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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2/31
    2007년의 마지막날들(4)
    겨울철쭉
  2. 2007/12/30
    민주노동당,분당이 답인가?(4)
    겨울철쭉
  3. 2007/12/24
    [교안]비정규직조직화 전략세우기
    겨울철쭉
  4. 2007/12/23
    그해 여름
    겨울철쭉
  5. 2007/12/13
    [독서]대한민국 병원 사용설명서(2)
    겨울철쭉
  6. 2007/12/11
    [독서]존재의 심리학(1)
    겨울철쭉
  7. 2007/12/07
    사직하면서;부치지 못한 편지(5)
    겨울철쭉
  8. 2007/12/02
    로르카, 강의 백일몽
    겨울철쭉

2007년의 마지막날들

12월31일. 잘 '기념'되지는 않는 기념일 중 하나. 어찌보면 그저 사람이 만들어놓은 날짜들의 구획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하나의 계기들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은 의미가 있다.

2007년의 마지막 며칠 동안. 그제는 베토벤의 '합창', 9번교향곡 연주회를 갔다. 오늘은 휴가를 내고 서울시립미술관 반고흐展에 다녀왔다. 고난에 찬 2007년을 마감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두 개의 선물을 한 셈이다. 우연한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이 다가온 어떤 이유들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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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9번 교향곡은 흔히 보편적인 인류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곡을 들으면 그것은 그저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속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들의 형제애, 민족(국가)을 넘어선 연대가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곡의 해설에 대해서는 붉은털실님의 포스팅이 좋다.
http://blog.jinbo.net/egalia227/?pid=155
링크를 따라가면 푸르트벵글러의 1951년 공연도 들을 수 있다.

예술이 (마치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자선언'처럼) 하나의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선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그렇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의 이념이자, 구체적인 개인들에게는 어떤 활동의 지침같은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나갔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국제주의적 연대. 너무 거창해 보이지만 마치 공산주의자선언이 그런 것처럼, 그것이 우리의 이념이라면 그것은 개인들을 '활동가'로 만들 수도 있다.(이 위대한 작품을 단지 정치적 선언으로 해석하고 긴박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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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당시 네덜란드 반고흐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등지에 보고 세달만에 다시 만난 전시회.
몇몇 작품은 만난적도 있어서 괜히 반갑다.

여행에서 쓴 글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고흐의 그림에서 특징적인 것 중에 몇가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영혼의 고통을 자신의 예술로서 구원받고자한 열정.

이번 전시에서는 유럽에 갔을 때 꼭 보고 싶었지만 못봤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슬픔'이라는 제목의 석판화.

동거하던 시엔이라는 여인을 그린 1882년 작품이다. 여행을 시작할 때, 이 그림은 마치 나의 마음 속에 있는 슬픔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같은 느낌이었다. 웅크리고 떨고 있는, 누군가 다독거려주기를 기다리는 절망적인.

결국 한달반 여행을 거치면서 그 누군가는 무엇보다 자기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늘 보았을 때에서 그 슬픔을 다시 만나고 한참을 앞에 서있기도 했지만, 훨씬 덜 격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다시 만난 고흐의 다른 그림들, 자화상이라든가, 피에타(들라클루아 모작) 같은 작품들도 나에게는 지난 3개월 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는 리트머스시험지와 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는, 슬픔에도 어느정도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더 담담하게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개인사적인 느낌 외에도, (초기 네덜란드 시기부터 아를까지 이어지는) 고흐의 그림의 어떤 이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베토벤에 대해서 말한 것처럼, 고흐의 작품도 하나의 이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령 <씨뿌리는 사람>같은 경우를 보라. 그것은 태양의 진실 속에 표현된,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고흐가 그리고자 했던 "영원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이다.

한편으로는 영적이고, 한편으로는 정치적이기도 한 이러한 이념 역시 우리 활동에 어떤 '선언'이 될 수 있고,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삶에 녹여낼 지향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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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국제주의, 형제애와 노동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영적이고 정치적인) 애정은 어쩌면 멀리 떨어져있는 것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인민의 해방을 위한 운동에 다양한 모습으로 결합되었던 이념적 근원들의 일부다.

그것들을 예술 속에서 사고할 수 있고, 또한 실천 속에서 녹여낼 수 있을까를, 올해 마지막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연찮은 계기로 나에게 선물한 두 가지의 예술적 체험은 아마도 2007년, "삶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를 지나온 나에게 어떤 방향을 말해주는 것같다.(목적론적인가? ^^;) 2007년이라는, 어떤 방식으로든 개인사적으로 가장 깊은 의미를 가졌던 한해를 정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을 간절히 찾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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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분당이 답인가?

어제 민주노동당 중앙위가 파행적으로 끝난 이후에 분당론이 더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당원도 아니니 좀 자유롭게 혹은 거리를 두고 이야기해보자. 물론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사업도 많이 함께 하고 있으며 이번 대선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선거 때마다 투표는 했다는 정도는 밝혀둔다.

왜 분당하려고 하는가?

분당을 주장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왜 분당하려고 하는가?"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분당론자라는 분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이유들이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엊그제 민주노동당 중앙위에서 제기된 요구를 보면 아래와 같다. (레디앙 인용)

현장 발의안의 주 내용은 △종북주의 및 패권주의 청산, 당 강령 정신 및 당 민주주의 실현, 대선평가 당 전면 쇄신안을 임시당대에서 확정하고 △1월 15일 이전 임시 당대회 개최하며 △비례대표 추천권, 당규개정권 등 중앙위 권한의 비대위 전면 위임 등이다.

중앙위의 요구사항이 그 자체로 분당론의 모든 이유는 아니겠지만, 다른 분당 주장 입장들을 보아도 종북주의, 패권주의는 중요한 근거로 제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위기의 원인은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인가?

종북주의와 패권주의가 물론 하나의 문제들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민주노동당이 이번 대선에서 보여준 심각한 위기의 주된 원인인가? 혹은 권영길이 문제인가? 권영길의 노쇄한 이미지 때문에?

그렇다면 종북주의와 패권주의가 없었다면, 권영길이 후보가 아니었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런 결과를 만든 원흉이며 앞으로도 이런 식의 '뻘짓'을 할 자주파와 분리하면 대중의 지지를 받는 건강한 진보정당 운동이 가능할까?

글쎄, 나는 이 대목에서 분당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일부는 '순진한 분'들이고 일부는 (좋게 말해서) '영악한 분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번 대선에서 코리아연방공화국 논란이 당내에서 심각하기는 했지만 실제 선거과정에서 대중적으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패권주의적 작태 때문에 기층 당조직이 의기소침했다는 이야기들은 들었지만 적어도 당원, 활동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운동에 헌신적이었다.

이번 대선 참패와 당위기의 원인을 주로 종북주의, 패권주의로 제기하는 것은 자주파에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비당권파들은 면책받고 면피하기 좋은 방식일 뿐이다. 그러니 '그래봤자 정파적인 권력투쟁 아니냐'는 비아냥을 받는 것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자기반성을 포함한 지난 5년의 비판

구체적인 쟁점에는 논란이 있겠지만, 이번 대선 참패의 주된 원인은, 민주노동당이 사실상 '진보'라고 자신을 표상하는 노무현, 통합신당, 문국현류와 같은 세력,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이중대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찾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탄핵사태를 정점으로 주요 쟁점들에서 이들과 함께 했으며, 입장이 갈릴 때에도 국회 안에서 '예의바르게' 정책대안을 제시했다. 주로 노무현 심판이라는 회고투표로 진행된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과 친한 것으로 생각되는 민주노동당이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지난 5년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은 기껏해야 민주노총의 정규직 조직노동자를 대변하는 세력으로 인식되었다.(심상정, 노회찬이 후보가 되었으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환호했을까?) 그리고 이런 상황은 대선후보 선출 후부터 선거운동기간까지의 과정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지난 4~5년 활동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자주파만의 책임일까? 물론 자주파가 비판적 지지, 과도한 통일전선론의 입장에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어오기는 했지만, 사실상 당 내의 어느 세력도 의미있는 다른 정치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평등파라고 불리는 非자주 정파들은 순치된 개혁적 의제를 중심으로 의회활동을 전개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운동이 아니라 '열우당의 조금 왼쪽'에 있는 성실한 정책정당을 만들고자 했을 뿐이다. 게다가 '전진'으로 말하자면,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의 표상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민주노총 안에 있는  그 멤버들(이른바 중앙파)의 역할이 오히려 지대하다고 할 정도다.

어떤 운동적 대안?

자, 하지만 이제 책임소재를 묻기 전에 운동적 대안을 만들어야하니 분당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면 다시 이야기해보자. (사실 자주파에 "책임소재"를 묻고 있는 것은 평등파라는 점에서 모순된 문제제기일 수는 있지만 말이다.)

새로운 진보정치 혹은 노동자정치운동을 만들고자 한다면 왜 그 제기방식이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비판인가? 그리고 이를 명분으로 하는 분당논의인가?

오히려 민주노동당을 신자유주의 개혁의 이중대이며, 세상을 바꿀 의지도 힘도 없는 고분고하고 제도화된 합리적 정책정당이고, 정규직 노동자들 이해를 대변하는 데 불과한 '민주노총당'으로 만들어온 과정에 대해서 비판이 이루어져야하는 것이 아닌가? (자주파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비판 말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운동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자주파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식의 분당론이 아니라 어떤 내용으로 정치운동을 할 것인지를 제기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대중을 조직하고 변화시키는 운동정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안사회를 급진적으로 제기하고 투쟁할 것인지를 물어야하지 않는가?

만약 그 반성과 대안에 대한 논의의 결론이 결국 '분당'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작금의 민주노동당 내의 문제제기는 문제의 책임을 자주파에게 전가하는 것으로만 집중되고 있으며, 자신들은 부정하더라도 결국 당내 권력투쟁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당내 권력투쟁의 결과로 분당한다면 그들이 이후에 창당하더라도 당외의 좌파들이 왜 이들과 함께하겠는가? 그렇다면 기껏해야 사민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을 대거 포함하는 민주노동당내의 非주사 정파들의 연합당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실용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그렇다. 분당으로 새로운 운동을 하고자 한다면 자주파에 대한 책임전가와 네거티브한 평가만이 아니라 어떤 운동을 하겠다는 포지티브한 입장이 있어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분당 후 만들 신당의 정체성을 '반자주당'으로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분당, 혹은 신당이 진정으로 필요하다면.

'민중의 소리'라는 NL 정파기관지가 폭로한 전진 한석호씨의 문건 전문을 보면 향후 정황, 정세에서 자주파의 행동을 예측한다. 이대로 간다면 2012년에는 평등파는 괴멸한다고 진단한다.

한석호씨의 진단을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대안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대중운동을 위해서는 새로운 정당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2012년, 이명박의 실패 이후 대중의 선택이 더 반동적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위한 운동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그것은 매우 긴박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분당'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정치운동의 주체형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주파는 그런 정세에서 올바른 역할을 전혀 할 수 없는 세력이고, 그것은 남한에서 사회운동 전체의 파멸이 될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 내에서 그들이 계속 득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객관적 현실이라면 새로운 정당운동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 내의 평등파를 주목한다.

그러나 작금의 분당논의의 내용과 방식은 이런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기에 충분하다. 결국 민족자주당 대 사민당이라는,  불모의 구도를 만들거라면 그냥 민주노동당 안에서 소멸하는 것이 차라리 운동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석호 씨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새로운 운동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당내 권력투쟁으로 이 과정을 사고한다면, 시간만이 아니라 희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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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비정규직조직화 전략세우기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진행한 "미조직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서울지역 조직역량강화교육"의 일환으로 진행한 교육 교안.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전략 세우기"라는 주제.

비정규직 전략조직화 사업을 각 조직에서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서 진행한 교육과 실습이다. 보통 노동조합의 사업계획 세우기 교육과 유사하지만 다만 미조직비정규직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이라는 영역에 특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안은 전반적으로 일종의 짜집기다. 앞부분, 노조가 처한 외부적인 조건 도식은 민주노총 교육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번째 부분 노동조합 활동의 일반적인 사업도식은 논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경영학의 조직관리론 쪽에서 비영리기관 조직관리 도식을 가져온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타당성 있는 측면이 있다. (특히 조직자원 영역에서 지속적인 학습을 강조하는 부분 등)

세번째 부분은 이 교육의 첫강의로 진행된 철폐연대 김혜진 집행위원장 강의와 민주노총의 전략조직화 사업에 대한 정의에 비추어 고려해야할 사항을 도식에 맞추어 다시 정리한 것이다.

이렇게 짜집기이기는 하지만 몇가지 강조하려고 했던 부분은 있다.
우선,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직의 자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지속적인 학습과 구성원의 팀웍(단결력이라고만 말하기에는 더 있는)이라는 점. 지속적인 학습은 또 하나 강조하려고 한 내용인 '조직의 목표설정'과 관련되어 있다.

조직의 목표설정을 특히 강조하려고 한 부분. 비정규직 조직화를 왜 하냐는 것을 질문하려고 했던 것이다. 단순히 조합원을 몇명 늘리자는 취지라거나 혹은 남들 다 이야기하니까 하는 당위가 아니라 어떤 운동적인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했다. 그래야만 비정규직 조직화가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일환이라는 점을 상기하고, 또한 그런 측면에서 어떻게 사업을 해야할 지 사고할 수 있다. 조직화 사업의 모든 측면에서 그 (운동적이고 정치적인) '목표'가 구체적으로 녹아나야한다.

진행을 하다보니 더 세부적인 사항을 고려해서 보완해야할 지점들이 있다는 생각이다. 시간적으로도 불과 3시간 정도에 진행하기는 힘들다. (조직별 토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직진단이나 사업전략세우기와 같은 각종 실습 교육에서도 조직을 어떻게 만들고 운동할 것인가라는 쟁점을 반영해야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교안 파일 링크.
교안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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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그 해 여름
(2006) / 121분/2006-11-30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인데 뒤늦게 보았다. 작년에도 11월말에 개봉했으니, 여름이 배경이기는 하지만 겨울에 보는 게 적당한 것같기도 하다. 조금 더 영화와 거리를 둘 수 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영화는 관객 대부분이 갖고 있을 각자의 '그 해 여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래, 바로 '그 해 여름'이었다.

사실, 영화는 좀 어설픈 점들이 없지 않다. 1969년의 농활이라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해볼 때 영화에 나오는 방식으로 대학생들이 농민들을 만나는 설정도 어색하다. 그리고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 농촌의 처녀를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은, 도시-농촌, 지식인-무지자의 차이를 남성-여성으로 환유하는 불편한 구도다. 사건의 전개는 어쩌면 상투적이기도 하다.

여튼, 진부한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영화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봄날은 간다>의 상우/유지태)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떤 사랑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헤어지더라도 말이다.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정인(수애)처럼 혼자서 편백나무 잎을 세상 어딘가로 열심히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모든 사랑은 변한다"" 혹은 "어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주장들이 가능할 것이다. 어느 쪽이 되든 절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뭐, 어느 쪽이든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어설픈 틈새들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살아있는 건 거의 두 명의 주연 배우 덕분이다. 특히 (그리 예쁘다고 할 수는 없는) 수애라는 배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었더랬는데 영화를 보면서 아주 깊은 매력이 있는 배우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흔한 미모보다는, 다른 종류의 매력이 있다. 좋은 배우를 좋은 연기로 만난 것같아 좋다.


영화를 보려고 떠올렸던 건, 영화와 별 상관은 없지만 제목은 같은 노래 때문이다. 새로산 MP3플레이어에 놓을 노래들을 고르다가, 한동안 잊고 있던 곡을 다시 듣게 되었다. '펄스데이(Pearl's Day)'의 '그해 여름'이라는 곡이다. 우연찮게도 이 영화에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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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대한민국 병원 사용설명서


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
강주성 지음 / 프레시안북

 

 

책을 쓴 강주성씨는 참 독특한 사람이다. 사회운동과는 거리가 먼 생활인이던 그는 백혈병 환자가 된 후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모순을 온몸으로 경험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자기몸 하나 간수하기도 급급했을 텐데, 그는 동료 환자들과 함께 이 모순에 싸우기 위해 집단적인 힘을 모았다. 다행히 병을 고친 그는 이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한국의 보건의료 체제와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지금은 '건강세상네트워크'라는 보건의료운동 단체에서 일한다.)

 

그래서 그가 쓴 이 책은 죽음의 문턱, 가장 절박한 시기에 병원을 '사용'한 사람이 느낀 절박함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런만큼 치열한 대안에 대한 고민도 담겨있다. 그 절박함은 자신은 물론, 돈이 없어도 살아남을 권리를 주장하다가 먼저 세상을 뜬 동료 환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국의 보건의료 체제의 문제, 의료기관의 부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고발하는 것을 넘어서 매우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제도를 어떻게 바꾸어야하는가에 대한, 환자(따라서 보통의 시민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현장에서의 시각으로 탄생한 대안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아주 더 실용적으로, 환자의 입장에서 실제 병원을 이용할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매뉴얼'을 담았다. 사회적인 대안과 개인적인 대책을 모두 담은 셈이다.

 

저자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운동은 물론 개인들이 병원을 이용할 때 병원에게 원칙대로 할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자기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병원을 당혹스럽게 하고 귀찮게 하는 것도 그들을 강제하는 큰 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병원이 꼼짝할 수 없는 '사소한 것들'(그러나 환자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것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들은 병원이 사실상의 영리기관으로 자본의 논리에 따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부가 그러한 자본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을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황당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급기야 한미FTA는 최악의 상황을 몰고 올 것이라는 것을,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단지 '보건의료 부문' 혹은 '의료개혁'에 대한 책만은 아니다. 제한된 영역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이 부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필연적으로 전체 사회운동과 관련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부문운동'이라 불리는 것이 '부문'에 갇히지 않는 사회운동이 되는 방식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보건의료 영역의 이러한 중요한 쟁점들을 모르고 있던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주장하면서 켐페인 사업을 하기 전에 노조의 조합원들과 이런 내용을 교육사업 등을 통해서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의 문제, 생명과 직결된 문제가 어떤 식으로 사회운동이 쟁점들과 연관되는지, 우리가 평등한 의료체계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왜 해야하는지를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으로부터 이른바 노조의 '사회공공성 투쟁'이라는 것도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지하철 선전전 이전에 말이다.)

 

병원을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그리고 가난한 우리들에게 이 책은 실용적인 매뉴얼이면서 운동의 지침서이기도 하다. 다른 운동영역들에도 이런 식으로 글을 쓰고 대중들과 대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프레시안에서 처음 낸 책이다. 프레시안에 책 소개 기사가 잘 실렸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1116143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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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존재의 심리학


존재의 심리학
아브라함 H. 매슬로 지음, 정태연.노현정 옮김 / 문예출판사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가 이 책에서 한 주장은 주로 "인사노무관리" 서적에 주로 도식으로 인용된다. 사람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위계화한 그래프인데, 한 번 쯤 본 적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안전 욕구(sefety needs), 애정과 소속의 욕구(love and belongingness needs), 자기 존중의 욕구(self-esteem needs), 그리고 자아 실현의 욕구(self-actyalization needs)가 등장한다. 이들 그래프에서는 아랫 단계가 충족되어야 위에 단계가 가능하다고 인용하면서, 조직 안에서 자아실현의 욕구를 어떻게 창출(따라서 기업조직에 충성)할 것인가를 검토한다.

하지만, 정작 매슬로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러한 인용의 도식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목적에 있어서도 조직에 충성스러운, 혹은 창의적이고 따라서 효율적인 인간을 만들기 위한 것과도 다르다.

오히려 매슬로는, 자기실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위의 욕구들이 부차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실현을 통해서 보다 건강하고 고귀한 인간형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절정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절정경험'은 자기 자신과 세계-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몰입의 순간이다.)

매슬로에게 자기실현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경이로운 가능성과 심층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동기는 결핍을 채우기위한 욕망이라기 보다는 존재를 실현하기 위한 욕구가 된다.(매슬로는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를 '결핍의 심리학', 자신의 주장을 '존재의 심리학'이라 부른다. 책의 제목은 이렇게 나왔다.)

사실, 이 책에서 매슬로의 주장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론'이라고할 만큼 근거를 갖거나 논리적인 체계를 갖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책 전체의 내용은 '묘사'들에 불과하고 기껏해야 묘사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저자도 어느 정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는데, 자신의 주장을 발전시켜 동료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증명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구절들이 등장한다.) 물론 '설명적'인 부분에서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정신분석 혹은 심리학적인 상식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흥미로운 내용들은 많다. 설득력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떤 이론적인 동기라기 보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이 책의 주장, 즉 자신과 대상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순간(매슬로는 '절정경험'이라고 부른다.)이 존재하며, 이를 통해서 자신을 더 발견하게 될 때, 사람은 더 높이 고양된다는 것(매슬로는 이를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자기실현'이라고 부른다)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에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지만, 최근에 여행에서 경험한 강렬한 자기고양의 순간들은 매슬로가 묘사하는 '절정경험'과 대단히 유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의 효과--자기존중과 고양, 신경증 증세의 해결 혹은 완화--도 그렇다.

여행에서 그 경험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전혀 새로운 것들을 만나오면서, 그리고 나 외에는 대화할 사람이 없는 곳에서 불현듯 나 자신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눈물이 나는 아픈 것이기도 했지만 어느 때에도 경험하지 못했을 행복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다.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에서, 베를린 아테 미술관의 네페르티티 상 앞에서, 스위스의 등산열차, 절벽 앞에서, 피렌체의 두오모 쿠폴라 정오의 종소리에서, 피사의 다리 위에서, 아테네 리카비토스 언덕의 야경 앞에서, 등등. (다른 어떤 이유보다, 이런 경험이 짧은 기간에 집중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지난 여행은 내 삶에 최고의 시간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매슬로가 언급하는 것처럼 그런 절정경험은 보통 사람들에게 연애/사랑에서 자기고양과 대상에 대한 직접적/총체적 인식으로 나타난다. 나에게도 이와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지난 연애들 중에 적어도 한 번의 사건--그 보다 강렬하지만 오히려 섹스는 아닌--에서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장을 내가 모두 신뢰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매슬로가 보여주는 묘사의 내용은 나의 개인적 경험과 생생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의 주장은 어떤 이론적인 근거를 갖는다거나 실증적인 증거도 거의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매우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이 책의 묘사, 그리고 이런 것이 적어도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증명하는 노력이 더 있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한편으로, 이 책은 묘사적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근거를 갖지 못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장점이기도 하다. 이 책의 묘사들은 읽고 있으면,  그런 경험들의 순간이 생생하게 다시 떠오르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매우 개념적인 언어들로 이루어진 묘사이지만 마치 시처럼 느껴진다. 글의 어떤 논리적 구조보다, 이어지는 낱말들의 연쇄가 행복을 준다.

자, 어쩌면 다른 이들의 독서에서는 말도 안된다는 비난을 받을지 모를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매슬로가 말한 것들(정확한 개념도 부여하기 힘든 것들일 수 있다)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의 독서는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마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같았던 나의 독특한 경험을 누군가 "나도 그랬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 같다. 더 좋은 것은 그 경험이 자신의 발전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해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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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하면서;부치지 못한 편지

우여곡절 끝에 노조에 복귀한지 열흘이 지났다.

병가와 휴직이 끝나는 마지막 시기에는 복귀를 하지 않고 다른 활동을 하려고 생각을 했다. 결국, 결국은 복귀하게 되고 말았지만, 그것도 노조 활동을 하는 동안 끝까지 피하려고 했던 정책업무를 하게 되었다. 노조 정책실에서 쓰는 혹은 써야하는 글의 태반이 허구적이라는 점에서, 또는 정치적으로 그릇되거나 그도 아니면 엉터리라는 점에서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최근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거짓말을 덜 하고 활동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안 하고'도 아니고 말이다.)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같은 느낌. 하지만 어떻게 진실을 유능하게 말하고 글로 쓸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의미가 없지는 않은 일이니까.

휴직이 끝나는 마지막 주에, 사직하면서 노조 활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에게 보내기 위한 몇개의 글을 썼다. 아래는 그 중에 하나. 전반적으로 이제까지의 활동을 평가하면서 앞으로는 이렇게해달라라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최대한 누린 글이다. 결국은 보내지 못했지만, 이제는 내가 나의 유언집행자가 되어야할 상황이랄까.

앞 뒤에 인사말과 개인적인 소회(그것도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지만;) 부분을 빼고 운동적 쟁점과 관련된 부분이다. (마지막 가는 인사에 이런 것이 적당하냐고 누가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남는 활동가들에게 가장 최선의 선물은 이런 비판들이 아닐까?)

다만, 이른바 "사회공공성"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노조운동의 어느새 '지배적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전면적이라기 보다는 우회적으로 비판했다는 점 정도는 언급해야할 것이다. 다른 부분은 더 솔직하다.
(더 개인적인 일부분은 조금 수정)

전반적으로 '사회공공성' 투쟁이라는 것의 문제,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에 대한 노조사업이 변해야할  지점에 대한 의견이다.
 


(전략)

말씀드릴 것은 우선 사회공공성 투쟁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공공성 투쟁은 최근에 민주노조 운동 전반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한계에 봉착한 노동자운동이 나가야할 방향으로 제시되곤 합니다. 특히 노조-연맹에서 사회공공성이라는 건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고 있죠. 그런데 죄송하게도 저는 사회공공성이라는 과제가 몇몇 중요한 전제가 빠진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는 하나마나 하거나 혹은 안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현재 제기되는 사회공공성에 대한 여러 측면의 비판이 있지만, 이 슬로건을 인정하더라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이 과제에 비어있는 측면만 언급하고 싶습니다. 현재까지 사회공공성은 노조 안에서는 주로 "사유화반대(국유화)-지배구조민주화"로 이해되고 있고, 노조-연맹 밖에서는 주로 무상교육 무상의료로 이해됩니다. 대선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아마 대선 이후 당선될 이명박이나 이회창의 주된 공세가 다시 사유화로 연결될 것같기도 하니, 사유화 반대 투쟁만 해도 아직 중요하죠.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어야할 네가지 문제 중에 실제 운동과정에서 전혀 논의되지도 못하고 빠진 것이 세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1) 소유관계 2) 노동자, 민중통제 3) 국가성격, 권력 4) 노동자운동, 노조의 변화

1) 소유관계에 대해서는 사유화 반대라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되고 있는데 문제는 있겠지만 이건 일단 넘어가죠.(국가소유라고 그것이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기만이 문제입니다.) 문제는 2)는 "지배구조 민주화"라는 식으로 제기되는데 이건 왜곡된 방식이라는 것이고, 여기에 3) 국가성격, 권력 4) 노동자운동, 노조의 변화는 아예 언급도 없다는 겁니다. 공공부문이 사유화되어서는 안된다고 할 때, 대안이 뭐냐는 게 문제이기도 하죠. 그럼 지금처럼 국가의 관료적 지배구조를 온존시키고 공기업노동자들은 IMF위기 이후 불안한 상황의 지대를 지키는데 몰두할거냐는 겁니다. 기득권 지키자, 이렇게 가면 그럼 그게 무슨 운동이냐는 것이구요.

결국, 변혁적인 전망 속에서 공공부문이 사고되어야한다면, 마치 "이해당사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의 공공부문 번역판인 "지배구조 민주화"가 맞냐는 것이죠. (Stakeholder Capitalism는 한편으로는 주주자본주의로 번역되기도 하는 말이니, 그 의미는 자명합니다.) 오히려 노동자의 생산과 관리통제(따라서 인사경영참여를 넘어서는 작업장-현장권력의 문제로 접근해야합니다), 그리고 민중통제가 문제입니다. 특히 민중통제는 결국, 기업에 개입할 노동자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민중연대-사회적 연대를 구축할 것인가가 문제겠죠. 그렇게 보면 결국 4) 노동자운동, 노조의 변화라는 것이 동시에 이야기되지 않고서는 사회공공성은 허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 "3)국가성격과 권력" 문제는 이야기가 길어질 수 있으니 넘어가죠. 결국 정치운동에서 노조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문제일텐데, 지금처럼 민주노동당 선거기금 모아주는 방식의 운동으로 그게 되겠냐는 이야기부터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저런 정책대안들은 있지만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적 전망도 함께 갖고 있냐는 질문이죠.)

공기업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해서 '귀족노동자'라고 언론에서는 주장합니다. 이미 비정규직노동자가 '일반화'된 상황인데다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빈곤화라는 것까지 감안하면 반박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공기업정규직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착취에 노출되어있지 않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다소 위험할 수 있는 말이지만) 공기업정규직노동자들에게 임금가이드라인 분쇄라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일까하는 것을 묻고 싶은 겁니다. 오히려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조직 내 운동", 노조의 이념과 조직을 혁신하기 위한 운동이 매우 의식적으로 진행되어야할 겁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회공공성이라는 것이 국가소유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야한다면, 그것이 지배구조민주화든 노동자, 민중통제이든 소유를 넘어선 관리와 운영에 개입해야한다면, 여기에 개입하는 주체인 해당 사업장의 노동자(노조)에게 사회적 정당성이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노동자통제'가 되기 위해서라도 사내하청을 포함한 비정규직노동자에게 열려있어야하는 것은 물론이고, 민중통제라는 문제의식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도 민중연대, 사회적 연대가 결정적일 겁니다. 하다못해 '노조의 경영참가' 정도로 이해된다고 해도, 그 노조가 조합주의, 경제주의에 빠져있다면 결과는 뻔한 것 아닐까요? 조합주의와 경제주의가 지배적인 공기업정규직노조를 내부에서부터 변혁하는 과제가 같은 '사회공공성' 슬로건과 무게로 취급되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회공공성을 이야기하려면 그것을 주장하는 만큼, 동시에 노동자, 민중통제, 정치운동, 노동자운동의 내부적인 변화라는 것이 패키지로 함께 제기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듣기만 좋은 슬로건 몇개 제기하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를 한발짝도 넘어서지도 못하는 국가소유, 관료적 통제를 넘어서지도 못하는 지배구조 개혁을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설사 된다고 해도 만들어지는 것은 결국 퇴행적인 공공부문 판 '노사담합체제'겠죠.) 그게 운동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아예 사회공공성 슬로건은 폐기하거나 전면적으로 재구성해야할 것입니다. (그나마 이런 정도로 사회공공성 슬로건에 반성이 가능하고 그것을 주도할 수 있는 조직은 공공노조 정도밖에 없습니다. 사회공공성이라는 것이 이런 모양새인 조건에서 '사회공공성 선전전' 같은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 답답해집니다.)

그래도 공공부문 노조운동에 '주도적인' 슬로건인데 너무 심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떠나는 마당이지만 애정이 있으니 이렇게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네요. 아제 이 다음 이야기는 제가 해왔던 활동과도 연관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비정규직 투쟁과 조직화에 대한 측면입니다.
저 도 조직실-비정규직-지역본부를 거치면서 비정규직관련 사업을 여기저기서 해왔기 때문에, 이것은 더더욱 자기비판의 성격이 강한 이야기입니다.(지금 활동하시는 동지들 비판하고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니 양해해주세요. 그보다는 자기비판.)

제가 하던 시기부터 이제까지 비정규직 사업은 주로 신규조직화와 조직확대, 단위사업장 투쟁, 제도개선 투쟁 등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중심적으로 진행해야할 사업들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 지만, 애초에 왜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이라는 과제가 중요하게 판단되었던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체를 형성한다는 측면이었죠. 그러나 돌아보면 조직확대, 사업장 투쟁을 넘어서 매우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형성"(새로운 운동주체의 형성)이 거의 간과되어왔다는 점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몇년간의 비정규직 운동을 평가하면서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정규직 노조운동의 경제주의와 조합주의를 모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비정규운동을 하는 주체들 사이에서 자주 지적되고 있습니다. 공공노조(연맹) 역시 비정규직노조운동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운동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조직형식적인 실험(지역지부) 정도가 진행되고 있으나 여전히 한계가 많고 전략적 투자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어려움에 처해있죠. 그것을 넘어서 이들 주체가 지역적 연대를 강화하도록 하는 것에서부터 사회운동과의 결합, 활동가 육성, 조합원교육 등등등에서 주체를 형성하고 운동의 '질'을 바꾸기 위한 노력은 당면한 투쟁에 항상 밀려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긴급한' 과제를 진행한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과제를 수행했다고 보기는 힘들겠죠.

따라서 이후에 노조의 어떤 부서 혹은 지역본부가 업종본부가 하든, 비정규직 운동주체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매우 특별하게 배치되어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노력없이는 비정규직사업은 '앙꼬없는 찐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당면해서는 이런 노력은 몇몇 지역지부 조직들에서 어려운 조건이지만 그나마 진행되고 있습니다.(중앙조직에서 직접 주체형성에 기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지역-현장의 몫일텐데, 그렇다면 중앙조직에서는 이러한 지역-현장에 대한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집중적으로 고민되어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00, 00, 00같은 지역에서 이런 측면의 노력들이 의미있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제한된 자원의 전략적 투자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이들 지역지부에 대해서는 별도의 더 과감한 가중투자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건 지역지부 간 형평의 문제가 전혀 아니고 전략적 투자라는 측면에서 집행부의 결단이 필요한 측면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본부들도 대승적으로 양보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이들 지역에서 어떤 '전형'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이후 조직의 전체 발전, 공공노조 내 비정규직 사업, 투쟁, 조직화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는 건, 이제 떠나는 마당에 개인적인 이해관계도 전혀 없으니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것들은 소중한 불씨이지만 너무 꺼지기 쉬운 상황입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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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카, 강의 백일몽

로르카는, '시인이 총살 당하는 시대'의 희생자다.
좌파였던 이 시인은 1936년, 스페인에서 프랑코를 두목으로 하는 파시스트들의 쿠데타가 시작된 직후 그라나다에서 총살당한다. 시인이 총살 당하는 시대, 20세기는 오래 지속되고 있다.

번역된 시집을 읽으면 그는 너무나 아름다운 서정시인이다. 서정시인을 죽이는 시대.

로르카를 읽으면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예민한 영혼을 가진 시인도 헤어지고 영혼에 칼로 벤 상처를 받아도, 여전히 또 시를 썼다는 것,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를 중단시킬 수 있었던 것은 파시스트의 총탄 뿐이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파시스트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니, 아마도 훨씬 마음이 무딜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적어도 시를 읽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강의 백일몽
(헤닐 강)

포플러 나무들은 시들지만
그 영상들을 남긴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포플러 나무들은 시들지만
우리에게 바람을 남겨 놓는다.

태양 아래 모든 것에
바람은 수의를 입힌다.

   (얼마나 슬프고 짧은
    시간인가!)

그러나 그건 우리에게 그 메아리를 남긴다.
강 위에 떠도는 그걸.

반딧불들이 세계가
내 생각에 엄습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그리고 작아진 심장이
내 손가락들에 꽃핀다.

(정현종 옮김, 표현은 조금 바꿈)


하나만 더. (너무 많이 옮기면 시집을 사보지 않을테니 ^^;)
번역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들은 소리내어 리듬을 읽어야한다. 혹은 시를 옮겨 적는 타이핑의 경쾌한 키보드의 리듬도 어울린다.


어떤 영혼들은...
1920년 2월 8일

   어떤 영혼들은
푸른 별을 갖고 있다.
시간의 갈피에
끼워놓은 아침들을,
그리고 꿈과
노스텔지어의 옛 도란거림
이 있는
정결한 구석들을.

   또 다른 영혼들은
열정의 환영들
로 괴로워한다. 벌레먹은
과일들. 그림자의
흐름과도 같이
멀리서
오는
타버린 목소리의
메아리, 슬픔이 없는
기억들.
키스의 부스러기들.

   내 영혼은
오래 익어왔다 : 그건 시든다.
불가사의로 어두운 채.
환각에 침식당한
어린 돌들은
내 생각의
물 위에 떨어진다.
모든 돌은 말한다 :
"신(神)은 멀리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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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로르카의 시집


강의 백일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지음, 정현종 옮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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