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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1) 먼저 이야기해야할 것

지난 주에 급하게 다녀온 캄보디아. 예정했던 그리스-터키 여행이 여행사 사정으로 취소되면서 급하게 대체한 일정. 최저가 패키지 여행에 혼자 덜렁 따라가긴 했는데,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는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모든 여행에는 어떤 식으로든 느낌이라는 게 남는 것같군요. 가까운 사람들은 캄보디아 항공 사고가 난 와중에 무슨 여행이냐는 말도 있었지만, 현지 광지들은 한국관광객들로 넘치더군요.ㅋ

 

캄보디아라고 하면 물론 앙코르와트가 대표적인 역사유적군이자 관광지죠. 저도 물론 거길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다녀온 것에 대해더 어떤 말을 하려면 무엇보다 앙코르와트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겠지만, 그 이야기 전에 몇가지 다른 이야기를 해야할 것같군요. 정작 제가 가장 깊이 느끼고 온 것들은, 앙코르 유적들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첫날 일정 중에서, '관광지로 개발된' 킬링필드 희생자 사당이 있더군요. 사당이라기 보다는.. 전시장입니다. 옆에 보는 것처럼,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75~79년)에 학살된 사람들의 유골을 전시하는 곳입니다. 끔찍하죠.

 

끔찍한 것은, 크메르루주도 마찬가지이지만, 죽은자들의 유골을 정치적으로 전시하는 행위도 역시 그렇습니다. (제가 간 관광도시 시엠립의 것은 작은 편이고, 프놈펜 같은 곳에는 더 크다고 하는군요. 도시마다 이런 게 있답니다..)

 

물론 여기에는 크메르루주 시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베트남전쟁 시기 미국의 호치민루트, 캄보디아 동부지역 폭격을 언급해야할 것입니다. 크메르루주 시기에 학살된 사람이 약 8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할 때 적어도 그 만큼 혹은 그 이상의 인명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되었지만 주목되지 않았죠. "국민"학교 때 의무적으로 보아야했던 영화 <킬링필드>도 그런 관점에서 크메르루주의 학살만 부각합니다. 여기에는 역설적으로 미국과 베트남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은 자의 유골을, 그들의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 묻거나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하는 이런 행위는 베트남이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베트남이 자신들의 78년 캄보디아 침공과 점령, 괴뢰정권의 수립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88년 12월 베트남군이 철수하고 파리강화조약 이후에 연립정권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베트남이 세운 정권을 주도했던 훈센이 주도하고 있으니 이런 행위도 계속될 수밖에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것은, 자신들은 크메르루주의 학살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인도차이나반도에서의 패권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학살같은 것이 없었던 라오스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도 설명이 안되죠.) 공산주의 정권들 사이에서, 그것도 불과 얼마전에 있있던 미국과의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 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은 사실은 인도차이나 전체의 전쟁이었죠. 보통 프랑스에 대한 독립전쟁을 1차 인도차이나전쟁, 미국과의 전쟁을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합니다) 당시에 피를 나누며 싸웠던 이웃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인도차이나 3국(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공산당은 원래 인도차이나 공산당 하나였죠. 그러나 이후 코민테른의 민족당 방침 속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베트남민족 우선주의"(북조선 생각나는군요;;)에 따라서 각 민족당으로 분할됩니다. 그 결과는 해방 후 각 민족당 사이의 내전이었던 겁니다. 현대에 가장 위대한 반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이자 공산주의 혁명전쟁이라는 베트남전쟁의 주역들조차 이랬다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이라는 것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명확할 것입니다. 20세기 역사에서, 주변, 반주변 인민들의 저항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그것이 20세기 말에 남겨준 유물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공산주의를 자처한 정권들이 권력을 잡은 것이 수십년이지만, 글쎄요 사회가 민주화되거나 했다고 보기에도 어려울 것같습니다. 캄보디아인 가이드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직업이 뭐냐고 묻더군요, 노조활동가라고 소개했는데, '노동조합'이라는 '개념'조차도 아예 없는 겁니다. 거참. 그 양반도 국가가 운영하는 어떤 기구에서 일하는 '공식'가이드이고 배울만큼 배운 사람인데 말입니다.(가이드들은 보통 영어와 태국어/중국어를 하는 정도입니다.)

 

내전의 유산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서, 이 나라 전체를 상징하는 말, 빈곤 자체가 전쟁의 결과입니다. 아직도 많은 무기(지뢰가 대표적이지만 대인화기까지)가 남아있어서 범죄에 이용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아래는 무기를 회수하자는 켐페인 입간판.

이런 것보다 더 가슴아픈 것은 거리에 구걸하는 아이들입니다. 어디에서나 "one dollar"를 외치면서 달려드는 아이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이 나라의 빈곤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경험은, 여행중 저녁 시간에 공짜 공연이라는 이유로 찾아간, 어떤 첼로 공연이었습니다.

 

Beat Richner 이라는 첼리스트 겸 의사선생의 공연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의사선생.

자신이 세운 어린이 병원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공연이었습니다. 바흐를 주로 연주했는데, 정작 연주시간의 세배 정도는 이야기를 한 것같습니다. 짧은 영어라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75년 처음 와서 크메르루즈 폴포트 정권 이후에 병원 운영이 중단되었다가 90년대 다시 들어와서 10여년 동안 어린이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분이더군요.(그렇다고 크메르루주만 비판하는 것은 아니고 닉슨이 살인자라는 이야기도.)

 

많은 어린이들이 기초적인 의학적 처방을 받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고, 특히 어머니가 HIV 감염자인 경우에 어린이들이 더 취약하다는 이야기..이고, 특히 시엠립에 있는 병원은 HIV 감염 어린이를 전문적으로 보살핀다고 합니다. 선진국의 아주 작은 지원, 기부만으로도 훨씬 더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홈페이지도 있습니다. : http://beatocello.com

 

75년에 들어와서 활동하다가, 20년 가까이 되어서 병원 운영이 가능해지자 다시 들어온 사람, 10여년 동안 병원을 운영하고 진료하고, 지원을 받으러 각국을 순례하고 지금도 낮에는 병원을 운영하고 밤에는 매일 "무료" 콘서트를 여는 사람을 보면서,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요. 이 분 말고도 화가이자 생물학자인 Denis Laurent라는 분도 그림을 기증하고 병원 운영팀에 결합해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제3세계 최빈국에 와서 그야말로 봉사를 하는 사람들과, 빈곤한 이 나라의 어린이들을 보면서, 제3세계 빈곤(특히 빈곤아동 문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한데도 그렇고 남한 노동자운동도 그렇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사고도 없다는 것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전무'하지요.

 

이 나라들의 빈곤의 문제가 단지 '못 산다'는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세계체계의 모순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운동적 과제로 전혀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전적으로"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요..

 

여전히 저나 노동자운동.. 그리고 대부분의 사회운동들에게 이 문제는 '딴 나라 이야기'일텐데, 그 '딴 나라 이야기'라는 것이 중요한 대목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딴 나라' 이야기라고 해도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되지 않아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국제주의가 운동의 새로운 대안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라고 말하는 저조차도, 모든 운동의 과제는 단지 남한에서 전지구적 문제가 투영되는 문제에 대응하는 것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스페인 공화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전세계에서 달려왔던 국제여단은 영화속의 이야기일 뿐인 것이지요. 좌파들이 나름대로 국제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제가 보기에 그것은 겨우 '비-민족주의적'이라는 것에 불과하다는 반성입니다. 그러나 비-(혹은 反?)민족주의가 국제주의는 아닌 바에야, 사상과 이념의 혁신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국제주의와의 결합은 페미니즘과 결합만큼이나 혹은 반성적으로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노동자운동 혁신에 결합하기가 어쩌면 더 어려운 과제일 것같군요.

 

그렇다고 운동의 방식으로 기부금을 모으고 자원봉사를 가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어떤 시기에는 필요하겠죠) 다른 방식으로 신자유주의 세계체계에 대항하는 운동의 일환이 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필요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제3세계 인민들, 어린이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리고, 대안세계의 전망이 혼란에 빠진 이런 시기에는 (지구적) "정의운동"이라는 것, "정의"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대중적인 대항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그 '정의'에 대한 닥터 Beatocello(그 선생의 '애칭'입니다)의 호소에 공감하지 않았다면 2~300명의 관객들이 2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그의 '강의'를 듣고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겠죠.

 

마지막날, 옵션 관광의 하나로 가야했던 곳이 있습니다. "평양친선관", 평양냉면집입니다.

(이런 저가 여행에는 여러 옵션이 붙는데, 현지 가이드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런 것은 아무래도 예의상 해주어야하기 때문에.)

냉면을 포함한 식사를 제공하고, 평양에서 온 젊은 여성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그런 곳입니다. 써빙하던 여성들이 공연을 바로 하더군요. 시엠립에만 서너군데가 있는 것을 봤는데, 북한의 외화벌이 기업들이 서로 몇개가 따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연간 수만명의 관광객들이 북한 주민들을 접촉하고 있는데 국가보안법을 수호하는 국정원 등 국가기구들은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차마 그 장면들을 볼 수 없게 한없이 복잡한 심경이 되었습니다.(그래서 사진도 간판만 찍었습니다만) 특히 '아침이슬'을 가라오케 반주로 부르는데.. 그 복잡한 느낌은 뭐랄까..*&^&$&)*!##%$ 도저히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는. 알려진 북한 노래들(반갑습니다, 휘파람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 노래와 춤, 가야금..

 

다큐 어떤나라(A State of Mind)에 대해서 이 블로그에도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그 소녀들이 결국 이 앞에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말았습니다.

 

이 여행을 다녀오면서, 과연 그들에게 '공산주의'는 무엇이었을까하는 의문이 머리를 채웠습니다. 인도차이나에서, 조선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생각했던 것일까, 그들이 생각했던 공산주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결합 혹은 민족주의화된 스탈린주의도 아니고, 사이비 공산주의적인 민족주의였던 것일까.. 하지만 목숨을 바쳐 제국주의와 투쟁했던, 20세기 자본주의 헤게모니 국가로서 아메리카와 모든 것을 걸고 투쟁했던 그들의 진정성은 무엇이었을까..

 

20세기 인도차이나의 역사의 장면들과, 어린이들, Beatocello씨, 평양친선관의 여성들을 보면서, 20세기를 압축적으로 마주친 느낌이었습니다. 1000년이 넘은 유적들은 차치하고라도 그 많은 관광객들과 함께 너무나 비동시대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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