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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생활보장법 개정 요구 인증샷!!

끝내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던 지똥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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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 책읽기 모임에서 처음 만났지만 흔쾌히 인증샷을 찍어주신 애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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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의 영원한 지킴이, 은종복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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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풀무질 책읽기 모임에서 처음 만난, 짐 캐리를 닮으신 송충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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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 스타일로 인증샷을 찍어주신 장호님!! (풀무질 책읽기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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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쾌히 전장연 CMS후원서까지 써주신 멋진 구슬아님!! (풀무질 책읽기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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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에서 노동으로 -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의 비판적 이해』, 김종일 (일신사, 2001)

 

□ 37-40쪽

 

1) 실업의 원인 : 공급부문(즉, 실업자 자신)에서 실업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함. 그래서 노동유인, 고용가능성을 높이는 것을 주요 과제로 함. 비판자들은 이를 본질적으로 희생자를 비난하는 격(blaming the victim)이라고 지적. 실업자를 만들어낸 사회경제적 구조를 그대로 둔 채 그 피해자의 행태를 교정하는 일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는 태도라는 것. 유럽의 사회운동가들은 고용가능성과 같은 편향적인 개념 자체를 거부하고 대안으로 실업자 개개인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내세운다. 여기서 역량강화란 자신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실업자의 개인적 그리고 집합적 능력의 제고를 가리킨다.

==> 이러한 분석은 뒤에서 영미식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의 특징인 ‘노동력 부착 전략’을 비판하고, 덴마크식 ‘인적자본개발 전략’을 높이 평가하는 밑바탕이 되는데, 그러나 과연 이 두 전략이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전자가 노동자 개인을 ‘비난’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노동자를 처벌적 성격의 노동시장으로 밀어넣는다는 점에서 후자와는 비교되는 비판의 지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인적자본개발이 고용가능성 증진이라는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의 본질적 결함과 거리가 멀다 할 수 없다. 노동자의 역량강화, 인적자본개발이라는 논리가 전적으로 노동자 개인의 사회적 욕구를 발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으로의 재투입이라는 관점하에서 추동되는 것이라면,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두 가지 전략이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 그의 분석에서도 (특히 네덜란드의 경우) 두 가지 전략이 혼재되는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멀리 볼 것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노동력 부착 전략(이를테면 공공근로사업)과 인적자본개발전략(각종 평생교육사업이나 고용보험상의 실업자 교육훈련과정 등)이 병행하여 제도화되어 있다. 그런 한국적 상황을 영미식에 가깝냐, 덴마크식에 가깝냐를 구분할 수 있을까? 사회적 여론의 분위기, 즉 복지수급자를 비난하는 풍토만 놓고본다면 영미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국내에서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적인 제도의 작동 방식을 놓고 본다면 딱히 그렇게 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노동연계의 타당성 : 노동연계정책이 수급자의 도덕성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아 시민의 기본적 복지권을 훼손한다. 수급의 전제조건인 노동의무는 사실상의 강제노동으로, 이러한 시도를 방치할 경우 이 제도는 언젠가 또 하나의 구빈법이 되고 말 것이라고 지적. 정녕 복지수급자의 근로경험이 중요하다면, 왜 이들을 정상적인 고용계약을 통해 지역사회 서비스를 담당하도록 하지 못하는가? 또한 수급자들이 의무적으로 행하는 노동에 사회적 낙인이 가해져서, 해당 직업에 종사하는 일반 노동자는 물론 그러한 일 자체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3) 사회정책의 적극성과 소극성 : 복지급여가 수급자의 삶에 이바지하는 ‘적극적’ 기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됨. 거의 모든나라에서 복지급여는 최소한의 생계비를 넘지 않는다. 이 생계비에 의지해서 수급자들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위한 제반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이들을 마치 복지급여라는 아편에 중독된 사람으로 간주하는 사회 일각의 태도는 분명 잘못된 것.

 

 

□ 51쪽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필요성이 복지국가 전반에 걸쳐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어떠한 성격의 ‘적극성’인가에 관한 것이다. 작금의 추세는 국가의 적극성이 노동시장의 공급 측면에 집중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방 복지국가 전체가 온통 ‘고용가능성’이라는 개념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이 개념은 고용주의 입장에서 나온 말이다. 일자리는 넉넉하다는 전제 아래, 고용주가 ‘채용할 만한’ 사람이 못되는 원인을 해당 실업자에게서 찾아내어 그것을 제거하는 제반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로 고용가능성을 높이는 정책이다. 바야흐로 노동시장 바깥에서 연명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재상품화가 (시장이 아니라) 국가주도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 59쪽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가장 심각한 모순은 시장기제에 대한 이중적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보편적 사회복지를 통한 탈상품화 전략과 시장의 효율성을 통한 경제성장은 서로 충돌하는 목표였다. 특히, 경제가 어려워질 때 양자의 모순은 더욱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모순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일부 사민주의 복지국가가 채택한 전략은 노동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통하여 성장의 잠재력을 키워나가는 정책이었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서구 복지국가가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펼치고 있을 때,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복지국가들은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완전고용의 실현과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이들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복지에서 노동으로’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후자가 공공부조의 개혁이라는 목적 아래 추진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전자는 노동자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프로그램이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또한 노동시장의 공급 측면은 물론 수요 측면에도 개입한다는 점에서 후자와 구별된다. 믹국과 영국에서 시행중인 ‘복지에서 노동으로’ 정책의 경우 노동자의 교육, 훈련과 같은 노동공급 측면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활발하지만, 고용창출이나 임금 보조 등의 노동수요 측면은 거의 전적으로 시장논리에 맡기고 있다.

 

 

□ 89쪽 (1996년 미국 복지개혁의 주요 내용)

 

첫째, AFDC를 폐지하고 한시적 구호제도인 TANF로 대체한다. TANF의 수급자에게는 엄격한 근로의무가 주어진다. TANF의 수급기간은 평생 60개월을 초과할 수 없다.

둘째, 공공부조에 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주 정부에 넘긴다. 과거에 시행하던 JOBS와 연방정부의 대응보조금(matching fund)을 폐지하는 대신에, TANF의 소요예산은 전액 연방정부의 포괄적 교부금(block grant)을 통해 지급한다. 각 주와 지방 정부는 이 돈을 원하는 방식대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 새로운 제도에 따르면, 연방정부의 포괄적 교부금은 각 주의 1994년 지출 수준을 기준으로 책정되었고 이 액수는 2002년까지 변동이 없다. 이와 같은 방식의 지원은 주 정부지출액의 네 배를 무제한 지급하던 과거에 비해 주 정부의 빈민지원재정을 크게 압박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의회는 이러한 우려를 고려해서 1997년에 포괄 교부금과 별도로 주 정부의 노동중심적 복지개혁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예산을 마련하였다. 30억 달러의 이 지원금은 TANF 수급자 가운데 취업능력이 가장 뒤떨어지는 집단을 위해 연방 노동부에 의해 시행되었는데, 이것은 이 돈의 사용 목적이 소득지원이 아니라 노동지원임을 명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TANF에 관한 업무가 각 주로 이관되었다고 해서 연방정부가 감독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연방정부는 몇 가지 원칙과 기준을 통해 주 정부를 규제할 수 있다. 예컨대, 2002년까지 모든 주는 수급자의 50% 이상을 근로활동에 참여시켜야 한다.

 

 

□ 미국,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에서의 노동중심적 복지국가 정책의 비교 분석

 

지금까지 논의된 복지의존에 관한 담론은 다음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복지 자체에 대한 부정, 나아가 복지의존의 원인인 빈곤에 대한 개인적/문화적 인식에 입각한 것이다. 요컨대 빈곤은 개인의 결함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이들의 복지의존을 방치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는 시각이다.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관점이며, 최근에는 영국에서도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둘째는 사회적 배제, 포함이라는 관점이다. 복지의존이 길어지면 복지수급자들이 사회로부터 소외·배제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복지의존의 예방에 힘써야 된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덴마크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복지의존을 주로 경제 현실의 입장에서 다루는 관점이 있다. 이것은 복지의존이 가져올 경제적, 재정적 부담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는다. 네덜란드의 활성화 정책에서 이러한 관점이 드러난다. (191쪽)

 

노동중심적 복지정책이 대상은 미국을 제외하면 대체로 청소년에 집중되고 있다. 영국의 뉴딜은 청소년 뉴딜이 핵심이고 네덜란드의 구직자 고용법도 기본적으로 청소년을 겨냥한 것이다. 덴마크의 활성화 정책 역시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비중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 대체로 유럽 국가들의 활성화 정책이 청소년 실업자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유는, 이들의 실업률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장기 실업의 늪에 빠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EU에서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청소년 실업을 예방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회원국에 권고하고 있다.

이와 달리 믹구의 노동중심적 복지정책은 사회부조에 의존하는 편부모를 대상을 삼아왔다. 아니, 미국의 복지개혁 자체가 바로 이들의 ‘문제’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미국의 복지 개혁 역사가 공공부조 개혁의 역사이고, 공공부조 수급 대상자는 대부분 편부모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공공부조에 의지하는 편부모들이 미국 복지개혁의 핵이라는 사실보다 미국 복지국가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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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中

날씨는 대체로 맑았지만 추웠다. 한낮에는 가끔 해가 환하게 빛나기도 했다. 그러나 늘 추웠다. 산기슭 여기저기에 부리처럼 생긴 야생 크로커스의 녹색 열매가 보이기도 했고, 붓꽃이 머리를 내밀기도 했다. 분명 봄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느리게 왔다. 밤은 평소보다 추웠다. 새벽에 경계 근무를 끝내면, 취사실에서 불을 때고 남은 것을 긁어모아 발갛고 뜨거운 깜부기불 앞에 서 있곤 했다. 군화에는 좋지 않았지만 발을 녹일 수 있어 좋았다. 때로는 봉우리들 사이로 동트는 것을 보기 위해,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서 빠져나오는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산을 싫어한다. 좋은 위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산들조차 싫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 뒤편 봉우리들 뒤로 동이 트면서 가느다란 황금색 빛줄기들이 검처럼 어둠을 가르고, 이어 빛이 밝아지면서 가없이 펼쳐진 구름 바다가 붉게 물들 때, 그 광경은 설사 밤을 꼬박 새고 난 뒤 무릎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고 앞으로 세 시간은 아무것도 못 먹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우울해질 때라도, 한번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짧은 전쟁 기간 동안에, 인생의 나머지 기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일출을 보았다. 바라건대는, 앞으로 살아야 할 세월 동안 보아야 할 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본 것이면 좋겠다. (57쪽)

 


흔히 제창되는 구호 가운데 <전쟁이 먼저고, 혁명은 나중이다>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통일사회당 의용군은 그 구호를 진심으로 믿었다. 정말로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혁명을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구호는 눈속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좀더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스페인 혁명을 미루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노동자들은 점점 권력을 빼앗겼다. 온갖 부류의 혁명가들이 점점 더 많이 투옥되었다. 모든 행동이 군사적 필요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졌다. 손쉽게 써먹을 수 있는 핑계였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우월한 지위로부터 점차 물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났을 때, 자본주의의 재도입에 저항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될 터였다. 나는 일반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마드리드 주위에서 영웅적으로 죽어간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무슨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 정책의 방향을 잡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92쪽)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후방에 적대적인 주민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의 통신 시설을 지키고 파업을 진압하는 등의 일을 해야만 전방의 군대도 유지할 수가 있다. 따라서 프랑코의 후방에서는 이렇다 할 저항 운동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프랑코의 영토 내에 있는 인민, 적어도 도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이 프랑코를 좋아했다거나 그를 원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가 계속 우익 쪽으로 움직여가면서 정부의 우월성은 점점 빛을 잃었다. 이런 점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것이 모로코 사건이다. 모로코에서는 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프랑코는 악명 높은 독재를 수립하려 했다. 그런데 무어인들은 실제로 인민전선 정부보다 프랑코를 더 좋아했다! 명백한 사실은 모로코에서는 반란을 선동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전쟁에 혁명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어인들에게 인민전선 정부의 선의를 보여주기 위한 우선적인 조치는 바로 모로코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스와 영국을 회유하려는 헛된 희망때문에 전쟁에서 가장 좋은 전략적 기회를 날려보내고 말았다. 공산주의 정책의 전쳊덕 경향은 이 전쟁을 평범하고 비혁명적인 전쟁으로 축소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전쟁에서는 인민전선 정부가 극도로 불리했다. 그런 종류의 전쟁은 기계적 수단, 즉 궁극적으로 무제한의 무기 공급에 의해서만 승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의 주된 무기 지원국인 소련은 이탈리아나 독일과 비교해 볼 때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어쩌면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내건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다>라는 구호가 언뜻 보기보다 덜 환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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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현배려.

 

 

소중한 이가 떠났다.
사실 내게 그가 그렇게 소중했던 이였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오늘 아침 돌아서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목이 매여오는걸 보니 그가 내게 얼마나 큰 무게를 남긴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군대를 가기 전 1년 반동안 그 조그만 학교에서, 겨우 3-4명이서 이것저것 해보겠다고 참 아옹다옹거리면서 많이 웃고 싸우고 또 즐거웠는데... 얼마 전 제대하고 나서도, 그때와 같은 설렘은 없을지 모르지만 다시 그런 마음으로 돌아가 너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었는데...

 

가끔 문득문득 그 때 그 무리들이 다시 모여서 인천 계산동 골목을 돌아다니는 꿈도 꾸곤 했는데, 이제 너가 없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다 허망해지고 말았구나.

 

내가 조만간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많은 얘기 나누고 싶었는데, 너는 너만 혼자 사랑하는 하나님 곁으로 떠났구나...

 

그런 너가 너무 야속하지만, 내가 야속해하는 만큼 너의 세상에서 행복하렴. 그리고 그 곳에선 다신 아프지 마. 그렇게 아프도록 너 자신도 모를만큼 속으로 썩고 있지도 말고.

 

안녕, 너무 빨리 나의 추억이 되고 만 소중한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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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 <위건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2부 발췌독

 

 

그게 우리가 듣고 자란 말이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마주친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반감은 극복 불능이다. 살인자나 남색자에겐 호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입 냄새가 지독한 사람에겐 호감을 가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호의를 품는다 해도, 아무리 그의 정신과 성품을 존경한다 해도, 입 냄새가 고약하면 그는 끔찍한 대상이 되며 당신은 마음속 깊이 그를 혐오하게 된다. 평균적인 중산층 사람이 노동 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바로 우리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이다. (172-173쪽)

 

 

 

그렇다면 ‘하층민’은 정말 고약한 냄새가 날까? 물론 대체로 그들이 상류층보다 깨끗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들의 생활 여건으로 볼 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처럼 개명한 시절에도 영국 주택 절반 이상에 욕실이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유럽에서 매일같이 온몸을 씻는 풍습은 아주 최근에 생겨난 것이며, 노동 계급은 대체로 부르주아보다 보수적이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눈에 띄게 점점 더 깨끗해지고 있으며, 앞으로 100년 뒷면 일본인만큼 깨끗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동 계급을 너무 이상시하는 사람들이 노동 계급의 특징을 무조건 찬미하여 불결함도 장점인 양하는 것은 딱한 일이다. 그래서 희한하게도 사회주의자와 체스터턴 같은 감상적인 가톨릭계 민주주의자가 손을 잡는 일이 벌어진다. 이를테면 둘 다 불결은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청결은 한 때의 유행 아니면 사치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 덕분에 노동 계급 사람들이 안 깨끗한 건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원해서라는 오해가 사실처럼 비칠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 실제로는 욕실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쓰려고 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중산층 사람들이 노동 계급은 더럽다고 ‘믿는’데 있다. 아울러 더 문제인 것은 아무튼 노동자는 ‘본래부터’ 더러운 존재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175-176쪽)

 

 

 

중산층인 사람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다고 하자. 그래서 달라지는 게 과연 얼마다 될까?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그는 계속해서 돈벌이를 해야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그가 부르주아로서의 경제적 지위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취향이나 습관, 거동, 상상력의 배경은, 공산주의 용어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는 변할까? 이제는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그가 여전히 습관적으로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와 뜻이 같을 노동 계급 사람보다는 그들의 위험한 ‘과격분자’라 여기는 같은 계급 사람과 있는 게 훨씬 편하다. 음식, 와인, 의상, 독서, 그림, 음악, 발레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현저하게 부르주아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 (182-183쪽)

 

 

 

골즈워디는 민감하고 눈물 많은 전쟁 전 인도주의자의 훌륭한 표본이다. 그는 결혼한 여자는 전부 사티로스에게 사슬로 묶여 지내는 천사라고 생각될 정도로 병적인 연민 콤플렉스를 보이는 작품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과로하는 사무원이, 저임금에 시달리는 농장 인부가, 타락한 여인이, 범죄자가, 창녀가 동물이 겪는 고통에 대해 언제나 분노로 부르르 떤다. 그의 초기작을 보면 세상은 압제자와 피압제자로 양분되며, 압제자는 이 세상에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다 터뜨려도 타도하지 못할 무지막지한 석상처럼 꼭대기에 앉아 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정말 타도를 원할까? 확고부동한 압제에 맞서 싸우는 그를 붙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자신이 그것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뜻밖의 일들이 벌어지고 그가 알던 세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의 생각은 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압제와 불의에 맞서 싸우는 패배자들의 옹호자로 출발한 그가 끝에 가서는 경제적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노동 계급이 가축 무리처럼 식민지에 끌려가도 좋다는 주장을 한다.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는 아마 좀 더 품위 있는 형태의 파시즘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것이 감상주의의 불가피한 운명인 것이다. 그의 모든 견해는 현실을 최초로 맞닥뜨리자마자 정반대의 것으로 변해버린다.

(...)

다른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영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높은 생활수준은 우리가 제국을, 그중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열대 지역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영국인이 상대적으로 안락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인도인 500만 명이 기안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한다. 그것은 참으로 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택시에 발을 들여놓거나 딸기 곁들인 크림 한 접시를 먹을 때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시이다. 대안은 제국을 뒤집어엎고 영국을 축소시켜, 우리 모두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고 청어와 감자를 주로 먹어야 하는 춥고 시시하고 작은 섬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좌파 사람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도덕적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태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한다.

(212-215쪽)

 

 

 

노동자는 진정한 노동자로 남는 한, 엄밀한 의미의 사회주의자인 경우가 거의 혹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다분하며, 기회가 닿으면 공산당에도 표를 던질 수 있겠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그보다 신분이 높고 책으로 훈련받은 사회주이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 마련이다. 평번한 노동자에게, 이를태면 토요일 밤 아무 선술집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유형에게, 사회주의는 더 많은 임금과 더 짧은 노동 시간과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사람이 없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혁명적인 유형에겐, 즉 기아 및 실업에 항의 하는 시위에 참석하고 고용주의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오른 유형에겐, 사회주의란 압제에 저항하는 일종의 구호일 뿐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진정한 노동자라면 그 누구도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보다 심각한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내가 보기엔 그런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보다 더 진정한 사회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와는 달리 사회주의란 곧 정의와 상식적인 양식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 그가 모르는 것은 사회주의를 경제적 정의로만 축소할 수는 없으며,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면 우리의 문명과 우리 자신의 생활양식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236-237쪽)

 

 

 

나는 사회주의자(자기 글을 소책자로 만들어내는 지식인이며 스웨터 차림의 더벅머리에 마르크스를 수시로 인용하는 타입을 말한다)를 보며 도대체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곤 한다.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특히 자신과는 가장 동떨어진 부류인 노동 계급에 대한 사랑이라 믿기는 어려울 때가 많다. 내가 보기에 많은 사회주의자들의 숨은 동기는 병적으로 심한 질서의식일 뿐이다. 그들이 현 세태를 불쾌히 여기는 것은 그것이 비참한 현실을 초래하기 때문도,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장기판 비슷한 무엇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평생 사회주의자로 지낸 버나도 쇼의 희곡들을 생각해보자. 노동 계급의 생활에 대한 이해나 자각이 얼마나 많이 드러나는가? 쇼 자신은 노동자를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것은 “연민의 대상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노동자를 그런 역할로도 무대에 올리지 않으며, W.W.제이콥스의 우스꽝스러운 인물 같은 모습으로만 무대에 올린다. 노동계급에 대한 그의 태도는 기껏해야 <펀치>처럼 키득거리는 태도이며, 그보다 심각한 경우에는 그들에게서 경멸스럽거나 역겨운 점만 발견한다. 그에게 빈곤이란, 더욱이 빈곤에서 비롯되는 정신의 빈곤이란 ’위에서‘ 없애야 할 무엇이다. 그것도 필요하다면, 심지어 가급적이면 폭력으로 없애야 할 무엇이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인간을 숭배하며, 독재자나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에게 호감을 갖는 것이다. 또 그래서 스탈린과 무솔리니를 거의 동격으로 보는 듯하다. (240-241쪽)

 

 

 

우리는 유토피아의 시민들이 토마토 통조림 공장에서 하루 두 시간씩 손잡이 돌리는 일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일부러 더 원시적인 생활방식으로 돌아가 자신의 창조적 충동을 달래기 위해 나무 세공이나 도자기 칠이나 베 짜기 같은 일을 소소하게나마 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그럴듯하지 않은 광경이다. 그것은 항상 작용하지만 항상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은 원리 때문이다. 즉, 기계가 ‘있는 한’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그만인데 굳이 우물물을 길어 쓸 사람은 없다. 여행을 생각해보면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개발 안 된 나라에서 원시적인 방법으로 다녀 본 사람이라면 그런 여행과 기차나 자동차를 이용하는 근대식 여행의 차이가 생사의 차이만큼 크다는 것을 안다. 낙타 등이나 달구지에 짐을 싣고 걷거나 짐승을 타고서 다니는 유목민은 온갖 불편을 겪기는 하지만 적어도 여행하는 동안 살아있다. 그에 비해 급행열차나 호화유람선의 승객에게 그 여행은 일종의 공백기 또는 죽음이다. 그렇지만 철길이 존재하는 한 사람은 기차로 여행하게 되어 있으며, 자동차나 비행기도 마찬가지다. (...) 모든 걸 기계로 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모든 게 기계로 이루어진다. 일부러 원시적인 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 구식 연장을 쓰는 것, 무슨 일을 할 때 괜히 조금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전부 일종의 딜레탕트 취미이며 과도한 멋 부리기다. 그것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앉아 돌로 만든 식기로 만찬을 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기계의 시대에 수공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대충 흉내만 내어 그 옛날의 찻집이나 튜더 양식 주택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노고와 창조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본성을 좌절시킨다고 하겠다. 그것은 눈과 손의 활동을 불필요하게 하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한다. ‘진보’의 사도들은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고 선언하곤 하는데, 우리는 그럴 수 있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끔찍하게 긴지를 지적함으로써 그들을 구석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 대체 손은 왜 쓴단 말인가? 코를 풀거나 연필을 깎는데도 손을 쓸 필요가 있나? 어깨에 쇠와 고무로 만든 무슨 장치를 달아 쓰면 될 테고, 그러면 팔은 뼈와 가죽만 남은 줄기처럼 시들어버릴 것 아닌가? 그것은 신체의 모든 기관과 모든 기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숨쉬고, 번식하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할 이유가 아예 없어진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기계가 대신 해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기계적 진보의 논리적 귀결은 인간을 병 속에 든 뇌 비슷한 무엇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물론 우리가 뜻하는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목표이다. 위스키를 매일 한 병씩 마시는 사람이 딱히 간경화에 걸릴 뜻이 있는 게 아니듯 말이다. (269-271쪽)

 

 

 

파시즘 운동을 어느 정도 지켜본 사람이라면 말단의 파시스트 당원이 반듯한(이를테면 실업자의 운명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의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보수주의의 나쁜 변종뿐 아니라 좋은 변종에서도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전통과 질서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파시즘을 일단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요령 없는 사회주의들의 선전만 잔뜩 듣다 보면 파시즘을 유럽 문명의 장점을 지킬 마지막 방어선으로 보게 되기가 아주 쉽다. 심지어 한손엔 몽둥이를 들고 다른 한손엔 약을 든, 상징적으로 최악인 파시스트 깡패도 자신을 깡패라 생각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독교계를 지키기 위해 롱스보 고개에서 야만족과 맞서 싸운 롤랑이 된 기분일 것이다. (...) 그들은(사회주의자들) 경제적인 면에만 눈이 멀어 있어서, 인간에겐 영혼이란 게 없다는 가정에 따라 활동해왔으며, 노골적으로건 암시적으로건 물질적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말았다. 때문에 파시즘은 쾌락주의와 ‘진보’라는 값싼 관념에 반발하는 모든 충동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파시즘은 유럽 전통의 옹호자 시늉을 할 수 있었으며, 기독교 신앙과 애국주의와 군사적 가치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파시즘을 ‘집단 사디즘’이니 뭐니 하며 간단히 무시해버린다면, 그냥 무익하기만 한 게 아니라 몹시 해로울 수 있다. 파시즘을 머지않아 절로 사라질 예외적인 현상인 듯 여긴다면, 누구에게 몽둥이로 얻어 맞고서 깨어날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287-288쪽)

 

 

 

민감한 사람들이 흔히 ‘진보’와 기계문명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은 정서의 차원으로서만 변호할 수 있다. 그것이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로 타당하지 않은 것은,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기계화와 표준화에 반대한다, 고로 나는 사회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한다면 사실상 ‘나는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기계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인데, 말이 안되는 소리다. 우리는 모두 기계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기에, 기계가 작동을 중지한다면 대부분 다 죽게 될 것이다. 기계문명을 혐오할 수 있고 혐오하는 게 옳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문제일 수 없다. 기계문명은 이미 ‘여기’ 존재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만 비판할 수가 있다. 우리 모두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것은 낭만적인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온수 나오는 욕실 딸린 튜더 양식 오두막에 사는 문단의 신사나 소총과 수레 네 대 분량의 통조림을 챙겨 정글로 들어가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사나이가 그런 사람들이다. (...) 아무리 바람직해 보인다 해도 보다 단순하고 자유롭고 덜 기계화된 생활양식으로 돌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는 숙명론이 아니라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일 뿐이다. ‘벌집 국가’에 반대한다고 해서 사회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벌집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은 인간적인 세상이냐 비인간적인 세상이냐를 선택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단지 사회주의냐 파시즘이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파시즘은 아무리 최상의 것이라 해도 미덕을 다 빼버린 사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293-295쪽)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나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압제가 타도되는 꼴을 보기를 바라는(그냥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바라는)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하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대부분 그런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받아들인다 해도 몹시 못마땅해할 것이다. 이따금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들을 때, 그리고 그들의 책을 읽을 때는 더더욱, 사회주의 운동 전체가 그들에겐 일종의 흥미로운 이단 사냥에 불과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장단에 맞춰 이리저리 미친 듯 뛰어다니며 '어험, 어험, 이거 변절자의 피 냄새가 나는구먼!' 하는 듯하다. 그래서 노동 계급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자신이 사회주의자라 느끼기가 훨씬 더 쉬운 것이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융통성 없이 구는 일이 너무 많은데, 그런것들은 너무나 쉽게 근절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문학에 대해 취하는 딱한 태도를 보자. 많은 경우가 기억나지만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사례다. <데일리 워커>의 전신 중 하나인 <워커스 위클리>에 '편집인 책상 위에 책' 타입의 문학 한담 칼럼이 있었다. 여기서 몇 주 동안 셰익스피어에 관한 얘기를 연재했는데, 그 때문에 몹시 화가 난 독자가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친애하는 동지, 우린 셰익스피어같은 부르주아 작가들 얘긴 듣고 싶지 않아요. 좀더 프롤레타리아적인 얘길 쓸 순 없나요?" 편집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색인을 다시 들춰보시면 셰익스피어가 여러번 언급되어 있다는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로 불만을 간단히 잠재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디 주목하시라. 셰익스피어는 마르크스의 축복을 받자 당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런 정서가 민감한 사람들을 사회주의 운동에서 떼어놓는 것이다. (297-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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