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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들어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재정위기에 빠진 그리스에 총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 유로화 붕괴를 막기 위해 7500억 유로의 재정안정 기금 조성을 골자로 한 대책을 수립했다. 이로써 당장 그리스 채무불이행의 가능성은 줄었으나, 남부유럽 각국의 긴축정책으로 인한 성장둔화와 유로화 붕괴가능성이 이야기되면서 유로화 하락, 유가 하락, 금값 상승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나아가 이번 대책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지적과 함께, 그리스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살찐 돼지 국가들(PIIGS,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페인)’의 재정위기로 전염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곳곳에서 제출되고 있다. 설사 이번 조치가 실효를 발휘하여 재정위기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더라도 장차 유럽연합이 ‘유럽 역내 불균형’을 근본적으로 시정하지 못하는 이상 유럽화폐동맹(EMU)의 균열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연 그리스 재정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또 이에 대한 그리스 정부와 유럽연합의 해법이 지닌 문제점은 무엇인가. 향후 그리스 재정위기 사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와 같은 비상한 정세에서 그리스와 유럽 사회운동의 대안은 무엇인가. 아울러 최근 그리스 사태가 국내 사회운동에게 제시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아래에서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 위기의 전개 추이
지난 해 10월 파판드레우 신정부가 2009년 예상 재정적자를 종전의 6%가 아니라 12.7%라고 발표하며 그리스 재정위기가 가시화되기 시작됐다. 독일과 프랑스 등 EU의 중심국은 그리스의 국가부도 사태를 방지하고 유로지역의 안정을 위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지만 한동안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올해 초 그리스 정부는 2012년까지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미만으로 축소한다는 요지의 안정및성장프로그램을 제출하고 EU와 IMF의 지원을 요청했다. 금년 중 530억 유로의 자금을 조달해야 하며, 특히 4-5월중 200억 유로에 달하는 국가채무의 만기가 도래하는 그리스로서는 필사적이었다. 2010년 내로 재정적자를 GDP 대비 4% 포인트를 감축하는 것을 시작으로, 예산제도 및 공공행정 효율성을 제고하고 투자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노동시장과 사회보장제도 개선 등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실시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유럽 각국의 정상들은 3월 말, 금융시장에서 그리스의 자체 자금조달이 불충분할 경우 최종적인 수단으로 유로지역 회원국과 IMF가 공동으로 자금을 지원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물론 엄격한 지원조건을 부과하고 EU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ECB)의 평가에 기초하여 유로지역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는 단서가 부가되었다. 하지만 국제 신용등급 평가회사들은 작년 말에 이어 4월 말 다시 한 번 그리스의 등급을 낮춘 것은 물론 포르투갈의 신용등급마저 강등했다. 재정위기의 전염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유로화 가치가 최근 1년간 최저치로 하락하는 등 유럽의 금융시장은 패닉으로 치달았다.
결국 5월 초 EU와 IMF는 그리스에 총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당초 예상치의 두 배를 훌쩍 넘는 규모로, 2012년까지 만기가 돌아올 그리스 국채(800억 유로)를 모두 막고 그동안 생기는 재정적자까지 보전할 수 있는 금액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 15개 유로지역 회원국 지원액 800억 유로의 80%를 부담할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의회도 그리스 지원 방안을 신속히 통과시켰다.
그리스 정부는 EU의 구제금융 지원 합의에 앞서 세금 인상, 공무원 급여 삭감, 연금 삭감을 골자로 하는 강도 높은 재정긴축 프로그램을 제출했고, 곧이어 그리스 의회도 거센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 안을 가결했다. ECB도 그리스 국채에 대한 신용등급 한도 적용을 중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국제 신용등급 평가회사들이 그리스 국채의 신용등급을 추가로 하향조정하더라도 ECB로부터 국채를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어서 EU 27개국 재무장관들은, 유로화 붕괴의 불안에 대비하기 위해 7500억 유로 규모의 재정안정 기금 조성을 골자로 한 전방위 대책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유럽집행위원회(EC) 대출을 유럽중앙은행(ECB)과 유럽연합 국가가 보증하는 것을 요체로 하는 EU 재정안정체제(ESM) 구축 방안에도 합의가 이뤄졌다. 여기에는 기존의 EU-IMF 지원금과 별도의 700억 유로 규모의 긴급 안정화기금을 조성하는 방안도 포함됐다고 알려졌다.
ECB도 200억 유로 상당의 그리스․포르투갈․스페인 단기 국채를 매입하는 방침을 수립했다. 그동안 그리스 등은 투기자본의 공격으로 국채 금리가 급등, 국채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ECB가 국채시장에 직접 개입해서 불안정성을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 연방준비제도(FRB)도 ECB, 영국중앙은행(BOE), 스위스중앙은행(SNB) 등과 통화 스와프 계약을 체결하여 유럽에 달러 유동성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EU-IMF 지원 방안의 한계
이번 종합 대책은 독일, 프랑스와 같은 유럽연합의 중심국들과 미국의 긴밀한 공조를 배경으로 한다. 유럽 정상회의에 앞서 독일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공동 기고문을 통해 회원국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경고했으며, 같은 시점에 미국 오마바 대통령은 두 정상에게 ‘보다 단호한 조치’를 주문한 바 있다. 그리스를 비롯한 남부유럽발 금융불안을 방치할 경우 유로화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고 그렇게 될 경우 2007-09년에 이어 제2의 세계 금융위기가 촉발될 수 있다는 공동의 위기의식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긴급 국제공조 방안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듯, 5월 중순에 접어들며 국제금융시장의 패닉상태는 다소간 진정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ECB 트리셰 총재도 그리스에 대한 지원 결정은 유로존에 대한 시장신뢰 회복과 재무안정성을 보장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번 구제금융 지원 조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할지 불분명한데다 재정적자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 재정위기가 궁극적으로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우선 전문가들은 현재 그리스 재정위기를 단순한 유동성 문제가 아니라 지불능력의 문제로 보고 있다. 그만큼 그리스의 국가부채 문제는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뜻이다. 금융기관들의 분석에 따르면 2013년 그리스 국가부채 규모는 GDP의 150%로 팽창할 전망이다. 국채금리 6%를 적용하면 GDP의 9%를 이자로 지불하는 셈인데, 이는 그리스 정부 세수의 25%를 차지하는 것으로서 원천적으로 유지 불가능한 비율이다. 과거 아르헨티나 등의 채무불이행 사례에 비춰볼 때, 2013년 경 그리스가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금조달을 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EU-IMF의 지원 프로그램에 대해 ‘값비싼 도박’이라는 금융시장의 비난이 제기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리스의 부채 상환 능력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3년 뒤인 2013년 5월초까지 만기 도래하는 국가부채는 700억 유로로, 올해 그리스가 약속한 재정적자 목표를 지킨다고 해도 3년간 총 500억 유로에 달하는 누적 재정적자를 채권발행을 통해 메워야 한다. 이 경우 두 수치를 합친 것만 해도 1200억 유로로 이미 승인된 EU-IMF의 지원규모 1100억 유로를 초과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그리스가 추가적인 금융지원 없이 부채를 ‘돌려막기’ 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이러한 예상이 금융시장에 확산된다면 결국 구제금융 계획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종합할 때 이번 구제금융 조치가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부채구조를 조정하고 부채부담을 대폭 삭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 지원방안이 결정된 직후 실시된 독일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인 기민당(CDU)이 패배해 상원 내 과반수 의석을 잃었다. 이는 향후 유럽 각국이 채무불이행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에게 추가적인 혜택이나 지원을 계속 부담할 가능성이 극히 불투명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른바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취약국에 대한 재정 지원이 지원국의 국내 정치적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화폐동맹의 결함
EU-IMF 방안에 따라 그리스가 강도 높은 긴축재정을 추진한다고 해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재정긴축안은 그 자체로 노동자에 대한 사상 유례없는 공격을 의미한다. EMU 체제에 따라 자주적인 환율·통화정책을 구사할 수 없는 그리스는 결국 단위노동비용을 20~40% 삭감해 수출경쟁력을 확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 민중들의 대대적인 출혈로 이어질 것이므로 정치적 실행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 게다가 EU의 자체 분석에 따르면, 그리스가 재정긴축안을 계획대로 실행할 경우 경제성장률이 -9%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 경우 오히려 재정적자가 심화되어 이 방안은 경제적 실행 가능성도 지극히 낮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 1990년대 말 환율위기 당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구조조정을 통한 노동비용의 가치절하와 함께 자국 통화의 대대적인 평가절하를 통해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세계경제가 금융화에 따른 경기상승 국면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방안은 실행 가능성이 있었다. 반면 구조조정이나 환율조정을 통해 수출경쟁력을 확보할 여지가 극히 협소한 그리스로서는 재정긴축에 따른 경기수축 압력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세계경제는 그리스 위기의 여파로 2007-09년 금융위기에 이어 재차 경기가 하강하는 ‘더블 딥’의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려면 그리스는 EMU를 탈퇴하여 자국통화를 대폭 절하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것은 곧 유럽을 비롯한 국제 금융시장으로부터의 분리, 즉 파국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는 왜 이와 같은 진퇴양난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일까. 그 원인과 배경을 EMU 체제에 내재한 근본적인 결함, 즉 ECB의 통화주의와 ‘유럽 역내 불균형’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보기로 하자.
1970년대 초 브레튼우즈체제의 붕괴 이후 환율변동이 경제에 미치는 파괴적 효과가 지속되자, 화폐공급과 금융에 대한 탈규제를 통해 위기를 관리하고자 하는 통화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1978년 도입된 유럽화폐제도(EMS)는 회원국간 환율을 고정시킴으로써 환율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설정했다. 1992년 마스트리히트조약이 EMU를 위해 제시한 경제정책의 네 가지 수렴기준은 민족국가 화폐주권의 소멸을 의미했다(대표적인 기준은 정부의 연간 재정적자 폭은 GDP의 3% 이내, 공공부채는 GDP의 60% 이내로 한정하는 조항이다).
반면 EU에서 화폐동맹에 상응하는 재정동맹은 이뤄지지 않았다. 화폐정책에 비해 재정정책은 민족국가의 주권적 성격이 강한데다 조세제도, 재정지출 등은 국내 정치적 측면을 많이 반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내포하는 재정정책은 크게 제약됐고 회원국은 적자재정을 포기하고 균형재정의 범위 내에서 예산을 분배하는 선택지만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처럼 기술력과 생산성이 열세인 국가가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을 신축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독일 헤게모니 하 ECB의 화폐정책을 수용해야 하는 주변국들은 국내 거시정책을 모두 재정정책으로 부담하게 되었다. 화폐정책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면 적절한 금리인하와 유동성 확대정책을 통해서 부담을 재정정책과 함께 분담할 수 있지만, 이러한 정책조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내경제 여건을 고려할 때 확장적인 거시정책 수행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ECB가 긴축적 통화정책을 고수할 경우 팽창적인 재정정책을 수행할 수밖에 없어 재정적자가 확대되는 메커니즘이 확립됐다.
그 결과 EU 역내에서 수출경쟁력이 낮은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등 주변국들은 실질환율이 고평가되어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적으로 누적된 반면, 수출경쟁력이 높은 독일 등 중심국들은 실질환율이 저평가되어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적으로 누적됐다(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등 적자국의 상품수지 적자액 가운데 역내에서 발생한 부분이 90% 이상이었다). 전문가들은 “유럽 금융위기로 유로화가 10% 떨어지면 유로지역 경제는 5% 성장하고, 수출주도형 국가인 독일에게 더 높은 효과가 발생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스 위기의 전망
이러한 EMU 체제의 구조적 결함으로 말미암아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던 남부유럽 국가 등은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지출 확대 및 세입 감소로 재정 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EU 추정에 따르면, 2010년 아일랜드·스페인·그리스·포르투갈·이탈리아의 재정 적자는 각각 GDP대비 14.7%, 10.1%, 8.7%, 8.0%, 5.3%를 기록하여 적자 확대세가 지속될 전망이다. 또한 2010년 GDP 대비 국가부채 비중 역시 그리스 120%, 이탈리아 117%, 포르투갈 85%, 아일랜드 83%, 스페인 64%를 기록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ECB와 함께 남부유럽 국가에 대출을 제공한 독일과 프랑스와 같은 중심국들의 자산 부실화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남부유럽 국가들의 총대출 중에서 프랑스는 23%, 독일은 18%, 영국은 12%를 차지하고 있고, 남부유럽 국가 간 거래도 10%에 달한다. 게다가 유로지역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의 역내 교역 비중은 70% 내외로 교역의 연관성이 높기 때문에 개별 회권국의 문제가 빠르게 전이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한 위기 확산 가능성에 직면하여 현재 EU 당국은 유럽통화기금(EMF) 창설, 유럽투자은행(EIB) 기능 확대, 유로채권(Euro Bond)의 발행과 같은 중장기 위기관리체계 구축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유로지역 회원국들간의 단기적인 재정이전을 비롯한 통합 예산관리 시스템과 재정규율의 엄격한 시행을 통한 재정통합 방안도 고려되고 있다. IMF도 유럽 국가 다수의 국가부채가 위험수준에 도달했으며 시급히 재정안정성 회복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권고에 따라 현재 유럽에서는 재정위기 가능성을 경고받은 영국·아일랜드·스페인은 물론 구제금융을 제공한 독일·프랑스도 임금 및 연금 삭감, 복지 축소 대책을 줄줄이 도입하고 있다.
한편 ECB가 그동안 인플레이션을 우려해 채택하지 않았던 수량완화조치가 조만간 도입될 것이라는 관측도 제시되고 있다. 일단 현재까지 ECB는 물가안정을 핵심 목표로 삼는 ECB의 통화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하지만 ECB가 그리스 위기 대응 과정에서 담보규정을 완화하고 취약국의 국채를 매입한 것이 사실상 수량완화로 정책 운용의 기조를 전환한 것이고, ECB가 향후 6개월간 매입해야 할 국채의 규모가 무려 3천억∼6천억 유로 수준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바 추가적인 수량완화조치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ECB가 매입하는 그리스 국채가 사실상 정크본드 수준이고 유로화 가치도 계속 하락하는 추세여서 ECB의 자산이 부실화될 우려도 상당하다. 이는 그만큼 이번 그리스 위기의 충격이 막대하다는 징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도적 보완책이 EU 재정동맹체제, 다시 말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유럽의 정치적 통합으로 발전한다는 보증은 결코 없다. 오히려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 위기는 결국 EMU 체제의 균열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편으로 그리스 사태의 여파가 여타 국가로 전염될 경우, 독일 등 주요 회원국의 구제금융 부담이 점차 확대되고 EU 회원국의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하면서 금리가 급등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구제금융의 실익이 적다고 판단하고 EU가 지원을 중단하면 부실 국가들의 연쇄적인 채무불이행은 불가피하다. 다른 한편으로 EMU 체제의 유지를 위해 당분간 구제금융을 지속하더라도 ‘유럽 역내 불균형’이 근본적으로 시정되지 못할 경우, 독일을 비롯한 중심국들이 강력한 통화정책의 도입을 위해 탈퇴할 가능성이 있다. 그밖에도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는 중심국과 디플레이션 우려가 있는 주변국 간 역내 불균형으로 인해 ECB가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큰 딜레마다.
사회운동의 대안
그렇다면 그리스와 유럽 사회운동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우선 그리스 노동자운동은 최근 양대 노총 주도로 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과 거리시위를 전개하면서 정부의 재정긴축안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들은 EU-IMF 지원 메커니즘이 그리스 민중들의 임금·연금·사회복지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본을 회생시키는 조치에 불과하다며 재협상, 부채탕감, EU의 안정및성장협약의 즉각적 폐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구제금융 조치의 본질은 금융자본, 특히 EU 중심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그리스와 같은 주변국 민중의 출혈을 강요하는 ‘제국주의’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사회운동들도 그리스의 위기가 ‘마스트리히트 체제’의 모순의 산물이며 경제위기에 직면한 EU의 실패를 입증하는 첫 번째 사례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노동권에 대한 공격을 통해 수출경쟁력의 회복과 국가부채의 지불을 시도하는 EU-IMF의 해법이 비단 그리스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리스 민중들에 대한 연대를 표방하고 나섰다. 또 EU-IMF의 방안이 각국 화폐주권의 종속을 더욱 심화하고 금융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각국 정부가 도입하고 있는 재정긴축 방안에 대해 저항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럽 사회운동은 실패한 EU 모델을 바꾸고 ‘또 다른 유럽’을 건설하기 위해 어떠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먼저 “유럽 민중들은 위기비용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연대 유럽’을 위해 단결하자!”라는 공통의 구호에 주목할 수 있다. 이 구호는 현재 유럽 각국 정부의 공공지출 삭감 방안이 위기를 촉발시킨 금융자본을 위해 노동자계급에게 위기비용을 전가하는 메커니즘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일례로, 지난 3월 말 유럽노조연맹(ETUC)과 같은 유럽 노조들과 유럽좌파당(ELP)과 같은 정당들은 유럽공동행동을 통해, 유로화의 안정성을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 조치가 필요하다는 EU-IMF, 각국 정부의 제안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리고 이들은 노동권과 권력 및 소유의 민주화 없는 위기 탈출 전략은 기만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면서 유럽 노동자들의 연대를 호소했다.
다음으로 유럽 사회운동들이 이번 위기의 원인으로 금융화와 이를 지지하는 국제기구들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는 데 주목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ATTAC)의 경우, 금융거래에 대한 과세와 함께 ECB의 구제금융 혜택이 금융기관이 아닌 유럽 시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 각국의 정당들도 IMF의 구제금융이 ‘자본가의 이익에 복무하고 노동자의 실업과 빈곤을 증가시킨다’고 비판한다. 또 ECB의 대출은 ‘은행을 구원하지만 국가를 구원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재정위기에 몰린 국가의 정부채권이 금융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민간 신용등급 평가회사가 아닌 유럽차원의 공적 신용등급 평가회사를 설립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또한 ‘유럽 역내 불균형’이 수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바닥을 향한 경쟁’에 의해 상호 강화되어 왔다며, 유럽 수준의 초민족적 단체교섭을 활성화할 것을 주장하는 유럽 노동자운동의 흐름에 주목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EU의 ‘확대경제가이드라인’은 임금인상을 생산성 성장 이하로 억제하고 지리적·직종별로 임금을 차등화하는 내용을 명문화했고, ECB는 회원국이 임금 억제 정책에서 이탈할 경우 통화수단에 제한을 가하는 제재를 부과했다. 유럽의 노조들도 1980년대 이후 대체로 일정한 조정기를 거쳐 신자유주의적 ‘경쟁 지향 코포라티즘’으로 수렴됐다. 민족국가 수준의 사회협약과 함께 기업 수준에서는 양보협약-경쟁적 기업동맹을 통한 ‘조직화된 분권화’가 일반화되었다. 유럽 차원에서는 초민족적 수준에서 자본의 구조적 우위를 강조하는 ‘사회적 대화’를 통한 상징적 유럽 코포라티즘이 작동했다. 이때 개별 노조들의 대응은 ‘국가 대 국가’나 ‘기업 대 기업’의 경쟁으로 귀결되어 임금 및 노동조건 하향 압박을 강화하는 역설에 처하곤 했다. 장기 지속될 경제위기 아래에서 노동자의 민족적 분할 및 내부 노동시장 경쟁 압력도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바, 수출경쟁력을 위한 출혈적 ‘임금덤핑’을 지양하기 위한 유럽 차원의 공통 단체교섭 지침을 채택·적용하는 것과 같은 노동자 국제연대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유럽, 나아가 금융화한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은 그리스 위기 이후에도 줄곧 유사한 방안을 강요할 것이다. EU의 정치·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유럽 사회운동은 비상한 각오로 ‘또 다른 유럽’을 구체화하면서 대안적 정치·사회적 세력으로 부활해야 한다. 그들의 표현대로 ‘오직 유럽 민중의 저항만이 근본적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의 상황은 국내 사회운동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2007-09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이어 그리스발 위기가 확산되면서, 결국 세계경제가 다시 한 번 침체에 빠지는 ‘더블 딥’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위기비용을 전가하려는 지배계급의 공세에 맞서 계급적 단결을 추구하면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민중적·국제적 대안을 구체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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