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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18
    삶은여행;여행을 마치면서.(6)
    겨울철쭉
  2. 2007/10/18
    그리스, 델피, 디오니소스 극장, 비극을 생각하다.
    겨울철쭉

삶은여행;여행을 마치면서.

삶은 여행, 여행을 마치면서.

남들은 20대에 주로 가는 한달반짜리 유럽여행. 하지만 어떤 여행도 너무 늦거나 이르지 않다. 여행은 언제라도 자신이 있어야할 시간이 ‘지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나의 여행에서도 하루하루, 한곳한곳은 바로 그 순간에만 만날 수 있는 어떤 경험들을 주었던 것같다. 여행에서 많은 사람, 많은 시간과 장소를,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길을 잃고, 헤어지고, 아픈, 영혼을 치유한다.

엊그제 우연히 여행사에 걸려있는 지도를 보았다. 내가 여행한 곳을 따라가보니, 먼길. 그러나 지구 전체를 놓고 보면 너무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작은 여행으로 너무나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한 것에 얼굴이 붉어진다. 세상에도 겸손해져야한다.

어떤 여행

여행에서 만난 많은 여행자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여행을 한다. 주로 숙소나 길에서 만나는 한국인 여행자들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유럽의 도시를 ‘찍고’ 가는 것이 목표인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다는 곳들만 찾아다니거나, 아예 자기 일정이 없이 ‘묻어가는’ 것이 목적인 사람도 있다. 도시에서도 어딘가를 다니기보다는 여행자들과 술자리를 즐기는 것이 주가 된 사람도 있다. 사치품 쇼핑을 주로 다니는 사람도 있다. 여행책자나 여행사가 짜준 일정에 충실한 사람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 어떤 때는 신기해져서 관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들과 만남도 여행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각자 여행하지만, 잠시잠시 이런저런 사람과 동행하기도 하지만 주로 혼자 여행하고 나와 주로 대화하고,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것에 놀라고, 그것에 대해서 머리와 가슴에 되새김질하기를 즐긴 나의 여행도 나쁘지 않다.

유럽에서 만난 많은 낯선 것들은, 많은 경우에 ‘관념들’에 불과했던 것에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한다.(따라서 보다 구체적으로 사고하게 한다. 우리가 가진 관념들의 상당수가 유럽에서 온 것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그 관념들이나 혹은 내 안에 있었지만 잠재되어 있거나 은폐되어 있었거나 억압되어 있었던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었던 개념들을 갑자기 단락shotcut시키기도 하고, 그것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것보다 세상에는 더 많은 일이, 더 다른 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이제야 알게된다. 그래서 상상력에 혈색을 돌게 하고, 또 이제까지의 경험들, 앞으로 있을 경험들에도 겸손하게 한다.

나를 만나기

스위스에서 쓴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혼자 여행은 자신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혼자 걸으면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해 질 수 있다. 슬픈 마음을 슬프게 느끼고 애도한다. 삶의 기쁨이 의외의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발견하고 놀랄 수 있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고, 남들은 시시하게 지나가는 것에도 감동받을 수 있다. 그런 속에서 나를 만난다.



그건 나에게는 참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만큼 내가 나 자신을 깊이 돌아보지 않고 살았기 때문일 테다. 나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그러지는 못했던 것이고, 그러니 아픔에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했겠지.

그래서 나에 대해서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어떤 의무이나 책임같은 것으로 스스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 속에서의 나를 돌아보면서 왜 아픈지 나를 이해해주게 된다. 비로소 나를 다독거려준다. 울고 싶을 땐 울어, 그래, 괜찮아, 괜찮아.

자신에게 진실하기

여행에서 위대한 예술들, 숭고한 자연들을 만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생각하게 된 것도 이번 여행에서 너무나 값진 일이다. 유럽이라는 거대한 문명이 수천 수백년 동안 만들어온 역사의 가장 위대한 것들만 매일 매일 찾아서 만나고 다녔으니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여행에서 유럽이 자신의 역사 속에서 남긴 위대한 예술과 사상을 압축적으로 만난 셈이다.

(여행과 관련된 제도와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런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유럽의 거장들에게 미안해질 만큼 감격스러운 일이다. 물론 시간과 지적 능력의 제약으로 인해서 상당부분은 주마간산 식의 만남이라는 아쉬움이 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무엇이 그것을 숭고하게 만드는지 생각한다.

나 자신에 매순간 진실하게. 운명--Fortuna여신--의 일은 그녀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 진실한 것이 어느 순간에는 운명과 부딪힐 수도 있고, 그럴 때는 비극이 될 수도 있다. 운명의 순풍을 탄다면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어떤 운명을 만나는 경우이건 그것은 다음 일이다. 내가 나 자신에게 가장 충실할 때 인간답고 숭고할 수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었다거나 방법을 찾았다고는 아직 전혀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다만 인간다운 삶의 방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고 할까. 그렇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이번 여행이 알려준 이제부터 삶의 긴 과제일 것같다.

삶은 여행

여행을 시작하면서, 이상은의 Soul Hospital을 들었다. 영혼의 치유를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가 부딪히는 많은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노래한다. 나에게는 이번 여행이 거대한 Soul Hospital이었던 셈이다.

이번 여행 기간 중에 이상은의 새 앨범이 나왔다. (10월2일) 여기서 앨범을 살수는 없는 조건이라 (죄송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구해서 들을 수 있었다. 여행의 후반은, 이 앨범의 곡들을 듣는 곳이 많았다. 특히, 삶은 여행.

삶은 여행, 이상은

의미를 모를 땐 하얀 태양 바라봐 얼었던 영혼이 녹으리
드넓은 이 세상 어디든 평화로이 춤추듯 흘러가는 신비를

오늘은 너와 함께 걸어왔었던 길도
하늘 유리 빛으로 반짝여
헤어지고 나 홀로 걷던 길은 인어의 걸음처럼 아렸지만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소중한 너를 잃는게 나는 두려웠지
하지만 이제 알아 우리는 자유로이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난 걸

용서해 용서해 그리고 감사해 시들었던 마음이 꽃피리
드넓은 저 밤하늘 마음 속에 품으면 투명한 별들 가득

어제는 날아가버린 새를 그려 새장 속에 넣으며 울었지
이젠 나에게 없는 걸 아쉬워하기보다 있는 것들을 안으리

삶은 계속되니까
수많은 풍경 속을 혼자 걸어가는 걸 두려워했을 뿐
하지만 이젠 알아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했던 걸

눈물 잉크로 쓴 시, 길을 잃은 멜로디
가슴과 영혼과 마음과 몸이 다 기억하고 있어
이제 다시 일어나 영원을 향한 여행 떠나리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강해지지 않으면 더 걸을 수 없으니
수많은 저 불빛의 하나가 되기 위해 걸어가는 사람들
바라봐
 
**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 : (이상은 13집 The 3rd Place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the3rd_place/100042588037

피사의 낯선 거리, 어떤 다리를 건너면서 노래를 듣고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노래에 슬픔이 깊이 담겨있고, 나와도 다르지 않다. 이상은에게도 몇 년전의 앨범 Romantopia 이후에 깊은 슬픔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슬픔을 그냥 잊지 않고 자신의 영혼의 일부로 더 아름답게, 아리게 만들어가는 이 음악들을 듣는다. 그리고 그녀가 슬픔에 대면하는 자세를 듣는다.



40여일, 먼 길을 걸으면서, 여행에서 쓰러지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을 가기 위해서는 강해져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과 영혼과 마음과 몸이.

그래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다시, 걸어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삶은 여행이니까, 삶은 계속되니까.

***
이번 여행에는 ‘먼곳의 동행’이 많았다. 중간 중간 내 메일을 받아준 이들,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받은 사람들, 전화 통화를 한 사람들, 나를 생각해준 모든 분들, 그리고 이 블로그를 통해서 나를 지켜봐준 모든 이들의 나의 고마운 동행이다. 이 모든 분들 덕분에 때로는 어렵고 힘든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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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델피, 디오니소스 극장, 비극을 생각하다.

그리스, 델피, 디오니소스 극장, 비극을 생각하다.

그리 오래 있지 못한데다가 마지막 여행지인 그리스에서는 무척 아쉬움이 많다. 몇가지 이야기가 있겠지만, 우선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를 잠깐하자. (그리스 문명, 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상 등은 다음 글이 가능하다면 쓸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많은 비극에서 등장하는 신탁의 장소인 델피(델포이), 그리고 오늘은 아크로폴리스 옆에 디오니소스 극장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델피

아테네에서 버스를 타고 세시간 정도 걸리는 델피는, 아폴로 신전의 신탁으로 유명하다.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곳도 여기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가 죽게 된 것도 델피 신전에 신탁을 받으러가다가 오이디푸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연작에도 델피가 소재로 사용된다. (모두 신화의 이야기.)

델피에 다가가면서, 아, 그리스인들이 왜 이곳에 신탁의 장소, 아폴로 신전을 지었는지 조금씩 느낄 수 있다. 낮은 구릉들만 있는 평원에 혼자서 우뚝 솟아있는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상 쪽에는 구름까지 끼어있다. 산으로 버스가 오르자, 높은 절벽과 깊은 계곡(물은 없지만)이 펼쳐진다. 마침내 도착한 델피는, 그 장소 자체가 장관이다.



델피를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만든 신전 이전에 그 산과 계곡이었던 것이다. 자연이 만든 숭고함이다. 절벽에 걸려있는 신전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마치 하늘에서 지상을 바라보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신성한 장소라는 곳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늘과 땅의 중간지대. 그리스인들이 이 곳을 신의 말(言)이 내려오는 곳이라고 생각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태양과 이성의 신인 아폴로를 예언의 신으로도 생각해서 신탁을 받았다. 현대의 우리들의 관념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않는 일인데, 예언은 이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폴로는 운명의 신들과는 불화하면서도 예언을 관장한다. 그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미래를 아는 것은 (비록 신탁이라는 종교적 형태로 표현되지만) 알 수 없고 변덕스러운 운명이 아니라 이성을 통한 예측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같다.

하지만, 그러한 신탁이 운명을 어찌하지는 못했던 것같다. 신화의 내용에서, 사람들은 신탁을 듣고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하지만 결국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마는 이야기가 많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도 그런 경우인데, 신탁은 운명의 아이러니를 더욱 강조한다.

오디이푸스는 신탁을 통해서 미래를 알았으면서도, 그리고 그 자신이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으면서도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운명 앞에서 파멸하는 이유는 사소한 기질 상의 단점(길가는 노인--아버지--를 살해한 성급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고귀한 성품(진실을 끝까지 대면하고자하는) 때문이다. 위대한 인간의 파멸은 비극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디오니소스 극장

다음날 오후에 간 아크로폴리스 아래에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다. (같은 티켓으로 입장할 수 있다.) 극장을 찾느라 더운 날씨에 좀 헤메서 기진맥진해서 도착했다. 이렇게 찾은 극장은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정말 감격스럽다. 바로 이곳에서 위대한 비극들--소포클레스, 아이퀼로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이 공연되었던 곳이구나. 별이 빛나는 밤에 여기 객석 어디선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위대한 극작가들도 비극 공연을 관람했겠지.



땡볕 속에서 객석이 잘 보이는 좋은 자리를 잡아 앉는다. 비록 무너진 극장이지만, 수천년 전 공연된 비극의 감동이 남아서 울리는 것같다. 이곳에서 비극경연대회가 열리고, 비극이 초기형태로부터 완숙한 형태(아리스토텔레스가 이제 비극은 완성되었다고 말한)까지 꾸준히 창작되었다.

시간을 견디는 것

비극경연대회는 사라지고, 그리스 문명도 쇠락하고, 돌로 된 극장마저 무너졌지만, 비극은 시간을 견디고 남았다. 지금도 그리스 비극은 세익스피어와 함께 가장 위대한 비극으로 평가받는다. 평가가 문제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주는 감동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 비극들은 단지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윤리적이며 철학적이고, 예술적 감동을 준다. 비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예술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짜는 신파와는 다르지만 더 오래 남는 슬픔을 전하고, 또 단지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사고’할 수 있게한다.

알 수 없는 운명과 불화하고 그 때문에 파멸하더라도 위대한 인간들이 위대하다는 점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운명--Fortuna여신--의 것은 그녀에게, 그러나 나의 영혼의 일은 나에게. 아폴로--태양과 이성--도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 어떤 미래를 불러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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