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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과 코난은 20~30대라면 누구나 기억할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다. 원자력 에너지를 쓰는 아톰의 시대에서, 태양의 에너지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코난의 시대로 가자고 주장한다. 바로 석유시대를 넘어서 말이다. 프레시안 에서 황우석 사태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쟁점에 좋은 글을 써왔던 강양구 기자가 썼다.
석유 에너지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들, 바이오디젤, 바이오매스, 태양에너지, 풍력에너지 등을 소개한다. 각각의 에너지가 유럽 등지에서 어떻게 실제로(!) 활용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공상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며, 그리고 절박한 미래이기도 하다.
여기에 비해서 남한의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다.” 법과 제도, 정부의 의지는 재생에너지 혹은 석유 대체에너지의 개발과 사용을 촉진하기는커녕, 가능성을 봉쇄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석유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시점에 비참한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석유 정점 oil peak가 2015~25년으로 예상되는 마당에 이미 임박한 현실이다.) 90년대, 쿠바와 북한이 처했던 상황이 그것이다.
폐식용유로 만든 바이오디젤로 시내버스를 운행하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바이오매스로 필요한 난방, 전기에너지는 물론 비료를 생산하는 독일의 윤데 등의 사례는 흥미롭다. 이런 사례들은 대체 에너지를 사용해서 살아가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소도시들에 불과하고 농업에 기반하고 있는 사례들이라는 점에서, 전체 에너지를 대체하기에는 힘들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적어도 이런 방식의 시작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대체 에너지와 관련해서는 여러 쟁점이 있다. 바이오디젤과 관련해서는, 이것의 생산(재배와 운송, 가공)을 위해서 들어가는 화석에너지로 인한 온실가스 발생, 식량대신 바이오디젤 생산을 위한 농업이 진행되면서 물의 부족, 열대우림의 파괴, 식량가격의 인상이 일어난다. 저자는 이런 쟁점에 대해서도 비교적 균형있게 소개하고 있다. (물론 내가 보기에는 저자는 바이오디젤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다. 식량 가격의 측면에서 보아도, 가격인상이 ‘아직’ 충분히 현실화되지 않았을 뿐, 바이오디젤 산업이 전면화되면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대체에너지들이 딱히 어떤 명확한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다. 소개하는 사례들은 지역적으로 제한적이고 고군분투하고 있고 아직 돈이 많이 든다.(따라서 저소득 국가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과연 환경적으로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에너지 체제 전환을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직은 실험, 대안 “만들기”의 과정이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명확한 대안, 깔끔한 전망이 아직 없다고 해도 에너지 체제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실험과 실패는 필수적인 기회비용인 셈이다. 그래서 '감히' 시도해나가야한다.
한편, 이러한 대안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북한에 대한 대체 에너지 지원 방안이다. 북한에 경수로 대신 풍력에너지, 바이오매스를 활용할 수 있는 시설을 제공하자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에서도 이미 제안한 바 있는 이런 대안은 에너지 체제전환과 평화를 결합하는 의미있는 방안이다.
유가 폭등의 시대, 유류세 인하가 쟁점이 되고 있지만, ‘언발에 오줌누기’ 식의 대책만 논의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현재의 석유에너지 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을, 운동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책에도 언급되지만 환경운동단체, 민주노동당, 공공노조-연맹 산하의 에너지 관련 노조들(가스공사지부, 발전노조 등)로 이루어진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의 활동을 더욱 활성화하고, 또한 노조운동의 유기적 일부가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점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 최근 프레시안이 낸 책들은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대한민국 병원사용 설명서>는 보건의료, 건강보험 제도와 시민의 생활의 문제를 생생하게 풀어낸다. 이 책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는 에너지체제 전환을 위해서 (노동자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대안에 대해서 말한다. 직접적으로 공공부문 노동자운동에 필요한 이념들을 (노조운동에 제한되지 않는)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셈인데, 나 같은 노조활동가들에게는 실천적(혹은 실용적)으로도 매우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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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의 시대’에 대해서는 물론,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코난이 맞서 싸웠던 인더스트리아에서 전쟁광들이 얻어내려고 했던 에너지도 “태양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미아자키 하야오는 작품 속에서 플롯의 전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모순을 드러내기를 즐기는 것같은데, 이것도 그 사례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그런 사례로, 나우시카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여성인 크샤나, 모노노케 히메에서 철의 문명을 만들고 동물들과 싸우는, 그러나 여성과 나병환자를 보호하는 에보시와 제철소 마을의 존재 등을 들 수 있다.)
인더스트리아에 숨겨진 태양에너지는, 석유 제품(플라스틱)의 재활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전쟁을 위한 것으로 전유된다. 그에 비해서 라나의 하이하바섬은 태양과 바람 속의, 평화로운 농경 공동체이다. 미래소년 코난의 결말은, 마치 하이하바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같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쓰자고 제안하는 것같다. (인터스트리아가 가라앉은 후 새로 떠오른 대륙처럼)
그 세계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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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이 당선된 이후에 재벌에 대한 규제완화를 비롯한 "친기업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정책들은 온통 재벌, 대기업에게 유리한 것들로 채워져있다. 이명박의 정책패키지는 이전 정권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더욱 급진화시킬 것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명박의 경제정책들은 "친기업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상당히 모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모순은 조만간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을 상징하는 인물이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국가경쟁력강화특위장인 사공일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발전국가 하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인물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의 재등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발전국가를 재도입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런지, 그것이 성공할 수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사공일은 5공 하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한 인물이고, 3저 호황 시에 재경부 장관이었다. 그가 주도하는 '세계경제연구소'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씽크탱크인 국제경제연구소(IIE)와 긴밀하게 연계해왔다.)
금융세계화에 대한 실증적 분석으로 채워진 이 책은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체계의 금융세계화의 역사에서 시작해서 미국-독일-북유럽 모델을 검토한다. 한국자본주의에 대한 평가와 진로가 이 책의 또 한 축인데 꼼꼼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책을 소개하는 것이 여기서 목적은 아니니 몇가지 눈에 띄는 시사점을 언급해보자.
우선, 금융구조, 기업지배구조, 노사관계 제도/관행을 포함하는 경제체제는 각각이 결합되어 있어서 각각 분리해서 몇몇 개별적인 제도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적용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점이다.(혹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북유럽이나 독일에서 산별노조-중앙교섭은 정부 차원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복지제도뿐 아니라 기업이 자금을 주식시장이 아니라 주거래은행을 통해서 확보한다는 사정까지 연관되어 있다. 주주자본주의의 취약성은 기업의 장기적 성장에 이해관계를 갖는 은행자본과 종업원(경영진과 노동자)들이 타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거시적 차원에서의 타협도 가능하다.)
작년부터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사회연대정책"과 같은 경우는 북유럽모델 경제정책 패키지의 일부인 "연대임금정책"의 한국판 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이 스웨덴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경제구조가 달라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연대임금정책을 "노동자양보론"이라고 비판한 입장들도 정당하긴 하지만 더 나가서 말할 필요가 있다. 요컨데 그렇게 제기되어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국민연금 개혁"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의할만한 정책대안을 "사회연대전략"이라는 운동전략 수준으로 비약시켰다는 점에도 있다. 물론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주체들의 입장은 다분히 논쟁적이고 '의도적'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남한이 미국과 같은 조건이 아닌 이상, 미국식 경제체제로 수렴될 것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러나 여전히 경제구조의 변화는 전면적인 것이어야 그나마 '사소한' 개량주의 정책, 사민주의적인 정책이라도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물론 나의 입장에서는, 세계자본주의의 생산적 팽창이 일어나던 시기에 가능했던 그러한 경제모델이 금융세계화 국면에서, 반주변에서는 실현되기 불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경제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에 동반되지 않은 채 제기되는 "사회연대전략"과 같은 것은 허망할 수밖에.
둘째로, 주주자본주의의 전면화라는 방식의 금융화된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에 조차도 "역사의 필연적인 완성"은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적으로도 (심지어는 영미에서도) 주주자본주의가 전면화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현재에도 유럽이나 일본 등에서는 상당히 독자적인 모델의 자본주의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 물론 이들이 영미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인 구조가 바뀌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금융세계화를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의 전면화로 이해하고, 따라서 (쌍둥이 적자로 유지되는) 미국경제의 유지불가능성을 곧 금융세계화된 자본주의 자체의 유지불가능성으로 등치시키려는 유혹이 생기기 마련이다. 물론 미국경제의 붕괴가 자본주의 세계체계에 심각하고 결정적인 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지만, 앞으로 발생할 위기의 원인이 모든 국가의 경제모델이 미국식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금융세계화가 심각하게 진전되고 있으나 미국과 같을 수는 없고, 따라서 한국의 조건에서 제기될 수 있는 구체적인 경제체제 대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구체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기껏해야 다른 자본주의 모델을 대안사회 모델로 제기하는 것과 같은) "정책대안"이라는 방식으로 제기되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남한"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체계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변혁적이고 국제주의적인 대안이 제기될 필요가 있다. 요컨데 일국적 모델이 문제가 아니다.
세째로,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서의 정세를 진단하고 대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책은 특히 한국전쟁이후 남한 자본주의의 역사를 국가의 개입이라는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서술하는데,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90년대와 2000년대, 현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이명박의 경제정책은 모순된 요소를 포함한다. 한편으로는 금융허브 구축, 금융자유화를 추진하고, 또 한편으로는 금산분리완화, 출총제완화, 공정위 폐지(축소)와 같은 친재벌적인 금융정책, 그리고 대운하건설과 같이 경기부양을 위한 (아마도 결국은 재정정책이 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몇몇 전략적인 업종에 대해서는 산업정책도 시행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금융자유화는 재벌의 왜곡된 지배구조 보장과 충돌하고 과도한 재정정책은 거시경제 측면에서 금융자본의 이해를 침해한다.
아마도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과거에 찬란한 영광을 안겨준 발전주의 전략(산업정책과 금융정책, 재정정책)과 현재 국제적인 자본주의의 "대안"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모두 결합하고 싶겠지만 그것은 "동그란 네모"와 같이 불가능한 전략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해주는 것은 "친기업정책"이라는 정치적 선언일 뿐이지만 조만간 정책적 실패 앞에서는 그런 수사는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권은 한 쪽의 선택을 해야할 것이라는 것인데, 그 지점에서 동요하다가 임기응변을 '실용주의'로 포장할 가능성이 많다.(이명박도 노무현만큼 럭비공처럼 튀어다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대중-노무현이 오히려 정책적으로 일관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권의 (예정된) 실패가 가지는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예상하는 것이 앞으로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는 우리가 그것을 대중들에게 어떻게 폭로하고 어떤 대안을 낼 것인가와도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재벌옹호 정책을 신자유주의 논리로 비판하는 (참여연대 식의) 비판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비판은 위에서 "어떤 다른 대안"과 함께 제기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의 주장이 내가 이제까지 언급한 이런 것들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민주적 시장경제"를 주장하고 이를 위해서 정책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일단 통합신당은 불가능해 보이니, 결국 민주노동당이 그러한 역할을 자임할 것인가?) 미국경제의 위기를 예상하는 가운데 내포적 성장전략을 채택하고 조정시장경제와 (숙련된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고진로 전략으로 정책을 전환하자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곧바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저자가 제기하는 수준의 구체성을 가진 논쟁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금융세계화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서 대안에 대한 논의도 구체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한편, 이런 입장과 지난 대선에서 가장 가까웠던 것은 창조한국당 문국현과 한국사회당 금민이었다. 노동자운동 안에서도 "새흐름"의 일부 분파는 이와 유사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향후에 노동/사회운동 안에서 고전적인 좌-우 구분이 흐트러질 것을 예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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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경식과 대담을 한 적이 있는 타카하시 테츠야의 경우는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을 자크 데리다의 '책임-응답가능성'에서 찾은 적이 있었어요(서경식이 여기에 관해서 어떤 코멘트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를 않네요(^_^;)). 데리다 자신이 이야기 하듯이 '절대적 환대'는 불가능할 것이지만, (또한 데리다 자신이 이야기 하듯이) 이런 개념이 없다면 '환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행동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타자의 부름에 언제나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 같아, 저는 저런 개념이나 글을 접하면 조금 무섭기도 합니다.오늘날 예술이 자본주의에 파열을 내면서 타자와의 대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매개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저는 이런 면에서 [디아스포라 기행]이 맑스로부터 시작하면서도 자본주의에 관한 직접적인 비판적 언급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특히나 근대의 디아스포라는 명백히 자본주의적 팽창과 폭력을 거론하지 않고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죠(^_^)). 예술과 정치의 매개 고리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으면서 내내 고민을 했던 부분이었어요. 그나저나 이제 [만남]을 읽어 보아야 되겠네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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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 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과연 (디아스포라의) 그런 고통에 "참여"(김상목은 '환대'도 아니고, '참여', 이런 개념을 사용합니다;;)한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점입니다. 그 고통은 존재론적인 것일텐데, '참여'가 가능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너와 나의 고통의 근원이 같으니 함께 싸우자는, '연대'와도 다른 것이죠.한편, 예술에 대해서는 저도 무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잘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술적 체험 속에서 검증될 때에만 이야기할 수있을 텐데요, 유사한 예로는 베를린에 있는 유태인기념관을 들 수 있을 뿐입니다.(제 경험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아우슈비츠라는 인간성의 절멸에 대한 끔찍한 경험에 대한 상징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것과는 또 다르죠.(물론 그것을 연결짓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예술적 형상화는 자본주의적 착취가 다른 억압-착취-폭력과 만나는 어떤 지점, 그러니까 과잉결정되는 어떤 지점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술에서도 자본주의적 착취의, "최종심급의 고독한 시간"은 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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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에 대해서라면, 이해의 폭을 좀더 넓힐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영국에서 일년동안 살면서 고향에서, 제 언어 세계에서 떠난 이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되고 그래서 디아스포라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전세계 디아스포라를 연구한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 뿌리뽑혔다는 인식, 쫓겨났다는 인식이 없는 이주민들도 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고통스러운 것은 분명한 현실이지만, 디아스포라는 상실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겁니다.디아스포라는 전혀 새로운 정체성 형성의 가능성도 보여줍니다. 이 정체성은 당장 국민국가라는 철저하고 견고한 경계 때문에, 경계에 서 있는 정체성, 배제된 정체성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어떤 특정 국민국가 또는 특정 국민(민족)에 의존적이지 않는 새로운 정체성의 가능성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즘 서양, 특히 서양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런 '변화하는' '전이 상태의' 정체성입니다.
다만 이 정체성은 아직 너무나 허약하죠. 새로운 '복합적 정체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집단이 '테러와의 전쟁'의 여파로 순식간에 '위험한 이질적 집단'으로 돌변했으니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디아스포라는 '국민국가' 또는 '국민'의 폭력성, 배타성과 연결지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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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shin/서경식도 그런 측면을 언급하는 대목이 <만남>에 있습니다. 말씀하신 것과 같은 가능성을 "국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말하더군요.(257쪽) 그러면서도 여전히 현재의 국가간 체계에서는 국가로부터의 추방은 곧 인권으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점에서 "코스모폴리탄적 자유"란 허구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네요. 그래서 marishin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이중성이 있는 것일텐데요,가능성은 가능성대로 봐야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통도 그 나름대로 여전히 현존하는 것이라면, 각각이 한 주체 안에서 공존하면서 만드는 매우 특이한 효과(서경식과 같은)의 결과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허약함"은 물론이지만, 두 경향이 서로를 상쇄해서(서로를 중화시켜서) 어떤 허약한 정체성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모순적"이어서 그 모순이 작동하는 순간도 있는 것같아요. 그런 것이 김상봉 같은 이가 말하는 고통속의 보편성..같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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