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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여행의 사치

비엔나, 여행의 사치

여행이 끝나가는 지금, 여행기를 쓰면서 도시마다 하나의 이야기 정도는 남겼지만,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인터넷이 되지 않는 조건에 있었기 때문인데, 여행기에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지만, 비엔나에 대해서는 짧게라도, 여행이 끝나기 전에.

제국의 수도

런던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의 제국의 수도가 어떤 것인지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수도였던 오스트리아도, 런던과는 또 다른 분위기이지만, 하나의 제국의 수도로서 화려함을 갖추고 있다.

또한 합스부르크 왕조는 절대왕정 하에서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와 경쟁하면서 궁전의 규모까지도 경쟁하면서 화려한 건축물들을 남긴다. 이런 것들은 이제 관광명소나 시민들의 휴식지가 되었지만, 이들의 허망한 경쟁이 남긴 유물을 보는 건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든다. 왕조의 화려한 궁전은 굳이 찾아가지 않는 여행이었지만, 빠리에서는 이제는 박물관이 된 루브르, 그리고 비엔나에서는 도심의 공원이 된 벨베데레 궁전에는 다녀왔다.



음악가들의 도시

18세기, 19세기에 왕조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렵, 비엔나의 왕족과 귀족들은 음악을 애호하면서 후원한다. 이에 따라서 단기간에 한 도시에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이 모이는 일이 일어난다. 모차르트, 베토벤, 드로브작,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등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음악가들이 모두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그런 위대한 시기가 짧은 기간에 한 도시에서 가능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같은 일이다.

우리가 듣는 위대한 클래식 음악의 상당수가 이러한 지원 하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점에서도  역사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만은 판단할 수 없게 한다. (클래식음악도 지배계급의 것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일은 소련에서도 하지 않았으니.)

시내 곳곳에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동상들이 있다. 왕궁 정원 한편에는 모차르트의 동상이 있다. 동상 한켠엔 꽃다발이 놓여져 있다. 모차르트의 동상 앞에 앉아서 ‘현을 위한 세레나데’를 듣는다. ‘캐논’을 들으면서 비엔나 오페라하우스 앞을 지나다 보면 베토벤 광장, 베토벤 동상에 이르게 된다.

베토벤 동상 앞 벤치에서 한낮이지만 ‘월광’을 듣는다. 그의 동상 옆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가 고통, 그러나 굳건한 표정으로 조각되어 있다. 베토벤에 어울리는 상징이다. 그의 음악은 마치 인간에게 영원한 시간에 속하는 음악을 선사했다는 이유로 신이 가하는 것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마르크스와 함께, 그는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렇게 슈베르트, 슈트라우스 동상이 있는 시립공원을 지나서 트램을 타고 조금 가면 음악가들의 묘지가 모여있는 한적한 ‘중앙묘지’에 닿을 수 있다. 몇몇 관광객들이 들리고,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왁자지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곳에는 모차르트를 중심으로,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슈트라우스 등의 묘지가 모여있다. 이곳에 이르자 MP3 플레이어서는 이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이 흘러나온다.

여행의 사치

이렇게 한 하루는 나의 유럽 여행에서 가장 호화로운 하루였다. 비록 돈이 많이 든 일정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감각으로 최고의 예술을 함께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자취를 따라가는 한 곳 한 곳은 어느 사치스러운 여행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돈을 산 어떤 사치도 이런 호사에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저녁에는 (값싼) 음악회 티켓을 구해서 갔었지만, 음악회조차도 낮에 걸은 그 길의 감동에 비할 수 없었다.

베토벤, 환의의 송가

사실, 비엔나에서 느낀 것은, 최고로 인기있는 음악가는 모차르트라는 것이다. 어디가든 모차르트가 넘친다. 내가 간 날 알아본 음악회 티켓도 거의 다 모차르트 공연이 뿐이었다. (아니면 슈트라우스의 왈츠) 거리에 보이는 기념품샵도 대부분 모차르트와 관련된 것이거나, 그와 관련된 물품이 다수를 이룬다. 그가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대중적인 클래식 음악가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비엔나에서는 베토벤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는 모든 인간적인 고통, 영혼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대한 예술을 창조한 인간이다. 모차르트를 들을 때는, 자유분방한 선율에 감동하게 된다. 베토벤을 들을 때는 고전적인 형식미 속에서 인간적인 열정을 녹여낸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고전적인 형식을 따르기는 하지만, 그 속에는 영혼의 고통이 있다. 그것은 때로는 열정으로 때로는 깊은, 깊은 슬픔으로 드러난다.

베를린에서는 일부러 베토벤을 듣지 않았다. 베를린장벽의 붕괴 이후에 독일의 통일, 그리고 동시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붕괴를 축하하는 브란덴부르크 광장 공연에서 번슈타인이 교향곡9번 ‘환의의 송가’를 ‘자유의 송가’라는 것으로 바꾸어 연주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류애를 노래하는, 따라서 프랑스혁명을 지지한 공화주의자였던 그의 이력을 생각하지 않더라고 가장 공산주의적인 이 음악을 편협하게 해석한 해프닝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유럽연합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상징음악으로, 베토벤의 ‘환의의 송가’를 채택하고 있다고 한다. 유럽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이 곡은 유럽이 자신들의 상징으로만 채택하기에는 너무 위대한 곡이다. 말 그대로, (유럽의 연합이 아니라) 인류의 형제애를 노래하는 곡이 아닌가! 유럽(연합)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국가 간 체계를 민주화하고 그것을 세계화한다면 모를까.)

독일어로 된 가사를 들으면서 음악을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아래 번역을 보면서 4악장을 들어보자. 이것이 진정으로 위대한 음악이다. (첫 구절을 제외하고는 쉴러의 시 ‘환의의 송가’를 가사로 쓴 것이다.)

오! 벗들이여 이 가락이 아니고 더욱 즐거운 가락 그리고 환희에 넘친 가락을 함께 부르자!

환희여, 신들의 아름다운 광채여,
낙원의 처녀들이여,
우리 모두 감동에 취하고
빛이 가득한 신전으로 들어가자.
잔악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신비로운 그대의 힘은 다시 결합시킨다.
그대의 다정한 날개가 깃들이는 곳,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환희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
그렇다. 비록 한 사람의 벗이라도
땅 위에 그를 가진 사람은 모두...
그러나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자는
눈물 흘리며 발소리 죽여 떠나가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연의 가슴에서 환희를 마시고
모든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환희의 장미 핀 오솔길을 간다.
환희는 우리에게 입맞춤과 포도주,
죽음조차 빼앗아 갈 수 없는 친구를 주고
벌레조차도 쾌락은 있어
천사 케르빔은 신 앞에 선다.
장대한 하늘의 궤도를
수많은 태양들이 즐겁게 날 듯 형제여
그대들의 길을 달려라,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
서로 서로 손을 마주잡자,
억만의 사람들이여,
이 포옹을 전 세계에 퍼뜨리자.
형제여, 성좌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신이 계시는 곳이다. 엎드려 빌겠느냐,
억만의 사람들이여, 조물주를 믿겠느냐
세계의 만민이여, 성좌의 저편에 신을 찾아라,
별들이 지는 곳에 신이 계신다.

내가 유럽에서 많은 성당들을 둘러보면서 느낀 것은, 어떤 성스러운 것에는 그것이 그 종교의 구체적인 관행과 교리에 제한되지 않는 보편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신’이라는 것이 굳이 기독교의 ‘야훼’가 아니라도 인류가 공유하는 성스럽고 숭고한 이상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인류 모두의 환의의 송가가 될 수 있다. 그런 영혼에 울리는 보편적인 것을 각각의 종교, 문화, 언어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다면, 충분히 그렇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 서로 서로 손을 마주잡자,
억만의 사람들이여, 이 포옹을 전 세계에 퍼뜨리자.

위대한 인간의 위대한 예술을 다시, 청각과 시각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곳. 짧은 비엔나의 일정은 그래서 나에게는 이번 여행에서는 어쩌면 주제넘을지도 모르게 가장 사치스러운 경험이었다.

***
영화 ;  Immortal beloved

여행에서 본 영화 중에는 유럽 여행자들이 십중팔구는 본다고 하는 Before sunrise (그리고 Before sunset) 와 함께 베토벤에 대한 영화인 Immortal beloved 가 있다.

전자의 영화는 워낙 유명하게, 비엔나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영화. 여행에서 어떤 우발적인(혹은 운명적인), 그러나(혹은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을 만나기를 바라는 여행자들의 기대를 담는다.

후자는, 베토벤의 주요한 작품들을 (주로 전기적 근거는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이는) 개인적 경험과 연결해서 보여준다. 베토벤에게, 불멸의 연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전제로.

영화의 상상력도 별로 나쁘지는 않다. 영화는 영원immortal하지만, 시간에 어긋난 사랑의 무대에 베토벤을 등장시킨다. 아, 시간의 덧없음이여. (여기서 시간이란 더 이상 위대한 무엇이 아니라, 가장 슬픈 결과를 낳는 운명Fortuna, 혹은 그녀의 장난과 같은 것. 오히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영원하다.)

하지만, 영화의 설정 때문에 주로 베토벤의 음악들을 거의 그의 개인사와 연결시킨다는 단점이 있다.(게다가 대사를 통해서 그의 음악들을 그런 식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을 통해서 베토벤을 작품 속에서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설사 실제로 그러한 측면이 없지 않더라도, 베토벤의 음악은 그의 개인적인, 개인의 영혼의 고통을 그대로 표현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영화는 다소 편협한 측면이 있다. 그의 음악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고통받는 영혼의 인간이고, 그 고통을 음악에 담았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그것을 모두가 함께 공명할 수 있도록 보편적인 것으로 표현한 점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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