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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0/26
    올해의 노벨문학 수상자 도리스 레싱
    진아
  2. 2007/10/25
    도리스 레싱
    진아
  3. 2007/10/24
    한번 살아보자!
    진아
  4. 2007/10/23
    지혜...
    진아
  5. 2007/10/22
    짝사랑의 끝.
    진아
  6. 2007/10/21
    진보성에 대해서...
    진아
  7. 2007/10/21
    죽음의 욕망...
    진아
  8. 2007/10/20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의 두가지 과제(1)
    진아
  9. 2007/10/20
    삶은 폭력이다.
    진아
  10. 2007/10/20
    ...
    진아

올해의 노벨문학 수상자 도리스 레싱

`시대의 반항아` 도리스 레싱의 삶과 문학 [연합]

`19-20세기 모든 문예사조를 아우르는 작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영국 출신 여류작가 도리스 레싱(88)은 "20세기 영어로 소설을 쓰도록 선택받은 몇 안되는 가장 흥미진진한 지성인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는 현대 영국 문학계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페르시아에서 태어나 짐바브웨에서 성장기를 보낸 레싱은 젊은 시절 공산당에 참여하는 등 일찍부터 다양한 세계를 경험해왔다. 또 열네 살에 학교를 떠나 다시는 어떤 학교도 다니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전도되면서는 이혼의 아픔까지 경험했던 작가다.

그런 이채로운 경험들은 작가로 하여금 언제나 주류에서 벗어나 '시대의 반항아' 역할을 자처해오도록 만들었다. 기성의 가치, 제도, 체제, 이념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레싱이 평생 견지해온 일관된 태도였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레싱은 1919년 이란의 커만샤에서 태어났다. 24년, 다섯 살 나이로 가족을 따라 아프리카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의 농장으로 이주했다. 정부 지원금과 융자를 받은 이주였기 때문에 그의 가족은 진흙으로 손수 집을 지어야 했을 정도로 힘들게 살았다. 열세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으로 공부했고, 열다섯 살엔 집을 떠나 타이피스트, 전화 교환원 등으로 일했다.



  38년 공무원과 결혼해 두 자녀를 낳고 이혼한 레싱은 재혼했다가 다시 이혼한다. 레싱은 둘째 남편의 성(姓)이다. 49년 재혼에서 얻은 아들만 데리고 소설가를 꿈꾸며 영국 런던으로 향한다. 그때 그의 수중엔 단돈 20파운드가 전부였다. 이듬해 그는 자전적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 (The Grass is Singing)』를 발표해 런던에서 큰 반향을 끌어낸다.

백인 농부의 아내와 흑인 하인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인종 간 갈등을 비판한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보듯 초기의 레싱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백인들의 아프리카 식민 통치와 흑인에 대한 억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때문에 그는 1956년부터 남아공 입국이 거부되었다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이 무너지고 흑인 정부가 들어선 1995년에야 입국이 허용되었다. 또한 그는 1952년에 영국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1956년 헝가리 봉기를 계기로 탈당한 바 있는데, 이 무렵 그의 소설들은 진한 사회주의적 경향과 강렬한 반핵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북대 왕철(영문학) 교수는 “레싱은 영국인이지만 제3세계 작가라 할 수도 있을 만큼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나 백인의 이중성을 다룬 작품이 많다”고 설명했다.

레싱이 천착해온 주제는 그녀가 성장한 아프리카. 영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인종 간 불화, 착취, 문명 간 충돌과 갈등, 제국과 자본주의의 모순 등을 목격해야 했던 레싱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척박한 아프리카에서 살았던 자기 부모의 삶을 근간으로 한 첫 작품 '풀잎은 노래한다'(1949)가 바로 그같은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백인 식민주의자들에게 착취당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삶과 자연, 그 과정에서 황폐해가는 백인들의 심리적, 도덕적 공황 상태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레싱 문학의 트레이드마크는 역시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황금 노트북>(1962)이 “초창기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적 업적이며 남녀 관계에 관한 20세기적 관점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책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작 레싱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규정하는 데에 부정적이다.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이념적이고 남녀 관계를 과도하게 단순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해명이다. <황금 노트북>은 자서전적 (논)픽션과 노트, 수기, 일기 등이 다양하게 오가는가 하면 메타소설적 구성을 짜는 등 현란한 형식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평민사에서 한때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으며, 도서출판 ‘뿔’에서 이달 중에 다시 나올 예정이다.



◆다양한 작품세계=레싱의 대표작이라면 『황금 노트북 (The Golden Notebook·1962) 』이다. 세계 페미니즘 운동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른 소설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한 여류작가가 예술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터득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로 모두 5부로 구성됐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소설은 내게 여전히 가장 교훈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다”고 적었다.



  이 소설은 2002년 세계 100대 작품에 선정됐다. 노르웨이의 노벨연구소와 북 클럽스가 세계 50여 개국 출신 유명 작가 10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다. 설문에 참가한 작가는 살만 루슈디(이란), 노먼 메일러(미국), 밀란 쿤데라(체코), 카를로스 푸엔테스(멕시코) 등 당대의 거장이다. 2005년엔 미 시사주간지 ‘타임’에 의해 ‘세계 100대 작’으로 선정됐고, 90년대 중반 중국에선 재판 8만 권이 하루 만에 매진되기도 했다.
레싱은 특히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적 인물로 꼽힌다. 개인의 다양한 욕망의 충돌과 갈등을 그려낸 '황금노트북'(1962)은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대표작이자 현대 페미니즘 문학의 정전으로 꼽힌다.

혁명이나 전쟁, 비극적인 사건이 아닌 여성들의 일상을 통해 인종, 계급, 성, 제도적인 문제를 성찰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여성들의 자아를 괴롭히는 가치관의 혼돈, 여기에서 비롯되는 정서적 무력감의 실체를 밝히고자 했다.

스웨덴 한림원도 11일 레싱의 수상 사실을 발표하며 "회의와 통찰력으로 분열된 문명을 응시한,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그린 서사 시인"이라며 특히 '황금 노트북'이 가장 두드러졌다고 밝혔다.

유제분 부산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이데올로기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줬을 뿐 아니라 여성의 일상이 바로 소설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대표작은 1988년 발표한 '다섯째 아이'. 해외에서는 이미 고전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전통적 의미의 가정을 추구해나가는 두 부부의 가정이 비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괴멸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며 인간의 근원과 가치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그녀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것은 페미니즘도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도 아니었다. 수없이 변화하는 주제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개인의 자유와 해방이 곧 사회적 해방 또는 정의와 연결된다는 신념"이었다.

레싱의 페미니즘은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과 달랐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영국에 거주하던 레싱이 짐바브웨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그는 미국인 페미니스트들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한 달에 고작 70∼80달러로 연명해야 하는 아프리카의 현실은 무시하고 그들은 서양식 교육방법 따위나 가르치고 있었다. 레싱은 그건 “문화제국주의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백인이나 중산층 여성들의 삶은 크게 변한 것이 사실이지만 진정 변해야 할 소외계층의 삶은 예전과 다름없다.”-자서전 『나의 속마음』(원제 Under My Skin, 1994)

1950년대 '앵그리 영맨'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레싱은 페미니즘과 정치에 대한 강력한 견해로 잘 알려져 있다. 1962년 작품 '황금 노트북'은 페미니스트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페미니즘 소설의 고전으로 꼽힌다.

그러나 레싱은 페미니스트 운동과 거리를 두고 살았으며, 여성들만 사는 세상에 살기를 원치는 않는다고 말했다. 레싱은 두 번 결혼했으나 곧 이혼했고, 레싱은 두 번째 남편의 성을 아직도 쓰고있다.

레싱은 여든이 넘어서도 창작 활동의 끊을 놓지 않은 타고난 작가로 꼽힌다. 두 권의 자서전 '내 피부 아래'와 '그림자 속을 걷다'는 자서전의 전범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82세였던 2002년 소설 '가장 달콤한 꿈'을 출간하기도 했다.

영국 최고의 문학상으로 꼽히는 서머싯 몸 상(1956)을 비롯해 메디치 상(1976), 유럽 문학상(1982), 아스투리아스 왕세자 상(2001) 등을 수상했으며 그 같은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아 1991년부터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혀왔다

유 교수는 "레싱이 상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늦게 수상한 감이 없잖아 있다"며 "사실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19-20세기 문예사조를 아우르고 있는 대단한 작가"라고 평가했다.

'런던 스케치'를 국내 번역해 소개한 서숙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도 "레싱은 세계문학의 거목과 같은 작가며 강력한 작가"라며 "백인으로 식민지에 살며 지켜본 인종차별, 식민주의자들과 원주민들의 관계를 지켜보며 느낀 인간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작품에 잘 반영돼 있다"고 말했다.

용인대 영어과 강의교수인 정소영씨도 "처음에는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며 소설에서 사실주의적 작품에 천착했던 작가"라며 "특히 '골든노트북'에는 인간의 무력함과 세계의 폭력성 등이 잘 반영돼 있다"고 설명했다.

분명 20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지만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는 다소 생소한 작가로 꼽혀왔다. 현재 국내 소개된 작품으로는 '마사 퀘스트', '황금 노트북', '다섯째 아이', '풀잎은 노래한다' 등이 있다.
(서울=연합뉴스)



레싱의 대표적 작품들



 ◆황금노트북(The Golden Notebook)



 도리스 레싱의 자전적 요소가 강한 소설이다. ‘자유로운 여자들’이라는 테두리 소설과 주인공이 쓰는 4권의 일기가 교대로 전개되며, ‘소설 속에서 소설 쓰기’라는 메타픽션적 구성을 취한다. 주인공인 여성작가 안나는 자신의 여러 역할(사회주의자·이혼녀·어머니·연인…)사이에서 갈등을 겪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1997년 평민사에서 출간한 한국어판은 현재 절판상태. 출판사 뿔에서 새로 번역, 10월 중 출간할 계획이다.



 ◆다섯째 아이(The Fifth Child)



 아주 정상적인 두 남녀가 만나 전통적 의미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간다. 하지만 그들의 ‘다섯째 아이’로 이상한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비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난다. 그 아이가 ‘이상적인’ 가정을 파괴해가는 과정을 간결하고 긴박한 문체로 그리면서 레싱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999년 민음사 출간.



 ◆런던스케치(London Observed: Stories & Sketches)



 런던의 구석구석을 배경으로 그린 열 여덟 편의 단편집. 좁은 도로에서 마주 선 채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두 대의 자동차와 그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는 다른 자동차들을 그린 ‘원칙’등을 비롯해 현대 도시인의 자화상이 담겨있다. 2003년 민음사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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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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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살아보자!

미치고 말것같다.

정희영이..

드디어...

오호..

이제 그걸 느끼다니...

넘 늦었는가...

 

철들무렵부터 시작된

나의 이 남모르는 우울증..

이걸 어쩔것인지...

어찌하면 좋을것인지...

그끝은 결국 미치는걸까?

죽음이란 말인가?

 

생이 힘들었던만큼

살자!

 

나의 생이 아까웠던만큼

함 살아보자!

 

'뫔 가는데로~' 라는말이있다.

뫔...

몸과 마음의 합성어인듯한 미묘한 말이다.

 

그려~!

너무나 답답하고 힘들었던만큼

그게 아까웠던만큼

살자 이거다.

 

결국 아까운 인생으로 끝난다한들...

어차피 끝은 누구에게나 있는것.

행복하고 밝은 생을 산 사람이나

어둡고 답답한 삶을 산사람이나

결국 끝은 똑같다.

그 끝을 미리 내다볼건 없다.

 

그래!

함 살아보는거야!

부딪쳐 살아보는거여!

머 더이상 두려울것도 겁낼것도 없다.

마구마구 살아보는거야!

죽음보다는 나을것 아닌가!

 

이판사판이다....

난 이판사판 불붙을 열정이 필요하다.

삶의 에너지,삶의 기운이 필요하다...

이판사판 붙고보자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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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하느님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상심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그 둘 사이의 차이점을 알 수 있는 지혜를 나에게 허락하셨다.


-성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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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의 끝.

 

사랑이란게 무엇일까?

측은지심인가...?

 외로움과 외로움이 만나는 그것일까?

 

그는

나를 필요치 않는다는걸 안다.

그는

나없이도 잘 살고있다.

그가 원하는 행복은

내가 아닌것이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잘 알고있기에...

그는 정확하고

그는 냉정할줄 알기에...

나는 그것을 알기에...

씨익~

웃고마는 것이다.

사랑을 느끼지만

그게 사랑은 아닌걸 알기에...

“사랑에 대한 유일한 승리는 그 사랑으로부터 탈출이다.”

   이렇게 나폴레옹의 짝사랑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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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성에 대해서...

 

 

 

 

내가 진보적이라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나의 감수성을 개방하는 삶의 자세일 것이다.

빵이 해결되었어도 건강이 해결되지않아 고통을 겪고있는 동포가 있는가하면,

건강이 확보되었어도 사랑의 결핍으로 고뇌에 빠져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이 듬뿍 주어져 있어도 나태로 자기를 파멸시키고 있는 자도있다.

이러한 인간의 고통을 우리는 항상 총체적으로 관회해야 하는 것이다.

어찌 빵의 분배 하나만으로 인간세의 대동(大同)을 건설하겠다는 것인가?

 

인간삶의 상황적 역동성과 다양성에대한

통찰과 유연함이 필요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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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욕망...

 

 

삶에대한 욕망이 있는것만큼

죽음에대한 욕망도 있는가보다.

 

죽음의 욕망이 날 휘감을때엔..

난 어찌할바를 모르겠다.

 

어찌해야 하는가?

이 죽고싶은 욕망을 어찌할것인가?

이 없어지고싶은 욕망..

아무것도 할수없게 만드는 이 늪의 느낌을

어찌할것인가?

 

나는 이렇게 파멸하고 마는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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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자본주의 세계의 두가지 과제

현금 우리가 살고있는 최대의 과제는
공산주의이념이 붕괴된 이 마당에
최소한 그 이념에 권위를 주고있는 실험의 장이 사라지고 있는 이 마당에,
자본주의라는 유욕의 체계를 억제시킬수 있는 공산주의에 상응하는
새로운 조직화된 힘(organized curbing power)을
어디에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그 일점에 모아진다.
공산주의의 기권은 자본주의라는 인간본연의 주류(主流)에대한 지류(支流)로서의
억제기능,인간본연에 대한 인간당연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그러한 기능의 회복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본주의는 문명의 자연이로되 <자연의 자연>은 아니다.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를 떠나 생존할 수 없다면
자연의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자연은 방치되거나 방임될수 없다.
인간의 욕망을 억제시키는 궁극적 힘은 욕망을 발생시키고 있는 몸
그 자체로부터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욕망을 억제시킬수 있는 힘이 나오기 전에
욕망 그 자체의 오판에 의하여 몸을 파멸시키는데까지 이를 수 있다는데
문명속의 인간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을 우리는 "질병'이라고 부르며,
그 질병의 종국은 "죽음"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가지 문제를 생각해 볼수있다.
그 첫째는,자본주의라는 인간세의 현상 그 자체의 인식을 순화시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여태까지의 자본주의의 인식이 오로지 공산주의와의 대결속에서대자적으로 설정되어왔던 그러한 측면들을 과감히 털어 버리는 것이다.
여태까지의 자본주의의 인식이 오로지 공산주의에 대립되는 그 무엇으로서,공산주의와 대결키위하여 자기동일성을 유지 존속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자본주의라는 기존의 이념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인식체계를 위하여 또다시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므로
그결과는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 수정 내지는 다양성의 확보라는 방향으로 발전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키워나가야 할것은 결코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건간한 사회며 보람있는 인간상이며,
그 사회를 구성하고있는 개개 모두의 건강(health)이다.
이 건강을 위하여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행위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라는 과제만을 철저히 점점해 봐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제적 행위방식이 반드시 파괴적인 집약적 도시화나 막중한 자본의 투자,대량생산,고도의 테크날로지,개발주의 통제 플래닝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기존의 모델에 순종해야만 할 필요가 있는가?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본성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도시 문화의 효용증대만을 꾀하는 현금의 경제학에 자본주의 혹은 경제현상의 미래를 맡길수 있겠는가?
과연 경제현상을,인간이라고 하는 토탈한 걸작품과 생명없는 아톰의 법칙과를 동일시 하려고하는 과학성에 의거하여 법칙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것은 우리 삶의 경제 현상일 뿐이며,자본주의가 아니다.
공산주의가 없어지면 자본주의도 없어져야 마땅하다.
자본주의가 없어진 경제에 남는것은
오로지 인간의 과제일 뿐이다.

둘째,자본주의의 독주나 독선을 막는 힘은 궁극적으로 자본의 논리 그 자체에 의하여 나올수 밖에 없다.
이것은 칼 맑스가 자본주의는 자본의 확대재생산이라는 잉여가치창출의 법칙 그 자체에 의하여 필망할수 밖에 없다는 논리와도 상통하는 것이지만,
여기에 우리는 필망이라는 한 시점적 묵시성을 설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볼때 지금 자본의 논리를 제어할수 있는것으로서
인류에게 싹트고 있는 가장 근원적 공통의식을 묶는 개념이 바로 "에콜로지"라는 것이다.
현금 에콜로지에 대한 관심은 인간이라는 유기체와 그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문명의 구조에대한 관심으로까지 확대되었고,
또 모든 유기체의 스스로 그러함에 폭력을 가하는
모든 문명의 폭력에대한 자성의 공동체의식 내지는
그 폭력을 관장할수 있는 정치,사회적 역량의 증대를 꾀하는 민권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에콜로지의 미래적 가능성을 극대화 시킴으로써 매우 총체적인 문명의 억제기능을 강화하는데 과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 에콜로지운동의 비극은
첫째,그것이 아직까지는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요,
둘째 그것이 공산주의와 상응하는 조직력(일례를 들면 공산당 조직과도 같은)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의 해결도 일시에 이루어질 수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정치조직 형태와는 다른 의미에서
지구촌적 공동체 의식이 확산되어 가면서,
그리고 소국과민(p.s작은정부,소화小化,아나키즘등을 의미하는듯함)의
제도적 변혁이 초래되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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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김용옥의 생태공동체운동에관한 언급이 나온 부분을 읽다가 발췌한겁니다.씌여진 때가 1991년 소련의 공산주의의 붕괴라는 시점중이라 그무렵의 사회적 분위기도 읽을수 있게되더군요...

생태공동체운동은 과거 공산주의 사상을 뛰어넘는
더욱 근원적이고 절대절명의 시대의 요청입니다만...
현재의 이 운동의 한계성을 뛰어넘을수있는
개인들과 조직의 역량을 키워나가야 하는데...
암튼 포기하지말고 멋지게 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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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폭력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삶은 폭력이다."
"사회는 폭력이다."
"생물 개체간의 의사소통방식은 폭력이다."

...중략...


이처럼 폭력은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고 때로는 언어로서, 때로는 물리력으로, 때로는 침묵적으로 행사되며, 행사주체의 기득권의 유무에 따라 은폐되거나 제도화된 폭력으로 합리화 되기도 하고 원시적인 폭력으로 저주받기도 한다. 따라서 '폭력 없는 세상의 염원'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며,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폭력의 소멸이 아니라 정당한 폭력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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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공동체 게시판의 김완진님의 칼럼에서 발췌한 겁니다.
어젯밤 갑자기 이 글이 생각이났는데...
제작년 읽을때보다 지금은 더욱 절감하게 되는군요!

삶은 폭력이다....
삶은 결국 폭력을 밑받침으로 지탱되는거다.

흔히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선교를 강조한다고하여 폭력적이라고 하는데
현대의 종교의 역량을 볼때
종교는 더이상 폭력성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선택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이 삶은 다분히 폭력적이라는것.
내가 이세상에 태어났다는것 자체가 나의 의지와 무관한 폭력인거고
가족이라는 관계도...
사랑도...마찬가집니다.
(사랑은 특히 폭력적입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또한 아이들의 저에대한 사랑역시

가히 폭력적일수 있다는거죠~!

삶 자체가 폭력성을 지니는데
그안의 사랑이 폭력적인건 당연한건가!


아뭏든 삶 자체가 폭력이란 생각에
갑자기 담~담해 집니다.
제가 그리도 고민하고 괴로와하던 고민들도
한순간 풀리는것 같기도 하구요...

삶은 폭력이다.
삶 자체가 폭력인데
무어가 특별히 아쉽고 서럽고 괴로운게 따로 있겠는가?
나뿐 아니라 세상의 삼라만성이 다 괴로운것을...
저 풀도 괴롭고 저 꽃도 벌레도 병아리도 다 괴롭다 하쟎습니까?

오호라...
그렇구나...

어차피 삶은 폭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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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란게 무엇일까?

측은지심인가...?

 외로움과 외로움이 만나는 그것일까?

 

그는

나를 필요치 않는다는걸 안다.

그는

나없이도 잘 살고있다.

그가 원하는 행복은

내가 아닌것이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잘 알고있기에...

그는 정확하고

그는 냉정할줄 알기에...

나는 그것을 알기에...

씨익~

웃고마는 것이다.

 

사랑을 느끼지만

 

그게 사랑은 아닌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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