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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01
    [발췌독] <에코페미니즘>(반다나시바 & 마리아 미스)
    구르는돌
  2. 2009/06/01
    이명원, <말과 사람>(2)
    구르는돌

[발췌독] <에코페미니즘>(반다나시바 & 마리아 미스)

예전에는 산모 그리고 산모와 아기 간의 유기적 통일성에 있던 초점이 이제는 의사가 통제하는 '태아라는 결과물'에 맞추어진다. 여성은 자궁은 활동력 없는 용기로 환원되었고 여성의 무지와 더불어 여성의 수동성이라는 관념도 조작되었다. 태아와 여성 간의 직접적인 유기적 결속은 여성을 훌륭한 어머니로 교육시킬 전문지식을 독점적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남성과 기계에 의해 매개되는 지식으로 대체된다.  (42-43쪽)

 

 

노동이 비노동으로 정의될 때, 가치는 무가치로, 권리는 무권리로, 그리고 침략은 개량으로 정의된다. '개량된 종자'와 '개량된 태아'는 사실상 '점령된' 종자와 태아이다. 사회적 노동을 자연상태로 규정하는 것이 이 '개량'의 본질적 요소이다. 이것은 다음의 세 가지를 동시에 획득한다. 1)그들이 착취하는 생상물의 원소유자의 공헌은 모두 버정하며, 그들의 활동을 수동적이라 치부함으로써 이미 사용되고 개바된 자원을 '사용되지 않고' '개발되지 않은' '버려진' 자원으로 변모시킨다. 2)착취를 '개발'과 '개량'으로 해석함으로써 '개량'했다는 주장에 근거하여 절도를 소유권으로 바꾼다. 3)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이전의 사회적 노동을 자연으로 정의하고 따라서 아무런 권리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민중들의 관습적, 집단적 용익권을 '해적행위'와 '절도'로 바꾼다.

아메리카 땅을 원주민들에게서 뺏는 것에 대해 토머스 모어 경이 적용한 논리에 따르며, "누구라도 쓸모없이 비어 있는 땅을 취할" 때 그 몰수는 정당화된다ㅏ. 1889년 로우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정착민과 개척자는 그들 편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저당성을 갖는다. 그들이 없었던들 이 거대한 대륙은 오로지 지저분한 야만인들을 위한 사냥금지구역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49쪽)

 

 

 

"배의 맛을 알려면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즉 입에 넣고 씹어봐야 한다." (마오쩌뚱, 1968)

 

 

 

최근의 생식기술과 유전공학은 지금까지 인간 개체, 한 사람 한 사람을 폭력적인 침략으로부터 지켜주고 한갓 연구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던 최후의 경계까지도 무너뜨렸다. 이것은 특히 생식기술의 주된 연구대상인 여성들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주체와 대상, 인간과 비(非)인간을 가르는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이냐는 질문은 과학 내부에서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적 패러다임은 과학적인 충동에는 한계가 없으며 추상적 지식에의 탐구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리라는 신조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연구과정 안에서는 어떠한 도덕적 간섭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스스로 윤리적인 질문에 답변할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 도한 보통의 시민이요 남편,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에 관한 윤리적인 질문들과 갈수록 더 많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개 이 문제를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즉 허용된 것과 허용되지 않은 것을 가르는 선을 어딘가에 새로인 그음으로써 해결한다. 이는 곧 무엇이 주체디고 무엇이 객체인가에 대하여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비인간인가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그들이 새로운 정의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방법의 한 예가 새로운 생명윤리학자들이 태아연구라는 까다로운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태아연구는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태아연구를 금지할 것을 요구한다. 영국에서는 워녹위원회와 자원검열국이 이 문제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발견했다. 그들은 임신한지 2주 후 생명의 시작으로 보았다. 2주 이전에는 태아가 아니라 전-태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태아 시기에는 연구가 가능해진다. 명백히, 그저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가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이 정의는 생식기술을 규제하려는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여졌다. 과학자들과 의료재단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태는 명백하다. 즉 생식기술, 특히 IVF공학이 성공하려면 더 많은 태아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모나시 대학의 생명윤리학자 헬가 쿠제와 피터 싱어는 정의를 내리는 능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들에게 2주 된 태아는 단지 '양상추'(lettuce)일 뿐이다. 그들은 호모 싸피엔스 종과 인간 개체 사이에 구별을 짓거나 선을 긋는다. (...)

쿠제와 싱어에게 2주된 태아는 "고려할 필요가 잇는 주체"가 아니며, 다라서 연구가 허용될 뿐만 아니라 남아도는 태아는 폐기하거나 인공적으로 낙태시킬 수도 있다. 그들은 경계선을 인간개체에 더 가깝게 설정하여 태아가 고통을 느낄수 있는 시기, 즉 중추신경계가 발달할 이후의 시기를 자신들의 정의로서 택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 시기가 18~20주경이 될 것이라 본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한시간을 워녹위원회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월러위원회가 설정한  현재 14일보다 한참 더 늦추어 잡을 것을 주장한다. 그들은 태아란 여성의 일부이며 여성과의 공생관걔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점은 어디서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최초의 분리는 여성과 태아의 분리이다.

생명윤리학자들에게 유전공학 및 생식기술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다만 정의(定義)의 문제에 불과하다. 과학자들은 주로 정의내리는 행위를 통해 폭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직접적인 폭력에서 겉보기에는 깨끗하고 순수해 보이는 구조적 폭력으로 변모했다.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이러한 정의의 힘이야말로 바로 나찌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특히 정신장애자들을 상대로 연구를 행한 과학자들이 도덕적 제약을 무시할 수 있게 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람들은 대상으로 기본연구를 행한 과하갖들은 정신장애자들이 비인간이거나 인간 이하라는 정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비인간으로 정의되느냐는 것은 권력의 문제이므로 쿠제와 싱어가 내린 인간의 정의(이성적, 자기인식적, 자율적임)는 권력의 조작에 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성 역시 오랫동안 이성적이며 자기인식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떠올리게 된다. (67-69쪽)

 

 

 

 

착취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체제에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한 것이다." (91쪽)

 

 

 

경영자, 기술관료층이 최근 들어 자주 사용하는 언어는 여성을 아동의 수동적인 '환경'으로 묘사하거나 '인구폭발'의 주범인 '폭탄'으로 묘사한다. 이 두 경우에서 자녀의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의 생명은 어린이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통제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어머니의 자궁은 아이의 '환경'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상대적으로 보호받는 환경에서조차 태아는 완전히 보호받지 못한다. 아기의 건강상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잇는 어머니의 건강이 '태아환경 내의 한 요소'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아기 관계를 해체 하는 비슷한 관점이 작업장의 환경위험에 대처하는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태아보호 정책'은 임신한 (혹은 임신을 원하는) 여성을 위험지역에서 내보냄으로써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보호'한다는 것으로, 고용주들은 위험한 생산에서 초점을 옮길 수단으로 이를 활용한다.

극단적인 경우, 여서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고 식탁에 올릴 음식을 얻기 위해 불임수술에 동의하기도 한다. 더 전형적인 사례에는 여성들의 생리주기를 감독하거나 고용하기 전에 유산을 하게 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린 넬슨이 말한 대로 "'오염을 가정하고' 작업장 재배치와 산부인과적 처치를 받기란 너무 쉬운 일이지만, 이것들은 병 자체가 아니라 증상에 대한 대응일 뿐"인 것이다. (114-115쪽)

 

 

 

 

독일에서 열린 유전공학에 대한 공개토론회에서 유전공학 분야의 한 선도적인 연구자는 이렇게 말햇다. "나는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특정 기술이 위험한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개발하고 응용해보아야죠. 그런 다음에야 민주적인 원칙에 따라 이 기술을 사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관해 공적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원자력의 어ㅟ험을 알기 위해서는 원자폭탄을 만들어서 폭파시켜봐야 한다는 얘기이다. 유전공학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펼 수 있다. 많은 과학자들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연구가 도덕적인 고려나 사람들의 우려와 정서, 특히 정치가들의 자금규제로 인해 방해받고 있으니, 윤리와 도덕은 연구가 완료된 후 그것을 응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겨날 때나 되어서야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거이다. 실제로 윤리위원회는 그후에느 생겨난다. 하지만 최종결정을 내리는 것은 정치가들이다. 다른 한편 이들은 오염허용치 등의 어려운 윤리적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 과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사실상 과학자나 정치가는 특정 기술에 투자할 돈이; 있고 이윤을 위해 그것을 개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122쪽)

 

 

 

 

오리싸의 해안지대에서는 발리아빨(Balliapal) 부족이 7만명의 부족민을 그들의 비옥한 고향당에서 몰아낼, 국립 로켓시험지구 설정에 저항하고 있다. 반대자들은 되풀이해서 그들과 땅의 유대가 시험지구에 대한 저항의 근거라고 밝히고 있다. "땅과 바다는 우리 것이다. 목숨은 내줄 수 있어도 신성한 어머니 대지는 내줄 수 없다." 그들은 보상금 제안도 거절했는데, 보상금으로 발리아빨 농민들을 수세대애 걸쳐 보살피고 먹여살린 땅과의 깨어진 유대를 보상할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리야(Oriya)의 시인 브라즈나트 라이(Brajnath Rai)가 쓴 대로이다.

 

수마일이나 펼쳐진

코코아와 캐슈 농장.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한

비틀 덩굴이

갈색 모래카펫 위에

녹색의 예술적인 무늬를 그렸다.

고구마, 땅콩

머스크 멜론 덩굴이

당신의 먼지 낀 땅을

변치 않는 녹색으로 장식했다.

이것들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번창한 삶에 대한  기운찬 희망을 주었다.

읠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삶의 영원한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오늘, 갑자기

권력에 미친 사냥꾼의 탐욕스러운 눈이

당신의 녹색 몸을 발견하고는

조각조각내고

신선한 붉은 피를 맘껏 마셔버렸다.

저주받은 사냥꾼은

내키는 대로

당신의 가슴을 겨냥하여

불타는 미사일을 발사했다.

 

(133-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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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말과 사람>

얼마 전에 YES24에서 벌인 이벤트 <사회과학 출판사 응원하기>에 당첨되었다.

사실 내가 응원한 책은 직접 읽어보지도 않은 책(김원의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인데, 재수도 좋게 YES24측에서 잘 속아주셔서 ㅋㅋㅋㅋ 이매진 출판사의 책을 공짜로 5권을 받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을 읽어보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방대한 분량이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서 집 근처 도서관에서 2번이나 빌려놨는데도 한번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뭐 여튼간 그렇게 해서 받게 된 책은

1.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2. 우기동 외, <행복한 인문학>

3.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

4. 이명원, <말과 사람>

5. 여러 만화가들(ㅋㅋ), <악! 법이라고?>

 

우선 1번 책이 가격이 2만원을 넘어가는 대작인지라, 거의 감계무량 수준... ㅋㅋㅋ 그러나 지금 당장 읽기에는 부담되고... 일단 4번부터 건드려 봤다.

 

 

이명원씨는 풍선인형이 맨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하던 사람이라 대체 어떤 인물인가 했는데, 얼마전에 문화과학에서 <바리데기>에 관한 평론도 그렇고, 여러 글들이 참 매력적인 사람이라 생각해서 <말과 사람>에도 쉽게 손이 갔다.

 

물론 이명원씨의 개인저작이 아니라 이문열, 조정래, 백낙청, 김민수, 김상봉, 김종철 등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을 만나 인터뷰 한 내용을 담은 거라 이명원씨 개인의 생각뿐만 아니라 이들 지식인의 삶과 사상에 대해 더욱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튼 그래서, 여기다가는 인터뷰 내용 중 인상깊은 부분만 좀 담아본다.

아, 그러기 전에 이들 6명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밝혀보자면....

 

1) 이문열 : 역시 구제불능인 것 같긴 하지만, 그의 불평대로 나도 그의 최근작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니, 인터뷰에서 주로 언급된 <호모 엑세쿠탄스>라는 책 부터 읽어보고 제대로 평가해 봐야 겠다. 그의 말대로 한 사람의 작가를 '이미지'로 작살내는것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으니....

 

2) 조정래 : 인터뷰 내용이 너무 싱거웠다. 신자유주의가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하는 행위라니... 별로 대단한 얘기도 아닌 것을 너무 심각하게 얘기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3) 백낙청 : '진보가 통일문제에 너무 지적으로 태만하다는 데에는 동의하나, 그의 방식으로 통일을 고민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변혁적 중도주의'라니... 이건 뭐 좌파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4) 김민수 : 이 사람은 잘 몰랐는데, 아주 매력적인 지식인이란 생각이 든다. 도시 디자인을 통해 근대 철학적 문제를 사유하는 그의 통찰력은 오랜만에 나의 뒷통수를 '뻑'하고 때려주셨다. 한국사회가 '이미지맹'에 빠졌다는데 한 표!!!

 

5) 김상봉 : 이 분은 최근 황석영, 노무현 관련 논의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발언으로 좀 미워졌지만,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보기드문 사유를 하고 있는 뛰어난 분이란 생각이다. (특히 그가 주축이 되어 작성된 진보신당 강령 전문(前文)은 후대에 기리기리 남을 명문이라 생각한다.) 특히 5.18을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절대 공동체'를 지향한 씨알들의 투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인상깊었는데, 숙고해볼 가치가 있는 주장이라 생각한다.

 

6) 김종철 : 가라타니 고진은 김종철이 문학비평계를 떠나면서 한국에서는 근대문학이 종언되었다고 말했다는데, 이와 관련된 발언들은 좀 신선했다. 갑자기 그의 <시적인간과 생태적 인간>이란 책을 찾아 읽어봐야 겠다는 욕구가 불쑥 불쑥!!! "근대 문학의 핵심은 야생의 정신 유무의 문제다"

 

총평을 하자면 1,2,3번은 탈락, 4,5,6번은 합격 ㅋㅋㅋㅋ

 

마지막으로 인상깊었던 부분을 옮겨 적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36-138쪽 김민수의 발언 내용)

 

C.P.스노우가 1959년 <두 문화와 과학혁명>이라는 강연 제목에서 발의한 두 문화 논쟁은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심화된 단절 현상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시각예술과 인문학 사이에 그러한 단절이 존재하는 것인데, 사실은 시각예술과 인문학의 관계는 스노우의 두 문화 논쟁과 좀 다른 특수한 한국적 맥락이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시각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17세기 이래 근대 인문정신과 불가분의 관계에서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봉건적 길드에 속한 일개 장인에 불과했던 미술가들이 인문적 성찰을 통해 미술 아카데미를 성립시켰고, 바로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정신 활동으로서 시각예술이 출현했던 것이다. 즉 시각예술은 인문적 성찰을 통해 예술의 지위를 획득했다. 따라서 시각예술은 인문학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한국의 경우는 이러한 역사적 전통이 일제에 의해 서구 학문이 이식되는 과정에서 오독된 것이고, 어떤 점에서는 과거 조선 시대보다 퇴화된 인식틀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조선 시대에 문인들은 예술을 겸비하고 있었다. 글을 쓰면서도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했던 고산 윤선도 선생은 <산중신곡>과 <고산유고>같은 문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직접 거문고를 제작해 사용한 악기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거문고 제작과 사용법을 수록한 책 <회명정측>과 악보를 기록해놓은 <낭옹신보>를 남기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을 유실하고 마치 시각예술과 인문학이 두 문화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서구 학문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전통마저 잃어버린 이상한 학문 세계에 갇혀 있는 꼴인 셈이다.

글을 못 읽는 것을 문맹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미지를 읽지 못하는 것을 '이미지맹'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시대에는 이미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것을 문맹과 같은 차원에서 취급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문자에 익숙해 있기 대문에 이미지 언어에 대해서는 독해가 거의 안 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예를 들어 청계천 복원 사업에서도 잘 드러났다. 실제로 청계천에서 복원된 것은 별로 없다. 다만 한강물 펌프로 퍼올려 분수대처럼 물 흘려 내보내고 풀을 심어 '짝퉁' 녹지 공간을 조성한 것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마치 인형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조립되는 인형들처럼 청계천을 구경하러 가는 것은 일종의 도시적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는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포섭하고 있다. 일상 속의 광고의 진실은 무엇인지에 대해 소비자들의 이미지 독해가 충분하지 못하니 과장, 사기성 광고에 속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이미지 독해력이라는 차원에서 디자인이 중요하다. 단순히 환경미화 차원의 장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읽어내는 이미지 독해력의 차원에서 일반인도 디장인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관리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에게는 디자이너 교육만큼이나 소비자 교육도 중요하다.

 

 

 

 

(139-140쪽 김민수 발언 내용)

 

과학기술은 여전히 일상으로 다가오지 못하고 신비화되고, 인문학은 위기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담을 쌓고 있고, 예술은 여전히 예술의 전당과 미술관에서나 하는 것으로 생각해 일상과 거리가 있고, 디자인은 세상과 너무나 가까운 공간, 제품, 이미지를 다루고 있는데도 우리들의 삶의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판타지만을 부추기고 있는 점이 그렇다.

 

 

 

 

(214-215쪽 김종철의 대답을 듣고 이명원이 정리한 내용)

 

요컨대 오늘날 지배적으로 돼가고 있는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김종철의 근본적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녹색당조차 제도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주장을 내놓고 제기하기 힘들다. 대의제 민주주의 구조 아래서, 녹색당이 제도 정당의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결국 '여론'에 편승해야 할 텐데, 그랬을 때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당의 존립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비관이 앞선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김종철의 현실에 대한 비관주의는 매우 뿌리깊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김종철은 비관적 상황에 대한 어설픈 희망보다는, 비관적 상황 그 자체를 냉철하게 사유하는 시각이야말로 오늘의 시민들에게 오히려 더 필요한 가치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러한 반문은 현재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서경식 교수 역시 동일하게 제기한 바 있다. 서경식은 이른바 민주화 시기에 자신의 두 형인 서승과 서준식 형제가  한국의 감옥에 수감 중일 때, 이탈리아계 유대인인 프리모 레비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이탈리아 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전쟁 뒤 이탈리아에 돌아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작품 등을 통해서, 우리가 인간에게서 찾고 있는 통념적인 인간성이라는 것이 실상에 있어서는 얼마나 허구적이고 절망적인 가치인가를 되물었다. 프리모 레비는 증언하는 문학을 추구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 날 돌연 자살을 했다. 서경식 교수는 이 증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절망에 전율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식인은 정작 뿌리 깊게 절망해야 할 때 그 절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헛된 낙관주의보다는 정직하고 근원적인 절망이 때로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절망을 회피하려는 의식이 강한 것 같다.

어쩌면 희망을 만들어내려는 인간의 욕망보다, 절망을 좀 더 투명하게 투시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김종철의 절망은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근본적 절망과 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절망과 비관을 통해서, 우리는 근대를 틀 지우고 있는 반인간주의와 반생명주의의 무서운 발전주의를 상대화할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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