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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25
    [영화] 색,계 (色, 戒: Lust, Ca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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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11/23
    [펌]노사 형평성 ‘OECD 꼴찌’
    겨울철쭉
  3. 2007/11/19
    [독서]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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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7/11/16
    태왕사신기 본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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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안]노동자운동,역사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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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7/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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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7/11/08
    이상은, 태양의 영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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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7/11/07
    [교안]자본주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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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7/11/04
    [독서]중국노동자의 기억의 정치(2)
    겨울철쭉
  10. 2007/11/03
    친구들과 술 진탕 먹은 다음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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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색,계 (色, 戒: Lust, Caution)

보고나서는 한참 동안 멍하게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영화.

 

 

1.

파시스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들은 타자의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그 필연적인 귀결로서 자신들의 자유까지도 억압하고 지속적으로 소거해가기 때문이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그 말은, 파시스트들에게는 영혼이 교통하는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파시스트들에게 예컨데 soulmate라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영혼의 울림, 떨림을 동반하는 것이지만, 파시스트의 자기억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파시스트의 하수인인 이(양조위)는 자신의 주변에서는 만나지 못하는 대상을 저항군의 스파이인 왕치아즈(탕웨이)에게서야 찾을 수 있다. ('이'에게 부인은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도 '내려가서 마작이나 하라'고 말할 의미없는 대상이다. 파시스트와 함께 사는 여인들은 그저 마작을 하는 장면만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파시스트인 그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것.. 따라서 왕치아즈(탕웨이)에게 만큼이나 이(양조위)에게도 이 사랑은 파멸적이다.

 

2.

영화는 저항군이 왕치아즈(탕웨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어떤 한계로 내모는 순간, 가장 잔혹하다. (사람을 수십번의 칼질로 난도질 때가 아니라 이 순간에.) 그렇다면 그것을 계속 견딜 것을 요구하는 저항군의 중간간부에게는 파시스트만큼의 영혼이 있는가?

 

적어도, 영화에서 그 중간간부는 왕치아즈(탕웨이)의 말, 이미 멈출 수 없게 이(양조위)를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그녀가 처한 성적 착취에 괴로워하는 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잘 못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끝까지 '조직의 이름으로' 작전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저항군'이라는 사람들은 결국 파시스트들과 어디서 다른가. 파시스트의 육체를 살해하기 위해서 동지의 영혼을 살해할 때..

 

운동은, 그것이 설사 그것 때문에 패배하더라도 지켜야할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서 있는 곳들에서조차 그런가.

 

3.

사랑이 정치적 적대와 얽혀들 때.

사랑에 대한 온갖 찬사들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다만 현실의 (정치적) 적대 속에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인 인랑 (人狼, Jin-Roh)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흥행을 포기했는지) 불길하게도 정치적 적대 아래서, 사랑은 가장 낮은 차원의 종속변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영화를 같이 보았던 애인과는 다음해, 첫직장에서 노조를 만들고 싸우는 과정에서 헤어졌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그녀와 노조활동에 대한  입장을 화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전에 연애에서도 그 '정치적 입장'이 문제였던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까, 가끔 떠오르기는 하지만 역시 그 당시 상황에서 어떤 다른 판단들이 열려있었을까.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모든 과정이 영화의 흐름과 동시에 다시 재생되었다. (극장에서 나는 두 개의 영상들을 본 셈이다.)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이후의 또 다른 과정에서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실패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라는, 아주 당연하고 별로 특별할 것도 없어보이는 결론을 고통스럽게 얻었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왜 사랑은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강하지 못한지 생각하게 된다. '정치'라는 말 보다는 그/녀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부터 '색, 계'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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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노사 형평성 ‘OECD 꼴찌’

한겨레신문 기사.
노동관련 법제도, 관행이 이 지경인데, 얼마나 더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노조활동을 제약해야 분이 풀리겠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를 '열사'로, 산업재해로 죽여야 분이 풀리겠냐..

이런 상황에서도 노동유연화, 기업규제완화, 노조활동제한, 노동자투쟁에 대해 "법와 원칙" 운운하는, 정작 자신들은 범죄자인 놈들이 대선에 보란 듯이 나와서 1,2위를 하고 있으니 나라 꼬라지가 한심하다.
87년은 역사책에만 남고, 이 모양이 되도록 제대로 싸우지 못한 우리  노동운동의 상황이 참담하기도 하고..


한겨레신문(07-11-22)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252111.html

노사 형평성 ‘OECD 꼴찌’
30개국 중 29위…비정규직 비율 2위 등 효율성 항목만 상위권

한국노사관계 지표별 순위   
한국의 노사관계 수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30개국 가운데 23위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또 ‘효율성’은 높지만 ‘형평성’은 지나치게 낮아 심각한 불균형을 낳고 있으며, 노동기본권 보장 수준 등 형평성 측면에서 노사관계 순위는 꼴찌에 가까운 것으로 지적됐다.

김동원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의 노사관계 평가를 위한 국제세미나’에서 “노사의 조직 특성과 전략, 노사관계의 제도적 틀과 노동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개발한 노사관계 평가 지표로 각국 노사관계를 비교해보니, 한국은 효율성과 형평성에서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 나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김 교수가 개발한 노사관계 지표에 근거해 2005년 기준으로 한국의 노사관계 순위를 살펴보면, 한국은 집단해고의 자유나 노동운동 통제 정도, 비정규직 비율 등으로 이뤄진 ‘효율성’ 순위에서 7위를 기록한 반면, 노조 조직률이나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정도, 정부의 사회보장 지출 수준, 단체협약 적용률 등으로 이뤄진 ‘형평성’ 순위에선 29위에 그쳤다. 종합 순위도 23위에 머물렀다. 비교 대상이 된 30개국 가운데, 덴마크는 효율성과 형평성이 모두 높아 1위를 차지했다.

김 교수는 △국제사회 수준의 단결권 신장 △노동조건 개선 및 고용차별 해소 △사회보장의 확충 등을 통해 노사관계의 효율성과 형평성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노사관계 평가 연구에 함께 참여한 파울라 부스 전 미국노사관계학회장(럿거스대)은 이날 세미나에서 “한국처럼 형평성을 제대로 취하고 있지 못한 나라에선 상대적으로 노사 갈등이 심각하게 야기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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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그라나다의 처형은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누구나 총부리 앞에 세워질 수 있는 시대, 시인이 총살당하는 시대가 왔음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1936년, 프랑코 파시스트 쿠데타군에 의해서 살해당한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살해되는 순간, 이 열전의 첫번째 인물에 대한 글의 한 구절이다. "시인이 총살당하는 시대", 20세기에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하지만 의외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도 많다. 서경식 선생이 일본에서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니 내가 들어보지 못한 일본인들은 등장할 수 있다고 쳐도, 로르카부터도 그렇지만 잭 시라이, 파블로 카잘스, 에른스트 톨로.. 이런 삶들을 내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아주 역설적으로, 이 책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잘 기억되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어떤 잘 알려진 위인들보다도 위대한 삶을 살다가, 위대하게 죽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 그리고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더 그럴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면 부끄러워지는 일이다.

이 책에 소개된 49명은 대부분, 파시스트 독재나 전쟁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또 상당수는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인물들이다. 살아남은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이들은 모두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앞에서도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들이다. 이들을 살해한 자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존엄한 파시스트"란 존재할 수 없는 말, 형용모순이다.)

한명 한명의 삶과 죽음이 가지는 무게 때문에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에 책장 하나하나를 쉽게 넘기기 힘들다.  그 중에도 가장 강렬하게 기억되는 인물은 잭 시라이.

일본에서 고아로 자라서, 항구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미국에 밀항하여 식당노동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 국제여단에 참전한 그는 파시스트의 총탄에 1937년7월11일 사망한다. 일본인으로 미국노동자가 되어 스페인에서 공산주의자로 죽었다.

시라이의 죽음에 대해 뉴욕주재 일본영사관은 "있을 수 없는 비국민"이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가 되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바로 그런 "있을 수 없는 비국민"이 아닌가!

20세기는, 그런 "비국민"들을 "있을 수 없게"하기 위해서 살해하고 기억에서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겨우' 기억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
떠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오늘, 우리는 언제, 떠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될까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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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 본색

무한한 연습님의 [<<주몽>>과 <<태왕사신기>>: 자본주의적 욕망의 서사(와 민족 서사)로써의 고구려 역사 드라마들.] 에 관련된 글.
님의 [<태왕사신기>와 포섭의 정치] 에 관련된 글.

드디어 이번주 태왕사신기 방영분(18~19회). 태왕사신기의 본색이 위에 링크한 글에서 무연님, 삼님이 말한 것과 같은 식으로 너무 '친절하게' 드러났다. '친절한 담덕씨' 우리 태왕폐하는 아주 친절하게 프리젠테이션까지 준비해서 자신의 비전을 설명한다. 어디선가 들었던 표현을 언급하자면 "벤처 사장들의 북방 개척론"이랄까.

자신이 하려는 것은 피흘리는 전쟁이 아니라 거란이나 부여나 주변의 이런저런 나라들과 무역을 하려는 거다, 그게 '쥬신민족'이 평화롭게 하나되는 길이라나.(18회) 그러다가 드디어 다음회(19회)에서는 소금장사하러 거란으로 떠나신단다. (게다가 태왕 담덕이란 인물은 점점 더 내적 모순이 완전히 제거된 무슨 꽃미남 밀납 인형같은 캐렉터가 되어가는 중이다.)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합한 전략이라는게 세계화된 경제라는 식의 연설을 광개토대왕이 하는 셈. 이걸 보면서 정부의 한미FTA 홍보광고가 당장 떠올랐던 것이다. "더 넓은 시장에서 경쟁합시다" 실제로 국정홍보처의 한미FTA 광고 중에는 광개토대왕 어쩌구하면서 하는 것도 있었다. "경제영토"가 뭐네하는 광고도 있다.


요것은 태왕사신기의 한 장면? 아니다. 국정홍보처의 FTA광고 "도전편"에서 광개토대왕 어쩌구하는 장면이다. http://fta.korea.kr/Article/?dataSeqNo=9007&dataGubun=TV&PageMode=Detail

그런데, 여기까지는 MBC 뭐 니들이 그럼 그렇지, 하는 건데 좀 더 생각하다가 기분이 더러워졌다.
(물론 나름 드라마 재미있게 보다가 기분 잡치면 그 자체가 좀 그렇기는 하다. 그런데, 게다가,)
이게 위에서 말한 "벤처 사장들의 북방개척론"이라는 생각이 떠오른 건데, 이건 뭐시기냐하면,
권영길 후보 공약을 비판하면서 우석훈씨가 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레디앙] 소제국주의 식민지 전략보고서?

"코리아(=고려=고구려)연방"으로 "쥬신(조선)민족" 대동단결해서 북방시장 개척하자는 거잖아, 이거..
전근대적인 것과 초근대적인 것의 결합이랄까, 민족주의 상징을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위한 대중동원에 결합하는 이런 방식을 사회운동들까지 따라해야하나..

그러다가 작년 투쟁할 때 민주노총에서 만든 총파업 깃발에 메인 로고가 '태왕사신기'에도 열심히 출연하고 게시는 삼족오라는 것도 떠올랐다. 젠장.. 이러다가 민주노동당이 태왕사신기 컨셉으로 선거 선전할까봐도 심히 걱정된다.

뭐, 작년에 민주노총은 그게 삼족오가 아니라 주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니 문소리나 이지아를 섭외하려나? (남조선은 남쪽이라 주작인가??.. 그런 심오한 고려까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주작(朱雀)이 민주노총 세상을 바꾸는 총파업투쟁을 수호한다.

민주노총은 이번 총파업 상징으로 선정된 주작을 이미지화해 깃발로 제작, 연맹과 지역본부, 지구협에 보급하고, 11월12일 전국노동자대회 장소에서도 배포한다.

깃발 이미지는 ‘민중적 내용을 민족적 형식에 담는다’는 원칙아래 주작의 상징적 모양과 붉은 색조를 기본으로 형상화했다. 또 검정과 회색톤을 가미해 강렬하면서도 현대적 이미지를 표현했다.

주작은 우리 민족 설화에서 청룡, 백호, 현무 등과 함께 하늘의 사방四方을 지키는 신을 일컫는다. 주작은 남방의 수호신으로 삶, 생존을 의미하는 사신四神 중의 하나다.

봉황이 득도를 하면 온몸을 붉게 물들이며 주작이 된다 하여 ‘붉은봉황’이라고도 한다.

이준용 민주노총 문화미디어실장은 주작을 총파업투쟁 상징으로 정한데 대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변혁세력의 단결로 민족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감으로써 역사의 변환점을 만들어가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또 “이번 상징물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민, 빈민, 청년학생 등이 참여하는 민중총궐기 투쟁에서도 이용될 것”이라며 상징물의 쓰임세에 대한 기대를 표시했다.

(노동과 세계 기사, 홍미리 기자 gommiri@naver.com   2006년11월06일 )


http://newscenter.nodong.org/news/view.php?board=mainnews&id=6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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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노동자운동,역사와 미래

지난 주 교육에 이어서 두 번째로 진행한 노동조합 간부교육의 두 번째 주제는 노동자운동의 역사와 전망. 전체적으로 조직발전 전망을 논의하기 위한 사전단계로 진행되는 교육이기 때문에, 노동자운동이 처한 현재의 조건에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공유하기 위한 내용이 요청되는 강의였다.
(지난 교육에 대한 글은 : [교안]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참고)

교안은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교안2차] 노동자운동, 역사와 미래

교육의 난점들

지난 번 교육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나 자신에게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어쩌면 더욱 그런데, 정리할수록 분량은 방대해지지만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할지는 더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시간 가량의 교육으로 노동자운동 200~300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그 전망까지 담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수도 있다.

몇가지 강조점을 다른 노동운동사, 노동운동 전망 교육과 달리 두려고 했지만 그것들을 상호결합시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꼭 교육기술상의 문제만은 아닌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평의회 운동의 역사와 현재 요청되는 사회운동적(혹은 사회변혁적) 노동자운동을 결합시켜서 이야기하기에 쉽지 않다. 이론적인 연결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지점도 있는 것이다.

한편, 강조점의 문제에 있어서는 실제 강의를 진행하는 것이 그것을 잡아내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조합원들의 반응을 보면서, 그리고 내가 스스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어느 지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단지 교육상의 강조점의 문제만은 아니고, 실제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할 쟁점들을 인식하는 과정인데, 교육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함께 교육된다고 할까. 따라서 교안 자체는 내용이 방만하지만 실제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교안자체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진행하면서 오히려 긴장감과 속도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교육을 준비하고 교안을 작성하면서 애초에 의도했던 것은 올해 여름과 가을에 각각 진행된 사회진보연대의 “사회운동세미나” 중 내가 맡았던 “세계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쉽게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손을 대기 시작하자 완전히 새로 쓰지 않으면 노조의 기초간부교육 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급하게 새로 쓰다 보니 내용적으로 부실하거나 심지어 틀린 부분도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런 주제의 교육은 좀 더 교육 시간을 여유있게 잡을 필요가 있다. 물론 애초 교육기획처럼 역사와 전망을 결합해서 진행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의 교육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능한 경우에는) 90분짜리 교육을 이어서 두 강의를 배치하는 방법인 것같다. 이번에 내가 진행한 강의는 총 2시간10분이 소요되었다.(앉아있는 조합원동지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

강조되어야할 것

교안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몇가지가 있다.

일단,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교육하는 데서는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경험이라도) 사건들의 나열을 넘어서야한다는 것이다. 사건들이 처하는 역사적 맥락을 당시의 자본주의 구조, 운동의 발전과 함께 제시하고 따라서 그것이 현재에 갖는 의미를 공유해야한다. 특히 이를 위해서는 실버의 <노동의 힘>을 참고하는 것이 유리한데, 역사적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세기적인 노동자운동의 형태를 단지 ‘덜 발전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 인식하고 현재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노동자운동사의 많은 교재, 교안들은 노동자운동의 발전을 직선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조적 인식이 취약하다.)

운동사 부분에서는 교안의 구성방식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강조되어야할 것들도 있다.
시간상 관계 때문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지만 여성노동자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젠더편향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반영되어야한다. 전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을 결합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또한 국제주의가 강조되어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민족주의와 결합한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해야한다. 이 부분도 시간적인 문제 때문에 충분히 강조하지 못해 아쉬운 내용. 이러한 비판을 위해서는 전쟁들을 겪으면서 노동자들이 쟁취한 “민족국가의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약이자 독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쉽게 제시해야하는데 기술적으로도 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평의회 성격의 노동자운동의 역사에 대한 제시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교안은 노조-당을 중심으로 운동사를 제시하는 데, 이 속에서 평의회 운동의 경험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가 어떤 식으로 대안세계를 만드는 역량을 갖고 있는지를--따라서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평의회운동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조될 필요가 있는 사건들은 파리코뮌-러시아소비에트-1919~20년 독일?이탈리아의 혁명적 경험-해방이후 전평과 자주관리?인민위원회-중국의 문화대혁명 등이다. (파리코뮌이나 전평의 경험을 평의회운동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은데, 검토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이번에는 일단 교육적인 측면에서 그렇게 설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망의 부분에서는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 대안세계화운동의 일부로서 노동자운동, 지역을 중심으로, 비정규직노동자 등 새로운 운동주체를 형성하는 것의 중요성, 페미니즘과 국제주의 등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노조 간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인만큼 핵심은, 새로운 운동주체가 과거의 운동관행(기업별 경제주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열어가야한다는 것. 그것을 위한 운동의 요소들을 제시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존 교육의 문제점

교육을 준비하면서 기존의 노동운동사 교안과 '노동운동의 전망‘을 주제로 한 교안들을 검토했다. 몇가지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노동자운동사에 있어서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사건들의 직선적인 나열인 경우가 많다. 민주노총의 교육비디오 중에 유명한 “승리의 역사 진군의 역사”라는 것이 있는데, 간단한 조합원 교육을 위해서는 좋은 방법이지만 간부, 활동가 교육으로 넘어가면 적절치 않다. 그런데 간부 정도를 대상으로 하는 교안도 그런 식이 많다. 이제까지 단계적으로 발전해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식의 제시는, 글쎄, 미신적인 경험주의라고 할까, 의지주의라고 할까. 오히려 현재 우리의 노동자운동이 어떤 위기에 빠져있다면 그 원인을 역사적으로 인식하고 또한 대안도 역사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을 텐데 말이다.

(물론 역사적 경험 속에서 ‘감동’을 느끼도록 하고 결의를 주는 교육이 있다. 박준성 선생의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와 같은 것이 그런데, 그런 교육은 나름의 고유한 목표가 따로 있는 것으로 그 자체가 매우 훌륭한 교육이다. 그에 비해서 내가 진행하고자 한 것은 보다 전략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역사를 제시하는 것이라 목표상에 차이가 있다. 양자가 비교 대상은 아닌 것.)

또한 많은 경우에 “노동자운동”이라기보다는 “노동운동”에 대한 설명. 따라서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이 싸워왔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에 주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노동’을 쟁점으로 하는 운동만이 아니라, 노동자가 해왔던 투쟁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의 전망에 대한 교육들을 보자. 많은 노조에서 ‘관성적으로’ 진행하는 교육이기도 하다. 특히 노조의 공식교육들은 연초에 만든 노조의 연간 사업계획(+정세분석)을 적당히 짜깁기 한 것들이 많은 데, 노조의 사업계획을 집행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될 때에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고 해도, 교안은 나열적인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가 위기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지표를 제시하다가 비정규직 확산 등 노동자의 위기를 말할 때에는 연결고리가 없이 그냥 언급. 그러다가 노동운동의 과제로는 신자유주의 반대, 비정규직 철폐, 전쟁반대.. 대체 이런 식의 투쟁과제를 나열하는 데 이것들이 현재의 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혹은 각자의 운동과제끼리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가 제시되는 경우가 드물다. 이런 식의 교육은 개별의 투쟁과제를 소개하는 것일 수는 있지만, 그들이 과연 “어떤 방향”인지를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

===
내가 작성한 교안도 한계가 분명하다. 특히 강의에서 강조한 내용이나 설명한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교안에 담은 것도 아니고, 내가 비판한 ‘역사적 사건들의 나열’이 나의 교안에서도 반복된다. (시간이 없어서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의 교안의 내용을 카피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추후에 다른 기회가 있다면 보완되고 수정될 필요가 있는 것들. 필요한 동지들이 있다면 직접 해주어도 좋을 것 같다. 노동자 교육을 내용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토론을 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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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 영웅의 시대?

요즘에 태왕사신기를 재밌게 보고 있다. 사실 요즘에 그나마 시간이 있기 때문에 보는 셈인데, 여행을 다녀와서 지난 주에 14회를 처음 본 후에 1회부터 주말내내 찾아봤다는,,;;

나도 영화나 드라마 보는 취향은 그저그래서 일단 판타지 줄거리에, 멜로 라인, 멋진 쌈박질 장면 등이 볼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CG는 별로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쪽에는 예산을 줄이다가 "싸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 태왕 담덕 역의 배용준은,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반할 정도로 멋있게 나온다.

재미있게 보다가 생각나서 몇가지.



신화, 영웅들의 시대

드라마의 배경은 고대. 좀 늦은 시기이기는 하지만 신화적인 시기로 그려진다.(고구려 정도는 이미 역사시대인데..;)

주인공인 태왕 담덕은 '영웅'이다.
그런데, 이 영웅에는 두 가지 정도의 부류가 있다. 전자는 영웅신화나 설화에 등장하는, 탄생-고난-성장-귀환으로 연결되는 일생을 사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타고난" 운명을 갖고 있어서 언젠가는 승리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고난을 겪어야하고 그 운명을 알아보고 돕는 것들을 만나야한다.

이런 영웅들은 매우 전형적이어서, 어느 민족들의 영웅신화, 설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홍길동전같은 중세소설에서도 그렇고, 지금 쓰여지는 소설이나 영화들에서도 활용되는 구조.

그런데, 또 다른 영웅들이 있는데,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세익스피어에서도 그렇지만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보자. 이들은 운명의 장난에 따라, 혹은 자신의 기질 때문에 비극적인 상황에 봉착하지만 자신의 고귀함을 지키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된다. 이들은 파멸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고귀함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성격의 영웅은 그 위대함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기 때문에 더 위대하게 느껴진다. 두 가지의 영웅 성격이 결합할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나, 영화 '메트릭스'에 네오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튼, 태왕사신기의 영웅인 태왕 담덕은 전자의 성격에 가까운 인물. 그래서 14회 정도부터 시작해서 17회 정도에 이르러서는 고난을 거의 이기고 이제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렇게 되다 보니, 오히려 극적 재미가 반감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한편으로는 극적 재미를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반감하는, 이 드라마의 판타지적인 성격이 관련되어 있다.

기계신(deus ex machina)

14회, 15회를 TV에서 보고 앞 부분을 찾아서 다시 보면서 궁금했던 것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담덕이 어떻게 (신물을 다 찾을 때까지 임시라고는 하지만) 왕위에 오르는가하는 점이었다.

11회. 선왕을 살해한 것으로 의심받던 태왕 담덕은 신당에서 "가우리검"(심장에 칼을 박아넣고 죄를 지은 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하여 재판하는 제도라는 데, 중세시대의 마녀심판과 비슷한 것이다.)을 요구받는다. 심장에 칼을 찔린 담덕은 여기서 심장이 찔린 칼(동명왕검)이 한순간 가루로 변하면서 설아남는다. 그 결과로 짜자잔~ 선왕을 죽였다거나 귀족 자제들을 납치했다는 모든 의혹을 뒤로 하고 왕위 등극.

그 순간 당장 떠오른 것이 진중권 덕분에 유명해진 기계신(deus ex machina)이다.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사건자체의 필연성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외부적인 힘 덕분에 모순이 해결되는 상황을 비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개념. 여기서 동명왕검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렇다보니, 담덕이 왕위를 인정받는 것은 그의 고귀한 인품이나 고난을 헤치는 용기같은 것이라기 보다는(물론 그것들도 제시는 되지만), 판타스틱한 기적에 의한 것이 된다. 이렇게 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서 주인공 영웅을 도울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극적 긴장은 떨어질 수밖에. 4개의 신물을 모두 찾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것이지만, "가우리검" 장면은 특히 심했다.



인물들, 입체적이거나 밋밋한.

이런 상황이다보니, 태왕 담덕은 주인공이지만 점점 재미없고 더 밋밋한 인물이 되어간다. 물론 배용준의 멋진 외모 덕분에 여전히 (극에는 외적으로) 매력적이지만 말이다. 그의 성공은 그의 고귀한 영웅적 자질 때문이라기 보다는 초자연적인 힘들이 이미 닦아준 길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비해서, 오히려 태왕 담덕과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결국 대립하게 되는 기하(문소리)나 연호개(윤태영)가 더 입체적이고 극적인 인물이 된다. 이들에게는 내적인 갈등이 있고 고뇌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처한 운명 속에서 파멸되어간다. (아마 이들의 성품이 좀 더 고귀하게 그려졌더라면 이 드라마의 진정한 영웅은 태왕 담덕보다는 이들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극중 인물들의 사랑에서도 더 가슴을 울리는 것은 기하가 태왕 담덕에게서 멀어져가는 과정, 그리고 파멸을 예상하면서도 (기하를)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연호개의 경우다. 수지니(이지아)를 둘러싼 태왕 담덕과 처로(이필립)의 미묘한 감정보다도 더 그렇다.

오늘 방영한 17회에서 "(더 멀어지고 파멸하기 전에) 자신을 멈추어 달라"는 기하의 대사나, 지난주(아마 15회?)에서 연호개가 기하에게, "내가 필요없어져 버리더라도, 당신 손으로 내 가슴을 찔러줘요"라고 말하는 연호개의 경우가 더 생생하게 '사랑'이라는 감정의 느낌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드라마는 고대 귀족정 시대를 다룬다. 이것은 영웅들을 묘사하기에 쉬운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귀한 인간들의 귀족적 성품을 두드러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귀족정을 옹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성품의 인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귀족적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것이 '평범'해지는 이 시대에는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들을 그리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혹은 인간의 위대함을 억압하는 시대.) 그러다보니 별 같지도 않은 것들이 정치판에서 영웅 행세를 하려고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고대민족들의 역사

한편, 이 드라마는 '쥬신'이라는 이름으로 동이족들을 통칭하면서 이들이 같은 민족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 거란 등이 언급된다.

사실은 여기에 왜(倭)도 넣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하지 않는데, 왜를 포함해서 동이족을 지칭할 경우 '내선일체'를 상기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거란, 말갈을 언급하는 것은 이들이 지금은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지 못할 뿐더러 그런 점에서 남한민족보다 열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일본은 '내선일체'를 말할 수 있지만 일본민족보다 열위에 있는 조선민족은 그것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기만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백제가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요서에 이르는 동부지역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설을 채용하지만, 마찬가지 맥락을 갖는 다른 가설, 백제와 왜가 연합왕국이었다는 주장을 인정하는 것같지는 않다. 이것 역시 일본에 대한 미묘한 입장 때문일텐데, 이 드라마가 일본자본의 적극적인 투자, 그리고 일본 수출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일이다. (혹은 그렇기 때문에 왜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드라마를 보면, 주요 전투장면은 황량한 초원과 사막지역에서 촬영한 것을 알 수 있다. 카자흐스탄의 스텝지역에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무대였던 만주에서의 촬영에 대해서 중국정부가 내용상 문제를 들어 불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수입과 방영도 불허할 방침이라고 한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동이족을 통칭하여 '쥬신'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한민족과 연관시키는 이 드라마의 내용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고대사를 두고 각 민족국가들이 벌이는 역사전쟁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만들어진 고대>라는 책에 대한 글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구성된 역사들에 대해서 말이다.

중국의 경우에 특히 실망스러운 것은 그들이 (말로라도) 체제의 성격으로 사회주의를, 그리고 다민족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로 민족간의 우애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에서라면, 오히려 각 민족들의 고유한 역사를 평등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민족적 우애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은 한족(漢族)의 주요 제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하고, 다른 민족의 역사는 "지방정권"이라는 식으로 폄하하는데, 이는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한족의 패권적 역사관일 뿐이다. 이렇게 되는 데 티벳을 지원하는 미국과 같은 위협, 민족들의 분리독립의 위험이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과연 그것이 다민족 국가로서의 중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데에 올바르고--게다가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의문이다.

드라마를 이런 식으로 만드는 한국이나, 그것을 금지하는 중국이나, 또 일본이나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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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앞으로도 재미있게 보겠지만, 극 자체의 재미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질 것같고, 화려한 영상과 몇가지 극적 에피소드가 더 두드러지지 않을까 싶다. 아, 그리고 배용준을 비롯해서 인물들의 비주얼만으로도 아직은 충분히 볼만하고 앞으로도 상당히 그렇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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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태양의 영혼

이상은 앨범은 자주 듣지는 않는데도
(얼마전에 산 베토벤 전집을 천천히 듣는 중인데, 일단 그 "양"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들을 수록 왜 이렇게 좋은 곡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가끔 듣다가보면, 거의 "환장할" 지경이다. (이것도 병인가;;) 대체 왜 이런거지;;

이상은 13집 중,

태양의 영혼

커다란 해무리 무지개빛 테두리 눈이 부시게 환하네 천국이 가까운 듯
어린아이처럼 하늘만 계속 보았네 아름다운 빛 속으로 날아가고파
아 별들을 이어서 멜로디를 만들고 꽃들을 엮어 그림 그리고
바람을 담아서 시를 쓰고 그늘없는 미소를 모아 그대에게 드리리
나의 노래는 잊혀지겠지만 감사 드리리

나의 먹구름과 거칠은 모남이 조금씩이라도 바뀌길 기도해
높고 높은 그곳에 찬란한 빛 비추니 나의 모든 것들에 눈물이 나네
아 별들을 이어서 멜로딜 만들고 꽃들을 엮어 그림 그리고 음 바람을 담아서 시를 쓰고
조금씩 나아지기를 빛을 머금은 말과 눈빛과 미소를 세상의 어둠에 묻히지 않는
태양을 내 영혼속에 커다란 해무리 무지개 빛 테두리 눈이 부시게 환하네
어린아이처럼 하늘만 보았네 아름다운 그 빛 속으로



* 스피커모양 아이콘을 누르면 곡이 재생된다.
(다만 Firefox에서는 잘 되는데 IE7에서는 안되는 경우도 있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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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검색을 하다보면 이상은의 '삶은 여행'이 '첫눈'이라는 영화에 삽입되면서 뮤직비디오로도 만들어진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사람들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이 뮤직비디오의 영상은 마치, 노래방에서 나오는 영상처럼 곡하고 (느낌이나, 심지어 속도도) 전혀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노는 느낌이다.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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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조합 현장간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집중 교육 프로그램 중 “우리가 사는 사회,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교안. 전체 교육 중에서 내가 맡은 것은 두 개의 강의인데, 이것과 함께 다음 강의는 “노동운동의 역사와 전망”이라는 주제.

참고삼아 필요한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다운받을 수 있다.
교안1차자본주의란무엇인가.hwp

사실 한계가 많은데, 게으르다보니 시간을 두고 준비하지 못한 것도 문제고 교육을 마치고 나니 초점을 정확히 맞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의 강의에서 전달해야할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하게 구성된 것도 원인 중에 하나일 것이다.

교안의 개요

교안은 자본주의의 역사와 구조를 비정규직노조 현장간부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교안이 포함하는 내용은 이에 따라서 : △ 자본주의의 역사(아메리카 헤게모니 이전까지) △ 자본주의의 구조(자본의 증식과 착취) △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의 정치 △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와 신자유주의(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본 남한자본주의의 발전과 정치) △ 신자유주의의 특성 △ 자본주의의의 미래 등에 대한 주제를 포괄한다.

특히 이러한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각 주제가 구조적으로 관련되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계급투쟁을 필연적으로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의 파괴성과 함께 붕괴의 필연성을 제시하면서, 노동자계급이 경제적인 방어투쟁만이 아니라 대안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으로 나가야한다는 점까지 제시하는 것이 목표.(그것을 위한 운동의 내용은 다음 주 강의의 주제다.)

교육의 난점들

강의를 진행하면서 주로 어려웠던 점이 몇가지 있다.

첫째, 역사적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역사와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을 통합해서 설명하는 것. 자본주의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시종일관 결합하는 것은 별로 가능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출현과 초기의 상업자본주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동역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런 점이 있다. 이런 측면은 역사적 자본주의론을 비판하는 논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역사와 계급투쟁을 “선명하게” 연결시키는 데 난점이 있다는 측면과도 관계가 있다. (여기서는 “교육적인 효과” 때문에 무리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아니면 아예 별개의 주제로 진행해야하는 것일까?

둘째, 노동가치론과 이에 따라 잉여가치의 추출매커니즘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은 교육을 함께한 간부조합원들이 제조업 사업장이 아니기 때문에 설명의 난점이 있었던 측면도 있겠지만, “노동자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교육의 방식, 논리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안을 작성할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실제로 진행하는 과정에서는 조합원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기 때문에, 설득력의 공백이 어느 지점에서 발생하는 지 당장 느껴진다.)

특히, 잉여가치에 대한 회계적인 설명을 지양하려다보니, 보통 잉여가치 추출의 도식으로 설명하는 “노동일 안에서 몇시간은 지불된 노동이고, 몇시간은 부불노동이다”라는 식의 설명을 진행하지는 않으려고 했던 측면이 있었다. 잉여가치를 양적인 측면으로 환원하는 회계적인 설명은 교육적인 목적에서 쉽게 설명할 수 있기는 한데, 별로 내용적으로 옳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무엇보다 잉여가치 추출은 계급투쟁이며 ‘생산관계’의 문제.)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경제학비판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교육적인 효과를 달성할 수 있는 설명방법이 무엇일지를 고민하게 된다.

셋째, 강의의 시간이나 분량 상 이데올로기 비판은 넣지 않았는데, 이것이 없이 계급투쟁에 대해서 특히 국가장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한된 시간, 분량 안에 결합할 수 있을까가 문제가 된다. 자칫 대중교육에는 적합하지 않게 한없이 학술적이 되거나 긴 시간을 요구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보니, 이제까지 마르크스주의를 도식화하는 이론과 설명방법들이 괜히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스탈린주의 교과서의 도식들은 매우 깔끔한 설명이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그것이 교육적인 목적을 넘어서 (물론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론 자체를 도식화하고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론적으로 올바르면서도 설득력있게 대중 교육이 가능한--이 말은 이론이 이를 통해 대중이데올로기로 전화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방식이 있을 것인가가 문제. 그것이 계속 연구되어야한다.

유사한 주제의 기존 교안들에 문제점

이런 점은 교안을 작성하면서 검토한 기존의 교안들을 보면서도 느낀 것이다. 교안들은 자본과 잉여가치에 대한 회계적인 설명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다소 도식적으로 자본주의 역사를 설명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공황을 설명하면서, “과잉생산 때문에 이윤율 저하가 나타나고 그래서 금융위기가 발생한다”는 식의 설명하다가 생산부문간의 불비례까지 언급하고 “공황의 극복을 위해 자본주의는 전쟁, 탈노동정책(???)을 취한다”는 부분도 있는데, 답답해질 지경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설명에서는 부정확한 개념들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고, 특히 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빈곤화(혹은 양극화), 실업과 비정규직 확대 등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 한 채 단지 나열한다. 따라서 투쟁에 있어서도 결과에 대한 투쟁까지를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으로 제시하지만 정작 금융세계화(현시기의 자본주의 자체)를 넘어서 대안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적인 전망을 제기하지도 못한다.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그렇게 강조하지만 정작 그것이 “왜”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인지,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를 준비하기 위한 투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공백으로 남게 된다.

보완되면 더 의미있을 부분들

한편, 강의를 진행하면서 좀 더 보강하면 의미가 있겠다고 느낀 측면들도 있다.(조합원들이 관심을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용 중에는 20세기 자본주의 역사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도래했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에서 세계자본주의의 역사와 함께 남한 자본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도 결합해서 강의를 진행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동학과 정치를 함께 설명하게 만든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경제발전, 한일수교나 유신, 전태일 열사의 분신, 부마항쟁-10/26-광주항쟁과 같은 정치적 사건, 전두환의 집권과 80년대 경제위기와 85년 이후의 3저 호황과 87년 대투쟁, IMF 구제금융위기, 대선 등까지 조합원들이 살아가면서 직면한 중요한 정치, 사회적 사건들의 원인을 제시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의 결론은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세력화(민주노동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와 계급재형성, 대안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 등) 조합원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연령대가 높은 조합원들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좀 더 보완되면 재미있을 부분.

자본주의 사회 계급투쟁의 동역학을 통해서 계급적 단결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교육을 함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자신의 운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할 수 있다는 점도 풍부하게 보완하면 좋을 부분으로 생각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으로 나누어져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설명을 넘어서, 프롤레타리아의 분할과 그 반경향, 자본주의의 변화와 함께 형성되는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대표성과 비정규직 노동자 운동에 대한 설명 등.

이렇게 몇 가지 난점을 보완하고, 긍정적인 부분을 다듬는다면 더 좋은 교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난점들은 더 있을 것이고, 몇몇 부분에 이론적으로 정확치 않은 부분들도 있을 텐데 함께 점검할 필요가 있다. (게을러서 언제나 할지는 모르겠지만 ^^; 아마 언젠가 다른 교육을 할 기회가 있으면.)

조합원, 간부교육은 할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특히 매번 실제로 진행하면서 보완해야할 지점이 어디인지 등을 느낄 수 있다. 또 조합원들의 유언의 혹은 무언의 반응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번 교육에서도 (교육주제와 무관하기는 한 내용까지도 포함해서) 광주시청 비정규직 조합원동지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기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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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중국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중국 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백승욱 엮음 / 폴리테이아


문화대혁명에 대한 중국노동자들의 기억을 구술을 통해 다시 불러오고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들이 밝히는 것처럼 문혁은 당시와 마찬가지로 40년이 지난 지금도 매우 정치적인 쟁점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것을 택한 지금의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문혁은 재앙이었다. 문혁은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한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도 계급투쟁이 지속되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급속한 자본주의적 재편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결합할 수 있는 폭발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주의 정치의 측면에서, 공산당의 국가권력 장악 이후에 문혁은 국가와 당을 관통하는 혁명이라는 점에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스탈린주의 이후 관료주의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되어가던 사회주의는 중국에서 문혁을 거치면서 새로운 전망을 획득하기도 한다. 68혁명 과정에서 중국의 문혁이 주목되고, 이후에도 외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들을 당시 문혁에 참가한 노동자의 기억을 통해서 돌아본다는 것은 온갖 평가들--공식적이거나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들 속에서 문혁의 구체적인 실제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길이다. 이렇게 바라본 문혁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사건들의 나열을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전한다. 힘든 조사를 수행하고 정리한 저자들의 노력 덕분에 이런 기억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노동자들은 문혁 과정에서 무엇이었나? 노동자들은 문혁 속에서 능동적인 정치적인 주체로 거듭났다. 노동자들은 진정으로 자신이 ‘영도계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신들의 사회주의 혁명을 밀고 가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자신들을 조직했다. 공장에서 자발적인 조직을 구성하고 진정으로 더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투쟁에 나선다. 심지어 당을 향해서도 투쟁하고 권력을 쟁취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인상적인 기억이었다. 문혁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당시의 입장, 지금의 입장에 따라서 평가가 다른 점도 있지만, 주로 개혁/개방 이후에 노동자들이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위치를 잃고 기계의 부품이 되고 열악한 상황에 내몰린다는 점을 비판한다.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문혁 당시 기억에 기반해서 조직된다는 점도 지적된다. 중국노동자들의 이후의 투쟁이 문혁의 기억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그것은 또한 세계 노동자운동의 미래와 자본주의 세계체제 앞날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문혁 과정에서 생산 현장에서 권력이 재구성되고 직책이나 지적 위계에 관계없이 평등한 관계가 만들어진다.(오히려 간부나 기술자보다 노동자가 우위에 선다.) 이와 함께 노동자 조직은 공선대로 대학에 파견되어 학생운동(홍위병, 학생 조반파)을 오히려 정치적으로 지도한다. 한편으로는 학생 홍위병이 문혁 초기에 공장에 진입하여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급진화시킨다. 지식에 따른 정치의 위계를 적극적으로 철폐하고 지식인과 노동자가 정치적으로 교통한다.

이와 함께 교육도 혁신된다. (이는 주로 문혁 중앙지도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공농병工農兵 대학과 같은 제도를 통해서 평범한 노동자, 농민, 병사들에게 고등교육의 문이 열린다. 초중등 교육이 농촌지역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생산과 결합하여 교실만의 학습을 벗어난다. (우리가 가진 교육제도의 관념, 즉 전일제로 교실수업만을 통해 지식을 주입하는 형태와는 달리 훨씬 더 긴밀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과 함께 생산에서도 혁신이 이루어지는 데,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구체적인 생산 현장을 바꾸어나가기 때문이다. 문혁 기간 동안 생산을 잘 수행하는 것도 투쟁의 중요한 쟁점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상과는 달리 생산이 중단되거나 파괴된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경제성장률 등은 매우 높은 수치를 기록하기도 한다. 노동자들이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생산력의 성격조차 바꾼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이다. 생산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생산력의 측면에서도 계급투쟁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생산력의 혁신은 사회주의 단계에서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한다는 점을 보여준다.(사회주의 단계가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혁명의 계속된 기간인 것처럼.)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기억을 통해서본 문혁은, 사회주의가 하나의 고정된 단계가 아니라 혁명의 계속이라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럴 수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매순간 모든 곳에서 노동자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지속되어야한다. 국가권력의 장악은 단지 시작일 뿐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지속적으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공장과 지역, 학교를 혁명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기억은 사회주의 정치를 사고하는데 있어서 문혁은 결정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다시 증명한다. 사회주의는 국가 운영-관리의 기술이 아니라 언제나 대중운동의 이념이라는 점. 이것은 현재의 우리 운동에 있어서도 매우 현재적인 쟁점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 이후에 너무나 쉽게 잊혀진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문혁의 기억을 돌아본다는 것은 사회주의를 사고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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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술 진탕 먹은 다음 날

친구놈들과 술을 진탕먹고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다음날 아침.
그런데,

경험도,
상처도,
통찰력도
이 녀석들을 보니


너무
적고
아직도 어리다
넌 도대체
그 동안 뭘 한거니
정말 관료질 온실 안에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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