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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11/03

장애문제는 백분토론에서 다뤄질 수 있는가?

바로 어제 장애학 세미나 발제에 썼던, 아주 갑작스럽고 엉뚱한(?) 고민...

 

 

박경석 대표님이 예전에 하셨다는 그 말, “장애인들의 문제가 백분토론에 한번 나와 봤으면 좋겠다”라는 얘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과연, 장애문제가 이 사회에서 ‘토론’ 가능한 문제일까?

난 이런 질문 앞에서 예전에 학생운동단체에서 활동할 때,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동물들은 우리 안에 갇혀서 사실상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있는데, 우리들은 그걸 보고 신기해하고, 가끔 사진도 찍고 하는 게 나는 영 불편했다. 그러다가 나는 마지막에 동물원을 나오면서 ‘꼭지가 확 돌아버렸다’. 왜냐면 산만한 크기의 코끼리의 한 쪽 발이 쇠자물쇠에 묶여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난 그 모습이 너무 화가 나서 돌아오는 내내 같이 갔던 사람들에게 ‘동물해방’ 투쟁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날 나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농담거리가 되고 말았다.

 

물론 완전히 같은 문제라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장애문제를 인식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 동물원의 동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동물원과 장애인 시설의 존재 목적은 다르지만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바는 사실상 같은 게 아닐까? 동물원은 우리 속에 갇혀진 그들의 (우리는 무감각하게 ‘울음’이라고 부르는) ‘비명’ 소리로 인간들에게 ‘오락’을 제공하여 이들의 안락을 유지한다. 인간의 경계 ‘내부’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그 ‘내부’에서 동물들의 존엄성에 대해 토론할 필요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 꼭 동물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야생동물들이 그 ‘우리’ 안에 갇혀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지금의 안락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가끔 TV를 통해 들려오는 멸종위기 생물들에 대한 남획에 분노할 수는 있어도, 우리 중에 누구라도 뒷산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맷돼지가 내려오는 것을 참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그건 근대적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용납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무슨 동물보호단체라는 데서 나온 사람들이 토론프로그램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대개가 의학적, 생물학적 지식을 동원해야만 말이 이어지는 것들이다. 이런 말이라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다행이긴 하지만, 나는 그게 생명체들의 보편적인 자기 삶의 권리를 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장애인 시설은 비장애인의 삶의 방식에 ‘불편한’ 존재일 (뿐이라 여겨지는) 장애인들을 시설로 몰아넣으면서 비장애인들의 안락을 유지한다. 비장애인들은 그렇게 장애인들을 시설로 몰아넣고는 가끔씩 ‘봉사활동’이란 명목으로 찾아가 자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내가 고등학교 때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노동자 자녀들을 데리고 꽃동네 봉사활동 하는데에 간 적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서 비장애인들이 취했던 태도는 동물원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랑 다르지 않은 것 같다. ①우르르 몰려간다. ②잠깐 있다 나온다. ③먹을 것을 준다. ④가까이 오면 무서워한다. (+알파, 베타, 오메가....)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의 삶에 대한 토론이 가능할까? 그것도 백분토론 같은데서? 내 생각은 토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토론을 할 수도 있고 해서 나쁠 것도 없지만, 사실상 토론 불가능의 영역으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가 끌어안고 있는 어떤 신체의 ‘무결성’과 그들의 ‘안락함’이라는 개념을 깨버리지 않은 상황에서 그 토론이 핵심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직은 장애문제를 둘러싸고는 ‘말’로 하는 토론보다는 ‘몸’으로 하는 싸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사회를 더 없이 불편하게 해야 한다. 이 사회의 안락함이라는 것은 장애인을 ‘비(非)인간’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시설의 위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은, (안타깝게도) 아직까진 ‘말’보다는 ‘공격’인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동아리에 들어온 새내기가 장애인 시설에 봉사활동 다녀서 동아리 활동을 소홀히 한다길래 (그 전부터 노들에서 교사활동을 하던 선배와 함께) 술자리에서 그 친구를 앉혀놓고 그런 거 다니지 말라고 몰아세워서는 결국 울려버린 적이 있다. 내가 살면서 여러 사람 눈에 눈물 흘리게 한 것 참 반성을 많이 하지만, 그 때만큼은 참 잘한 것 같다.

 

(계속 논점이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난 김에 말해보자면) 우리 인간에게 어떤 권리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 근대사회를 열어젖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투쟁을 하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인간에게 ‘어떠한 권리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을 (예를들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평생토록 시설에 가둬놓을 권리가 ‘없다’. 그것이 특정한 인간집단의 안락과 편안함을 위해 더 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같은 이유로 인간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특정한 공간에 가둬놓고 그것을 보며 즐거워할 권리가 ‘없다’. 어떠한 생명도 자신을 감금된 상태로 희생하며 다른 생명에게 유희를 제공할 의무 따위는 없다. 예전에 지율스님의 도롱뇽 소송 같은게 이런 의미를 가진 싸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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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스쳐간 고민에 대한 갑작스런 메모.

난 어떤 의미에선 우리나라가 ‘복지국가’가 맞다고 생각한다. 복지국가에 어떤 이상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보편적 삶의 권리가 보장되고, 소득분배가 평등한 나라라는 기준으로 보자면 택도 없지만. 사실 사회복지정책론 교과서 같은데 나오는 복지국가 유형분류를 논외로 생각한다면, ‘복지국가’라는 어떤 근대국가의 이상향적 모델은 근대인들의 무절제하게 팽창하는 욕구에 어떻게 사회경제시스템이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 욕구를 어떻게 조절하여 지구상의 생명-생태계와 공(共)-존(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완전히 열외의 문제였다. ..... 그래서 .... 인간의 욕구와 등치된 개념이 되어버린 ‘권리’를 사실상 삭제하고 새롭게 ‘삶’을 창안하는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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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임금이론』(케네스 라피데스 저, 사회진보연대) 주요부분 요약

 

 

 

마르크스의 임금이론

(케네스 라피데스 저,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운동연구소)

 

 

■ 마르크스의 초기 임금이론

 

1)『1844년 경제학․철학 원고』

- 처음 출간될 당시에는 노동자의 소외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심이 드러나 있다는 점 때문에 큰 방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임금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심은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함.

- 수요-공급법칙과 노동자의 생계적 필요가 임금수준을 경정하는 일차적 요인으로 이해됨. 반면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탄압과 같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가 이러한 시장의 효과가 실현되는 과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이해됨. 하지만 마르크스의 성숙기 분석의 근본적 특징인 생계적 필요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과 노동조합의 역할이라는 요소가 빠져 있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생계적 요구와 상대적 임금이라는 측면을 통해 기존의 분석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있음. “모든 사회 계급들의 평균 소득이 증대하였다는 것은 거짓이지만, 이를 사실이라 가정할지라도 소득 격차, 따라서 상대적 소득 격차는 더욱 커졌고, 이로 인해 부와 빈곤의 대립은 더욱더 첨예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총생산이 증가하고 그와 똑같은 정도로 욕구, 욕망, 요구도 나타나고 증대하는 까닭에, 절대적 빈곤은 줄어든다 할지라도 상대적 빈곤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2) 엥겔스, 「경제학 비판 개요」

-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 모두를 통틀어 임금 문제를 최초로 다루고 있는 저작.

- 엥겔스는 이 글의 목적을 자본주의 체제와 그 이데올로기, 경제적 불의와 위선을 고발하는데 두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노동자의 조건을 악화시키는 요소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엥겔스는 당대에 중요했던 다른 주제들, 예를 들어 맬서스의 인구론이라던가 기계의 도입이 고용과 임금에 끼치는 영향 등에 대해서는 면밀히 연구하였다. 특히 후자에 대해서 엥겔스는 “자본과 토지의 노동에 대한 투쟁에서, 자본과 토지라는 두 요소가 노동에 비해 갖는 특별한 이점이 이다. 그것은 바로 과학의 지원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기계는 공장주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계획도 분쇄하고, 열세를 면치 못하는 노동이 자본에 대해 벌이는 투쟁에서 그나마 노동이 쥐고 있던 힘의 흔적마저도 지워버렸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둘의 공동작업인『신성가족 비판』에 이르러 임금인상을 위한 노동자의 조직된 투쟁을 중요하게 인식하면서 이를 무시하는 견해를 논박하기 시작한다. “임금의 크기도 처음에는 자유로운 노동자와 자유로운 자본가 사이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서 결정된다. 뒤늦게 노동자는 자본가가 임금을 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수 없으며 자본가도 될 수 있는 대로 임금을 낮추지 않을 수 없음이 드러난다. 계약 쌍방의 자유 대신에 강제가 나타나게 된다.

 

3) 엥겔스,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 엥겔스는 최저임금은 노동자들 경쟁으로 인해 결정되지만, 최고임금은 부르주아 자신들 간의 경쟁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 자본가는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한다. 수요 증가 때문에 모든 가능한 노동자가 다 흡수된 뒤라면 자본가들은 자신들끼리 노동자를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그 결과 임금이 상승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평균 임금률을 결정할 수 있다. 평균적 상황에서 임금은 최저수준 약간 위쪽에서 형성된다. 여기서 평균적 상황이라 함은 노동자나 자본가 모두의 경쟁, 특히 자신들끼리 경쟁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며, 정확히 수요만큼의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수 정도의 노동자만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임금이 최저수준보다 어느 정도까지 상향할 수 있는 지는 노동자의 평균적 필요와 문명화 정도에 달려 있다. (...)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있으며, 그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아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이보다 적게 줄 수는 없다. 반면 자본가 자신들 간에 경쟁이 없는 상황에 특별한 호의를 베풂으로써 노동자를 유인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보다 많이 줄 이유 또한 없다.

- 과잉인구는 어떤 자연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로 인해 발생한다. “노동자들 간의 경쟁에 의해 최고 수준으로 올라간 손노동의 작업속도와 생산성, 분업, 기계의 도입, 자연력의 이용 때문에 노동자 다수는 빵을 빼앗겼다” 여기에 더하여 교역위기의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공장이 문을 닫거나 기존의 절반만 가동되면 “실업자와 경쟁, 노동시간 감소, 수익 매출의 부재 등으로 인해 임금은 내려간다.”

 

4) 『철학의 빈곤』

- 프루동을 비판하면서 혁명적 입장에서 노동조합주의를 방어함. 그러나 임금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 미달하는 것으로, 이 저작에서도 임금수준 결정에 있어 사회적, 역사적 요소에 대한 언급을 빠뜨리고 있음.

-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순진한 생각을 논박하기 위해 그 이전에 기각한 바 있던 리카도의 분석을 다시 받아들이고 있음. “노동 자체가 상품이라 할 때, 노동의 가치는 노동이라는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통해 측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노동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들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즉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고,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켜 나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5) 『임금노동과 자본』

-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있어서 임금 문제만을 다룬 최초의 저작.

- “화폐로 환산된 상품의 교환가치를 가격이라고 부른다. 임금은 노동의 가격을 지칭하는 특별한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임금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법칙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경제학의 상투적 가르침과는 반대로 마르크스는 “임금은 ...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상품에서 차지하는 몫이 아니다. 임금은 자본가가 일정한 양의 생산적 노동력을 사들이는 데 사용한 기존 상품의 일부분이다.” 노동자는 노예와는 다르게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팔아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이 부르주아 혹은 저 부르주아에 속한 것이 아니고, 부르주아 계급 전체에 속해있다.” ⇒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이론이 발생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음. (자본과 임금노동 사이의 교환을 설명하면서 명시적으로 ‘노동력’이라는 표현을 씀)

- 상대적 부와 상대적 임금에 대해 논하기 시작함. “임금이 현저히 증대되려면 생산자본의 급속한 성장이 전제 되어야 한다. 생산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마찬가지로 부, 사치, 사회적 욕구 및 사회적 향유의 급속한 성장을 야기한다. 따라서 비록 노동자의 향유가 증대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노동자가 넘볼 수 없는 자본가의 증대된 향유에 비하면, 즉 사회의 발전 상태 일반에 비하면, 감소된 셈이다. 우리의 욕구와 향유는 사회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를 기준으로 욕구와 향유를 재며, 욕구와 향유를 만족시키는 것들을 기준으로 만족의 정도를 재는 것이 아니다. 욕구와 향유는 사회적 본성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본성이다."

- 임금은 자본가의 이득과 비율의 문제로 사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 실질임금이 변함없더라도 심지어 오르더라도, 상대적 임금은 하락할 수 있다. 즉 임금은 무엇보다도 자본가의 이득, 즉 이윤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 즉 상대적 임금이라는 것.

- 임금변동이 가지는 이점에 대해 강조. 임금의 변동이 없다면, 노동자는 문명의 발전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 최저점 이상으로 임금의 일시적 상승이 없다면 노동자는 모든 생산의 발전, 사회적 부, 문명, 따라서 해방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

- 맬서스로부터 기원하는 임금기금설을 논박함. 그는 생산적 자본이 성장하고 그 결과 노동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상승하는 경우에도, 현대 산업과 자본의 특성상 노동자 고용을 위한 수단은 동일한 비율로 증가하지 않는다고 지적. 이것은 필연적으로 대규모 산업의 본질적 속성과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

 

6) 『공산주의자 선언』

- 『선언』은 임금과 관련하여 “임금노동의 평균 가격은 최저임금이다. 다시 말해 생계수단의 양은 노동자를 노동자로 겨우 연명케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고 같다”고 쓰고 있다. 임금은 이러한 최저생계를 “연장하고 재생산”할 수 있을 정도다. 『선언』에서의 이러한 해석은 이후 마르크스의 임금론을 이해하는데 지속적인 영향을 미침.

- (마르크스의 <자유무역 문제에 대한 연설>(1848)에서) 자본의 성장은 사실상 노동자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 그러나 이는 자본의 축적과 집적을 의미. 이러한 집중은 분업과 기계의 사용을 증가시킴. 분업의 심화는 노동자의 특화된 기술을 파괴하며 노동자 사이의 경쟁을 증대. 자유무역의 교리에 따르면 경쟁은 모든 상품의 가격을 최소 생산가격으로까지 떨어트린다. 따라서 최저임금이 노동의 자연가격. 그렇다면 최저임금이란? 노동자의 생계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임 품목의 생산을 위해 필요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양이며, 개별 노동자도아 노동자 계급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것과 동일한 양. 그는 또한 “노동자들이 오로지 이 최저임금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항상 이 임금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더 값싸고 저질의 음식으로 노동을 유지하는 방법이 끊임없이 발견됨에 따라 최저임금은 끊임없이 하락한다."

- 마르크스는 런던 거주 당시 근대 노동자운동과 접촉하면서 이 사태를 분석. “이러한 파업은 일차 생필품 가격의 전반적 상승에 상응하여 노동-잉여가 상대적으로 하락한 필연적 결과”. 그는 파업 이외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실제 시장 가치를 받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말하며 처음으로 노동조합을 경제적으로 정당화 함.

 

 

 

 

■ 『경제학 비판 개요』와 『1861-63년 경제학 원고』

 

1) 경제학 비판 개요

- 『자본』의 최초의 원고로 알려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음. 또한 이 저서의 의의에 대한 논의도 학자에 따라 분분한 상황.

- 마르크스는『개요』의 몇몇 구절에서 임금에 관해 별도의 장 또는 절에서 논하겠다고 하면서 분석을 유예함. 일부 저자들은 이를 근거로 그가 후에 『자본』출간에 후속해서 자신의 임금이론을 완성하는 임금노동을 다루는 별도의 저작을 쓸 계획이었다고 오해. 그러나 있지도 않은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마르크스가 표현한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진실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 마르크스의 임금 분석 방법에 있어서의 전제 : “임금은 언제나 최저로 가정된다. 이런 가정 하에서만 하나의 관계를 논하려 할 때 기타 여러 가지 관계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최저’라는 말의 의미는 이전의 저작에서 ‘최저생계’를 의미했던 것과 다름. 여기서는 ‘사회의 특정 상태’에 의해 규정되는 최저임금. 그것은 단지 임금의 상승이나 하락, 또는 토지 소유의 영향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을 때의 이윤 법칙들을 확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고정된 가정들은 설명이 계속되면서 모두 불필요해진다. 마르크스는『자본』1권에서도 ‘분석상의 목적으로’ 상품이 자신의 가치대로 교환되고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 가치에 따라 임금을 지급 받는다고 가정했을 뿐이라고 말함.

- 『개요』에서의 임금결정 방식 분석 :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이 임금 수준을 결정한다는 리카도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경쟁은 임금 수준의 하락의 원일 수는 있어도 “일반적인 임금 표준”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며 “오로지 자본-노동의 기원적 관계에 의해서만” 설명 가능하다고 말함. 경쟁은 부르주아 경제 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집행자.

- 마르크스는 자본의 성장과 자본의 생산력 성장은 그 가변 요소(산 노동과 교환되는 자본의 부분)의 비율이 체감한다는 것을 함의한다고 말함. 그는 과잉인구에 대한 맬서스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노동 능력의 일정 부분을 과잉인 것으로, 즉 이 부분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과잉인 것으로 정립하는 것은 필요노동에 비한 잉여노동 증가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말함. 이 경향은 노동수단을 기계로 전환함으로써 실현. 그러난 그는 어떻게 해서 기술 발전이 잉여인구 증가와 노동력 가치의 하락의 원이 되는지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음.

- 역사적으로 창출된 욕구가 증가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한 특성.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소비를 자극하고, 자신의 상품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며,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욕구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 자본은 노동을 자연적 필요의 경계 이상으로 내몰고, 그리하여 풍부한 개성의 발전을 위한 물질적 요소들을 창출한다. [풍부한 개성 속에서] 자연적 욕구는 역사적으로 창출된 욕구로 대체되었다.”

-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노동의 이중성을 발견한 것. 노동자가 판매하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그 자신의 노동력.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분석은 잉여가치의 비밀을 푸는 열쇠. 마르크스는 186-63년 원고에 이르러서야 노동력 가치를 노조와 명시적으로 연관 지음.

 

2) 『1861-63년 경제학 원고』

- 이 원고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노트 4권-15권은 훗날 『잉여가치학설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됨. 마르크스는 “화폐는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 그 해답은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이해에 달려 있음. 다른 모든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자신을 유지하고 한 명의 노동자로 살아가고 아이를 낳기 위해 필요한 생계수단의 가치로 분해될 수 있다.” 또한 모든 상품이 그렇듯이, “노동력의 시장가격은 어떤 시기에는 제 가치 이상으로 상승하기도 하고 다른 시기에는 제 가치 이하로 하락하기도 하면서” 장기적으로는 평균값을 나타낸다. 여기서 생계수단의 가치를 감소시킴으로써 노동력 가치의 수준을 떨어트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여성과 아동의 부양책임이 그 평균수준을 결정하는 데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도 노동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이 수준을 떨어트릴 수도 있다.

- 통상노동일의 연장은 양적 차이 뿐 아니라 질적 차이도 있으므로 노동력의 일일 가치는 변화된 평가액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초과수당을 요구한다. 13시간 노동일이 12시간 노동일을 대체하면, 노동자의 노동력은 더 빨리 소비될 것이다.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력 연한이 20년이라면 15년으로 단축되는 셈이다. 이러한 초과수당의 문제는 1860년대를 뜨겁게 달군 이슈로서,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정상적 노동 시간을 초과하는 시간에 대해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하도록 하더라도 이는 결코 임금인상이 아니며 초과시간에 해당하는 가치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현실에서 초과수당은 이를 보상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사실 초과근로 시 더욱 늘어나는 노동력 마모에 대해 보상하기 위해서는 추가된 시간만큼이 아니라 매 노동시간에 대해 더 놓은 임금률이 매겨져야 한다”고 말함.

- 노동력의 정상적 재생산에 필요한 생계수단의 양은 노동력의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 사용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동일한 양의 생계수단이 노동생산성 상승으로 인해 더 짧은 노동시간 동안 생산될 수 있다면, 노동력이 계속해서 제 가치대로 판매되더라도 노동력의 가치는 하락할 것이며, 이로 인해 그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도 짧아질 것이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생계수단의 종류, 따라서 삶의 쾌락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가 영유할 수 있는 사용가치의 양과 질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생산성 향상의 결과 중 하나로 노동일 중 더 큰 부분이 자본에 의해 영유된다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법칙을 증명한 뒤, 마르크스는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의 결과 노동자의 물질적 상태가 다방면에서 개선되었다는 통계적 증명을 통해 이 법칙을 반증하려고 하는 본말전도”를 공격한다.)

- 노동자운동이 성장하고 사용자로부터 양보를 쟁취할 능력이 신장되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에도 그 영향이 반영되었다.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의 감소를 막아낼 수 없더라도, 임금이 절대적 최저치로 하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노동자들은 전반적으로 증가한 부 중에서 일정한 양을 분배 받을 수 있다.” 이는 최저임금 그 자체는 변화하며 항상 하락한다는 1847년 당시 마르크스 자신의 견해를 뒤집은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주장으로 세간에 알려진 소위 ‘궁핍화’ 교리에 대한 반대이다. 확실히, 생산성이 상승하고 상품가격이 하락할 때 노동자가 그 상품을 소비한다면 명목임금이나 노동력 가치가 감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마다 임금이 노동생산성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정확히 반대다. 세계시장에서 한 나라의 생산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을 때, 그 나라의 임금은 다른 나라보다 더 높다. 영국에서 명목임금과 실질임금 모두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높다. 그러나 생산성에 대비해서 측정해보면 영국이 다른 나라보다 더 높지는 않다.

- 임금기금설에 대한 비판 : 임금기금설은 일정한 자본 기금이 임금 지불에 사용된다는 통념, 즉 이 이금은 노동을 고용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하고 기타 용도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통념이 중심을 이룸. 그래서 임금기금의 출처인 축적된 자본이 확대되어야 임금상승도 가능하다는 논리. 그러나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통해 반박한다. “한편으로 그들은[노동자들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노동 공급이 감소하고, 그 결과 노동의 가격은 상승한다. 그러나 노동의 가격이 상승하면 축적률이 감소하고, 그 결과 노동 수요가 감소하고 노동의 가격이 떨어진다. 노동의 공급이 줄어드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자본이 줄어든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이 아이를 낳으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공급을 늘려 노동의 가격을 떨어뜨리게 된다. 따라서 이윤율이 상승하고 자본축적도 상승한다. 말하자면 노동인구는 정확히 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숫자만큼 존재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말이다.”

-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발전할수록 가변자본으로 재전환되는 잉여생산물의비율은 더욱 작아지며 언제나 생산과정에서 잉여화되는 인구도 더욱 늘어난다. 노동자 숫자를 증가시키지 않고서도 소비되는 노동의 양이 커질 수도 있다. 노동의 공급은 ... 노동자의 수가 아니라 노동일의 길이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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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맑스주의』(이진경, 그린비) 부분 요약 정리

『미-래의 맑스주의』(이진경, 그린비)

 

 

▶ 화폐와 사회 (138-141쪽)

 

- 상품들의 세계는 화폐를 통해 고유한 질서를 획득하며, 이런 의미에서 화폐는 상품들의 세계를 동질적 공간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질서를 만들어낸다. ⇒ 상품들이 구성하는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묶고 통합하는 것은 ‘가치’나 ‘계약’이 아니라 화폐의 초월적 권력

- 상품세계와 화폐의 관계는 근대인과 근대국가의 관계와 정확하게 동형적. 정치경제학은 상품세계에서 개별적 가치형태의 전개로는 극복될 수 없는 한계를 특정한 한 상품의 ‘선출’과 배제를 통해 극복한다는 소설과도 같은 내러티브를 통해 화폐의 탄생을 설명. 이러한 설명의 논리는 개별적인 의지들이 서로간에 대립하고 있는 자연상태 내지 전쟁상태를 피하기 위해 어떤 하나의 대표자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위임하는 홉스나 계약론의 설명방식과 유사.

- 이러한 화폐의 거래망은 공동체와 상응할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지 않음. 교환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화폐조차 공동체 사이에서, 공동체들간의 교역을 위한 공간에서 발생했고, 공동체의 바깥에 있는 외부자들에 의해 취급되었다. “두 나라 사이의 평화상태는 양국의 지배자 간에 항상 증여가 행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곧 상업적 성질을 가진 추장교역이며, 추장상업은 이로부터 발달하였다. 증여가 단절된다는 것은 전쟁을 의미했다.”(막스 베버, 『사회경제사』)

- 자본주의의 발상지로 간주되는 중세도시의 경우에도, 그 도시의 상업과 부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다른 도시와의 대외교역. 이러한 도시간 대외교역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광범위한 상업적 교역망과 더불어 화폐의 교역망을 만들게 되는데, 이러한 ‘화폐거래 네트워크’가 나중에 영토국가와 손을 잡거나 그것에 의해 포획되면서 영토국가 차원의 시장과 화폐가 발전.

- 그 경우 화폐는 전쟁자금이나 궁정의 사치 등과 같은 국가적인 차원의 리에 사용되었고, 그것의 조달은 국가가 나중에 걷을 조세를 담보로 은행가나 상인에게 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가는 그 채무를 인민들에게 조세로 떠넘겼다. 그리고 조세를 화폐로 납부하게 함으로써 화폐가 하나의 국가 내부에서 일반화된 교환수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화폐가 한 ‘사회’의 내부에서 일반화된 교환수단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화폐, 특히 어떤 사회 내부의 일반화된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는 개별적인 교역 내부에서 교환의 확대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국가적 조세를통해서 자리잡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시장적인 모델의 세계에서 화폐의 지위는 단순한 교환의 매개라는 상인의 위상이아니라 인민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조세를 내라고 요구하는 군주의 지위와 훨씬 더 가깝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5장.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 개념에 대하여

 

1. 산업혁명과 노동

 

-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은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 맑스는 노동이란 가치를 갖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노동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사용가치”라고 주장. 즉 ‘노동의 가치’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사용하여 산출한 생산물의 가치라는 것.

- 이러한 정의는 노동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함축함. 헤겔식의 ‘노동이란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이란 개념에 반하여 노동과정이란 그것을 구매한 자본가각 노동력을 사용하는 과정이라는 주장. 이는 노동을 자본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사회적인’ 본질로서 재정의 한 것.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노동이 된다. 즉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관계하에서 ‘노동자의 활동’은 ‘노동력 상품의 사용’(=노동)이 된다.

- 이러한 정의는 자본주의에서는 ‘노동’ 자체가 항상-이미 계급적 적대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다시 말해 노동과정 자체가 두 개의 적대적인 의미가 항상-이미 대립하는 계급투쟁 과정임을 의미. ⇒ ‘자본에 의한 노동의 포섭’

 

①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

- 자본이 노동을 형식적으로 포섭한 조건에서 자본은 노동력의 구체적인 사용 양상을 장악하고 사용할 수 없으며 다만 노동의 결과물만을 자신의 소유로 영유할 수 있을 뿐이다. ⇒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포섭’ / 노동시간을 연장함으로써만 잉여가치를 확대시킬 수 있음. ‘절대적 잉여가치’

- 자본과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처음부터 시간을 둘러싼 투쟁의 양상을 띰. 14-18세기 영국의 노동법규는 노동일을 강제로 연장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함. 톰슨(E.P. Thompson)의 말대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노동생활은 “한바탕 일하고 한바탕 노는 것의 반복”이었기 때문에 자본이 노동자의 노동과정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없었음. 그래서 국가적 법을이용해서라도 노동시간을 확보하려고 함.

 

②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

- 산업혁명으로 인해 개별 노동에 고유한 기능이 기계로 이전되고, 숙련은 해체되어 기계적인 동작의 집합이 됨. 이제 자본가들은 기계의 운동을 장악함으로써 노동의 리듬을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됨. ⇒ 상대적 잉여가치로의 전환, 그러나 노동시간은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확대. 이제 반대로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제한하기 위해 법의 힘을 빌리게 됨.

-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노동자의 활동을 노동자의 의지로부터, 간단히 말해 노동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하려는 경향을 확인하게 됨. 노동 자체에 함축되어 있는 적대성이 펼쳐지는 중요한 양상.

 

 

2. 기계화의 세 가지 계기

 

① 육체노동의 기계화

-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에서 나타난 ‘과학적 관리’나 그에서 연원하는 인체공학의 발전 등을 ‘육체노동의 기계화’라 부르자. 이는 다양한 육체적 동작을 역학적 수단을 통해 분석하여 표준화된 요소동작으로 분해하는 것이었다. (육체노동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하기)

- 1870년대경부터 미국의 도살장 등에서 사용되던 것을 포드가 전면적으로 채택하여 공장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어셈블리 라인은 개별적인 육체노동의 기계화와 다른 차원에서 분할된 노동을 결합시키는 ‘결합노동의 기계화’를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테일러와 길브레스의 ‘과학적 관리’라는 시도와 구별되는 것.

 

② ‘정신노동의 기계화’와 ‘결합노동의 기계화’

 

a. 정신노동의 기계화

- 인공지능 개념의 사용은 컴퓨터의 발전과 결부되어 있음. 튜링은 ‘튜링-기계’ 개념을 창안했던 1930년대에 이미 컴퓨터의 본질이 아주 단순한 이론적 기계를 모델로 한다고 주장했다. 즉 통상 ‘계산’이나 ‘연산’이라고 불리는 정신적 사고과정을 7가지의 기계적 연산(테이프를 읽어라/테이프를 한 글자 왼쪽으로 옮겨라/테이프를 한 글자 오른쪽으로 옮겨라/테이프에 0을 써라/테이프에 1을 써라/다른 명령으로 넘어가라/멈추어라)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그는 컴퓨터의 연산과정과 인간 두뇌의 사고과정이 본질적으로 유사하다고 주장. ⇒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간주되던 정신활동 내지 정신노동이 기계화될 수 있게 됨. ⇒ 정신노동의 기계화

 

b. 결합노동의 기계화

- 어셈블리 라인이 사물들의 물리적인 흐름을 기계화함으로써 결합노동을 기계화하는 것이었다면, 전기나 전파를 통해서 수행되는 전자기적 네트워크는 소리나 문자, 정보는 물론 전기적 신호로 변형가능한 모든 비물질적인 것의 흐름을 기계화함으로써 결합노동의 범위를 비물질적인 것으로 확장.

- 컴퓨터에서 처리하기 위한 탈코드화/재코드화의 형식으로서의 디지털은 이질적인 형태의 정보를 하나로 동질화하여 일괄처리할 수 있는 표현형식을 제공. 이러한 디지털화의 과정은 모든 정신적 프로세스가 빛의 유무로 치환가능한 0과 1 두 숫자의 집합으로 초코드화(overcoding)되는 것을 뜻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정신적인 영역의 모든 이질성이 동질적인 수로 변화되는 탈코드화(decoding)를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디지털화된 정보는 전달된 것 그대로 다른 것들과 혼합되거나 변형되어 일괄처리 될 수 있으며, 따로 입력하거나 형태를 바꿀 필요 없이 그대로 사용될 수 있음. 이로 인해 네트워크로 연결된 모든 지점이 결합된 활동이나 결합노동을 할 수 있게 되며, 분리된 지점에서 수행하는 활동이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조건만으로 직접적으로 결합될 수 있게 됨. ⇒ 결합노동의 기계화

 

 

3. 자동화와 정보화

 

-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식화하여 구별하자면, 자동화가 육체노동의 기계화와 정신노동의 기계화를 졉합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면, 정보화는 정신노동의 기계화와 결합노동의 기계화를 접합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a. 자동화

- 자동화는 일차적으로는 기계화된 동작에 피드백이나 재귀적 처리를 포함하는 일련의 사이버네틱 프로세스를 결합해 ‘노동자 없는 노동’을 기계로 수행하게 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전통적인 관념에서 노동이나 ‘생산적 노동’이 수행하던 역할이 기계의 작동으로, 기계의 ‘노동력’의 사용으로 이전됨. 이제 노동은 노동자의 활동이라는 정의로부터 거의 벗어나서 자본가의 손에 전적으로 장악되고 포섭됨. ⇒ 산업혁명을 통해서 진행된 육체노동의 기계화가 자본에 의해 노동이 실질적으로 포섭되는 과정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육체적 및 정신적활동능력 자체를 기계화함으로써 노동 없이도 활동능력 자체를 착취하는 이러한 양상은 자본에 의해 노동이 기계적으로 포섭되는 과정이라 말 할 수 있음.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

 

b. 정보화

- 자동화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기계적 도식을 통해 노동자의 활동능력 자체를 기계적으로 포섭하는 것이었다면, 정보화는 오히려 노동자는 물론 다양한 사람들의 활동을 그 자체로 포착하여 가공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 저장하고 일괄처리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시킨다. 정보화를 통해 자본은 디지털화된 네트워크와의 ‘접속’을 수반하는 모든 활동을 가치화한다. 이럼으로써 자본은 굳이 노동력을 구매하지 않고서도 모든 종류의 활동 자체를 착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 정보화의 예 : 은행 창구 직원들이 하던 노동은 기계 앞에서 우리 자신이 직접 수행해야 하는 ‘비노동’으로 대체. 주문하는 활동 자체가 직접 입력하는 행위를 통해서 주문장을 만들던 이전의 노동을 대체. 이전에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활동의 산물들, 가령 그림이나 디자인, 음악, 지식 등과 같은 것들을 직접 재료로 삼아 가공하여 상품화.

- 자동화가 노동자의 고용없이 인간의 노동능력 자체를 이용/착취하는 것이라면, 정보화는 노동자의 고용 없이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이용/착취하는 것. (‘사회적 활동을 기계적 포섭’과 ‘사회적 잉여가치)

- 자동화든 정보화든 모두 노동자의 활동은 더 이상 노동력-상품으로 구매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포섭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짐.

 

 

4. 기계적 포섭의 결과들

 

- ‘기계적 포섭’이란 생산의 중심적인 프로세스를 자동화된 기계가 차지하고 ‘인간’은 그것을 그 기계적 프로세스의 입력과 출력을 담당하게 되는 이러한 변화를 의미. ‘인간’에 속한다고 생각되던 요소들이 기계의 일부가 되고 ‘인간’의 활동이 기계적 과정의 시작(입력)과 끝(출력)을 차지하게 되는 양상. 네트워크의 발전과 정보화의 진전은 이러한 입력과 출력의 지점들이 ‘공장’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공간에서 탈영토화되어 사회 전체로 확장되며, 생산과 비생산은 물론 대중들의 일상적 삶 전체로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

 

 

5. 기계와 잉여가치

 

- 사회적 잉여가치는 정보화된 활동의 결과나 정보화하는 기계와 접속하는 활동 자체를 착취하는 것이란 점에서 비용의 지출 없이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착취하는 것임을, 그것을 통해 노동자 내지 인간을 착취하는 것임을 표현한다. 즉 사회적 잉여가치는 정신노동 및 결합노동의 기계화에 따른 결과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활동을 수행한, 혹은 수행하는 사람 자신이 생산한 것이다.

- 하지만 자동화는 사회적 잉여가치와 달리 활동이나 활동의 결과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능력 자체를 착취하는 것이기에, 노동자나 인간에 대한 착취의 형태로 진행되지 않으며, 반대로 노동자나 인간 없는 생산의 형태로 진행된다. 극한적인 형태의 자동화된 공장이란 노동자가 사라진 공장, 인간의 노동이 사라지고 기계가 스스로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표상된다. ‘노동의 종말’이란 관념이 정보화와 무관한 게 아님에도, 일차적으로는 자동화라는 현상의 짝으로 표상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 자동화된 공장에서 자본은 직접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이 ‘인간화된 기계’를 통해서 노동자 내지 인간의 노동능력을 착취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적 잉여가치란 노동자가 아니라 기계가, ‘인간화된 기계’가 생산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 기계적 잉여가치의 존재는 단지 새로운 기술의 채택에 따른 초과이윤을 뜻하는 특별잉여가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화된 기계가 생산한 것이고, 기계화된 인간의 능력을 자본이 착취하는 것이다.

- ‘기계적 잉여가치’ 개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론 : 비판자들은 가치와 사용가치는 다른 것이고 사용가치가 증가한다 해도 개별 상품의 가치가 감소하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의 전체적인 노동시간이 변하지 않았다면 가치량은 증가한 게 아니라고 주장. 즉 기계적 잉여가치란 새로운 기술이 전반적으로 평균화됨에 따라 소멸하게 될 일시적인 특별잉여가치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다면 자동화된 공장에서 생산하는 상품이나 개개의 자동화된 기계가 생산하는 상품은 가치는 없고 사용가치만 있는 그런 상품일까? 자동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될 경우 우리는 마치 식물들이 생산하는 산소를 공짜로 사용하듯이, 저 ‘인간화된 기계’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을 (재료값만 지불하고) 공짜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일까? (사용가치는 흘러 넘치지만 지불해야 할 가치나 잉여가치는 없는 새로운 천국?)

- 요컨대 노동의 기계적 포섭은 노동자 내지 인간의 능력 자체를 기계화함으로써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착취한다. 기계가 생산하는 잉여가치, 그것은 자본이 기계를 이용하는 방식의 한 극한이고, 자본이 노동을 노동자에게서 분리하려는 전략의 궁극적 도달점이다. 이는 자본의 한계 안에서만 유효하지만, 그것은 가치나 잉여가치라는 개념이 자본의 한계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그렇다. 그러나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인간학적 관념, 근대적인 경제학의 공리는 이러한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

 

 

 

 

▶ 6장.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적 계급인가?

 

1. 자본주의로의 두 가지 길?

 

- 『자본』에 나타난 자본주의 발생에 관한 상이한 두 가지 서술 : I권 마지막에 서술된 자본주의 실질적 출발점이 되었던 ‘본원적 축적’은 국가적 폭력에 의한 끔찍한 횡탈로 진행된 반면, (III권에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과거에 해당하는) 자본에 의한 자본의 증식을 추구했던 대부자본이나 상인자본은 대체로 자본주의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가로막는 계기들을 갖고 있었음.

- 후자의 경우 자본주의로 가지 않는 길이지 자본주의로 가는 길이 아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라리 상인자본처럼 근대적 자본의 직접적 선행형태로 보이는 것조차 자본주의로 이행의 계기를 갖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가로막는 계기로 자곧ㅇ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따라서 그 두가지 길이란 상인자본 같은 자본의 선행형태들이 포함하고 있는 두 가지 길, 두 가지 방향의 벡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야 더 적절함.

 

① 돕-스위지 논쟁

- 돕 : 자본주의의 발생을 상인자본에 결부시켰던 당시 역사학의 통념을 비판하면서, 반대로 생산자가 상인이 되는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길’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생하고 발전했는가를 제시하려 함. “상인자본은 대체로 구질서의 기생충으로 그쳐버리고, 청년기가 지나면 상인자본의 의식적 역할은 혁명적이 아니라 보수적으로 된다.”

- 스위지 : 원격직 교역에 따른 영주들의 사치품 수요 증대, 그를 위한 화폐에 대한 욕구 및 과도한 착취가 봉건제 위기를 야기한 원인. 즉 봉건제의 붕괴는 자립적으로 성장한 소생산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제에 속한다고는 할 수 없는 원격지 교역에 기인하는 것.

- 상인자본의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도 있고 그것을 저지할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두 가지 길은 역사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이행의 두 가지 유형’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과 자본주의 사이에 손쉬운 화살표를 긋는 통념에대해 경종을 울리는 것.

 

 

2. 도시와 자본주의

 

- 부르주아지는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영주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도망쳐 획득한 것이 ‘자치도시(Commune)’였다. 이러한 도시나 도시동맹체들의 발전은 일차적으로 상업의 발전을, 그리고 그에 따른 화폐자본의 축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상인자본은 자본주의 발전의 전제조건을 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길드(guild)라는 동업조합으로 표상되는 특권들을 통해서 자본주의 발전을 방해하고 저지했다. 왜냐하면 “상인자본에게 황금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바로 시장의 미발달” 이었고, 자신들이 교역을 독점함으로써 발생하는 초과이윤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교역 내지 상업이 도시 외부로 확장되는 것을, 도시 외부에서 시장이 발전하는 것을 극력 저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는 자본주의 발생과 발전에 필요한 상업의 발전, 화폐자본 축적을 야기했지만 결코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반대로 자본주의의 발달을 극력 저지하고 시장의 확산을 가로막았던 것.

-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 시장이나 생산을 오직 도시라는 특권적 영토 안에만 제한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확산과 발전을 저지하고 방해했다는 점에서, ‘도시적 길’은 자본주의 이행의 길이었다기보다는 그것을 도시 안에 가둠으로써 그것을 저지하고 가로막은 길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 이는 상업적 도시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수공업자나 매뉴팩처러 등의 생산자 부르주아지에게도 해당되는 지점. 생산자 부르주아지의 맹아적 성장을 강조하는 돕의 경우에도 수공업자조합이 상업부르주아의 손에 장악되는 식으로, 수공업자가 상인에게 완전히 종속되는 경우나 아니면 수공업자 자신이 상인귀족화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 결론 : 도시의 시민이란 의미에서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 계급이 아니라고 말해야하며, 자본주의는 도시에서 탄생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3. 자본주의와 영토국가

 

- 질문 : 소생산자는 자본가계급이 될 수 있을까?

- 소생산자의 독립성은 상인들에 대한 독립성일 뿐만 아니라 상품 자체에 대한 독립성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독립성으로 인해 시장에 크게 의존하지 않으며, 또한 상품시장의 흐름을 형성하는 구매력을 형성하지도 않는다. 또 소생산자가 만들어내는 시장은, 바로 그들의 ‘독립성’으로 인하여 자신이 소비하고 남은 여분을 교환하는 지극히 제한된 시장일 뿐이다. 나아가 상품화된 시장이 소생산자들의 농촌 세계에까지 깊숙이 침투하기 전은 물론 그 후에도 시장에 대해 ‘독립성’을 가지며, 따라서 시장에 잘 편입되지 않는다. 즉 소생산자가 자본가가 되는 것은 ‘이미’ 자본주의의 존재를 전제한다. 요컨대 상인이 자본주의화를 예견하면서 저지한다면, 소생산은 자본주의화를 밀고 나가기에는 너무도 ‘독립적’이다. 그래서 맑스는 자본주의 출발점을 이루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은, 돕의 생각과 반대로 소상품생산의 대대적인파괴를 수반한다고 썼던 것이다.

- 결국 중요한 것은 소생산자가 상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업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도시의 통제를 넘어서 시장이 농촌으로 확장되어야 하고 지방으로, 전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도시의 상인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와는 다른 이유에서 소생산자로서도 결코 수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여기서 우리는 도시동맹체나 도시국가와 대비되는 영토적 국가의 존재를, 혹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절대주의(절대왕정)에 주목해야 한다. 도시의 특권과 도시적 교역의 제약을 넘어서 국가적 영토 안에 그것을 통합하고, 봉건적 귀족의 영토와 권력을 넘어서 절대군주의 단일한 권력 아래 그것을 통합하고, 영토 내부의 흩어진 지역들을 잇는 도로망을 건설함으로써 국지적 시장을 지방적인시장으로, 나아가 전국적인 시장으로 통합하는 것. 이는 바로 절대주의 국가의 가장 중심적인 과제에 속한다.

- 이러한 영토적 내지 영토국가적 통합은 도시의 힘과 권력이 강성한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절대주의 국가가 유럽에서 도시의 힘이 취약한 지대였던 서유럽,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발전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 영토국가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느리게 성장해 옴. 그렇게 느리게 성장한 것은 도시에 비해 훨씬 광대한 영토 안에서 정치적, 경제적인 통합능력을 형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국시장이 완수되려면 농업, 상업, 수송업, 공업 사이에, 또 수요와 공급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영국이 마침내 이런 균형에 도달하자 네덜란드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경쟁자가 되었다.”(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III』)

 

 

4. 자본주의와 절대주의

 

- 절대주의 왕정의 관료들에 의해 시행되었던 중상주의는 정확하게 전국적 시장의 창출과 영토국가적 통합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중상주의는 “국지적 교역과 자치도시 교역의 케케묵은 텃세를 깨부수어 도시간, 지방간의 구별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구별도 점차 무시하는 전국시장으로의 길을 열었다.”(칼 폴라니, 『거대한 변환』)

- 자본주의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길’이 유효화되기 위한 조건이 전국적 시장이었다면, 그리하여 생산자가 상품생산을 위해 생산하는 ‘상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 전국적 시장의 g여성이었다면, 이는 단일한 중심으로 통합된 영토적 국가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고, 바로 그것이 절대주의가 직접적인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고. 자본주의는 나중에 ‘국민국가’라고 불리는 그런 영토적 국가를 통해서 비로소 사회적인범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자본에는 국경이 없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에는 국경이 있다고. 아니, 자본주의는, 그것이 비록 식민지의착취와 수탈, 세계경제의 발전을 실존의 조건으로 하며, 그것을 통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영토국가를 통해 형성된 국경을 통해 존재할 수 있었고, 국경을 단위로 작동하고 ‘발전’한다고.

 

 

5. 누가 부르주아지가 되었나?

 

- (다시 강조하자면,) 소생산자의 분해를 통해서 한편은자보가로 성장하고 양적으로 대다수인 다른 한편은 노동자가 되었다는 식의 내적 발전의 도식이 순전한 ‘신화’라는 사실. 소생산의 분해는 이미 국내시장의 형성을,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미 충분히 성장한 자본가계급을 전제로 한다.

- 인클로저나 교회재산의 몰수, 공유지 횡령 등을 비롯하여 이른바 ‘본원적 축적’을 구성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거대한 ‘본원적 자본’을 형성한 사람들은 어떤 계급인가? 그렇게 거대한 재산을 집적한 사람들은 무엇보다 우선 자본가계급이 되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 (책에서 소개된 몇 가지 사례들을 보면) 영국에서 젠틀맨이라고 불리던 귀족 출신의 대지주들이 16세기 미래 소위 ‘본원적 축적’을 통해 자본가계급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그들이 귀족이라는 사실은, 다시 말해 왕의 권한에 속하던 국가적 독점의 특권들에 가장 먼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계급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자본가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아니라 정반대로 이들이야말로 가장 쉽게 자본가가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반대로 상인이나 무역업자들처럼 국가적 독점권을 할당받거나 국가의 허가와 원조를 필요로 했던 층은 말할 것도 없고, 제조업자들 또한, 영토국가 자체의 성격과 밀접히 결부된 국가적 독점에 접근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신들의 조합에 젠틀맨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지만, 이는 그들에게 조합 자체의 중요한 이권을 내주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제조업자나 상인이나, 자본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귀족의 일부가 되거나 국가권력 안에 들어가려 했고, 이를 위해 자신들이 번 돈을 사용해서 매수하고 매직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 따라서 지주나 귀족과 자본가를 그 출신성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본질적으로 다른 계급으로 구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자본가들이 도시 체제 안에서 하나의 계급으로 통합되어 간다면, 지주나 귀족들은 절대왕정의 영토국가 안에서 국가적 독점을 축으로 하나의 계급으로 통합되어 간다.

 

 

6. 국가와 부르주아지

 

- 우리는 그 탄생기에서나 아니면 ‘정상적인’ 시기에서나 국가야말로 다양한 출신을 갖는 부르주아적 층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묶고 그것에 동질성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말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봉건영주, 지주, 상인, 제조업자, 수공업자, 대규모 차지농 등의 이질적인 층들이 국가권력이라는 축으로 모여들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의 계급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보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국가를 통해서만 부르주아지는 하나의 동질적 계급이 된다고.

 

 

 

 

▶ 7장. 계급과 비-계급의 계급투쟁

 

(...)

 

2. 자본주의 공리계와 계급

 

- 자본주의에 이르면 법은 이제 원칙적으로는 모든 경우에 해당되며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형식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법이 관련된 사항들 전체에 동등하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최소한의보편규칙이고, 개별적인 경우들이 그것에 기초해야 하는 그런 최상위규칙이란 의미에서 ‘공리적’이란 것이다.

- 이러한 자본주의 공리계에는 그 공리들을 따르는 오직하나의 계급만이 존재한다. 즉 가치법칙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계급, 시장의 법칙을 유일한 행동원리로 삼는 계급, 그러한 가치법칙을 자신의 행동 법칙으로 삼고, 그것이 함축하는 경제적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는 하나의 계급. 이를 위리는 부르주아지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공리계 안에서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피지배계급, 오직 하나의 노예계급만이 존재할 뿐이다. (...) 부르주아지란 일반화된 노예계급이다. 부르주아지는 부를 지배하는 계급이 아니라 증식을 목표로 하는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계급, 자본의 공리에 복종하는 노예계급이다. 공리계의 공리에 복종하는 계급, 자본주의 공리계는 오직 이런 하나의 계급만을 요구하며 그런 하나의 계급만을 생산한다.

- 계급은 오직 하난 존재하며, 그 계급의 보편성은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정의의 보편성이다. 예를 들어 흔히 말하듯이 자본가에게 고용된 관리자는 피고용자이지만 기능상 자본의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란 점에서 ‘기능적 자본가’고 부르주아지의 일부다. 소득수준의 차이나 직업의 차이는 이 경우 또 다른 계급을 구성하는 이유가 전혀 되지 않는다.

 

 

3. 부르주아지: 보편적 계급

 

- 부르주아지를 단순하게 지주나 귀족들과 다른 출신의 어떤 집단으로 상정하는 통념, 그리하여 근대적 합리성과 진보성을 표상하는 그런 신화적 통념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부르주아지는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부의 증식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이용하여 생산 내지 경영에 참여하는 아주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 부르주아지가 된다는 것은 그 출신이나 규모와 무관하게 영지나 토지 혹은 다른 재산을 이용해서 재산을 증식하고 화폐를 이용하여 화폐를 증식시키는 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공리적 보편성을 갖게 된 그 규정성을 획득하는 것에 의해, 그 규정성에 부합하는 순간 누구든 부르주아지가 되고, 그의 과거는 눈부신 화폐의 빛 아래 지워지고 사라지며 하나의 동일한 계급으로, 보편적인 계급으로 동질화된다.

- 그런데 부르주아지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제공하는 이권이나 특권에 접근할 수 있어야 했고, 그런 점에서 또 다른 의미의 ‘정치적 신분’이 되거나 거기에 줄을 대야 했다. 17세기 영국 공장들이 주로 귀족적 이권 소유자에게 장악되어 국왕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았던 것이 그런 예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적 독점권을 할당받아야 했던 상인들이나 무역업자는 물론 제조업자들도 영토국가의 독점적 권력에 접근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신들의 조합에 젠틀맨층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지만, 이는 그들에게 조합 자체의 중요한 이권을 내주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제조업자나 상인, 자본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귀족의 일부가 되거나 국가권력 안에 들어가려 했고, 이를 위해 자신들이 번 돈을 사용해서 매수하고 매직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 이런 점에서 부르주아지의 보편성은 누구에게나 적용가능한 규정이란 의미를 넘어서, 자신의 개별적 내지 특수적 이해를 국가를 통해 ‘보편적 이익’으로 변환시키는 능력을 요구했던 셈이다.

 

 

4. 프롤레타리아트: 비-계급

 

① 비-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 혹은 근대 사회에는 오직 부르주아지만이 존재하는가?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부르주아지라는 하나의 계급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 세계에 부르주아만 존재함을 뜻하는 건 아니다. 자본의 공리 혹은 부르주아지를 구성하는 가치법칙의 공리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 복속되어야 할 부르주아를 갖지 않는 사람들, 혹은 고용되었지만 그들의 의지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이들 모두는 부르주아지와 동일한 외연을 갖는 저 보편적 계급에 속하지 않는다.

-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이란 무엇보다도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를 분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신분적인 규정이나 경제적인 규정을 상실하여 비-신분이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의 공리나 부르주아지를 정의해주는 어떤 규정성도 획득하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란 이처럼 토지로부터 분리됨으로써 부랑자가 되어 사회를 떠돌거나, 걸식하는 거지가 되거나, 날품을 팔며 하루하루 생계를 잇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적극적 규정에 의해 ‘계급’으로 정의 될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 맑스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1843)에서는 이 개념을 정확하게 계급이 아닌 ‘계급’이란 의미에서 ‘비-계급’으로 규정한다. “철저하게 속박되어 있는 한 계급, 시민사회의 계급이면서도 시민사회의 어떤 계급도 아닌 한 계급, 모든 신분들의 해체를 추구하는 한 신분”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사회적 궁핍에 의해 기계적으로 몰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즉 주어진 규정 안에서 궁핍으로 몰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의 급격한 해체 [즉 사회적 규정성의 급격한 해체]를 통해 특히 중간계층의 해체로부터 출현한 사람들”이다.

-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특정한 요구, 특정한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이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보편적 계급’이 아니다. 계급 자체의 해소를 제외하곤 어떤 보편적 요구, 보편적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 물론 이 개념은 이후 ‘임노동자계급’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지만, 그 경우에도 분석의 맥락은 노동자계급 내지 임노동자계급이 자본의 운동과 관련된 경제적 관계를 서술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혁명이나 운동에 대해 말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 이런 이유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적 저작인 『자본』에 ‘노동자계급’이란 말은 빈번히 등장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 요컨대 부르주아지가 된다는 것이 출신이나 방법이 무엇이든 어떤 보편적 규정성을 획득하는 것에 의해, 그 규정성에 동일화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지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는 것은 그와 반대로 출신이나 방법이 무엇이든 기존의 지위를 유지하던 규정성을 상실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② 프롤레타리아트와 소수자

- 부르주아지가 주어진 규정의 획득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에서 다수적/주류적(major) 집단이요 다수자(majority)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규정의 부재, 척도의 부재, 혹은 수많은이질적 규정의 혼합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란 점에서 소수적(minor) 집단이요 소수자(minority)다. 다수자란 어떤 사회에서 지배적인 척도를 점유한 자들이고, 그것의 지배적인 규정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반면 소수자란 그 척도에서 벗어난 자들, 척도의 규정과 지배에서 배제되거나 벗어난 자들이다. 정확하게 이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근대 사회에서 부르주아지가 산출하는 모든 소수자들의 집합이다.

- 이런 의미에서 ‘비-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거대한 ‘계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이질적인 성분들의 흐름으로서 ‘대중’이라고 해야 한다. 계급적 제한에서 벗어난 다양한 집단들이 모이고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흐름, 정해진 규정이 없기에 미리 흘러갈 정해진 방향도 없으며, 길이 난 대로 흘러가지만 샛길로 빠지거나 패인 둑을 흘러넘치면서 새로운 길을 만드는 흐름.

- 이런 점에서 정말 노동자도, 아니 무엇보다 우선 노동자야말로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devenir-proletariat) 한다. 자본에 포섭되어 노동하는 존재, 가변자본의 형태로 ‘계급’에 포섭된 존재에서, 자본의 척도를 벗어나고 계급적 안정성의 부르주아적 환상에서 벗어나, 자본의 지배, 자본의 포섭에 대항하는 비-계급화 내지 반-계급화의 선을 그려야 한다.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역시 프롤레타리아-되기를 해야 한다. 단순한 비-계급적 상태에 머문 조재로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본의 손길을 기다리며 다시 계급적 자리를 꿈꾸는 ‘열등한 계급’ 내지 ‘버림받은 계급’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를 자신의 욕망으로 삼길 거부하고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길 거부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활동방식을 창안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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