사람 중에 누가 처음부터 이득을 보게 되겠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며, 직접 이득을 보는 자들은 특정 지배계급의 분파라는 식으로 오류일 뿐 아니라 단순한 추론을 통해 대답한다….. 이러한 비오류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이론적 중요성도 지니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단지 실천적 효율성에 대한 최소한의 암시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오직 도덕적인 교훈과 인간성에 대한 무한한 의문들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람시가 예로 든 리소르지멘토(1860~1861)란 외세(오스트리아,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며 작게 쪼개져 있던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민족운동으로,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과거 봉건귀족의 후예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로 탈바꿈한 카부루(Cavour)가 이끄는 온건파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에 능했던 마찌니(Mazzini)의 급진파이다. 마찌니가 사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봉건사회의 '침전물'을 말끔히 제거하기 위한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이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급진파가 자신들이 점령한 남부를 온건파에 헌납하고, 이에 흡수됨으로써 끝을 맺게 된다. 이후 마찌니는 이탈리아 정치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수동적 혁명이란 대중의 급진적 변혁운동과 열망을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세력 때로는 지배계급의 보다 자유주의적인 분파, 혹은 불철저한 중간계급이 급진적 변혁 대신에 체제의 개량으로 수렴하는 변화를 말한다. 기층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배반당한 불철저한 혁명이라고 하겠다. 보나파르티즘이나 파시즘, 혹은 87항쟁으로 성립한 87년 체제 역시 그러한 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람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왜 기층민중은 배반당했는가이다. 압도적 힘의 우위나 헤게모니상의 우위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중의 동원에 한계가 명백할 때 기동전만을 사고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체제가 단지 물리적 힘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참호와 반발력 그리고 위기를 수렴하고 자기변신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 의미에서 헤게모니와 진지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낡은 반영론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유물론은 ‘존재는 우리의 의지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라는 기본명제에서 출발한다. 이때 인식은 존재의 반영이겠지만 기계적인 반영이 아니라, 역사 혹은 사회는 의지를 가진 우리들 인간이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우리의 의식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 반작용을 한다.
상부구조 역시 토대의 반영 혹은 본질의 관철이라는 측면과 함께 반작용 즉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규정적인 것, 본질적인 것, 현상적인 것, 상대적 자율성의 개념은 현실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다.
오늘날 토대 또는 경제주의적 환원 혹은 본질환원적인 입장에 서는 사람은 드물지만, 우연이라는 현상 속에서 관철되는 필연으로서 본질환원적 사고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본질적이지 않은 제 계기와 반작용의 여지를 두지 않은 채 모든 현상이 본질의 관철임을 밝히려는 무수한 시도들이 있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구체에서 추상으로가 아니라 추상에서 추상으로 논리적 전개를 거듭한다. 그러한 결론이 궁극에 있어서 옳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문제는 경향 속의 관철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국가가 부르조아지의 공통사를 처리하는 위원회라고 할 때, 즉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도구라는 입장 결국 본질론적인 입장에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 국가의 행위가 총체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관철하는 것은 맞겠지만 현실 정치는 제 계급의 이해관계의 충돌의 장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본질론의 입장에 섰을 때 우리는 부르주아 정치체제의 다양한 형태인 보나파르트 체제나 파시즘의 체제, 그리고 사민주의적 체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성립을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이 난관을 벗어나는 방법은 상대적 자율성이다.
이데올로기, 대항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지배계급이 광범위한 대중들의 주요한 정치적 수행(예를 들어 전쟁)에서 실패했을 때, 혹은 거대한 대중이… 정치적 수동성에서 어떤 능동성으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그 내용들이 합쳐져 혁명으로까지 나아가는 그러한 요구들을 내놓았을 때, 그러한 위기가 발생한다.’
‘만약 지배계급이 합의를 상실하여, 즉 더 이상 지도하지 못하고 오로지 억압적 힘의 행사를 통해서만 지배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위대한 대중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되고 과거에 믿었던 것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위기는 바로 오래된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한 시기다. 이러한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증상들이 일어난다.’
‘그 성격상 진정으로 대중의 철학이 되려는 경향 때문에, 실천의 철학은 오직 논쟁의 형식 속에서 그리고 항구적인 투쟁의 형식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 그렇지만 출발점은 언제나 다수의 자생적인 철학이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일관성 있게 응집되어야 하는 상식이어야 한다.’
‘이것은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단계이며, 하부구조로부터 복잡한 상부구조의 영역으로의 결정적인 이행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전에 싹 텄던 이데올로기가 ‘당’으로 화해서 대결과 투쟁에 이르며 그것들 중의 오직 하나, 혹은 최소한 그것들 중의 오직 하나의 조합만이 주도적이 되고 우세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정치적 경제적 목표의 조화만이 아니라 지적 도덕적 통일성까지도 주장하게 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는 투쟁이 조합주의적인 차원이 아니라 보편적 차원 위에서 전개되는 과정에서 모든 문제를 제기한다. 따라서 여러 종속그룹에 대한 중추적인 사회그룹의 헤게모니가 창출하게 된다.’
상부구조인 국가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역시 동일하다.
국가는 그 본질적 요소가 폭력장치이겠지만, 폭력만으로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피지배자들이 동의, 공감, 수용하지 않는 한 그 체제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역할 특히 지배 이데올로기와 대항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은 그람시의 위대한 업적이다.
레닌의 주요 업적은 경제적 정치적 위기시의 기동전으로 부르주아 체제를 타파하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론이었다. 체제의 정당성을 잃고 폭압에만 의존하는 러시아의 상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문제보다 자코뱅적인 강력한 혁명정당의 리드가 훨씬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레닌의 당은 물질적 힘이다. 대중을 동원하고 장악하는 힘에 관한 과학이었다.
그런데 부르주아 체제는 신분제 사회와 달리 소유권과 인신의 자유, 참정권 등에 있어서 보편적 자유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내용과 형식의 차원에서 볼 때 부르주아 국가는 만인이 평등한 보편의 국가라는 형식 속에서 부르주아의 이해를 총체적으로 관철하는 체제이다. 이러한 내용과 형식간의 모순은 피지배계급에 대한 노골적인 폭압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통제와 포섭을 필수적이게 한다. 어느 체제나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중요하겠지만 부르주아 국가는 그 태생적이고 본질적인 모순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자본과 노동이라는 화해할 수 없이 적대적인 모순이 관철되는 토대의 반영이 아니라, 적대적 이익을 관철하면서도 체제의 지속성을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적인 억압과 순치가 필연인 체제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이러한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면, 혁명은 단순히 국가 장치 혹은 국가권력의 쟁취의 과정이 아니라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의 투쟁과 제압 즉 대항이데올로기의 창출과 확산의 과정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계급투쟁은 토대 또는 경제의 영역 혹은 생산수단을 둘러싼 생산의 영역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수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들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사회 역시 단순히 생산의 적대적 성격을 지양하는 사회가 아니라 유적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고 전인적 발전을 추구하는 사회라고 했을 때,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은 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는 이것을 기동전에 대비한 진지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람시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진지전을 혁명주의가 아니라 점진주의로 왜곡하고 있다. 그람시의 주장은 이데올로기 영역을 매개로 혹은 단계적으로 접근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국가권력의 장악만을 중시하는 경향에 대하여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치열한 혁명적 투쟁을 애기한 것이다.
본질은 그 자체로 모습을 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찰과 모순을 심화시켰을 때 나타난다. 우리는 거리를 걸을 때 경찰의 폭력적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우리들의 요구를 가지고 도로와 광장을 점거했을 때,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폭력적으로 진압을 당할 때 폭압기구로서의 국가의 본질이 들어나는 것처럼, 철거민들이 시키는 데로 순순하게 따르지 않고 망루에 올랐을 때 민중에 적대하는 친자본으로서의 국가의 본질이 명료하게 된다. 이때 본질은 현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억압에 대한 저항 그리고 억압적 이데올로기와 문화에 대한 저항은 그 이데올로기와 문화와 국가와 체제의 본질인 적대적 계급적 성격을 드러낼 것이다. 결국 그람시가 얘기하는 대항 이데올로기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하자는 것이고,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유연성과 적응성에 비추어 볼 때 필수적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헤게모니 투쟁이란 지적 도덕적 우위를 빼앗는 싸움이다. 모든 투쟁에서 물리적 충돌 이전에 지적 도덕적 우위의 확보가 관건인 것은 이데올로기 영역의 문제만이 아니다. 총이 없는 시민이 무장한 군대를 이기는 것 역시 지적 도덕적 우위가 확보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일회적이거나 순차적 점진적 매개적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대항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고 헤게모니를 확보해 가는 싸움은 현대 혁명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대중과 조합과 당, 자발성과 의식성, 평의회,
‘… 조합관료는 산업적 합법성을 영구적인 상태로 인식한다. 그는 자산가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 합법성을 자주 옹호한다. 그는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 속에서 오직 혼란과 악의만을 발견할 뿐이다. 그는 노동자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다.’
‘러시아 혁명, 헝가리 혁명, 독일 혁명 이후에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는 생성될 수 없으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역사라기보다는 그들 관계에서 생성된 근본적으로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믿게 되었다.’
‘조합의 본질적 속성은 공산주의적이라기 보다는 경쟁적이다. 조합은 급진적 사회변혁의 도구일 수 없다. 즉 조합은 프롤레타리아에게, 능란한 관료들과 일반적 산업문제에 관한 기술적 전문가를 제공할 수 있지만,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기초가 될 수는 결코 없다. 조합이 스스로 사회를 지배할 수 있고 또한 그럴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개인적 역량을 생성할 가능성이란 전혀 없다. 조합은 공산주의 사회발전의 생명력과 리듬을 구현할 지도부를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정당과 노동조합의 혁명적 조직들은, 시민들간의 관계가 중요하게 존속되는 정치적 자유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영역 위에서, 일반적인 관점에서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인과 발전으로서 탄생한다. 혁명과정은 억압자와 피억압자, 착취자와 피착취자와의 관계는 존속하지만, 노동자를 위한 자유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은 공장 내의 생산 영역에서 일어난다.’
‘평의화가 존립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생산을 위한 직접적인 의무를 부여받고 그들의 작업을 개선하도록 하며,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규율을 창안하여 생산자, 즉 역사 창조자의 심리학을 만들어내도록 한다. 노동자들이 이 새로운 의식을 자각하면서 조합으로 들어가며, 조합은 계급투쟁이란 단순한 활동을 추구하는 대신, 경제생활과 노동기술을 새롭게 구성하는 근본적인 과업에 헌신할 것이다. 즉 조합은 공산주의적 문명에 적합한 경제생활과 전문기술을 정교화하는 데 헌신할 것이다.’
‘공산주의사회는 생산 및 교환수단 위에 건설된 ‘자연적인’ 구성체로서만 인식될 수 있다. 또 혁명은 이러한 구성체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역사적 인정의 행위로서만 인식될 수 있다. 따라서 혁명과정은 자본주의적 소유체제 아래에서 공동생활에 내재해 있던 모순의 충돌로 야기되는 노동자계급의 자발적인 운동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투쟁기구들은 이러한 거대한 투쟁의 ‘집행자’일 뿐이다. 이와 동시에 사회당은 이러한 타파 및 건설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집행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한 과정의 형식, 즉 지도자들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는 유연한 형식은 결코 아니며 또한 그렇게 인식될 수도 없다.’
‘그것[지도력]은 구체적인 감정과 외관, 세계에 대한 단편적 개념을 통해서 특정 역사관계 속에서 형성된 실제적인 인간에 적용되었다. ‘자발성’이라는 요소가 무시되지 않았으며 경시되는 것은 더욱더 아니었다. 지도력은 교육되고 지도되며 외래의 오명으로부터 정화되었다. 그리고 지도력의 목표는 근대이론[즉 맑스주의]과 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동감있고 역사적으로 유효한 방식을 통해서였다. 지도자들 스스로 운동의 자발성에 대해 애기했으며 그러한 태도는 정당했다. 이 주장은 자극이자 강조점이었으며 깊이 있는 통일성의 한 요인이었다. …. 그것은 대중들에게 역사적 제도적 가치의 창조자이자 국가의 건설자임을 ‘이론적으로’ 자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자발성’과 ‘의식적 지도력’ 혹은 규율간의 통일은 이것이 단순히 대중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그룹들에 의한 모험이 아니라 (진정한) 대중정치인 한 정확히 예속된 계급의 실제적인 정치행동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각 개인은 자신의 직업적 행위 외에도 일정한 지적 행위를 수행하게 된다. 다시 말하여 그는 ‘철학가’이자 예술가이며 또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세계에 대한 특정의 개념을 가지고 참여하며 도덕적 행위에 대해서도 의식적인 지침을 가진다. 따라서 그는 세계에 대한 어떤 개념을 지지해주거나 아니면 그것을 교정하는데, 즉 새로운 사유양식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새로운 지식인이 되는 양식은 이제 더 이상 감정과 열정의 외관이나 순간적인 원동력인 웅변에 내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양식은 단순한 웅변가로서가 아니라 건설자, 조직자, ‘영구적인 설득자로서’ 실제 생활에 적극 참여하는 데 있다.’
이중권력은 그 자체로 혁명적 이행기의 모습이다. 대립하는 어느 계급도 주도권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두 개의 권력을 낳는 것이고, 이 시기는 장기에 걸칠 수 없다. 오직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을 제압함으로써 종료된다. 이때에 머뭇거림은 단지 죽음일 뿐이다. 이 때에 필요한 것은 단호한 의지와 유능한 능력을 갖는 그리고 신뢰받는 항쟁의 지도부가 필요한 것이다. 당은 이날을 준비하는 것이고 이 날에 자기의 존재의의를 찾는다.
대중의 자발성은 고무되어야 하나 결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중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집단지성을 창출할 수 없다. 오직 훈련된 당적 지성만이 필요한 순간에 올바른 방향과 방책을 제시하고 대중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대중은 상승기에는 혁명가보다도 더 용감히 앞서 나가겠지만 쇠퇴기에는 누구보다 먼저 사라진다. 주객관 정세와 대중의 열망과 의식 그리고 처지를 냉혹히 타산하고 이끌어나가는 것이 당의 역할이다. 이때의 당은 그람시가 얘기하듯 마키아벨리의 군주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군주처럼 혜안을 가지고 제시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신뢰에 기반하여 그들의 동의와 공감 속에서 즉 군림하지 않고 존경받고 신뢰받는 지도세력으로서 혁명을 이끌 것이다. 이 점에서 군주에 비교한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 역시 당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평의회는 혁명적 시기에 대중이 깨우친 조직의 형태이다. 파리콤뮌만이 아니라 모든 혁명적 저항조직은 반체제의 열망으로 가득 찬 평등한 성원들이 어떠한 기성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전체의 성원이 함께 결정하고 함께 실천한다는 의미에서 의결과 집행의 통일체이다. 혁명적 고양기에 이러한 평의회 특히 생산수단에 대한 지기지배와 자주관리를 관철하는 공장평의회는 오직 혁명적 고양기라는 특수한 시기에만 성립될 수 있다. 즉 일상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조직형태가 아니다. 다만 일상시기에는 평의회 민주주의를 작동원리로 하는 저항조직을 지속가능성이 담보되는 한에서 건설할 수 있다. 민주적 조직의 건설과 민주적 실천은 혁명조직만이 아니라 모든 대중조직 역시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관하여 선재적 투쟁이라고 하여 공장평의회 그 자체의 건설을 일상적인 목표로 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부르주아가 전복되기 이전에는 대중은 평의회를 지킬 힘이 없다. 고양기에 건설된 평의회는 쇠퇴기에 많은 보복을 수반한다. 그리고 대중은 상처입고 움츠러든다.
슬로건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반드시 관철해야 하는 대중의 열망과 의지를 담은 슬로건이 있는가 하면, 관철할 힘이나 전망이 없지만 의식의 고양을 위해서 혹은 선전과 선동용의 슬로건이 있다. 슬로건은 처음부터 제시되기도 하고 상황의 진전에 따라 바뀌거나 새로운 슬로건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람시가 평의회를 찬양했다고 해서 모든 시기에 선재적인 prefugurative 투쟁의 형태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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