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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미국 노동계급과 민주당의 불임의 결혼
1933년 브리그스 자동차공장 파업에서의 주된 두 가지 요구는 평조합원이 통제하는 공장위원회를 회사측이 인정할것과 작업반장과 생산라인 감독의 권한을 제한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7년 후, 자동차노동자연합(UAW)과 제너럴 모터스(GM)가 맺은 ‘디트로이트 협정’은 평조합원이 직접적 노동과정에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무산시켜 버리고 대신 이를 생산성 증가에 따라 임금과 각종 부가급여를 인상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흔히 새로운 산별노조가 점차 관료주의화한 탓으로 치부되어왔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산별노조가 관료주의의 틀 안으로 화석화되는 과정과 조합원대중 전투성의 내용과 궤도가 변화하는 과정 사이에 존재하는 좀 더 깊고 다면적인 변증법적 관계를 짚어내지 못했다. CIO가 이전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모순적인 것이었다. 이는 한편으로 이전 시기들에서 누적된 패배(곰퍼즈식 직능별 조합주의, 가톨릭 노동계급과 민주당의 강요된 결합 등)와 다른 한편으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과 노동기사단이 지펴놓은 꺼지지 않은 불씨를 물려받았다. 여기서 CIO의 모순적인 가능성들과 피규정성들을 좀 더 신중하게 평가려면, 이들 사이에 형성된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1. 브리그스 파업에서 플린트 파업까지
CIO 형성기에 관한 역사에서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 다음 사실을 우선 거론하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의 기바니 된 전투적인 노동자의 대부분은 1900-20년 ‘신新이민’의 2세인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노동조합운동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뉴딜정책의 선거보루로 동원되어갔다. 이들은 대부분 급격한 도시화의 향연 속에 살면서도 빈민계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더 이상 부모의 언어나 농민적 미신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직업적으로는 반(半)세습적인 미숙련 육체노동의 질곡에 동결된 채 도시의 빈곤과 시대의 혹독함을 감수해야만 했던 이 2세 노동자야말로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둘째, 1933년 산업노동자의 봉기가 시작되었을 때, 봉기의 주된 관심은 상당히 비(非)경제주의적인 요인들이었다. 당시 미국의 전형적인 공장은 능률적인 공업기술과 노골적인 폭력이 결합된 일종의 소규모 봉건국가로서, 파시즘국가의 노동부장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당시 노동자들의 요구는 작업장에서 나타는 전횡에 대한 반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산업유형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띠었다. 예컨대 버팔로 철강공장에서는 작업반장이 관장하는, 셰이프업(지원자들이 매일 아침에 작업장에 나와 일렬로 늘어서면 조합 혹은 회사의 간부가 일거리를 줄 사람을 선정했음)이라는 고용방식이, 자동차노동자들에게는 조립라인의 무차별적인 속도증가가 불만사항이었다.
셋째, 사실 원래의 CIO는 중요한 재정자원과 지배권력 고위층의 우군을 확보한 반대파 노동조합 관료들의 동맹으로서, 산업별 공장위원회와 반란적인 지부조합을 중심으로 이미 존재하는 대중운동을 말아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반란은 노조의 공식 지도자들의 자비 덕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에서는 공장의 핵으로 심어놓은 혁명적 기간요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들로 궝송된 비공식적인 그룹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2세 반숙련노동자들의 전략적 그룹들과 굳건한 동맹을 맺기 시작했으며, 이 전략적 그룹들은 다시 비공식적인 작업장 그룹들과 민족별 연계조직망 등 숨어 있던 역량을 동원했던 것이다. 이런 흐름속에서 전국적으로 AFL의 지부설립 허가 신청이 쇄도하는 등 이 시기에 미국 노동운동의 대중적 참여도가 가장 높게 올라갔다. 그런데 이는 AFL을 지배하고 있던 허친슨, 프레이, 월 등 우익 삼두체가 대표로 있는 직능별 ‘동업인협의회’에 몹시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이들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새로운 조합원을 당분간 ‘연맹지부조합’에 강제로 가입시켜(지역본부에 가입시키지 않고 연방의 전국본부로 직접 가입시킨다는 의미) 기간산업의 조직화운동에 대한 독재적 통제력을 그린(William Green)위원장이 임명한 AFL의 ‘전문적인’ 관리들에게 맡긴다는 방침이었다. 이후 AFL은 평조합원들의 반란을 와해시키고자 온갖 획책을 벌이고, 이로 인해 전투적인 평조합원들과 지도부 사이에 빈번한 불화가 발생하여 이들이 AFL을 대거 탈퇴하도록 만든다.
1936-7년의 1년간, 자동차와 고무 및 전기 산업의 공장원회들은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창조적인 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에서는 매우 소중한 두 가지 자원이 활용되었는데, 그 하나는 앞세대의 세계산업노동자연맹원들이 개척한 평조합원의 단결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연좌파업과 대중적인 피켓이었다. 또 하나는 좌파, 특히 공산당원들이 제공한 양질의 전략적 지도 및 공장간 조정역할이었다. 이 시기에 세계산업노동자연맹원들로부터 유래한 고도의 참여주의적, 평등주의적 투쟁전통은 조직, 규율, 전략을 강조한 미국 레닌주의의 최상의 요소들과 결실있는 종합을 이루었다. 특히 연좌파업은 회사재산이라는 성역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한편 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집단적인 힘을 앞서 보여주는 전술이었다. 당시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재산권보다는 인권을 우위에 두는 집단적 풍토가 강할 뿐 아니라 회사재산에 대한 존중심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부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루이스와 힐먼이 이끄는 분리주의파 조합관료들은 루이스 자신의 광산노동자연합(UMW)등을 이용하여 대중적 전투성의 급류를 막으려 들었다. CIO 간부진은 뉴딜정부의 관리들과 손을 맞잡고 ‘신뢰할 수 있는’ 협상안을 권장하는 한편, 평조합원들의 맹렬한 연좌파업 불길을 진압하려 했다. 이들의 전략이 성공하는데에는 두 가지 정치적 요인들이 작용했다. 그것은 첫째, 루이스는 필수불가결한 재정자원을 UMW의 기금에서 마음대로 인출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둘째, 더욱 중요한 요인은 CIO 지도부의 AFL탈퇴가 로즈벨트의 운명을 건 정치적 연합의 재편과정과 맞물려 일어났다는 점이다. 로즈벨트는 NRA 법조항을 북부 경공업에는 다소 친노조적으로 해석하고 대기업에는 중공업부문에서의 NRA 법조항 해석권을 양보함으로써 모순적인 동맹의 균형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사업장에서 평조합원들의 봉기가 계속 증가하자 기업들은 뉴딜에 대한 지원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한편 루이스와 힐먼은 평조합원들을 자기 쪽 대오로 끌어모으기 위해서 로즈벨트의 카리스마적 후원과 정치적, 사법적 지원이라는 영향력을 필요로 했다. 이렇게 되자, CIO는 로즈벨트의 지지세력을 동원하고 민주당파 은행가와 기업가의 이탈로 생긴 선거자금의 결손을 메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노동자무당파동맹을 창설했다. 로즈벨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노동부와 전국노동관계위원회에 친CIO 경향의 자유주의자들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공산당이 사회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뉴딜과의 동맹에 가담함으로써 이 정략결혼은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2. 무산된 노동자정당 건설운동
계급연대의식은 선거국면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북부 유권자들이 전통적으로 보여준 민족적, 종교적 선거패턴이 물러나고 노동자와 자본가가 각각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확연히 양분되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이 재편은 민주당의 활동기반을 확장함으로써 자본가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엄청나게 강화하는데 기여했으나, 다른 한편 그것이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통일시키는 경향도 갖고 있었다. 30년대 좌파는 CIO의 부상에서 대안적인 정치운동이나 노동자 지향적 제3당의 출현 가능성을 기대했다. 정치적 독자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자동차, 전기, 피복 노동자들의 지부조합들은 노동자정당 구상에 지지표를 던져서 루이스와 힐먼을 당황하게 했다. 연좌파업의 물결이 휩쓸고 간 후인 1937년 8월에 실시된 갤럽주사를 보면 적어도 전체인구의 21%가 전국적인 농민․노동자당의 결성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런 시도는 왜 실패하였는가? 주로 제시되는 설명은 첫째, 뉴딜정부가 ‘좌경’선회를 감행함으로써 반정부 정치운동의 거센 열기를 가로챘기 때문이라는 것과 둘째, 로즈벨트가 CIO를 암묵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산별노조운동의 구세주로 행세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1935-7년의 당면정세와 로즈벨트와 CIO간의 밀월기를 넘어서 일반화할 경우 설득력이 크게 줄어든다. 1938년 가을 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참패한 이후 뉴딜정부는 자신의 외교정책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려는 조급한 욕망에 사로잡혀 노동자에게 더 이상의 개혁안이나 새로운 양보조치를 허용할 수 없었다. 1937년 후반 SWOC(철강노동자조직위원회)에 대한 무력진압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뉴딜 주지사들의 파업분쇄행위가 널리 확산된 점을 고려한다면 CIO가 ‘국가권력과 근본적으로 맞서는 단계’를 결코 겪은 적이 없었다는 주장은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AFL의 소생
제3당 건설 시도가 좌절된 데에는 1937~38년에 AFL과 CIO사이에 일어난 내란 때문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우익 노조세력이 당시 공세로 전환한 자본가들과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단호한 방식으로 동맹하여 놀랄 만한 소생을 한 결과였다. AFL은 1937년 전국대회에서 정치적 배서(背書)정책을 채택함으로써, CIO에 동조적인 어떠한 후보자에게도 반대할 수 있게 되었다. AFL의 이 같은 형제살해광증은 2차 세계대전 전야에 이르러서는 노동-자본-국가 사이의 정치적 연합을 놓고 협상할 가능성마저 배제시킬 정도로 자기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AFL의 우경화에는 AFL조직원 중 상당수가 토박이-개신교 숙련공 및 ‘구이민’ 조합원들의 상대적인 보수성에도 큰 책임이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중간계층의 상대적인 사회적 비중, 중간계층 하부와 노동계급 상부 사이의 상호침투성이 모두 유달리 높았는데, 이것이 노동계급이 쁘띠부르조아지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는데 큰 기여를 했다. 언론매체 등을 통해 부추겨진 반급진주의적 물결은 CIO를 더욱 위축시켜 루이스와 힐먼을 로즈벨트와 민주당 자유주의파와의 연계에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했다.
공산당도 점차 로즈벨트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이 시기에 약 7만 5천명의 당원과 50만명 이상의 외곽세력을 꾸리고 있어서 대중적인 영향력 면에서는 절정에 달했지만, 그 성장의 대부분은 사무직,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태계 2세 노동자들이 당으로 몰려든 덕분이었다. 즉 공산당은 점차 탈(脫)프롤레타리아트화 되고 있었던 것이다.
3. 제2차 세계대전: 살쾡이파업과 인종차별파업
1941년 AFL로부터 주도권을 되찾은 CIO는 광산노조가 유니온 숍을 따내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불붙은 대중의 전투력은 진주만 공습으로 갑자기 끝장났다. 또한 전쟁의 도래는 노동인구의 편성과, 경제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키는 촉매가 되기도 했다.
첫 번째 변화는 수백만의 농촌이주민, 여성, 그리고 흑인이 산업노동시장에 들어감에 따라 ‘전례없는 노동계급 재편’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북부로 이주한 흑인인구의 프롤레타리아화가 진행되었고, 수백만의 여성이 종래에는 남성이 독점했던 대량생산산업과 중공업부문의 요새에 처음으로 진입했다. 둘째로 전쟁은 조직노동, 자본 및 국가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투쟁을 통해 재편하는데 촉매역할을 했다. 지도적인 개혁가들이 행정부의 한직으로 좌천되는 한편 워싱턴의 경제관계 장군들이 월가의 꽃이 됨에 따라, 이전에 뉴딜을 이탈했던 기업자본의 주요 파벌들이 이제는 뉴딜과 친밀한 협조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차대전때와는 다르게 장군들과 제독들은 전쟁물자 청부업자들 및 그들의 상시적 대리인들과 새롭고 상시적인 공모관계를 맺었다. 즉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위한 정치적․경제적 요소들을 융합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유지되려면 일정한 노동생산력과 산업평화가 유지되어야 했다. 이에 CIO에서는 스스로 기꺼이 생산력 향상을 이루면서도 조합이 공장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노사협의회’ 결성을 제창했다. 그러나 CIO의 정치적 영향력은 AFL과의 갈등 이후 변변치 못한 상태였기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대신 준-유니온숍이라 할 수 있는 조합원 유지조항과 조합비 일괄 자동공제제도를 양보받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과 실질임금의 감소로 대중의 불만이 계속 누적되어 갔고, UMW노동자를 시작으로 반란의 물결이 일었다. 물론 CIO관료들은 전투적인 노동자를 고립시키려 했으나, 제2계층의 지부조합 지도부들이 점차 평조합원의 불만을 수렴하여 파업중지서약에 대한 저항을 결집해 냈다. 이는 바로 노동자정당에 대한 새로운 열망으로 전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투쟁을 조정하고 다양한 종류의 독자적 정치활동을 벌일만한 기간요원은 부족했다. 그나마 공산당이 그런 자원이 가장 풍부했지만, 그들은 이미 민주당의 편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또한 전시에 노동자 전투성에 대한 좌파의 영향력이 약해짐으로써, 백인 노동계급의 인종차별주의는 더 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실제 전시의 노동조건과 파업중지서약에 대한 반란은 새로 들어온 흑인노동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공격과 중첩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게다가 CIO가 UAW지도자인 프랭컨스틴을 디트로이트 시장에 앉히려 했던 선거운동은 CIO가 공정소용실행위원회에 찬성한 데 항의하여 프랭컨스틴에게 등을 돌린 백인 노동자들로 인해 무산되기도 했다.
4. CIO의 정치활동위원회
CIO와 민주당의 정치적 동맹은 1936년 노동자무당파동맹의 결성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둘의 진정한 제도적 연합은 CIO의 새로운 선거운동기구인 정치활동위원회(PAC)가 출범하는 1944년에 비로소 상설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민주당측은 1942년 의원선거에서 중서부 의석을 대부분 공화당에 뺏기면서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이에 로즈벨트의 민주당은 남부와 서부의 산업중심지들에 민주당의 헤게모니를 확장시키려 하였다. 한편 CIO측에서는 AFL-보수주의 동맹이 산별노조를 완전히 격퇴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조직 내부에서 노동자정당 건설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집행위원회는 CIO의 본질적인 정치적 문제가 조합원들을 충분히 정치화시키지 못한 데 있다고 보았다. CIO가 PAC를 설립한 목적은 새로운 ‘CIO 투표인’을 창출하여 그 투표인집단과 민주당 뉴딜파의 유착관계를 영국의 노동당 혹은 유럽의 사회민주당의 경우처럼 자연스럽고 믿을 많나 관계로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CIO는 PAC를 건설하는데 엄청난 힘과 자원을 투입하였고 1944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데 PAC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이에 대해 CIO에게 돌아온 대가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CIO는 당내 기득권의 등쌀에 밀려 부통령 재지명에 나선 (CIO의 열렬한 지지자인 진보주의자) 월리스에 대한 지지를 꺼렸고, 결국 캔자스시의 부패한 팬더개스트파의 후원을 받은 트루먼 상원의원을 암묵적으로 승인하였다.
트루먼 시대에 대기업이 취한 전략은 그전의 ‘미국적 방식’처럼 대량생산산업체의 노조를 송두리째 격퇴시키려 하기보다는, 노동과정에 대한 경영자측 통제권의 복원과 단체교섭을 조화시킨 제도적인 굴레 속에 산별노조들을 묶어두는 것을 주축으로 하였다. 일선기업들은 ‘산업민주주의’를 요구하는 CIO의 간청을 거부하고, 임금에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함으로써 고의적으로 장기간의 소모적인 파업을 유발하여 기층노동자들의 전투력을 빼놓는 투쟁계획을 채택했다. 실제로 1945년 늦가을 파업이 발생했을 때, 그 규모는 미국역사상 가장 거대한 것이었으나, 평조합원의 주도력은 지극히 미미했다. 이는 파업을 이용하여 조합원들의 투쟁열기를 빼내면서 동시에 전국조합 지도부의 권력을 더욱 중앙집중화하려는 용의주도한 전략이었다.
게다가 태프트-하틀리법은 CIO의 급진성을 제거하고 노동자연대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들을 합법적으로 탄압하려는 고용주측의 목적을 성문화하였다. 이에 CIO 지도자들은 한편으로는 태프트-하틀리법에 도전하여 산별노조를 거리로 끌고 나와야 할지 말지를, 다른 한편으로는 월리스를 추종하는 인민전선적 물결(이는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제3당운동으로 되어가고 있었다)을 지지해야 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둘 모두를 거부하고, 오히려 트루먼 및 전국민주당과의 취약해진 동맹을 다시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CIO가 급속히 확대되는 행정부의 반공주의 성전에 필수적인 구성인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자유주의적인 민주당 대통령이야말로 1948년 선거에서 CIO의 지상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궁극적으로 전후 미국 노동계급에 새로운 문화적 응집력의 토대를 창출하는 것은 전시 민족주의의 발흥이었다. 종전에는 ‘아메리카주의’라는 용어가 일련의 토박이주의 운동의 슬로건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 새로운 민족주의는 백인 노동계급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며 더욱이 강력한 물질적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강력한 물질적 지원에는 상시적 군수경제의 고용창출 능력은 물론이고, 좀더 일반적으로 보면, 미국자본이 지배하는 전후 세계경제의 구조에서 미국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새로운 위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민족주의를 열성적으로 전파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진보주의자’들과 인민전선 좌파들도 있었다. 이들은 로즈벨트의 전시 지도력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였다. 특히 1942년에는 서해안에 사는 일본인 전부를 소용소에 ‘소개(疏開)’하는 계획을 실제로 지지하기도 했다.
적군(赤軍)의 동유럽 입성은 CIO조합원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슬라브계 및 헝가리계 이민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CIO 초기 조직화 과정에서 영웅적인 역할을 했고 사회주의 영향력의 가장 중요한원천의 하나였으나 각각의 민족공동체에서 우익적․반공주의적 민족주의가 다시 거대하게 불붙자 광신적 반공주의와 새로운 민족적․애국적 합의속으로 편입되어갔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가톨릭교회와 가톨릭 노동계급의 일상적인 삶에 뻗어들어간 이 교회의 수많은 촉수들(미국가톨릭노조ACTU와 콜럼버스기사단 등)이었다. 그런데 CIO의 지도부는 슬라브계 노동자와 가톨릭 노동자의 표를 되찾기 위해서는 마셜플랜을 비롯한 트루먼의 반공주의적 대외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때, CIO주류 조합들 대다수가 사실상 태프트-하틀리법의 반공주의 조항들을 이용하여 좌파가 이끄는 다른 CIO조합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반공주의가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와 혼합되면서, 철강노조의 백인지도부는 평조합원 광부들에게 겁을 주고 흑인 CIO 노조원들이 투표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5. 대차대조표
1952년, 아이젠하워가 민주당을 꺾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PAC위원장인 잭 크롤은 CIO는 민주당을 위한 어떤 값비싼 노력도 아끼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민주당과 고용주를 대하는 것과 다름없는 입장에서 협상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크롤은 특히 반(反)노조적인 ‘일할 권리’(right to work: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는 권리, 즉 오픈 숍을 의미한다)법안에 대한 ‘남부 이반파 민주당의원’들의 지지를 들었다. 이렇게 민주당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던 것에는 1>노동자의 단결 2>정치제도의 계급적 재편 3>소신있는 ‘CIO투표인단’ 이라는 요인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첫째, 급격히 불어나는 여성 사무직 프롤레타리아트와 남부 노동자 전체로 노조조직을 확대하지 못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새로운 계층화와 분절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둘째, 초창기 CIO의 강력한 연대의 원칙이 점차 ‘신형’의 실리적 조합주의에 밀려났다. 직능별조합의 배타주의가 점차 강화되었고, ‘최저정액(flat rate)'을 따내기보다는 일정한 인상률을 얻어내는 임금협상 등의 관행이 확립되었다. 게다가 1938년 이후에는, 미국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양당의 합의를 유지하는 일이 사회입법이나 정치개혁의 절박성보다 더 우선적이었는데, 노동조합과 그 자유주의 동맹자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포기하고 사회복지보다는 전지구적 반공주의를 우선시하는 방침을 정당화해주었다.
남부 대중의 투표권 쟁취야말로 민주당을 재편하고 의회에 자유주의자-노동자 다수파를 공고히하는 데 관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CIO는 체계적인 탄압과 내부의 냉전적 갈등에 직면하여 ‘남부공작’을 포기하였고, 40년대 후반에는 전국을 휩쓴 반동적인 인종차별주의의 물결에 더욱 심한 타격을 입었다. 노동운동과 흑인운동이 상호결합하지 못한 것은 더 운동 모두에 황폐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마지막으로 노조투표인단 문제가 있다. PAC의 목표는 CIO 조합원들을 정치화하여 신뢰할 만한 훈련된 유권자단을 창출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민주당과의 동맹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아주 단기적인 노동자의 이익조차 대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CIO자체가 노동운동의 독자성을 외면한 채 의회로비활동에 전념하여 평조합원의 전투성을 스스로 해체하고 말았다. 역설적이게도 노조 관료들에게 조합의 진정한 정치적 영향력은 궁극적으로 생산현장에서 대중활동을 동원하고 유지하는 능력에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태프트-하틀리법의 통과에 맞서 투쟁하자고 주장했던 이는 존 L. 루이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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